308화 유격작전 (5)
비사성으로 퇴각한 설인귀는 오만이 넘던 기병이 고작 오천여 기로 줄어 있어 황제를 뵐 낯이 없었다.
이는 장량도 마찬가지였으니, 서로 힘을 합칠 수밖에 없었다.
“장 총관, 보급 수송이 우선이겠소? 아니면 온달을 잡는 것이 우선이겠소?”
설인귀의 물음에 장량이 난색을 표하였다.
“보급이 우선인데… 온달이 저리 설치니, 보급을 수송할 수가 없구려. 허허… 설 장군, 어찌하면 좋겠소?”
이에, 설인귀가 잠시 눈을 감더니, 마음을 굳혀 말하였다.
“장 총관, 내게 군사를 내어주십시오. 온달을 잡고 보급로를 열겠습니다.”
“군사? 얼마나?”
“일만 명만 내어주십시오.”
“일만? 너무 많은데… 일만 명이나 내어주면 비사성도 방비가 허술해질 수 있어서…….”
장량이 머뭇거리니, 마음이 급한 설인귀가 재촉하였다.
“머뭇거리다간 폐하께서 보급이 원활하지 못한 죄를 물어 총관과 나의 목을 벨 것입니다. 망설일 시간이 없습니다.”
사실, 장검이 육만의 이민족 기병을 이끌고 온달을 추적하고 있었으나, 설인귀는 공을 놓치고 싶지 않아 이를 장량에게 알리지 않았다.
“허면, 설 장군… 온달을 궤멸시킨 뒤엔 빌려준 군사를 돌려줘야 하오.”
“당연한 말씀! 걱정하지 마십시오.”
설인귀의 장담에 장량이 마지못해 군사 일만을 내어주었다.
* * *
안시성에서도 하늘 높이 치솟은 검은 연기를 볼 수 있었으니, 고구려의 군사들과 백성들은 기뻐 환호하였다.
“공주님! 온달 장군께서 적의 보급을 끊었어요! 온달 장군님 백세! 천세! 만세! 천만세!”
팽운이 조그만 손을 높이 치켜들며 만세를 외치고는 평강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렇구나. 저 연기로… 당 군의 사기가 매우 저하되었을 터이니, 이보다 좋은 일이 없구나.”
평강이 팽운의 머리를 부드러이 쓰다듬으며 이처럼 말할 때, 독고영이 달려와 말하였다.
“공주님! 당 군이 이상합니다!”
“이상하다? 뭐가 그리 이상하단 말이냐?”
평강이 의아해 고개를 갸웃하며 물으니, 독고영이 숨을 고르며 답하였다.
“가서 보시어요. 당 군이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이에, 평강과 팽운이 독고영을 따라 외성으로 나가 보니, 화살이 닿지 않을 거리에서 당 군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성주님, 저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요?”
평강이 의아해 물으니, 양만춘도 고개를 갸웃하며 말하였다.
“글쎄요. 전방에 배치하였던 포차와 발석거, 정란 등을 빼고 저리 흙을 나르고 있습니다.”
“흙이요?”
“네, 그렇습니다.”
“땅을 파 굴을 만들어 성안으로 진입하려는 수작인가요?”
“그것은 아닌 듯합니다. 땅을 판 흙을 쌓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저기서 흙을 퍼와 저곳에 쌓고 있습니다.”
양만춘의 설명에 평강이 고개를 갸웃하며 유심히 살펴보았다.
대략 안시성 서문과의 거리는 천 보가 넘어 화살이 닿지 않을 거리였다.
“도대체 저곳에 흙을 쌓아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낮게 중얼거리던 평강의 눈이 순간 동그랗게 커지더니, 흙을 나르는 당 군을 뚫어져라 응시하였다.
흙을 나르는 당 군의 수가 무려 이십만 명은 족히 넘을 듯했고, 쌓인 흙을 다지는 군사들도 십만 명은 넘어 보였다.
“설마… 아니겠지? 천 보도 넘는 거리인데… 설마 아니겠지?”
평강이 시선을 고정한 채 중얼거리니, 팽운이 불안하여 평강의 소매를 잡아끌며 물었다.
“공주님, 저들이 무엇 하는 것인지, 아시죠?”
이에, 평강이 빙그레 웃으며 팽운을 안심시켰다.
“아무것도 아니란다. 운아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되느니라. 저 먼 곳에서 흙을 날라 쌓은들 두려워할 일은 없느니라.”
* * *
해가 질 무렵까지 당 군은 계속 흙을 퍼 날랐고, 어느새 쌓인 흙은 장정 키를 훌쩍 넘겼으며, 그 둘레는 일 리도 족히 넘겼다.
독고영은 팽운과 함께 백성들을 도와 군사들에게 저녁 식사를 날랐다.
두 아이가 곁에 없으니, 평강이 양만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성주님, 저들이 무엇을 하는지 짐작하시는지요?”
이에, 양만춘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답하였다.
“혹여, 토성을 쌓아 안에서 버티며 장기전을 대비하는 것은 아닌지요?”
“아니옵니다.”
“아니옵니까? 하면 무엇입니까?”
평강이 너무도 단호히 잘라 말하였기에, 필경 답을 지녔다 여긴 양만춘이 의견을 구하였다.
“저들은 토성이 아닌, 토산을 쌓고 있습니다.”
“토산이라 하셨습니까? 아니, 화살도 닿지 않을 저 먼 곳에 토산을 쌓아 무엇을 하려는…….”
“시작은 저리도 먼 곳에서 하였으나, 차츰 거리를 좁혀 올 것입니다.”
“거리를 좁히면 우리의 활이 흙을 나르는 당 군을 노릴 터인데…….”
“우리의 활을 두려워하여 저 먼 곳에서부터 쌓기 시작한 것이지요. 허나, 차츰 방비하며 다가올 것입니다.”
“정녕, 우리의 활을 방비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럴 것입니다. 아마도 토산을 저곳부터 시작하여 차츰 다가오며 쌓을 터인데, 토산에 가려 화살이 당 군을 노리지 못하게 될 듯합니다.”
“아니… 그토록 쌓는다면, 실로 거대할 터인데…….”
양만춘이 깜짝 놀라 말꼬리를 흐르며 아직도 흙을 나르는 당 군을 응시하였다.
아직 화살이 닿지 않는 거리였고, 토산을 쌓느라 당분간 공세를 펼칠 듯하지도 않았다.
평강의 예상이 맞다면 당 군은 거대한 토산을 쌓아 차츰 안시성과 거리를 좁혀 오고, 마침내 성벽에 닿으면 일거에 토산을 넘어 안시성 안으로 쏟아져 들어올 듯하였다.
허나, 산을 쌓아 옮긴다는 것은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공주님,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이에, 평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양제는 자신의 명이 어디까지 닿는지 보기 위하여 산을 뚫어 길을 내었고, 땅을 파 바다를 끌어들이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자신의 명이라면 산도 뚫고 바다도 옮길 수 있음을 확인하고는 우리 고구려를 침공하였지요. 이세민이 바로 이 짓을 하려는 것입니다.”
“서, 설마… 오히려 토산을 쌓는 당 군의 사기가 저하되지 않겠습니까?”
“보급이 불타 검은 연기로 변했음을 군사들이 모두 보았기에, 저하된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하여 잠시 공성을 미루고, 산을 쌓도록 한 것인데…….”
“…….”
“토산이 거대해지며 점차 우리 안시성과 가까워지면, 곧 성을 함락할 것이란 희망에 당 군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것입니다. 또한…….”
“또한? 무엇입니까?”
“토산이 거대해지고, 다가올수록 우리의 군사들과 백성들은 그 크기에 압도되어 전의를 상실할 것입니다.”
평강이 이처럼 말하고 입술을 깨무니, 양만춘은 할 말을 찾지 못하여 그저 흙을 나르는 당 군만 주시할 따름이었다.
* * *
다음 날, 날이 밝기 무섭게, 당 군이 다시 흙을 날라 쌓기 시작하는데, 이번엔 그 수가 더 늘었다.
주위를 경계하는 군사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군사들이 토산 쌓기에 동원된 것이다.
일개미처럼 당 군이 쉴 새 없이 오가며 흙을 나르고, 이를 또 다른 군사들이 다지고 쌓으니, 조금씩 더 높아지고 더 넓어져 갔다.
황제 이세민은 장손무기와 이세적을 대동하고 토산을 둘러보며 만족하여 웃었다.
“비사성에 사람을 보내, 설인귀를 불러들여라. 장검은 계속 온달을 쫓게 하고, 장량에겐 더 이상 예비분을 보낼 필요 없다 전하라.”
이에, 장손무기가 의아해 물었다.
“아직은 군량미가 충분하오나, 예비분은 충분히 확보해야 군사들의 사기가 저하되지 않을 듯하온데…….”
“아니다. 사기는 저 토산이 거대해지고, 안시성과 가까워지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올라갈 것이다. 오히려 보급을 수송하다 온달에게 급습당하면 사기가 저하될 터이니, 수송을 중단케 하고, 설인귀는 불러 토산을 경계케 하라.”
이에, 이세적이 명을 받아 전령을 급히 비사성과 온달을 쫓는 장검에게 보내었다.
* * *
다시 하루가 저물어 갈 무렵, 성벽 위에서 토산을 바라보던 평강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에, 안시성 성주 양만춘이 불안하여 물었다.
“공주님, 괜찮으시옵니까?”
“저는 괜찮으나, 안시성은 괜찮지 않을 듯하여 걱정이옵니다.”
평강이 이처럼 답하며 손으로 가리키니, 어제만 해도 그곳에 있던 구릉이 사라져 있었다.
아마도 구릉의 흙을 당 군이 퍼 나른 탓에, 사라진 모양이었다.
그리고 토산은 장정 키 두 배가 넘게 쌓였고, 그 둘레도 더 불어나 있었다.
양만춘이 안시성과의 거리를 눈대중으로 재어보니, 아직 거리는 어제와 비슷해 보였다.
“다행스럽게도 높아지고 넓어졌으나, 거리는 그대로입니다. 쉽게 산을 옮기며 다가오지는 못할 듯합니다.”
이에, 평강이 고개를 저었다.
“저 토산이 안시성의 성벽보다 높아지면 위에서 허물어 앞에 쌓아 다지는 방식으로 점차 다가올 것입니다.”
“허면, 놈들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나가 싸워야겠군요.”
“저들도 우리가 어찌 움직일지 예상할 터이니, 경계를 단단히 하며 다가오겠지요. 쉽지 않은 일입니다.”
“허면 이대로 저 토산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봐야 하옵니까?”
양만춘이 답답해 물으니, 평강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우리 군사들과 백성들이 저들의 의도를 몰라 전의를 상실하지 않았으나, 저 토산이 점차 다가오면 필경 모두 깨닫게 될 것이니, 반드시 다가오지 못하도록 막아야 합니다.”
“허면, 결국 나가 싸우는 수밖에 없겠군요.”
양만춘이 결심을 굳혀 말하니, 평강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우리의 수가 적어 나가 싸우는 것은 필패를 의미합니다.”
“그렇다고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양만춘이 한숨을 내쉬며 답답한 심정을 겨우 다스려 물으니, 평강이 토산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답하였다.
“나가서 싸워 저 토산이 다가오지 못하게는 할 수 없습니다만, 이 안에서 저 토산이 다가오지 못하게 할 수는 있을 듯합니다.”
“그 수가 무엇이옵니까?”
이에, 평강이 결심을 굳힌 듯 단호히 답하였다.
“저 토산보다 더 거대한 함정을 파서, 다가오는 토산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하, 함정이라 하시었습니까?”
양만춘이 깜짝 놀라 물으니, 평강이 토산의 앞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저 땅밑까지 우리가 굴을 파고가 함정을 만드는 것입니다. 허면, 거대해지고 거대해진 토산이 스스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여 무너질 것입니다. 공들여 쌓은 토산이 무너지면 당 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토산을 뭉갠 우리 군사들과 백성들의 사기는 필경 올라갈 것입니다.”
평강이 가리킨 곳은 토산의 바로 앞으로 안시성과의 거리는 족히 구백 보 이상 되었다.
“저곳까지 굴을 파서 거대한 함정을 만든다라…….”
평강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며 양만춘이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이 산을 쌓아 옮길 수 있다면, 우리 역시 땅을 파서 산을 뒤집을 수 있겠지요. 내일부터 백성들을 동원하겠습니다.”
양만춘의 말이 끝나자, 어느새 다가왔는지 온동이 고개를 저으며 이견을 내었다.
“역시나, 토산을 쌓아 안시성에 붙여 넘으려는 것이었군요. 허나, 저곳까지 굴을 파서 거대한 함정을 만드는 것은 불가한 일입니다.”
소리로 당 군의 이상 행동을 파악한 모양이었다.
“어찌 불가하단 말인가?”
양만춘이 놀라 물으니, 온동이 안시성과 토산의 거리를 떠올리며 말하였다.
“함정을 만들어 토산을 내려 앉힐 수는 있으나, 다시 쌓으면 그만입니다. 그땐, 함정을 만들어도 토산을 막을 수 없다는 절망감에 우리 군사들과 백성들이 크게 낙심하게 될 터!”
“허면, 이대로 두고 보자는 말이냐?”
평강이 근심을 담아 이처럼 물으니, 온동이 머리를 조아리며 답하였다.
“두고 볼 수는 없지요. 함정을 저곳에 만들면 토산을 다시 쌓을 터이니, 토산을 다시 쌓을 수 없도록 함정의 위치를 성벽 앞으로 하자는 소견이옵니다.”
온동이 성벽을 더듬어 아래를 가리키고는 말을 이었다.
“이곳에 함정을 만들어 토산을 무너뜨리면, 당 군이 토산을 다시 쌓고자 해도 우리의 활이 노릴 것이고, 공성을 펼치고자 해도, 무너진 토산이 앞을 가리니, 정란과 충차가 기동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에, 평강과 양만춘이 온동의 혜안에 탄복하며 크게 기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