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천하무적 (天下無敵) 연개소문 (3)
당항성 포구 앞에 진을 친 고구려 함대 속 대장선으로 한 마리 전서구가 날아들었다.
당진평이 당항성에 심어 놓은 수하가 어둠을 틈타 날린 것이다.
“새는 밤에 날지 않을 터인데…….”
연수영이 당진평의 품에 얌전히 안긴 하얀 전서구를 신기한 듯 바라보며 말하였다.
이에, 당진평이 빙그레 웃으며 전서구의 발에 묶인 서신을 펼쳐 읽고는 입을 열었다.
“당항성에 아주 뛰어난 책사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래 어찌하려 한답니까?”
연수영의 물음에 당진평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신들의 함대를 가리켰다.
“물이 빠질 때, 이곳의 해류가 바뀜을 이용하여 우리를 공격하려는 모양입니다.”
“물이 빠질 때요?”
“그렇다고 합니다.”
“그럼 큰일 아닙니까? 진형이 흐트러질 것인데…….”
연수영이 우려를 표하였으나, 당진평은 천하태평이었다.
“큰일이지요. 허나 그렇다고 배를 돌릴 수도 없고, 빠지는 물을 사람이 막을 수도 없으니, 어쩌겠습니까.”
“아니, 그렇다고 이렇게 두고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연수영이 답답해 말하니, 당진평이 태연히 닻을 가리켰다.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싶지 않으면 열심히 노를 젓거나, 닻을 내려야겠지요. 그럼 됩니다.”
* * *
새벽이 찾아오자, 석진과 장솔이 포구로 나가 고구려 진형을 바라보았다.
이백여 척의 군선들이 일자로 늘어서 포구를 에워싸고 있어, 그 진형이 매우 단단해 보였다.
당항성의 포구에도 삼백여 척의 군선들이 대기 중이었으나, 포구 입구가 좁아 일렬로 나가야 할 형편이었다.
물론, 고구려 군선이 당항성을 점령하기 위해 포구로 들어올 시에도 일렬로 줄지어 진입해야 했으니, 서로 간의 처지는 비슷하였다.
“지금으로선 먼저 공격하는 쪽이 불리한 형국이오나, 곧 물살이 바뀌면 적선들은 조수에 떠밀려 진형이 흐트러질 것입니다. 우리는 바닷물의 흐름을 타 빠르게 적선을 향해 돌진하여 승기를 잡을 수 있습니다.”
장솔이 차분히 설명하니, 석진이 흡족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것이오! 이곳 당항성에 근거를 마련한 이유를 내가 잠시 잊고 있었구려. 역시 장솔 그대는 나의 장자방이오.”
석진이 연신 칭찬하니, 장솔도 내심 기뻐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였다.
이윽고, 물이 빠지기 시작하며 포구의 수위가 낮아지니, 석진이 대장선에 오르며 크게 명하였다.
“모두 배에 오르라!”
이에, 삼만여 명의 군사들이 일제히 배에 올라 때를 기다렸다.
수위를 지켜보던 장솔이 마침내 손을 들어 올리니, 대장선의 돌격 깃발이 올라갔다.
“북을 올리지 말고 돌진하라!”
석진의 엄한 명에 삼백여 척의 군선들이 노를 젓기 시작하며 빠르게 물살을 탔다.
그리고, 당항성 앞에 수상진을 펼친 고구려 군선들이 물살에 떠밀리기 시작하였다.
가장 심하게 물살을 탄 부분은 고구려 진형 중심으로 대장선이 자리하고 있었다.
“저곳에 고구려의 대장선이 있다! 단숨에 돌격하라! 노를 저어라!”
장솔의 명에 군사들이 빠르게 노를 저으며 물살을 타고 속도를 더하니, 금새 고구려 수상진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화살을 날리고 노를 저어 대장선을 들이받아라!”
장솔의 명에 더욱 속도를 높이고는 고구려 군선으로 불붙은 화살을 날리며 돌진을 시도하였다.
이때, 고구려 대장선에서도 깃발이 올라가더니, 돌격해오는 당항성의 군선을 향해 일제히 불화살을 날렸다.
수천여 대의 화살이 검은 밤하늘을 날아오며 불을 밝히니, 그 모습이 마치 반달을 닮아 있었다.
그제야 장솔이 놀라 소리쳤다.
“아뿔사! 학인진이다!”
고구려의 수상진은 중심이 물러나고, 양 끝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학익진이 형성되었다.
이와 달리 고구려 수상진의 중심을 노리고 일렬로 돌진하는 당항성의 군선들은 어린진을 형성하고 있었다.
어린진은 양 측면이 약점이기에, 학익진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저것들이 어찌 이런 진형을 펼칠 수 있단 말이오?”
석진이 놀라 물으니, 장솔이 한숨을 내쉬었다.
“고구려 진형 좌우 양 끝의 군선들은 이동을 포기하고 단단히 닻을 내린 듯합니다.”
해상전 중 닻을 내림은 이동을 포기하기에, 적의 공세를 피하지도 적을 공격하기도 어려웠다.
허나, 이번 당항성의 공격처럼 일렬로 돌진하는 경우, 좌우 양 끝은 공격을 받지 않으니 닻을 내려 물살에 저항할 수 있었다.
“배를 돌려라! 적선에 화살을 날리며 배를 돌려라!”
장솔이 급히 소리쳐 명하였으나, 이미 물살을 탄 군선을 돌리기란 쉽지 않았다.
중심이 물러난 고구려 진형은 마치 학이 날개를 펼쳐 반원을 그리듯 적을 포위하여, 결코 당항성의 군선들을 쉽게 놓아 주지 않았다.
계속하여 밤하늘을 환하게 밝힌 불화살들이 속속들이 당항성의 군선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에 비하여 일렬로 줄지어 포구를 벗어난 당항성의 군선들은 넓게 수상진을 펼친 고구려 군선들을 향해 불화살을 날리기 용이하지 않았다.
“대장선만 노려라!”
석진이 눈을 부릅뜨고 크게 소리쳐 명하던 그때, 기름을 먹인 불화살이 그의 발아래 박히더니, 화르르 불길을 일으켰다.
장솔이 급히 석진을 잡아끌며 말하였다.
“성주! 속히 퇴각해야 합니다.”
이에, 석진도 별수 없어 고개를 끄덕이니, 장솔이 급히 명하였다.
“퇴각하라! 노를 젓고, 불을 끄거라!”
장솔의 판단은 옳았다.
포구의 당항성 군선들이 모두 일렬로 포구를 벗어나 물살을 타기 전에 퇴각을 시도한 덕에 서로 뒤엉키지 않아 그나마 피해를 줄여 퇴각할 수 있었다.
“장솔이 인물은 인물인가 봅니다. 판단이 빠르군요.”
포구로 돌아가는 적선들을 바라보며 당진평이 말하니, 연수영도 동의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군요. 모두 불태울 수 있었는데…….”
* * *
포구로 돌아온 석진이 분을 참으며 아직도 수상진을 펼친 고구려 군선들을 노려보았다.
“장솔! 다음 수는 무엇이오?”
이를 바드득 갈며 묻는 석진에게 장솔이 차분히 답하였다.
“포구의 입구는 좁고 안은 넓으니, 적은 결코 우리 당항성을 공격하지 못할 것입니다.”
“누가 그걸 모르오!”
석진이 버럭 소리치니, 장솔이 이마의 땀을 훔치며 답하였다.
“성주님, 우리는 안전한 포구에서 보급을 염려치 않아도 되오나, 적선들은 보급과 피로가 누적되어 오래도록 수상진을 펼칠 수 없나이다. 적이 보급을 받고자 수상진을 스스로 허물고 물러날 때, 급히 뒤를 쫓으면 필승이옵니다.”
“허면, 그때가 언제쯤이오?”
석진의 물음에 장솔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하였다.
“길어야 보름이옵니다.”
“열닷세나… 너무 늦지 않겠소?”
당 황제가 요동을 점령한 후, 평양성까지 내려오기 전에 폐수를 통하여 평양성을 점령해야 했으니, 석진의 마음은 무척이나 조급하였다.
“다행스럽게도 당 황제는 아직 요동을 점령하지 못한 듯하옵니다.”
이에, 석진이 겨우 분을 삭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항시 적진을 살펴 적선들이 물러날 낌새를 보이거든 출진할 수 있도록 하시오!”
* * *
연수영과 당진평이 수군을 이끌고 당항성을 봉쇄하던 그 시점, 연개소문 역시 한수를 등지고 배수진을 펼쳐 신라의 정예 상주군을 맞이하고 있었다.
신라 군의 총사령관 각간 김서현은 배수진을 펼친 연개소문의 개마무사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하였다.
“어찌 중장갑 기병 일색으로 배수진을 쳤을고?”
이때, 아찬 김건호가 나서 답하였다.
“연개소문은 아마도 대회전을 벌여 승패를 빨리 결정짓고 싶은 듯합니다.”
“그래? 마음이 급한 게로군. 허허허.”
각간 김서현이 느긋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고는 명을 내렸다.
“우리는 급할 것이 없다. 단단히 진을 펼치고 연개소문이 어찌 나오는지 구경이나 해보자.”
수적으로 우세였고, 시간을 끌면 당항성의 수군이 평양성을 공략할 것이기에, 각간 김서현은 조급할 것이 없었다.
이에, 곧 진영이 갖춰지고 엄히 경계를 세우는 한편, 군사들을 쉬게 하니, 신라 군의 사기가 올라갔다.
이와 반대로 고구려 군은 신라 군이 전혀 싸울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답답하고 조급하기만 하였다.
“사부, 우리 이대로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니오?”
팽무일이 답답해 물으니, 개소문도 난처하여 답을 찾지 못하였다.
“아니 사부. 그런데 우린 왜 개마무사만 주야장천 마련한 거요?”
“기회를 보아 폭풍처럼 당 군에게 돌진하기 위해서다.”
“기회라… 그 기회가 오겠소?”
“기다리면 기회는 올 것이다.”
“헌데, 우린 지금 당 군이 아니라, 신라 군을 상대하고 있지 않소? 그런데 저들이 진 안에서 나오지 않으니, 우린 이제 뭘 해야 하오? 그냥 막 돌진?”
신라 진영 주위로 목책이 세워져 있어 무작정 돌진은 개마무사라도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한 명의 군사라도 아껴 요동으로 이끌고 가야 했기에, 개소문의 마음은 몹시 답답하였다.
“사부, 전쟁이 참 마음 같지가 않소. 그렇지?”
팽무일도 답답한지 한숨을 내쉬며 말하였다.
어느덧 석양이 질 듯 서쪽 하늘이 붉게 변하고 있었다.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다!”
개소문이 결심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을 몰아 나가니, 팽무일이 놀라 자신도 말을 몰아 나갔다.
이에, 개소문이 손을 들어 팽무일을 저지하고는 낮게 말하였다.
“해가 지기 전 돌아올 것이다. 제자는 돌격 준비를 갖추거라!”
팽무일이 고개를 끄덕여 답하니, 개소문이 천천히 말을 몰아 앞으로 나갔다.
신라 진영과 불과 삼백여 보 남짓 거리를 두고 멈춰 선 개소문이 벼락 치듯 소리쳤다.
“나는 고구려의 대막리지 연개소문이다! 검귀 칭호를 지닌 나를 감히 대적할 신라 장수가 있느냐?”
이에, 각간 김서현이 놀라 군막에서 뛰어나왔고, 그 뒤를 십여 명의 장수들이 따라 나와 개소문을 바라보았다.
등에 다섯 자루의 비도를 매고, 양 허리춤엔 각기 검을 찼으니, 듣던 대로 연개소문이 분명하였다.
“허허, 기골이 장대하고 대범하나, 일군을 통솔하는 장수로서 너무도 가볍게 움직이는구나. 역시 애송이에 불과하였어.”
각간 김서현이 이렇듯 말하며 삼천당의 대대감 김우석을 바라보았다.
이에, 대대감 김우석이 바로 말에 올라 앞으로 나가며 크게 소리쳤다.
“삼천당의 수장 대대감 김우석이다! 내가 너에게 친히 한 수 가르쳐 줄 터이니, 잘 배우고 익히도록 하라!”
삼천당은 신라의 정예 기병 집단으로 대대감은 이들의 수장이었다.
오직 기병으로 구성된 삼천당은 자원을 받고, 수장인 대대감이 친히 선별하기에, 모두가 기마술이 뛰어나고 무예가 출중하였다.
여유롭게 진영을 벗어난 대대감 김우석이 속도를 내어 돌진하니, 이를 지켜보던 개소문이 등으로 손을 옮기고는 빠르게 비도를 날렸다.
“컥!”
맹렬히 돌진해 오던 대대감 김우석의 목에 비도가 박히고, 단말마의 비명을 남긴 김우석이 말에서 떨어져 절명하였다.
이에 각간 김서현이 놀라 소리쳤다.
“저런 격식도 모르는 놈! 누가 나가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는가?”
이에, 삼천당의 대감 구정과 박정윤이 동시에 말을 몰아 나갔다.
구정은 장창을, 박정윤은 장검을 들었는데, 이들의 무예는 삼천당은 물론 상주정 전체에서도 으뜸이었다.
“감히 검도 맞대기 전에 검을 날리다니 이 얼마나 비열한가?”
박정윤이 개소문을 비난하며 먼저 달려들었으나, 이번에도 개소문의 손이 등으로 향하더니 빠르게 비도가 날아들었다.
깜짝 놀란 박정윤이 급히 검으로 비도를 쳐내려 했으나, 중심을 잃고 말에서 떨어졌다.
허공을 가르고 비도가 날아갔고, 땅에 떨어진 박정윤이 다시 말에 오르려던 그 순간, 개소문이 말을 몰아 질풍처럼 달려와 단칼에 목을 베었다.
“이놈!”
벗을 잃은 구정이 노해 창을 찔러오니, 쌍검을 뽑아 든 개소문이 장창을 막아냄과 동시에, 구정의 가슴팍에 검을 찔러 넣었다.
또다시 장수 둘을 잃은 각간 김서현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졸지에 대대감과 대감을 잃은 삼천당의 사기는 땅에 처박혔다.
“저 찢어 죽일 놈이! 왜 자꾸 검을 날린단 말인가? 검은 휘둘러야지! 왜 자꾸 날리고!”
이때, 화랑으로 삼천당에 자원한 소감 기파가 말에 올라 진영을 벗어나니, 신라 군이 기뻐 환호하였다.
“와아! 기파랑이다!”
“천하무적 기파님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