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295화 (295/328)

295화 천하무적 (天下無敵) 연개소문 (4)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용맹하게 말을 달려 나오는 기파를 개소문이 무심히 바라보았다.

이제 열다섯 살인 기파는 눈매가 매섭고 턱선이 날카로워 나이보다 꽤나 어른스러웠다.

그러나 아직 골격이 덜 자란 탓에 어깨가 좁고 팔다리가 가늘어 개소문에 비하여 매우 연약해 보였다.

“신라 놈들은 어린애들을 모아 전장에 내보낸다고 하더니, 그게 저런 놈이로구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개소문이 양손에 쥔 검을 다시 허리춤에 차고는 팔짱을 끼고 기파를 맞이하였다.

“달려오느라 애썼다. 이제 그만 돌아가 보거라.”

마치 어린아이 달래듯 개소문이 말하니, 기파가 크게 노하여 소리쳤다.

“감히 화랑의 수장인 나를 능멸하느냐!”

기파랑은 이제 고작 열세 살이 된 김유신과 더불어 화랑들을 이끄는 수장이었고, 그 자부심이 매우 대단하였다.

그러나 화랑의 자부심 따위 알 바 없는 개소문이었다.

“그래, 알았다. 능멸하지 않을 터이니 그만 돌아가 보거라. 아직 전장에 나와 죽기 아까운 나이다. 전장은 어른에게 맡겨도 너를 탓할 이 하나 없을 것이다.”

좋은 말로 타이른다 생각한 개소문이었으나, 오히려 기파의 전의만 불태웠다.

“이놈! 연개소문!”

기파가 벼락 치듯 나름 소리쳤으나, 아직 앳된 목소리에 개소문이 허허 웃었다.

이에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기파가 개소문의 목을 노리고 창을 찔러 들어갔다.

창끝이 매섭게 바람을 가르며 다가오는데도 개소문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 여유로웠다.

창끝이 목에 닿을 듯 바짝 다가오자 그제야 개소문이 살짝 몸을 틀어 피하니, 기파가 더욱 화가 치밀어 이번엔 개소문의 얼굴로 창을 찔러 들어갔다.

이에, 개소문이 피식 웃고는 입을 벌려 창날 끝을 꽉 물었다.

개소문의 강한 턱 힘에 창날이 물려 빠지지도 더 들어가지도 않으니 기파가 두 손으로 창을 쥐고 소리쳤다.

“내 창이 먹고 싶으냐? 오냐! 어디 처먹어 보거라!”

온 힘을 다해 창을 밀어 넣으니, 개소문도 목에 힘을 주어 맞섰다.

이 순간에도 개소문은 여전히 팔짱을 낀 상태였으니, 지켜보는 이들이 모두 놀라 탄복하였다.

“개소문!”

격분한 기파가 크게 소리치며 몸까지 기울이며 창을 밀어대니, 개소문이 고개를 획 저었다.

빡!

기파의 힘과 개소문의 턱 힘이 맞선 창이 마침내 부러졌다.

그리고 몸을 기울여 창을 밀던 기파가 그 기세 그대로 중심을 잃고 말 위에서 떨어졌다.

이에, 개소문이 급히 말을 몰아 다가와 손을 뻗어 기파의 목덜미를 잡아 번쩍 들어 올리고는 다시 말 잔등에 올렸다.

“돌아가거라!”

개소문이 기파의 말 엉덩이를 걷어차니, 긴 울음을 남긴 말이 신라 군의 진영으로 내달렸다.

“이놈! 연개소문!”

빠르게 달리는 말 위에서 자세를 고쳐 앉은 기파가 소리치고는 다시 말머리를 돌리니, 개소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투지는 좋구나.”

개소문이 무심히 중얼거리자, 분노한 기파가 검을 빼어 들고 맹렬히 달려들었다.

휙!

기파의 검날이 석양에 붉게 타오르며 개소문의 가슴팍을 노렸다.

이에, 개소문이 빠르게 왼손을 뻗어 검을 쥔 기파의 손목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악!”

개소문의 강한 손아귀에 연약한 손목이 잡히니, 마치 뼈가 부러지는 듯한 고통에 기파가 비명을 내질렀다.

“아악!”

자신도 모르게 검을 놓친 기파가 연신 비명을 내지르니, 지켜보던 신라 군의 사기는 더욱 처참히 꺾여만 갔다.

휙!

이때 한 대의 화살이 바람을 가르며 개소문의 안면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러나 야수의 감각으로 바람을 가르는 화살의 존재를 느낀 개소문이 기파의 손목을 놓고는 날아드는 화살을 움켜쥐었다.

개소문의 눈이 번뜩이며 신라 군의 진영을 벗어나 달려오는 화랑에게로 향하였다.

기파보다 체구가 작고 어린 화랑이었으나, 익히 낯이 익었다.

“유신님이다!”

“김유신님이 기파님을 구하기 위해 나섰다!”

각간 김서현의 아들로 기파와 함께 화랑의 수장인 김유신이었다.

김유신이 기세 좋게 말을 달려와 창을 휘두르니, 개소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한 살 더 먹었으나, 여전히 어린아이로구나. 허나, 네겐 단 사부를 해한 죄를 물어야겠다.”

개소문이 검을 뽑아 드니, 기파가 김유신에게 소리쳤다.

“유신 내게 검을 다오!”

이에, 김유신이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아 기파에게 던지고는 더욱 속도를 올려 개소문을 향해 창을 찔러 들어갔다.

검을 받아 든 기파도 유신을 돕고자 개소문의 가슴팍을 노리고 검을 찌르니, 개소문은 안면과 가슴 두 군데를 모두 지켜야 했다.

그러나, 개소문은 기파의 검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유신의 창을 검으로 쳐내고는 기파가 찔러오는 검을 살짝 몸을 틀어 피하였다.

자신들의 공격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자, 기파와 김유신이 더욱 노기 충천하여 개소문에게 달려들었다.

이에 개소문이 김유신의 창을 옆구리에 단단히 끼고는 몸을 획 틀어 부러뜨렸다.

그리고는 검을 크게 휘둘러 기파가 찔러오는 검을 내리쳤다.

깡!

석양에 물든 기파의 검이 불꽃을 튀기며 부러졌다.

그리고 개소문이 뻗은 왼손에 멱살을 잡혀 기파가 말 위에서 번쩍 들어 올려졌다.

“살려주면 고맙다 인사하고 돌아갈 것이지, 참으로 버릇없는 아이로구나!”

기파를 크게 꾸짖은 개소문이 힘껏 들어 기파를 땅에 패대기쳤다.

“으악!”

기파의 처참한 비명에 정신이 번쩍 든 김유신이 급히 활을 들어 개소문을 향해 살을 날렸다.

근접한 거리에서 날린 화살이었기에, 유신은 명중을 자신하였다.

그러나 얼굴로 날아드는 화살을 살짝 피한 개소문이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니, 유신은 크게 놀라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결코 개소문의 주먹이 닿지 않을 거리였음에도 태산조차 부술 듯한 커다란 주먹이 바람을 가르니, 자신도 모르게 피하다 망신을 당한 것이다.

이에, 개소문이 땅에 나뒹군 두 아이를 내려다보니, 지켜보는 신라 군 모두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야수의 눈빛처럼 개소문의 눈이 석양을 받아 붉게 타오르고 있어 두 아이의 안위가 염려된 것이다.

이때, 신라 군 진영에서 열두 명의 화랑들이 말을 몰아 나오며 일제히 화살을 날렸다.

동시에 날아든 열두 대의 화살에 개소문이 검을 휘둘러 파천신검 초식을 펼쳤다.

챙! 챙! 챙!

검막이 형성되고, 검광이 석양빛에 붉게 타오르니 매우 화려하였다.

넋이 나간 듯 검막을 바라보던 기파를 김유신이 급히 부축하여 일으키고는 다시 말에 오르니, 두 아이의 투지에 개소문이 껄껄 웃었다.

“하하하, 투지는 인정하나, 계속 달려든다면 투정으로 여겨 볼기를 때릴 것이다. 하하하.”

이에 김유신이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비수를 꺼내 소리쳤다.

“전장에 나서 죽기를 각오하고 물러서지 않음은 우리 화랑의 결기이니라!”

“누가 어린 너희에게 전장에 나서라 하느냐? 어린아이를 앞세운 그런 나라는 섬기지 않아도 되느니라. 허나! 너는 내가 죄를 물어야 하니, 나와 함께 가자꾸나!”

겨우 한 뼘 크기의 비수로 찔러오는 김유신을 붙잡기 위해 개소문이 손을 뻗으니, 열두 명의 화랑들이 크게 놀라 말을 달리며 다시 화살을 날렸다.

이에 개소문이 뻗었던 손을 거두고 다시 검을 휘둘러 파천신검 초식을 펼치니, 날아들던 화살과 함께 김유신의 비수도 날이 부러지고 말았다.

“이… 이런!”

김유신이 놀라 소리치니, 급히 다가온 화랑들이 김유신과 기파에게 창과 검을 건네었다.

다시 무기를 쥔 김유신과 기피가 열두 화랑과 함께 개소문을 맹렬히 공격하였다.

이에, 멀리서 지켜보던 야수가 인상을 구기며 박도를 뽑아 들고 달려나가려 하니, 팽무일이 급히 야수의 앞으로 말을 몰아 저지하였다.

“사부가… 지켜보다 돌격하라 했다고! 기다려. 사부가 저런 젖먹이들에게 당할 리 없으니.”

팽무일의 말처럼 파천신검을 펼친 개소문의 검막에 어린 화랑들의 창과 검이 부러지고 있었다.

* * *

기파와 김유신은 물론, 열두 화랑들까지 개소문 한 명을 당해내지 못하니, 신라 군의 사기는 무참히 땅에 처박혔다.

그리고 이를 지켜보던 각간 김서현이 분통을 터트렸다.

“무엇하느냐! 삼천당은 당장 화랑들을 구하고, 연개소문을 잡아 오너라!”

이에, 삼천당의 기병들이 일제히 진문을 나서니, 고구려 진영에서도 돌격을 알리는 뿔나팔이 울렸다.

“자! 시원하게 돌진하자고!”

팽무일의 신호에 개마무사 일만 기가 일제히 땅을 밟고 내달리니, 쇳소리가 천지를 뒤흔들고 지축이 울렸다.

이에, 화랑들을 구하기 위해 내달려오던 삼천당의 말들이 놀라 크게 울며 진형이 흐트러졌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개소문은 화랑들을 안중에도 두지 않고 삼천당을 향해 말을 몰아 내달렸다.

“좋다! 너의 목은 좀 더 큰 뒤에 베어 주마!”

개소문이 스쳐 지나며 이처럼 말하니, 김유신이 매우 노해 맹렬히 개소문의 뒤를 쫓았다.

그러나 폭풍처럼 몰려오는 개마무사들의 쇳소리에 등골이 서늘해진 김유신과 화랑들은 개소문을 피해 빠르게 진영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몰아쳐라!”

어느새 삼천당 기병 진형 속으로 뛰어든 개소문이 크게 소리치니, 뒤이어 삭(기병창)을 앞세우고 일자로 밀려든 개마무사들이 신라의 최정예 기병 삼천당을 무참히 짓밟기 시작하였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전장에 삼천당의 처참한 비명과 말 울음이 끊이지 않았다.

어느새 삼천당을 요절낸 개마무사들이 개소문을 선두로 신라 진영을 향해 돌격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각간 김서현이 급히 명을 내렸다.

“극을 세우고 놈들을 막아라! 살을 날려라!”

진영 앞에 창병들이 기병 돌격에 대비해 나서고 궁수들이 살을 겨누었다.

그리고 이때, 신라 군의 진형 뒤에서 북소리가 크게 일었다.

어둠의 가려 자세히 볼 수는 없었으나, 배후에서 한 무리의 군사들이 나타난 것이다.

성충이 아우 윤충과 함께 백제 군을 이끌고 어둠을 틈타 신라 진영의 배후를 공격한 것이다.

“더욱 크게 북을 울리고 화살을 날려라! 신라 놈들이 아주 환하게 불을 밝혀 놓았구나! 저곳으로 살을 날려라! 하하하.”

횃불도 켜지 않은 백제 군이 어둠에 의지해 살을 날리니, 그 수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성충의 명에 화살이 장막처럼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밤하늘을 날아 신라 군의 진영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성난 파도와 같이 내달려온 고구려의 개마무사들이 들이닥치니, 각간 김서현도 정신이 아득하여 퇴각을 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퇴각하라! 퇴각하라!”

먼저 말에 오른 각간 김서현이 명하는 사이에도 창병들을 짓밟은 개마무사들이 진영 안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진영이 무너진 신라 군은 뿔뿔이 흩어져 도주하기 바빴고, 각간 김서현도 아들 김유신의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한 채 말을 몰아 내달렸다.

어느새 신라 군의 진영을 점령한 고구려의 개마무사들이 함성을 질렀고, 패주하는 신라 군은 등골이 서늘하여 무기도 버린 채 정신없이 내달렸다.

* * *

“성충!”

죽은 줄 알았던 성충이 백제 군을 이끌고 나타나 승리를 도왔으니, 개소문의 기쁨은 실로 컸다.

한걸음에 내달려와 성충의 손을 붙잡은 개소문이 환하게 웃었다.

“하하하! 역시 부여성충이오! 목이 잘려 내걸린 시신은 대체 누구였단 말이오?”

“그 시신이 누구인지는 저도 모르옵니다. 아마도 큰 죄를 지은 죄인이 저 대신 내걸렸겠지요.”

성충이 너무도 능청스럽게 답하니 야수가 못마땅하여 한마디 하였다.

“소. 식! 소식… 이라도… 보, 내야… 하지. 않았나?”

이에, 성충이 개소문과 야수에게 손을 모아 읍을 하며 말하였다.

“송구하게 되었습니다. 허나, 적을 속이기 위하여 죄를 지었으니, 부디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용서하고말고!”

개소문이 허허 웃으며 이처럼 말하니, 성충도 빙그레 웃었다.

“신라 군은 크게 패하여 감히 다시 한수를 넘고자 용기 내지 못할 것입니다. 대막리지께선 이제 북진하셔도 좋습니다.”

성충이 이처럼 말하니, 개소문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대가 이곳을 지켜 주시겠소?”

“여부가 있겠습니까. 허나 이곳은 지키지 않아도 되옵니다.”

“지키지 않아도 된다?”

“그렇습니다. 이곳에 단단히 진을 펼쳐 우리 백제가 대군을 이끌고 있는 듯 보이게 한 후, 저는 당항성 앞으로 신속히 이동하여 진을 세울 것입니다.”

“당항성의 발을 확실히 묶겠다는 것이로군!”

“그렇사옵니다.”

성충이 웃는 얼굴로 답하니, 개소문이 기뻐 성충의 손을 다시 잡고는 연신 치하하였다.

“그대와 그대의 백제를 잊지 않겠소. 반드시 보답하리다.”

“대막리지께서 당을 물리치신다면, 우리 백제의 안위가 마련되는 것이니, 보답은 그것으로 족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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