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천하무적 (天下無敵) 연개소문 (2)
달려드는 당 군을 베고 또 베어 쓰러뜨려도 더 많은 수의 당 군이 밀려오니, 공별이 지쳐 소리쳤다.
“제길! 수가 너무 많다! 황우! 어서 퇴각하라고!”
황우의 퇴각로를 마련하기 위해 공별이 악착같이 당 군을 베며 소리쳤으나, 결코 오랜 벗을 두고 떠날 황우가 아니었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황우가 군사들을 독려하며 오히려 당 군에 맞섰다.
“물러서지 마라! 뒤를 잡히면 허무하게 죽을 뿐이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라!”
“이 멍청이가! 고작 수레 태우고 목숨을 버릴 생각이냐?”
공별의 호통에도 황우는 그저 묵묵히 쇠망치를 휘두르며 당 군을 쓰러뜨렸고, 도주하던 고구려 군사들도 등을 돌려 분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수에서 열세였기에, 이내 곧 쓰러지는 군사들이 늘어만 갔다.
이때, 구릉에서 함성이 울리더니, 누런 말을 탄 온달이 시커먼 운철대검을 휘두르며 질주해 오는 광경이 공별의 시야를 자극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온달의 뒤로 구릉에서 고구려 군사들이 모습을 드러내고는, 당 군을 향해 맹렬히 돌진하였다.
“오, 온달 장군!”
공별이 기뻐 소리치며, 신명나게 검을 휘두르니, 스치고 닿기만 하여도 당 군의 피가 튀고 살이 흩날리며 공별의 발아래 시신이 쌓여만 갔다.
“온달 장군이 오셨다! 적을 물리쳐라!”
황우도 기뻐 소리치며 기세를 올려 쇠망치를 휘둘렀고, 패잔병으로 구성된 오백여 고구려 군사들 모두가 기뻐 없던 힘도 쥐어짜며 당 군을 몰아붙였다.
“한 놈도 살려 보내지 않겠노라!”
천지를 뒤흔들 듯한 온달의 외침이 들리고, 어느새 당도한 온달이 운철대검을 휘두르니, 감히 앞을 막고 덤벼들던 당 군은 비명만 남기고 쓰러질 따름이었다.
온달이 지나는 길은 오직, 당 군의 처절한 비명만 울리고, 그 주위에 제대로 서 있는 당 군은 존재하지 않았다.
온달의 뒤를 막바우와 강혁수가 이끈 고구려 군사들이 밀물처럼 몰려와 채우니, 왕대도는 그저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이… 이중 매복이었나?”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고 온달을 향해 달려들며 크게 명하였다.
“물러서지 마라! 수적으로 우리가 우세다!”
운철대검을 든 이가 바로 온달임을 한눈에 알아보았으나, 하늘 높이 사기가 치솟은 고구려 군의 기세를 꺾기 위해 왕대도는 망설일 수 없었다.
“온달! 내 검을 받거라!”
기세 좋게 달려드는 왕대도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온달이 주위 당 군에게 운철대검을 연신 휘둘렀다.
단순히 검을 휘두르는 듯한 동작이었으나, 이미 파산귀검의 초식이 담기었기에, 닿지도 않는 곳까지 검기가 살을 찢고 뼈를 갈랐다.
왕대도 역시 온달의 운철대검이 닿지 않는 곳에서 달려들고 있었으나, 운철대검이 뻗은 검기는 무척이나 길어 허무하게 왕대도의 명줄을 끊고 말았다.
“으… 온달… 이놈, 사술을 쓰는구나.”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 왕대도가 이처럼 생의 마지막 말을 남겼으나, 온달은 자신이 당의 수군 부총관 왕대도를 죽였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당 군의 수가 너무도 많아 쉬지 않고, 그저 닥치는 대로 베고 또 밸 따름이었고, 자신이 얼마나 많은 당 군을 죽였는지, 누구를 죽였는지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정말 장인 정신으로 베고 또 베시는구먼.”
일부러 온달 곁으로 다가가지 않은 막바우가 이렇듯 중얼거리며 자신도 창으로 찌르고 후려쳤다.
부총관 왕대도가 온달에게 근접도 못 한 채 허무하게 쓰러지니, 당 군은 사기가 바닥을 쳐 줄행랑을 놓기 바빴다.
당 군이 꽁지 빠지게 줄행랑을 놓아도 온달은 여전히 누렁이를 몰아 그 뒤를 쫓으며 연신 운철대검을 휘둘렀다.
이에, 온달이 혹여 너무 깊이 당 군 속에 들어갈까 우려된 막바우가 창도 내던지고 급히 온달을 쫓아 허리를 붙잡으며 사정하였다.
“장군, 좀 그만! 가도 너무 가셨소!”
누렁이도 막바우의 애원을 알아들었는지 발을 멈추었다.
그제야 온달이 운철대검을 어깨에 걸치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긴 건가? 내가 너무도 오랜만에 전투를 벌여서 그런지 조금 흥분한 듯하네.”
이때, 온달을 알아본 공별과 황우가 내달려와 누렁이 앞에 넙죽 엎드려 울며 소리쳤다.
“장군!”
“온달 장군! 우리이옵니다! 소장들을 기억하시나이까?”
온달과 막바우가 눈물로 얼룩진 공별과 황우를 바라보다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는 잠시 말을 잃었다.
“장군, 이들은…….”
막바우가 먼저 입을 여니, 온달이 누렁이 위에서 뛰어내려 공별과 황우를 덥석 끌어안았다.
“살아 있었구나! 살아 있었어!”
이때, 강혁수도 의아해 다가오다가 공별과 황우를 알아보고는 이들을 얼싸안고 울었다.
“장군들! 살아계셨구려! 살아계셨습니다! 진실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대장군 강이식이 세상을 떠난 뒤, 이들의 생사 여부를 알 수 없었기에, 온달과 강혁수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 * *
온달이 승리를 거두던 그 시점, 정명진이 이끈 수송부대는 겁도 없이 안시성 앞을 지나고 있었다.
“해도 해도 너무하는 거 아니냐?”
양만춘과 함께 군사들을 이끌고 안시성을 나온 경우가 이처럼 중얼거리며, 당 군의 후미를 바라보던 그때, 멀리서 한 떼의 기병이 당 군을 향해 돌격해오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라? 우리가 배후를 치려고 했는데, 저쪽에서 먼저 공격하네.”
경우의 말에 양만춘이 삼족오 기를 알아보고는 손을 들어 돌격 명령을 내렸다.
“건안성의 고돌발 성주다. 우리도 배후를 치며 호응하도록 하자.”
이에, 경우가 오랜만의 전투에 신바람을 내며 선두에서 말을 몰아나가더니, 한 대의 화살을 시위에 먹여 힘차게 날렸다.
목표는 고돌발 성주와 일전을 벌이기 위해 말을 몰아 내달리던 정명진의 뒤통수였다.
멋들어진 투구를 쓰고 있었으나, 힘차게 바람을 가른 화살은 정명진의 뒤통수를 뚫고 화살촉을 이마 위로 쑥 내밀었다.
“으악!”
적장의 얼굴이 피로 물들고 이마에 화살촉이 불쑥 나오니, 고돌발이 놀라 비명을 내질렀다.
별안간 장수를 잃은 당 군 역시 겁에 질려 사방으로 흩어졌다.
“사냥이다! 시원하게 살을 날려라!”
경우가 마치 사냥을 즐기듯 소리치며 내달리니, 양만춘이 이끈 고구려 기병들은 섬멸전을 벌이며 전투를 즐겼다.
이에, 고돌발이 겨우 정신을 가다듬어 명하였다.
“군량미를 취하라! 우리 건안성의 식량이 될 것이다!”
전장이 어느 정도 수습되자, 고돌발은 양만춘과 경우에게 말을 몰아 다가가 감사를 표하였다.
“천하제일 명궁 경우님과 양만춘 성주님을 뵙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양만춘은 항상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지원해온 탓에 상대적으로 경우보다 그 명성이 덜하였으나,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경우, 자네 언제 천하제일 명궁이 되었나?”
쑥스러워하는 경우의 등을 다독이며 양만춘이 이처럼 말하니, 고돌발은 혹여 자신이 실수라도 한 것은 아닌지 불안하여 말하였다.
“제가 실수하였나 봅니다. 안시성의 양만춘 성주님이야말로 천하의 명성이 자자하시어…….”
이에 양만춘이 단호히 손을 내저었다.
“내세울 것 하나 없음은 제가 잘 알지요. 건안성의 식량이 될 듯하오니, 어서 수습하여 가십시오.”
연개소문을 따르는 이들과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은 양만춘이었다.
양만춘이 냉정히 말머리를 돌리니, 고돌발이 황망히 뒤를 쫓으며 말하였다.
“성주! 제 말 좀 들어보소서!”
이에, 경우가 활을 들어 고돌발을 겨누며 냉정히 말하였다.
“당 군은 고구려의 원수이나, 개소문을 따르는 이들은 우리의 원수다! 감히 쫓아오며 나불댄다면 그 입에 살을 박아놓겠노라!”
“겨, 경우 장군…….”
“닥쳐라! 당 군을 내몬 뒤엔, 연개소문은 물론, 그 졸개들 모두 내 활이 벌할 것이니, 할 말이 있거든 그때 하거라!”
살기 어린 경우의 눈매에 고돌발의 말이 발을 멈추었고, 고돌발도 등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그저 멀어져 가는 안시성 군을 바라만 보아야 했다.
* * *
수군 부총관 왕대도의 죽음은 황제 이세민을 격노케 하였다.
황제는 실수가 없는 법.
허나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은 왕대도의 죽음으로 증명되었기에, 황제 이세민은 다시 새로운 판단을 내려야 했다.
“짐이 틀렸다!”
장수들을 둘러보며 황제 이세민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에, 이세적을 비롯한 모든 장수들이 침을 꿀꺽 삼키며 황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비사성의 장량을 제외한 전군을 몰아, 안시성으로 향하겠노라. 요동성으로 집결하라 전하라!”
이에, 전령들이 급히 요동 각지로 말을 몰아 내달렸고, 이는 곧 한수 이남에 진을 펼친 연개소문에게도 전해졌다.
* * *
연개소문은 비좁은 당포성에 주둔하지 않고, 한수 이남에 배수진을 치며 신라의 정예 상주군을 기다렸다.
“당포성에서 적을 맞아 싸움이 손실을 줄일 상책이옵니다.”
공손향이 이렇듯 말하였으나, 개소문은 단호하였다.
“당포성 안에 있으면, 피해를 줄일 수 있으나, 수성전은 적을 조속히 물리치기 어렵다. 신속히 적을 물리친 후 요동으로 향하려면 대회전을 벌여야 한다.”
“하오나, 성충이 죽은 이 시점… 백제의 도움을 받을 수 없으니, 우리 군사만으로 신라의 정예 상주군을 물리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개소문은 일만의 개마무사로 진을 펼쳤고, 곧 다가올 각간 김서현의 상주군은 오만에 달하니, 공손향이 이렇듯 말함은 당연하였다.
공손향이 급히 자금을 대어 평양성 내엔 삼만에 달하는 개마무사가 추가로 마련되었으나, 개마무사는 장기간의 훈련 기간이 요구되기에 단순히 갑주만 걸친다고 전장에 나갈 수는 없었다.
이에, 개소문은 자신이 신라 군을 물리치는 동안만이라도 평양성 내의 개마무사들이 훈련할 시간을 마련해 주고 싶었다.
하여, 고작 일만 기의 개마무사만 이끌고 오만에 달하는 신라 군을 막고자 출병한 것이었다.
“공손향, 그대도 걱정이 늘었구나.”
개소문이 근심스러운 눈빛의 공손향을 바라보며 담담히 말하였다.
이에, 공손향이 빙그레 웃으며 말하였다.
“저는 대막리지께서 홀로 대군을 상대하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가 걱정하는 것은, 소중한 우리 일만의 개마무사이옵니다. 이 군사들을 모두 살려 요동으로 데려가야, 당 군을 혼쭐낼 것 아니옵니까?”
“그런가? 그렇다면, 한 명도 상하지 않게 소중히 여겨 데려가야겠군.”
“하온데, 대막리지. 황제 이세민이 안시성으로 전군을 이끌고 진격하려는 모양입니다. 이는 어찌하실 생각이옵니까?”
이에, 개소문이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평양성의 개마무사를 신성으로 이동시키고, 막리지에게 안시성을 도우라 전하라.”
“하오면, 평양성이 빌 터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다. 내가 이곳에서 신라 군을 요절낼 것이니, 평양성은 안전할 것이다.”
너무도 자신 있게 개소문이 답하니 공손향도 더는 이견을 대지 않았다.
그리고 같은 시각, 당항성 포구 앞에 고구려 수군 함대가 모습을 드러내고 진을 펼치니, 때마침 출병하려던 당항성 수군이 기겁하였다.
연개소문의 여동생 연수영이 당진평과 함께 당항성의 수군을 묶어 두고자 수상진을 펼친 것이다.
“장솔! 고구려 수군이오!”
항상 침착하던 석진이 매우 놀라 이처럼 말하니, 책사 장솔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였다.
“당의 대군이 요동을 휩쓸고 있으며, 상주군이 한수를 넘고자 진격 중인데도 불구하고, 고구려 군이 방비하지 않고 이처럼 공세를 펼치다니… 실로 대범하면서도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그래, 우리는 어쩌면 좋소?”
석진이 답답하여 방책을 물으니, 장솔은 답하지 않고 포구로 나가 멀리 진을 펼친 고구려 수군을 바라보았다.
“지금 우리 군선이 포구를 벗어나면 먼저 진을 펼친 고구려 군의 공세에 큰 피해를 입을 것입니다.”
“그럼 어찌해야 하오?”
이에, 장솔이 빙그레 웃었다.
“여기는 밀물과 썰물 차가 큰 곳입니다. 물이 빠지면 바닷길의 흐름도 역으로 바뀌니 적들의 진형이 흐트러질 것입니다. 그때, 빠르게 물살을 타고 돌격하면 대승을 거두실 것이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