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화 사로잡힌 막바우 (1)
요격대장이 된 설인귀는 더욱 큰 공을 세워 황제 이세민을 기쁘게 하고자 잔인할 정도로 집요히 고구려 백성들의 뒤를 추격하였다.
“창이 닿는 놈들은 모두 숨통을 끊어 놓거라! 안시성 놈들이 겁에 질리도록 백성들의 비명이 닿게 하라!”
설인귀의 명에 당의 기병 삼만 기는 맹렬히 고구려 백성들의 뒤를 추격하였다.
뒤처진 백성들은 비명을 지르며 달리다 지쳐 주저앉았고, 뒤쫓아온 당의 기병들은 이들을 말발굽으로 뭉개고 창으로 심장을 뚫었다.
“하하하, 살려달라 외쳐라! 안시성의 양만춘과 온달이 너희의 비명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올 수 있도록 비명을 질러라!”
설인귀가 크게 웃으며 방천화극을 휘둘러 주저 앉은 노인의 명을 끊으니, 고구려 백성들은 사지를 벗어나고자 안시성을 향하여 살려달라 외치며 내달렸다.
이에 만족한 설인귀가 손을 들어 잠시 기병을 멈추게 한 후, 중얼거렸다.
“안시성이 저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성문을 연다면 우리는 한걸음에 고구려 백성들과 함께 성안으로 진입할 것이다. 만일 안시성이 저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성 앞에서 저들의 명을 끊어 지켜보는 안시성 군사들의 사기를 꺾어 놓으면 그만이다.”
어느새 고구려 백성들과 거리가 벌어지자, 설인귀가 다시 손을 들어 추격을 명하였다.
“쫓아라! 뒤처진 놈들의 목을 베며 안시성으로 몰아라!”
마치 개들이 양 떼를 몰듯 설인귀가 이끈 당의 기병들은 고구려 백성들을 한 방향으로 몰았다.
무리를 벗어나 다른 방향으로 이탈한 백성은 가차없이 당의 기병이 쫓아 말발굽으로 짓이겼고, 백성들은 살기 위해 오직 안시성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주필산부터 안시성으로 이어진 넓은 들은 고구려 백성들이 흘린 피와 시신으로 가득하였고, 하늘엔 먹이를 노린 독수리와 까마귀들이 맴돌았다.
* * *
설인귀가 고구려 백성들을 앞세워 안시성으로 향하던 그 시점, 신성으로 고구려의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개마무사 일만 기를 이끌고 당도하였다.
“합하!”
성문 밖까지 나와 맞이한 막리지 고정의가 개소문의 발아래 무릎 꿇었다.
주필산에서 십오만이 넘는 당 군을 싸늘한 시신으로 만들었으나, 결과적으로 선발대가 궤멸되었으니 대패한 전투였다.
이에 고정의는 개소문의 처분을 달게 받고자 무릎 꿇은 것이다.
“막리지는 일어나시오.”
말에서 내린 개소문이 고정의의 어깨를 잡아 세우며 말하고는 담담히 성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에 고정의가 따랐는데, 부끄러워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성안으로 들어선 개소문은 즉시 작전 회의를 열었다.
“주필산의 전투로 손실이 어찌 되오?”
개소문의 물음에 고정의가 답하였다.
“송구하오나, 개마무사 오만을 잃었나이다.”
“허면, 적의 손실은 어찌 되오?”
“필경 적도 타격을 입었을 터이나, 그 군세는 아직도 상당하여 감당키 어렵나이다.”
고정의가 고개를 떨구고 답하니, 개소문이 잠시 침묵하였다.
이에, 공손향이 조심스럽게 고정의에게 물었다.
“패전의 이유가 수에서 밀린 탓입니까?”
“아니오.”
“허면, 지세를 이용하지 못한 탓입니까?”
“그 역시도 아니오.”
“허면 패전의 이유가 어찌 되시나이까?”
공손향의 물음에 고정의가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며 차분히 답하였다.
“선봉 고연수와 고해진이 적의 유인책에 걸려 계곡 안으로 들어갔고, 갑작스러운 폭우로 시야가 흐려져 중장갑 기병인 개마무사의 기동이 어려웠소이다. 또한 적은 각종 병종이 어우러진 육화진을 펼쳐 우리의 돌격을 미연의 방지하였기에, 더 큰 타격을 줄 수 없었소이다.”
사실, 고연수와 고해진이 유인책에 걸리지 않았다면 고구려 군의 손실은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었고, 당 군의 패배로 전투를 마무리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고정의는 패전의 책임을 스스로 지고자 더는 변명치 않았고, 이를 지켜보던 개소문도 말이 없었다.
“패전의 책임은 모두 나의 잘못이었고, 합하가 세운 반격 작전은 옳았소. 나는 책임을 지고 그 어떤 벌도 달게 받을 터이니, 합하께옵선 부디 개마무사들의 떨어진 사기를 다시 드높여 주시기 바라오.”
고정의의 말에 공손향이 개소문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합하, 우리는 주력이 중장갑 기병인 개마무사이온데, 이는 경기병과 궁기병이 기동을 펼쳐 대항한다면 약점이 드러나게 되옵니다. 지금이라도 경기병을 보강하심이 어떠하신지요.”
공손향은 아직 출전하지 않은 국내성의 말갈기병 삼만 기를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개소문은 단호하였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어찌 때가 아니라 말씀하시옵나이까?”
공손향이 재차 물으니, 개소문이 담담히 답하였다.
“말갈 기병은 개마무사에 비해 그 수가 적고, 방어구가 약하여 쉽게 상할 수 있다. 우린 이들을 미리 잃을 수 없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하오면, 그때는 언제이옵니까?”
공손향이 다시 물으니, 개소문이 답하지 않고 손짓으로 쇼락을 불렀다.
“명하소서.”
앞으로 나온 쇼락이 머리 숙여 명을 기다리니, 개소문이 짧게 명하였다.
“네가 적봉진에 가야겠다.”
쇼락이 두말하지 않고 즉시 명을 받아 몸을 돌려 나가니, 팽무일이 기뻐 손뼉을 치며 말하였다.
“그래! 적봉진이 있었어! 하하하.”
적봉진의 실체를 눈으로 보았던 팽무일이었기에, 쇼락이 원군을 이끌고 온다면 중장갑 기병 일색인 고구려 군의 약점을 카사르와 호타크의 전사들이 채워 줄 수 있으리라 여긴 것이다.
그러나 고정의는 여전히 근심스러운 얼굴로 말하였다.
“그들이… 합하를 따르겠습니까?”
을지문덕 휘하 장수 우랑이 적봉진의 수장으로 있음을 알고 있기에, 개소문을 역도로 의심하는 우랑이 원군을 보내지 않으리라 여긴 모양이었다.
이에, 개소문이 단호히 잘라 말하였다.
“반드시 올 것이오.”
“합하, 저들은 합하를 역도로 여길 것입니다.”
“내가 역도라면 당 군을 몰아내고 내 목을 베기 위해서라도 올 것이오.”
“합하!”
“우리의 고구려가 존망지추의 상황이오. 적봉진은 고구려를 버리지 않을 것이오. 내 목을 베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대군을 이끌고 올 것이오.”
개소문의 말에 팽무일과 공손향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아니! 사부, 적봉진의 군사들이 당 군을 몰아내는데 도움을 주고, 그 뒤엔 사부의 목을 노릴 거라면… 당 군보다 더 무서운 존재들이 아니오?”
“합하… 또 다른 내전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당장 쇼락을 불러들여야 합니다. 적봉진의 군사들이 고구려 땅을 밟게 하면 안 되시옵니다.”
고정의도 사색이 되어 개소문에게 말하였다.
“당 군을 물리치기 위해 적봉진의 군사들이 필요함은 잘 알고 있으나, 저들은 합하를 곡해하고 있습니다. 필경 안시성의 온달과 힘을 합쳐 합하의 목을 노릴 것이오니, 원군을 요청하셔선 안 됩니다.”
그러나 야수는 이들과 달랐다.
“아. 니. 야. 받아… 야, 해. 그들이 없으면… 결코… 당을, 몰아낼 수… 없어. 대막리지의… 목은, 나중… 일이야.”
이에 팽무일이 버럭 소리질렀다.
“뭐? 나중 일? 이게 자기 목 아니라고! 나중 일이라도 나중엔 목이 날아간다는 말이잖아!”
“나중에… 이. 기. 면… 된다.”
“뭐? 이겨? 우린 지금 이 군사로 당 군도 이기고, 적봉진의 군사도 이겨야 한다고! 지치고 지친 군사들이 펄펄한 몽고 기병의 뒤를 어찌 쫓아서 이기냐고?”
“성문을… 닫. 아… 걸면 된다. 저들은… 공성전에, 약. 하. 다.”
야수가 담담히 답하였으나, 고정의가 고개를 저었다.
“온달과 저들이 합세한다면, 영주를 공략하듯 공성전을 펼칠 수도 있소이다.”
이에, 야수가 영주 공방전을 떠올리고는 당황하여 공손향을 바라보았다.
이처럼 모두가 적봉진의 원군을 두려워하였으나, 개소문은 여전히 담담하였다.
“우리의 고구려를 구함이 우선이다. 다들 이견을 달지 말라.”
이에, 팽무일이 개소문의 눈치를 살피며 구시렁거렸다.
“도대체 사부는 왜 이리도 오해를 받고, 풀려고 들지도 않는 거야? 돌겠네.”
소리죽여 중얼거렸으나, 이 소리를 들었는지 개소문이 피식 웃었다.
“그 오해, 내가 풀고자 해명하면 그들이 믿겠는가? 오히려 더 의심만 할 뿐이다. 오해와 질시는 익숙하니 애써 풀 필요 없다.”
* * *
주필산 전투를 마치고 돌아온 온달이 무거운 표정으로 회의를 열었다.
이미 온달에게 전투 결과를 전해 들은 안시성 성주 양만춘이 상석에 앉아 말하였다.
“적의 다음 목표는 필경 우리 안시성이 될 것입니다.”
이에, 막바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설마, 황제가 대군을 이끌고 직접 오지는 않겠지요?”
주필산 전투에서 당의 대군을 직접 눈으로 보았기에, 두려움이 컸던 모양이다.
이에, 평강이 지도를 유심히 살피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하였다.
“우리 안시성 남쪽에 비사성이 있고, 그 비사성에 당의 수군이 있으니, 황제는 필경 대군을 이끌고 우리 안시성을 공략한 후 비사성을 거쳐 보급을 확보하고 평양성으로 향할 것입니다.”
“그럼 큰일이네.”
막바우가 근심을 담아 말하니, 온달이 양만춘을 바라보며 물었다.
“적봉진으로 원군을 청하러 보낸 군사에게선 연락이 없습니까?”
안시성에서도 적봉진으로 원군을 요청하였으나, 아무런 회신이 없어 무척 답답한 실정이었다.
양만춘이 힘없이 고개를 저으니, 온달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에, 평강이 주위를 둘러보며 신중하게 말하였다.
“적봉진을 찾느라 오래 걸리는 듯합니다. 필경 대군을 이끌고 올 터이니, 그때까지 버텨냄이 좋을 듯합니다.”
“하오나 공주님, 우리 안시성만으로 당의 대군을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경우가 근심을 담아 이처럼 물으니, 평강도 답하지 못하였다.
이때, 부상에서 회복한 공별이 눈치를 살피며 의견을 말하였다.
“신성과 국내성에 원군을 청하십시오.”
이에 온달이 단호히 잘라 말하였다.
“안 되오.”
“장군, 소장이 누차 말씀드렸듯이… 대막리지는 역도가 아닙니다.”
이미 공별과 황우가 개소문이 태왕 건무와 대장군 강이식을 살해하지 않았음을 수차례 이야기하였으나, 온달을 비롯한 안시성의 모든 이들은 이를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나는 그대가 거짓을 말한다고 여기지 않소. 허나, 개소문의 변명도 듣지 않고 그대의 말을 모두 믿을 수는 없소. 그대가 잘못 알고 나를 설득했다면, 나는 죽어서 태왕 폐하와 대장군을 볼 면목이 없소.”
“장군…….”
공별이 안타까워 온달을 부를 때, 전령이 급히 뛰어 들어와 양만춘에게 아뢰었다.
“성주! 십만이 넘는 우리 백성들이 몰려오고 있으며, 그 뒤를 당의 기병이 쫓고 있습니다.”
“뭐라?”
양만춘이 놀라 벌떡 일어나니, 전령이 두려워 조심스럽게 아뢰었다.
“당의 기병이 우리 백성들을 말발굽으로 짓이기며 마치 사냥을 즐기듯 하고 있습니다. 들판이 온통 백성들의 시신으로 가득하였습니다.”
이에, 분노한 막바우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당장 백성들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차분한 경우가 이견을 내었다.
“십만이 넘는 백성이라 하지 않는가? 안시성은 더 이상 백성을 받아들일 여력이 없네. 보면 모르는가?”
“그렇다고 들짐승처럼 사냥당하는 걸 두고 보란 말인가?”
막바우와 경우가 이처럼 설전을 벌이니, 온달이 자리에서 일어나 양만춘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성주, 죄송하오. 이번에도 안시성이 감내해야 할 듯하오.”
이에, 양만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계속해 백성을 받아들여 안시성의 성벽이 터져 나갈지언정, 나는 저들을 내치지 못합니다. 부디, 장군께서 백성들을 구해 무사히 안시성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이끌어주십시오.”
“내 반드시 구해오겠소.”
양만춘에게 답한 온달이 아직도 경우와 설전을 벌이는 막바우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하였다.
“다시 나가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