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288화 (288/328)

288화 전장의 신, 이세민 (5)

비사성에서 출항한 고구려 수군은 건안성 인근 해상에 머물며 바다를 건너올 당의 수군을 요격하기 위한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정찰 보낸 군선들이 속속 들어오며 그 어디에도 당의 수군을 찾을 수 없었다는 보고를 하였다.

이에, 서해가 고광에게 아뢰었다.

“당의 군선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직 인근에 당도하지 않은 듯합니다.”

“아니다.”

고광이 고개를 저으며 짧게 답하고는 예곤을 응시하였다.

이에, 예곤이 한숨을 내쉬며 말하였다.

“성주께서도 느끼신 듯합니다.”

“그렇네.”

고광이 입술을 깨물며 답하니, 예곤이 재차 한숨을 내쉬며 바다를 바라보았다.

“성주, 적은 우리 비사성으로 향한 듯합니다.”

“그래, 자네가 예측했던 것이 현실이 되었군.”

“성주, 우리는 이제 비사성으로 갈 수 없나이다.”

“허면 어찌해야 하는가?”

이에, 예곤은 그저 바다를 하염없이 응시하며 말이 없었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르고 예곤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사라져야 합니다.”

“사라진다?”

“그렇습니다, 성주. 우리 함대는 이 해상에서 사라져, 세상에 없는 군대가 되어야 합니다.”

“그 뒤는?”

“반격을 준비하기 위해, 군선을 숨기고… 뭍으로 올라 안시성에 가야 합니다.”

“건안성이 아니고, 어찌 안시성인가?”

“건안성은 함락될 것이고, 안시성은 황제 이세민이 공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음…….”

고광이 잠시 생각에 잠기며 침묵을 유지하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안시성이 우리를 받아 줄 것 같은가? 선대 태왕 폐하와 강이식 대장군을 배신하고 대막리지에게 투항하였다고 의심할 것인데…….”

이에, 예곤이 옅은 미소를 지어 고광을 안심시켰다.

“성주, 온달은 대막리지를 오해하며 증오하고 목을 베려고 하나, 우리 고구려를 침범한 외적 또한 극히 증오할 것입니다. 반드시 우리를 받아들여, 황제 이세민에게 맞설 것입니다.”

“만일, 온달과 양만춘이 우리를 받아 주지 않는다면?”

이에, 예곤이 지그시 눈을 감고 답하였다.

“그땐, 요동을 떠돌다 당 군에게 몰살당하겠지요.”

“차라리 요동성은 어떤가?”

“성주, 우리는 요동성까지 갈 수 없습니다.”

예곤의 말처럼 건안성 앞에 장검이 이끈 이민족으로 구성된 기병이 진을 치고 있기에, 이들을 피해 요동성까지 가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안시성까지는 갈 수 있을 듯한가? 차라리 건안성은 어떤가?”

고광이 다시 물으니, 예곤이 잠시 시선을 하늘로 옮기고는 답하였다.

“하늘에 맡겨야겠지요. 안시성이 이곳과 가깝기는 하나, 그보다 더 가까운 곳에 당의 기병이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수군이고 저들은 기병이기에, 상극이라 건안성에 들어가기도 전에 전멸할 것입니다.”

이에, 고광도 더는 망설이지 않고 결단을 내렸다.

“좋다, 서해! 당장 우리 함대를 숨길 곳을 찾아라! 함대를 숨기고 우리는 뭍으로 올라 은밀히 안시성으로 향할 것이다!”

이에, 서해가 미리 염두에 둔 곳을 아뢰었다.

“이곳에서 북으로 오르면 작은 돌섬이 있사온데, 섬 중앙에 산이 있어 시야를 가립니다. 또한 돌섬 인근은 항상 안개가 자욱하고 암초가 많아 군선이 넘나들기 어려운 곳이라 우리 함대를 숨기기에 최적이옵니다.”

“허면, 돌섬에 군선을 숨기고 우리는 어찌 뭍으로 나올 수 있는가?”

이에, 서해가 빙그레 웃으며 답하였다.

“새벽이 되면 물이 빠지며 아주 잠시 길이 나는데, 그 길이 요하 하류와 이어집니다. 즉 건안성 북쪽으로 바다에 길이 나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 길로 바다를 걸어 뭍으로 나가, 안시성으로 향하면 되옵니다.”

“뭐라? 걸어서 바다를 건널 수 있단 말인가?”

잠시 생각에 잠겼던 고광이 눈을 빛내며 말하였다.

“좋다! 당장 그 돌섬으로 함대를 돌려라! 우리는 새벽에 바다를 걸어 건널 것이다! 그리고! 건안성 앞에 진을 친 당 군을 급습하여 건안성을 구원할 것이다!”

“성주…….”

예곤이 이견을 대려 했으나, 너무도 지엄한 고광의 명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예곤! 건안성이 함락되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네. 죽더라도 전장에서 죽겠네. 그리 알고 따르게. 서해, 어서 배를 돌리게!”

고광의 명에 따라 고구려 군선들이 일제히 북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리고, 사백여 척에 군선과 이만의 수군이 돌섬에 숨어 새벽이 오기를 기다렸다.

* * *

요동성으로 향하던 황제 이세민이 전령을 불러 명하였다.

“건안성에 진을 친 장검에게 전하라!”

“하명하소서.”

전언을 기다리며 전령이 머리를 조아렸다.

이에, 황제 이세민이 서쪽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아마도 저 서쪽… 바다에서 고구려의 수군이 올라올 것이다. 장검의 배후를 치기 위해 빙 돌아 상륙하겠지. 애써 적의 상륙지점을 찾으려 노력하지 말고, 새벽에 있을 급습을 대비하라 전하라.”

이에, 전령이 머리를 조아려 명을 받고는 급히 건안성 앞에 진을 친 장검의 군대로 말을 몰아 내달렸다.

“수군이 어찌 기병을 대적할꼬. 무모한 놈들이야. 허나, 이미 비사성 앞에서 바닷길을 지키는 우리 수군을 피해 남으로 내려갈 수도 없을 테니, 달리 방도도 없겠지.”

이미 승리를 예견한 황제 이세민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마상에서 황제 이세민의 명이 이어졌다.

“너는 즉시 말을 달려 이세적에게 전하라. 요동성을 공략 중인 이도종이 신성에서 보낸 개마무사로 무척 고달플 것이다. 은밀히 움직여 적당한 시기에 고구려 군의 배후를 공격하면 반드시 요동성을 외롭게 할 것이다.”

전령이 황제의 전언을 전하기 위해 말을 달려나갔고, 전장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꿰뚫어 보는 황제 이세민은 막힘이 없었다.

“지원군이 번번이 막혀 패한다면, 이후 함부로 군을 움직여 돕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그때! 고립된 성들을 차례대로 함락하며 진군하면 그만이니라.”

* * *

육만 군사로 요동성 앞에 진을 펼친 요동도 행군 부선봉 이도종은 친히 기병 사천 기를 이끌고 신성과 국내성에서 오는 고구려의 지원군을 요격하기 위해 동으로 진군하였다.

“지원군의 수가 적지 않다. 요동성 앞에서 지원군을 맞이할 경우, 요동성이 호응하면 삼면으로 공격당할 수 있다.”

이도종의 판단은 옳았으나, 그의 기병 수는 지원을 오는 고구려 기병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였다.

모용상이 말을 달려 신성에 당도해 지원을 요청한 결과, 신성 성주 고정의는 북부욕살 위두대형 고연수에게 사만의 개마무사를 맡겨 요동성을 지원케 하였다.

이와 더불어 국내성에도 전령을 보내 함께 요동성을 지원하라 명하였다.

이에, 미리 고정의에게 개마무사를 지원받은 국내성에서 남부욕살 대형 고해진이 이만 기의 개마무사를 이끌고 출병하였다.

이로써 도합, 육만 기의 개마무사가 동남과 동북 방면에서 요동성을 구하고자 질풍처럼 내달려 왔다.

이에 비하여, 이도종이 이끈 기병은 고작 사천 기였으니, 제아무리 용맹한 이도종이라도 자욱한 흙먼지에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저리도 수가 많다니!”

이세적과 달리 고구려가 신성에 숨겨둔 개마무사를 파악하지 못한 이도종은 매우 당황하였으나, 이미 물러나기엔 때늦은 감이 있었다.

“지금 등을 돌리면, 배후로 밀려온 놈들이 우리를 짓밟고 요동성 앞에 펼친 우리 진영마저 무너뜨릴 것이다. 맞서 싸워라! 우리는 정예로 황제 폐하의 부선봉이니라!”

이도종의 지엄한 명에 겁에 질렸던 당 군도 전열을 가다듬고 폭풍처럼 밀려오는 고구려의 개마무사를 향해 돌진하였다.

사천 기의 당 군과 남과 북에서 밀려오는 고구려의 개마무사 육만 기가 서로 맞부딪치기 시작하였다.

구구구궁.

지축을 흔드는 개마무사들의 말발굽 소리가 당 군의 귀청을 때렸고, 개마무사들의 삭(기병창)이 당 군의 흉곽을 꿰뚫었다.

모용상은 신성에서 출격한 개마무사의 선두를 서며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고, 그가 지나는 길은 모두 피로 물들었다.

단 한 차례 충돌로 이도종의 기병 선두는 말과 함께 무너졌다.

이에, 기겁한 당의 기병들이 말머리를 돌리기 바빴고, 그 속에 황제의 부선봉 이도종도 있었다.

“퇴각하라! 물러나 적의 발을 묶겠다! 퇴각하라!”

가장 앞서 도주하며 이도종이 소리쳐 명하니, 이미 전의를 상실한 당의 기병은 꽁지가 빠져라 도주하기 바빴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철갑기병인 개마무사보다 기동력에선 앞섰기에, 간신히 거리를 벌릴 수 있었다.

다시 진형을 갖춘 이도종이 구릉에 올라 고구려의 개마무사들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저것이 그 유명한 고구려의 개마무사로구나. 내가 적을 너무 간과하였다. 허나, 도주하며 개마무사의 약점을 파악하였으니, 이젠 적의 수가 많다 하여 두려울 것 없노라.”

이에, 도위 마문기가 물었다.

“장군, 적의 수는 많고 말까지 갑주를 둘렀는데도 약점이 있단 말입니까?”

“그렇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마문기가 재차 물으니, 이도종이 개마무사의 후미를 가리켰다.

“놈들은! 사람은 물론, 말까지 갑주를 둘러 기동력이 우리보다 현저히 떨어진다. 우리는 놈들의 정면에서 달려들다가 방향을 틀어 놈들의 진형 배후를 칠 것이다. 그리고 단 일격만 가한 후 다시 물러나 진형을 갖추고는 놈들을 빙 돌아 계속해 배후를 칠 것이다.”

이도종의 이 전술은, 기사까지 펼친다면 초원의 민족들이 펼치는 기병 전술과 매우 흡사하였다.

사실, 개마무사는 기동력이 떨어지기에 항시 경기병과 함께 움직여 적이 이런 전술을 펼치지 못하게 방비하였으나, 급히 지원 나오느라 경기병까지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개마무사의 약점을 간파한 이도종과 달리 도위 마문기는 이미 전의를 상실해 있었다.

“하지만, 장군 적의 수가 너무도 많습니다.”

도위 마문기가 겁에 질려 이렇듯 말하니, 이도종이 버럭 소리를 질러 꾸짖었다.

“놈들은 그 수가 많다 자신하여 우리를 업신여기고 있다. 허나! 놈들은 저 무거운 갑주를 걸친 채 멀리서부터 달려와 매우 지친 상태다. 거기에 더하여 우리가 지속적으로 배후를 치며 지치게 한다면 놈들의 말은 거품을 물고 쓰러질 것이니라!”

크게 호통을 친 이도종이 앞장서 말을 몰아 나가니, 도위 마문기도 군사들을 이끌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바람처럼 구릉을 내려간 이도종은 구름처럼 몰려오는 개마무사의 진형을 비켜지나 더욱 속도를 높이더니 마침내 개마무사의 진형 배후를 잡아 돌격하였다.

그리고 이를 따라 도위 마문기도 군사들을 이끌고 돌진하니, 배후를 공격당한 개마무사들의 진형이 흐트러졌다.

“단숨에 들이쳐라!”

선두에서 개마무사들을 베며 이도종이 소리쳤다.

이미 그의 앞엔 시신이 쌓여 있었고, 개마무사들이 급히 진형을 갖추고자 말머리를 돌리고 있었다.

“정신 차리지 못하게 쳐라!”

퇴각 시점을 계산하며 이도종이 외치던 그때, 개마무사 속에서 경기병 십여 기가 맹렬히 질주해오더니 이도종을 노리고 화살을 날렸다.

신성에 지원을 청하러 갔던 모용상이었다.

화살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자, 이도종이 크게 놀라 급히 말머리를 돌렸고, 그 틈에 진형을 갖춘 개마무사들이 퇴각하는 당의 기병을 뒤쫓았다.

“놈들을 짓밟아라!”

북부욕살 위두대형 고연수가 크게 소리쳐 명하니,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개마무사들이 이도종의 기병을 쫓았다.

그리고 그때, 개마무사의 진형 배후에서 또 다른 함성이 울렸다.

“와아아!”

황제 이세민의 명을 받아 개마무사의 배후를 공격하기 위해 대기하던 이세적의 군대가 드디어 움직인 것이다.

“기사하라! 살을 날려라!”

이세적의 기병들이 말을 달리며 화살을 날리니. 이도종의 뒤를 맹렬히 쫓던 개마무사들은 갑작스럽게 배후에서 나타난 적에 크게 당황하였다.

그리고 이 한순간의 공격으로 고구려 기병 일천 기가 허무하게 말에서 떨어졌다.

이에, 북부욕살 위두대형 고연수가 크게 겁을 먹고 소리쳐 명하였다.

“퇴각하라!”

“퇴각이라니? 퇴각하면 안 된다! 퇴각하면 요동성이 무너진다! 맞서 싸워라!”

모용상이 외치며 고연수의 앞을 막았으나, 이미 겁을 먹은 고연수는 모용상을 비켜 내달리며 바삐 소리쳤다.

“함정이다! 적의 매복이 있었다. 어서 신성으로 물러난 후 진형을 갖춰 다시 오자!”

“이… 빌어먹을 자식이…….”

분을 참지 못한 모용상이 주먹을 움켜쥐었으나, 그 역시도 어느새 밀려온 이세적의 기병을 피하기 위해 고연수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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