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291화 (291/328)

291화 전장의 신, 이세민 (8)

밧줄과 사다리를 든 군사들이 내달렸고, 충차가 불붙은 성문을 파괴하기 위하여 바짝 붙었다.

정란이 굉음을 내며 연신 불화살을 퍼부었고, 불길에 휩싸인 성벽 위 고구려 군은 몰려드는 당 군을 막아내지 못하였다.

끝내 요동성의 남문이 파괴되었고, 성 안으로 당 군이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요동성 성주 고영의가 급히 군사들을 이끌고 남문을 지키기 위해 달려왔으나, 이미 성 안으로 진입한 당 군에게 목이 베여 죽음을 맞이하였다.

요동성의 각 성문들이 마저 파괴되고 저항하던 고구려 군이 무기를 버리니, 황제 이세민도 성 안으로 진입하였다.

“항복한 이는 죽이지 말라.”

황제 이세민의 지엄한 명에, 살육은 멈추었고 항복한 고구려 군사들과 백성들이 모두 황제 이세민의 앞에 무릎 꿇었다.

“폐하, 고구려 군 일만에 백성 사만이옵니다. 또한 양곡이 오십만 석이나 되옵니다.”

이세적이 이처럼 아뢰니 황제 이세민이 크게 기뻐 껄껄 웃었다.

“수의 황제들이 그토록 들어와 보고 싶어 하던 요동성이다. 하하하, 이제 이 요동성을 요주로 개칭하니, 이곳의 백성들은 모두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한편, 황제 이세민은 요동성의 군사들과 백성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맞섰던 이유를 이세적에게 전해 듣게 되었다.

“항복한 고구려 군사들이 말하길, 타인의 죽음을 보는 여인이 ‘결코 모두가 죽지 않을 터이니, 요동성을 지켜내자’며 용기를 북돋았다고 하옵니다.”

“타인의 죽음을 본다? 무녀인 겐가?”

황제 이세민이 심드렁이 물었다.

“그런 듯하옵니다.”

“그래, 그 무녀는 살아 있던가?”

“붙잡혀 있사옵니다.”

“그래? 그럼 내 앞으로 데려오거라.”

황제 이세민의 명에 이세적이 군사들을 시켜 꽁꽁 묶인 모용설을 데려오게 하였다.

백의를 입은 모용설의 자태가 매우 단아하여, 황제 이세민이 밧줄을 풀어주라 명하고는 물었다.

“몇 살이더냐?”

이에, 모용설이 황제 이세민을 똑바로 응시하며 답하였다.

“그대가 태어나기도 전에 천하를 떠돌았느니라.”

“뭐라? 하하하.”

황제 이세민이 모용설을 벌하지 않고 한참 동안 웃더니, 표정을 굳혀 물었다.

“너로 인하여 고구려 군의 저항이 거세었다. 이로 인하여 우리 군사들이 상하고 고구려 군사들 또한 크게 상하였다. 만일 네가 저항을 포기하게 했다면 요동성의 군사들과 백성들을 더 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너는 이를 어찌 생각하느냐?”

“집에 도적이 들어와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겁탈하는데, 자식들이 죽기 싫어 방관해야 하는가? 그대는 불타는 집을 두고만 볼 것인가?”

모용설이 이처럼 단호히 답하니, 황제 이세민이 또다시 껄껄 웃었다.

“하하하, 역시 보통 여인은 아니로다. 그래, 너는 무녀인 겐가?”

“나는 무녀가 아니다.”

“무녀가 아닌데, 어찌 타인의 죽음을 본다는 겐가?”

“내가 타인의 죽음을 어찌 볼 수 있는지는 나 역시도 모른다. 허나, 내가 죽음을 볼 수 있는 것은 믿어 의심치 말라.”

“그래?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가? 이 고구려 원정에서 나는 죽겠는가? 살겠는가?”

빙그레 웃으며 묻는 황제 이세민의 얼굴을 잠시 바라본 모용설이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에, 황제 이세민이 의아해 물었다.

“어찌 한숨을 내쉬는 것인가?”

“내가 그대의 죽음을 보았다고 말하면, 내 목이 떨어질 것이고, 그대가 살 거라 말하면 기고만장해진 그대가 더욱 전쟁을 지속할 것이니, 그로 인하여 죽을 그대의 군사들이 안타까워 한숨을 내쉬었다.”

“뭐라? 하하하.”

한참을 웃은 황제 이세민이 황무문에게 명하였다.

“보통 여인은 아니다. 좋은 음식과 옷을 주고 잠자리를 마련해 주거라. 허나 나돌아다니며 요망한 주둥이를 나불대면 곤란해지니, 잘 지켜야 하느니라.”

이에, 황무문이 명을 받아 모용설을 끌고 갔다.

“고구려 정벌은 참으로 여러 재미가 있구나. 하하하.”

끌려가는 모용설의 뒤태를 바라보며 황제 이세민이 껄껄 웃었다.

* * *

요동성이 당 군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요동 각 성에 전해졌다.

요동 일대의 성들은 모두 충격에 빠졌고, 당 군에 대한 두려움이 극에 달하였다.

이전에 상대하던 적과 그 격이 달랐고, 고구려 군도 이전 전쟁과 달리 자신들의 군세가 약해졌다 여기고 있었다.

“선대 태왕 건무께서… 당에 굴종하시어 군을 강화하지 않은 탓이다.”

건안성 성주 고돌발은 요동성의 소식을 접하자마자 이처럼 말하며 크게 통탄하였다.

실상, 개소문이 정권을 잡아 군세를 강화하기 시작한 지 일 년도 되지 않아 당의 침공이 시작되었기에, 선대 태왕 건무를 탓할 만도 하였다.

연무장의 살육으로 인하여 대장군 강이식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의 죽음 또한 고구려의 군세를 약화시킨 원인이었다.

고돌발은 이 역시도 선대 태왕 건무의 굴종 외교 때문이라 여기고 있었다.

“온달 장군과 양만춘 성주는 아직도 성문을 닫고 전령을 들이지 않는가?”

고돌발의 물음에 장수들이 머리 숙여 답하였다.

“여전히 성문을 닫고 단교 중입니다.”

“성주, 온달과 양만춘은 잊으십시오. 저들은 대막리지와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다 여기는 자들로 이번 전쟁에 결코 참여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고돌발이 한숨을 내쉬며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요동성 함락 이후 당군의 다음 목표는 백암성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자신은 성 앞에 진을 펼친 장검의 군대로 인하여 백암성에 도움을 줄 형편이 못 되었다.

“백암성이 함락되면 압록수로 길이 열리게 된다. 이를 저지해야겠는데, 좋은 수가 없겠는가?”

고돌발의 물음에 장수들이 고개만 푹 숙여 답하지 못하였다.

백암성이 함락된 뒤에는 황제 이세민의 다음 목표가 건안성이 될 수도 있으니, 내심 성을 단단히 지키고 싶은 마음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고돌발이 답답하여 한숨을 내쉬니, 서해와 함께 건안성으로 피신해 온 비사성의 책사 예곤이 입을 열었다.

“성주, 소인에게 한 가지 수가 있나이다.”

“무엇이오?”

고돌발이 기뻐 바로 물었다.

“필경 신성의 막리지께선 오골성의 군사로 백암성을 지원케 할 것입니다.”

예곤이 지도를 가리켜 말하니, 고돌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허나, 당의 황제 이세민은 병법에 능하고 전략이 뛰어난 인물로, 이를 이미 간파하고 있을 것입니다.”

“허면?”

“공성전에 능하지 못한 기병을 건안성 앞에 진치게 한 연유가 바로 이 때문이지요.”

“그게 무슨 말이오?”

고돌발이 의아해 물으니, 예곤이 지도를 가리키며 답하였다.

“오골성의 원군을 건안성 앞에 진을 친 당의 기병들이 요격할 것입니다.”

“뭐라? 큰일 아니오? 그래 그대는 수가 있는 것이오?”

“수가 있사오나, 온달을 믿어야 하옵니다.”

“온달 장군을 믿으라?”

고돌발이 의아해 물으니, 예곤이 차분히 설명하였다.

“건안성 앞에 적들이 진을 쳤으나, 남쪽은 길이 열려 있나이다. 이는 우리 뒤에 안시성을 당 군이 대단치 않게 여겨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러하기에…….”

예곤이 잠시 뜸을 들이니, 고돌발이 바로 재촉하였다.

“그래서 어찌해야 하오?”

“기병으로는 건안성을 함락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주께서 군을 일부 빼내어 백암성을 구원하기 위해 출병한 오골성의 군대를 도울 수 있나이다.”

이에, 장수들이 놀라 크게 소리쳤다.

“군사를 빼내어 돕다니! 우리 건안성도 위급한 상황인데 어찌 우리가 도울 수 있단 말이오?”

“그대는 눈앞에 진을 친 적들이 보이지 않는 것인가? 우리가 백암성에 비해 뭐가 낫다고 도울 수 있단 말인가?”

장수들이 모두 자신을 책망하여도 예곤은 결코 흔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온달과 양만춘을 믿어야 하옵니다. 우리 건안성이 오골성의 원군을 돕고, 비사성을 함락해 보급을 나르는 장량의 부대를 급습하는 등 요격 전술을 펼친다면 당 군은 필경 우리 건안성의 남쪽으로 움직여 방비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이곳은 바로! 안시성과 건안성의 중간으로! 적들은 협공을 받게 되겠지요. 온달과 양만춘 성주가 필경 이곳에서 적들을 공격할 것입니다.”

예곤이 가리킨 곳은 주필산 인근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고돌발이 지도 위 오골성을 응시하며 말하였다.

“원래 오골성은 내가 지키던 성이었소. 그리고 이 건안성은 지금 오골성의 성주 고원이 지키던 성이었지. 함께 동고동락하던 오골성의 군사들을 돕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오. 나는 예곤의 말을 따라 남문으로 군사들을 이끌고 나갈 것이오.”

고돌발의 단호한 말에 장수들도 더는 이견을 내지 못하였다.

이처럼 오골성이 백암성을 돕고, 건안성이 오골성의 군사들을 돕고자 논의하던 그때.

백암성의 성주 손대음은 항복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나는 계루부의 고 씨도 아니고, 목숨을 걸고 황제와 싸울 이유도 없다. 설령 싸운들 이 백암성을 지켜낼 수도 없으니, 사상자가 나기 전에 항복하는 것이 옳다.”

이에 손대음이 성을 지키는 군사들 몰래 황제 이세민에게 사람을 보내 투항 의사를 밝혔다.

이런 사정도 모른 채, 고원이 이끈 오골성의 군사 일만 명은 백암성을 구원하기 위해 출병하였다.

또한 건안성에서도 고돌발이 기병을 이끌고 오골성의 군사들을 돕기 위해 출병하였다.

“삼천 기에 불과하지만, 적에게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고돌발이 강한 자신감을 내비치며 기병들을 이끌고 예곤이 예상한 지점으로 빠르게 이동하였다.

그리고, 이미 에곤이 예상했듯이 장검의 기병 일만 기를 이끈 계필하력이 오골성의 군사들을 요격하기 위하여 움직이고 있었다.

“이곳에서 매복한 후, 오골성에서 출병한 고구려 군을 요격한다.”"

빽빽한 산림 속에 말을 숨기며 계필하력이 명하였다.

이에, 일만 기의 기명이 산길 양옆으로 이동하여 오골성의 군사들을 기다렸다.

그러나, 이들이 주시하던 산길과 정반대로 등 뒤에서 말 울음이 일며 불붙은 화살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이미 매복 지점을 예견한 고돌발이 계필하력의 기병에게 화공을 가한 것이다.

이에, 계필하력이 놀라 급히 산림에서 나오니, 기다렸다는 듯 고돌발이 군사들을 이끌고 말을 몰아 돌격해 왔다.

“또 보는구나! 하하하.”

고돌발이 계필하력을 가리키며 크게 웃으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계필하력이 분을 참지 못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계필하력은 결코 고돌발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고돌발이 휘두른 창에 또다시 옆구리를 맞은 계필하력이 비명을 내지르며 말에서 떨어지니, 이번에도 설인귀가 급히 말을 몰아 나와 고돌발에게 맞섰다.

설인귀의 방천화극이 바람을 가르고 고돌발의 목을 노리면, 고돌발은 허리를 젖혀 이를 피하며 동시에 창을 휘둘렀다.

두 장수의 마상 무예가 백중이었고, 이 틈에 계필하력이 부장들에게 구해져 도망쳤다.

설인귀도 계필하력이 도주한 것을 깨닫고는 허수를 날려 틈을 만든 후, 급히 말머리를 돌려 도주하였다.

“오늘은 바쁘니, 다음에 다시 보자!”

설인귀가 이처럼 도망치며 외치니, 고돌발도 뒤를 쫓지 않고 군을 물려 빠르게 건안성으로 회군하였다.

자신이 군사들을 빼낸 것을 눈치챈 장검의 공세를 우려한 것이다.

고돌발의 도움으로 고원의 오골성 군사들은 백암성 인근으로 무사히 진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당도하기도 전, 백암성의 성주 손내음은 황제 이세민에게 항복하여 포상까지 받은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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