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289화 (289/328)

289화 전장의 신, 이세민 (6)

요동성을 구원하러 출병했던 고연수가 국내성의 고해진마저 데리고 돌아오니, 신성 성주 고정의는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다.

한참 동안 노려만 보던 고정의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물었다.

“어찌된 일이냐?”

이에, 고연수가 모용상의 눈치를 보며 말하였다.

“적… 적의 매복이 있었습니다.”

“매복?”

“그렇습니다.”

북부욕살 위두대형 고연수가 모용상을 힐끔 쳐다보며 이처럼 답하니, 고정의가 모용상에게로 시선을 옮겨 물었다.

“맞는가?”

이에, 모용상이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고연수에게로 옮겼다.

모용상의 매서운 눈매에 고연수가 고개를 푹 숙이니, 고정의가 모용상에게 재차 물었다.

“어찌 대답은 없고, 고연수를 노려만 보는 겐가?”

이에, 모용상이 다시 한숨을 내쉬며 답하였다.

“적의 매복은 사실입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매복이었는가?”

“제대로 응전하지 않았으니, 알 수 없습니다.”

모용상의 답변에 고연수가 억울하다는 듯 소리쳐 말하였다.

“아닙니다! 적이 배후를 급습했고, 저는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군사를 보전해야 했습니다. 적에게 반격을 가하기 위해선 단 한 명의 군사라도 아껴야 했습니다!”

이에, 모용상이 고연수를 잡아 먹을 듯 노려보며 맞섰다.

“닥치시오! 진형을 갖춰 대적한다면 필경 우리가 이겼을 것이오!”

모용상과 고연수가 서로 제 주장이 옳다 목청을 높이니, 고정의가 소리쳐 제지했다.

“모두 닥쳐라!”

모용상과 고연수가 씩씩거리며 입을 다무니, 고정의가 눈살을 찌푸리며 남부욕살 대형 고해진에게 물었다.

“육만의 개마무사였다. 정녕, 패주할 만큼 매복한 적의 수가 많았더냐?”

이에, 고해진이 머리를 조아리며 답하였다.

“송구하오나, 경황이 없어 매복한 적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고해진이 사실대로 고하니, 고정의가 흰 수염을 부르르 떨며 크게 노하였다.

“이 때려 죽일! 전장에 나선 장수가 적의 수조차 가늠하지 못하였단 말이더냐? 너희가 이대로 도망쳐 오면, 구원을 기다리던 요동성은 어쩌란 말이더냐?”

“죽여주십시오.”

눈치 빠른 고연수가 재빨리 머리를 조아리며 애원하니, 고해진도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하였다.

“숙부, 한 번만…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요동 일대 각성들의 성주는 물론, 장수들 대부분이 계루부의 고 씨로 구성되었다.

이에 계루부의 수장 고추가인 고정의는 이들에게 가장 큰 어른이었다.

모두가 그의 혈족이었고 형제며 조카였으니, 살려달라 간청하는 고연수와 고해진을 고정의는 차마 벌하지 못하였다.

“너희는 물러나 근신하며 절치부심하여 오늘의 치욕을 씻도록 노력하라. 만일 오늘과 같은 일이 또 있다면 내가 친히 너희의 목을 벨 것이다.”

고정의가 이처럼 고연수와 고해진을 벌하지 않으니, 모용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고연수와 고해진이 고개를 떨구고 물러나자, 모용상이 고정의에게 항의하였다.

“이대로 벌하지 않으면, 누가 패주를 두려워 할 것이고, 저들이 또 도망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습니다.”

이에, 고정의가 손을 들어 모용상을 제지하며 말하였다.

“허나, 저들의 목을 치면 대신할 장수를 어디서 채운단 말인가? 평양성 연무장의 살육 이후, 우리 고구려엔 마땅한 장수가 없네. 대장군을 비롯한 용장들은 모두 그날 죽었으니, 부족한 저들이라도 써야 하지 않겠는가?”

고정의의 고심이 느껴진 모용상이 입을 다물고 분을 참지 못해 그저 바닥만 노려보았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모용상이 분을 누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허면, 요동성은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성주, 제가 다시 가겠습니다. 군사를 내어주십시오. 한시가 급합니다.”

이에, 고정의가 모용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하였다.

“지금 가면 죽는다.”

“성주!”

“적은 이미 우리의 개마무사 육만 기를 보았느니라. 대비를 하고 있을 것이고, 모두가 죽을 것이다.”

“허면, 요동성을 이대로 두실 생각이십니까? 원군을 보내지 않으면, 요동성의 모두가 죽습니다!”

“너뿐만 아니라 원군으로 출병한 개마무사 모두가 죽을 수도 있다. 나는 대막리지가 신라를 물리치고 올 때까지 개마무사를 유지해야 할 막중한 책무가 있느니라.”

“성주, 모두가 죽습니다. 요동성의 모두가 죽는단 말입니다! 부디, 원군을… 원군을 내어주십시오.”

자존심 강한 모용상이 무릎 꿇고 애원하니, 고정의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울먹이는 모용상의 어깨에 손을 올린 고정의의 눈빛은 손주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따스함이 어려 있었다.

“이만의 군사를 주겠노라. 너무 무리하지도 말고, 애쓰지도 말라. 살고자 도망쳐도 좋고. 가다가 다시 회군하여도 좋다. 이것만 명심하라. 살아 있어야 반격도 할 수 있음을…….”

“…….”

“이 모두가 나의 조카들이 기회를 놓친 탓이니, 이 또한 내 잘못이다. 네가 요동성을 구원하지 못한다 하여 너를 탓하지 않을 터이니, 언제든 돌아오거라.”

“성주 감읍하나이다.”

모용상이 머리를 바닥에 박을 정도로 절을 올리며 연신 감사를 표하였다.

허나, 고정의의 예측대로 이세적은 이미 신성에서 출병할 고구려 군을 요격하기 위한 준비를 갖춘 뒤였다.

* * *

비사성이 함락되기 하루 전.

요하를 빙 돌아 도하한 영주 도독 장검이 요하를 지키고 있던 고구려 군을 급습하고 건안성으로 향하던 그때였다.

패주하는 고구려 군을 구하기 위해 건안성 성주 고돌발이 친히 군사들을 이끌고 출병하여 급히 요하로 향하고 있었다.

장검의 군대는 이민족 기병으로 구성되었고, 황제 이세민의 총애를 받는 철륵부의 장수 계필하력도 속해 있었다.

그리고 이 계필하력의 군사 중에 유독 하얀 갑옷을 입고 백마를 탄 군사가 있었으니, 이가 바로 심숙안과 함께 선대 태왕 건무를 알현한 설인귀였다.

설인귀는 심숙안이 선물로 준 보검을 팔아 백마를 사고, 좋은 갑주를 마련한 뒤 군졸로 고구려 원정에 자원하였다.

심숙안이 특별히 장검에게 ‘설인귀는 일반 군졸과 달리 복색을 갖추게 해주시오’라고 부탁한 덕에, 군졸치고는 너무도 화려한 갑주와 백마를 탈 수 있었다.

덕분에 설인귀를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였고, 심지어 장수로 여기는 이들까지 있었다.

장검은 이런 설인귀를 내심 탐탁지 않게 여겨 요하를 건너면 이세적의 군대로 보낼 생각을 품고 있었다.

속 사정이야 어떠하든, 설인귀는 현재 계필하력 부대의 군졸로 패주하는 고구려 군을 뒤쫓고 있었다.

패주하는 고구려 군의 앞에서 흙먼지가 자욱이 일며 밀려오니, 부장이 계필하력에게 소리쳐 말하였다.

“고구려 군입니다! 건안성의 원군이 분명합니다.”

이에, 계필하력이 손을 들어 말을 멈추게 하고는 시선을 밀려오는 흙먼지 구름에 고정하였다.

요란한 진동이 울리고, 말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진형을 갖추라. 곧 도독께서 오실 것이다.”

계필하력이 서두르지 않고, 본대를 이끌고 오는 장검을 기다려 건안성의 군대를 대적하려던 그때였다.

흙먼지 속에서 한 대의 화살이 날아들더니, 계필하력의 투구 끝에 박혔다.

“이… 이런!”

계필하력이 크게 놀라 투구 끈을 고쳐 묶고 정면을 노려보니, 흙먼지를 뚫고 젊은 장수 한 명이 말을 몰아 나오며 소리치고 있었다.

“나는 건안성의 성주 고돌발이다! 용기가 있다면 나와 맞서 보거라!”

고돌발의 도발에 계필하력이 커다란 도끼를 단단히 쥐고 말을 몰아 앞으로 나갔다.

“오냐! 기세 좋은 놈이로다!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싶어 찾아왔으니, 번거롭더라도 내가 친히 네 놈 목을 베어 주겠노라!”

기세 좋게 소리치며 고돌발이 말을 몰아 질주하였고, 고돌발도 장창을 비켜 쥐고 말을 몰아 내달려 맞섰다.

“머리 꼬라지가 돌궐 놈인 게냐? 갈 곳 없는 개처럼 밥이나 얻어먹고자 당 군에 기어들어 간 모양이로다! 하하하.”

고돌발이 조롱하며 창을 찔러오니, 계필하력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놈이 감히!”

몸을 살짤 틀어 고돌발의 창을 피한 계필하력이 뒷굼치로 말 옆구리를 차며 속도를 내어 바짝 붙고는 두 손으로 도끼를 쥐고 힘껏 내리쳤다.

고돌발의 정수리를 노리고 바람을 가르던 커다란 도끼가 순간 멈추었다.

고돌발이 왼손을 들어올려 도끼를 가볍게 쥐어 멈춘 것이다.

그리고 오른손의 쥔 창이 아래에서 위로 휙 올라오더니 계필하력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다행스럽게도 창날은 피하였으나, 강한 충격에 계필하력이 신음을 토하며 말 위에서 떨어졌다.

이에, 고돌발이 기회를 잡아 고돌발의 목을 노리고 창을 찔렀다.

“멈춰라!”

언제 나타났는지 백색 피풍의를 걸치고 백마를 탄 장수가 말을 몰아와 방천화극으로 고돌발의 창끝을 쳐내었다.

그 틈에 겨우 목숨을 구한 계필하력이 손을 발 삼아 네 발로 땅을 기어 사지를 벗어났고, 계필하력의 부장들과 군사들이 구하기 위해 몰려왔다.

고돌발은 떼로 몰려오는 당 군을 힐끔 쳐다보고는 냉소를 띄며 설인귀에게 말하였다.

“다음엔 네놈부터 나오거라.”

설인귀를 군졸이 아닌 장수로 여겨 한 말이었으나, 설인귀는 태연히 받아 답하였다.

“오냐! 오늘은 이 정도로 인사를 대신하고 다음에 제대로 붙어 보자꾸나.”

이에, 고돌발이 껄껄 웃고는 말머리를 돌려 물러났다.

설인귀는 고돌발의 당당한 태도에 내심 탄복하여 뒤쫓지 않았고, 계필하력의 부장들 역시 감히 추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 * *

고돌발과 단기접전으로 계필하력이 부상을 입으니, 뒤늦게 도착한 장검이 크게 놀라 명하였다.

“쉽게 볼 놈이 아니다. 일단 성 앞에 진을 치고 공성전을 치를 보군을 기다리도록 하자.”

기병 일색이었기에 무리해 공성전을 벌이지 않았고, 이는 옳은 판단이었다.

황제 이세민도 기병 일색인 장검의 군사들이 건안성을 점령하리라 여기지 않았고, 건안성을 점령할 군사들은 요택을 메꾸며 요하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장검이 건안성 앞에 진을 치고 공성전을 벌일 보군을 기다리기 시작한 지 이틀째 되던 새벽이었다.

바닷물이 빠지며 드러난 길로 뭍에 오른 비사성 수군 이만여 명이 쉬지 않고 건안성의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장검의 배후를 급습하기 위한 행군이었고, 눈앞의 건안성만 경계하던 장검의 군대에겐 크나큰 위기였다.

* * *

“한 식경 거리입니다.”

예곤이 바삐 발을 움직이며 말하니, 비사성 성주 고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가 뜨기 전에 장검의 군대 뒤로 접근할 수만 있다면, 큰 전공을 거두며 건안성을 구원할 수 있을 듯하였다.

“행군 속도를 높여라. 곧 적의 배후가 보일 것이다.”

고광이 엄히 명하니, 부장들이 손짓으로 신호를 보내며 군사들을 독려하였다.

아직 어둠이 가시기 전이었고, 멀리 진을 펼친 장검 부대는 아직 적막에 가려 있었다.

고요한 것이, 배후로 고구려 군이 다가오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 분명하였다.

“제아무리 기군이라도, 방심해 자고 있다면 수군에게 전멸당할 수도 있다.”

점차 자신감이 차오르며 고광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 순간, 배후에서 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말 울음?”

고광이 의아해 발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순간, 말 울음소리가 요란히 울리더니, 거대한 파도처럼 비사성 수군을 향해 덮쳐왔다.

“황제 폐하께서 예상하신 대로 놈들이 나타났구나! 하하하.”

영주 도독 장검이 친히 기병 이만 기를 이끌고 고구려 수군의 배후에서 나타나더니, 성난 폭풍처럼 휘몰아쳐 왔다.

“매복이다! 진영을 갖추고 맞서라!”

고광이 놀라 급히 소리쳐 명하니, 예곤이 창병을 진영 앞에 세우고 그 뒤에 방패병과 궁병을 세우라 소리쳤다.

“돌파당하지 말라!”

그러나 제대로 진형을 갖추기도 전에 돌격해온 당의 기병은 거센 발굽으로 고구려 수군을 짓밟고 창으로 찌르며 공세를 가하였다.

사위에서 고구려 군의 비명이 울리고, 고광이 예곤을 바라보며 한탄하였다.

“그대의 말을 듣지 않은 내 탓이구려.”

“성주, 속히 피하십시오.”

예곤이 고광의 소매를 잡아끌었으나, 고광은 검을 단단히 쥐고 고개를 저었다.

“서해! 예곤을 살려 훗날을 도모하라!”

서혜에게 엄히 명한 고광이 달려드는 당의 기병을 향해 몸을 날렸다.

고광의 몸이 솟구치고 검광이 빛나더니, 기세 좋던 당의 기병이 말에서 떨어졌다.

그러나, 뒤이어 내달려온 당의 기병이 창을 찔러오니, 허공에 뜬 고광은 고스란히 창날을 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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