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전장의 신, 이세민 (4)
공별은 자신의 주위로 올라오는 당 군의 목을 치고는 칼을 휘둘러 성벽에 걸린 밧줄을 급히 잘랐다.
팽팽히 긴장되었던 밧줄이 잘리자, 매달렸던 당 군이 땅에 처박히며 비명을 질렀다.
“북을 울리고 밧줄을 잘라 놈들이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
이때, 공별의 옆에서 올라온 당 군 다섯이 일제히 공별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놈들아! 어디서 감히 날뛰는 게냐!”
황우의 우렁찬 음성에 당군의 발이 순간 땅에 붙었다.
언제 올라왔는지 황우가 공별에게 달려드는 당 군 다섯을 몸으로 밀어 떨구고는 크게 소리쳤다.
“부월수들은 당 군을 밀어내라! 방패병이 앞장서고 창병이 뒤를 따라 적을 대적하라!”
명을 받은 부월수들이 도끼를 휘두르며 성벽에 머리를 내민 적을 찍었다.
그리고 이미 올라온 적은 중장갑을 두른 보군들이 방패로 밀고, 뒤에 선 창병들이 찔러 성벽 아래로 밀어냈다.
“항우!”
간신히 위기를 모면한 공별이 반가워 황우를 불렀다.
그러나 이내 곧 공별의 시야에 황우의 등을 노리고 달려드는 당 군 십여 명이 들어왔다.
“헉! 안 돼!”
공별의 외침에 황우가 뒤를 돌아보던 순간, 공별의 뒤에 선 궁병들이 화살을 먹여 황우에게 달려드는 당 군에게 날렸다.
“으아악!”
강한 힘을 실은 화살이 몸에 박히자, 당 군들이 비명을 지르며 자신도 모르게 휘청이며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나다가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나 성벽 위로 오르는 당 군은 끝이 없었고, 이내 곧 성벽에 바짝 붙은 황우의 몸에 매서운 검이 박혔다.
“크으윽!”
이를 악물며 비명을 참은 황우가 거대한 쇠망치를 휘둘러 후려치니, 가냘픈 당 군의 몸뚱이가 부서지며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결코 올라올 수 없다!”
성벽에 바짝 붙은 황우가 포효하듯 외치며 계속해 올라오는 당 군의 머리를 부수고 강한 힘으로 갈고리를 들어 올려 내던지니, 밧줄에 매달린 당 군들이 모두 땅에 처박혔다.
이에 공별도 검을 굳게 쥐고 성벽에 바짝 붙어 밧줄을 끊으니, 당 군의 비명이 끊이질 않았다.
“밧줄을 끊어라! 북을 올리고 밧줄을 끊어라!”
공별은 목이 터져라 외치며 발을 멈추지 않고 내달려 앞을 막는 당 군의 목을 치고 또 치며 계속해 밧줄을 끊었다.
황우 역시 성벽에 올라온 당 군의 머리를 거침없이 쇠망치로 내려치고 갈고리를 들어 올려 내던지며 분투를 거듭하였다.
그러나, 성벽 위 고구려 군의 수는 적었고, 당 군은 집요하였으니, 성벽 위는 점차 당 군으로 채워지기 시작하였다.
“물러나지 마라! 놈들을 밀어내라!”
황우가 크게 소리쳐 명하며, 성벽 위로 머리를 올린 당 군의 머리를 내리치던 그 순간.
황우의 옆구리에 칼이 박혔다.
“윽!”
신음을 삼키며 황우가 휘청이다가 쇠망치를 성벽 아래로 떨구고 말았다.
“적장을 잡았다!”
당 군의 외침이 울리고, 황우의 옆구리에 칼을 찔러넣은 당 군이 더욱 힘을 주어 황우의 몸으로 칼을 밀어 넣기 시작하였다.
“이놈!”
황우가 분노로 눈을 치켜뜨고는 자신의 옆구리에 박힌 칼날을 왼손으로 쥐어 더 이상 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한 후, 오른손을 휘둘러 당 군의 안면을 후려쳤다.
“으악!”
안면이 함몰된 당 군이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지자, 황우는 옆구리에 박힌 칼을 뽑아 쥐고는 달려드는 당 군의 목을 베고 가슴팍을 베었다.
황우의 옆구리에선 검붉은 피가 흐르고 그가 발을 옮길 때마다 바닥이 피로 물들었다.
“황우! 괜찮은가?”
공별이 달려와 황우를 부축하던 그때, 성문이 열리며 당 군이 비사성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와아아!”
당 군의 함성이 천지를 진동하였고, 이내 곧 성벽 위 고구려 군은 앞뒤로 적을 맞이하게 되었다.
“놈들이… 어느새 성벽을 넘어, 성문마저 열었단 말인가?”
공별이 너무도 허망해 털썩 주저앉았다.
“공별! 어서 일어나게!”
황우가 다친 몸으로 힘을 짜내며 공별을 일으켜 세웠다.
간신히 일어난 공별이 정신을 가다듬으려 눈을 부릅뜨니, 그의 시야에 새까맣게 몰려드는 당 군이 들어왔다.
이미, 저항할 수 있는 고구려 군은 주위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오직 당 군만이 먹이를 노린 이리 떼처럼 밀려들 뿐이었다.
“오너라!”
공별이 검을 고쳐 쥐고 소리치던 그때, 황우가 공별을 껴안고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으아악!”
갑작스럽게 성벽 아래로 떨어지게 된 공별이 비명을 내질렀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감촉이 몸 안에서 일더니, 이내 곧 바닥에 처박힌 몸뚱이 곳곳에서 강한 충격이 척추를 타고 머리끝까지 전해져 왔다.
“으아악!”
비명을 내지르는 공별을 옆구리에 낀 황우가 벌떡 몸을 일으켜 덤벼드는 당 군을 주먹으로 후려치며 무작정 어둠 속으로 내달렸다.
“저놈들을 잡아라!”
장량의 외침이 등 뒤에서 울리고, 당 군의 고함이 공별의 귀청을 때렸다.
그러나, 공별을 옆구리에 낀 황우는 거친 호흡을 내뱉으면서도 쉬지 않고 내달렸다.
당 군의 추격은 끈질겼고, 황우의 등 뒤로 태양이 떠올라 대지를 비췄다.
그리고 마침내, 비사성을 빙돌아 도망친 황우의 눈앞에 끝없는 바다가 들어왔다.
“공별, 더는 갈 곳이 없네. 우리 앞은 절벽일세.”
황우의 담담한 음성에 공별이 미소 지었다.
“그럼 또 나를 안고 뛰어 내려보시게 황우.”
등 뒤에서 들려오는 당 군의 외침이 가까워지자, 황우도 결심한 듯 입술을 깨물고는 절벽 너머 바다를 바라보며 내달렸다.
“간다!”
황우의 외침이 바다 위에 울려 퍼지고, 어느새 허공에 몸이 뜬 황우의 발밑에 바다가 펼쳐졌다.
그리고 마치 바다가 황우의 다리를 잡아 끌어당기듯 황우의 커다란 몸이 검푸른 바닷물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공별은 이 순간에도 황우가 옆구리에 끼고 있었기에, 고개만 간신히 돌려 자신들을 향해 화살을 날리는 당 군을 향해 소리쳐 조롱하였다.
“어디 용궁까지 쫓아와 보거라! 하하하!”
그러나 이내 곧 공별의 음성은 바닷물에 잠겨 끊기고 말았다.
* * *
천혜의 요새인 고구려 수군 기지 비사성에도 당 군의 깃발이 내걸렸다.
비사성의 함락은 바닷길이 열렸음을 의미하였다.
또한, 건안성과 안시성만 무력화되면 고구려 원정에 나선 당 군에게 지속적으로 보급 물자를 나를 수 있음을 의미하였다.
승전을 거둔 장량은 군사들에게 명하여 비사성 안으로 물자를 나르게 하였다.
또한 해상에선 천여 척의 군선이 바다를 지키며 비사성에서 출병한 고구려 함대를 요격하기 위해 진형을 갖추었다.
“고구려 수군은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놈들을 이 비사성 앞에서 수장시키고 말리라.”
기세가 오를 대로 오른 장량이 이처럼 호언장담하며 급히 전령을 황제 이세민에게 보내었다.
이때, 황제 이세민은 친정군과 함께 요택에 갇혀 있었다.
봄을 맞이한 요택은 얼었던 땅이 녹아 늪지대로 변해 있었다.
이백여 리가 넘는 늪지대가 요하 앞까지 펼쳐져 있으니, 황제 이세민은 말도 사람도 지날 수 없는 드넓은 요택을 수레 위에 앉아 바라보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세적과 이도종, 장검 등이 얼었던 이 요택을 먼저 건넜다는 것이다. 아직 승전을 거듭하고 있으나, 저들이 고립되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
혼잣말을 중얼거린 황제 이세민이 엽입덕을 불러 명하였다.
“너는 무엇이냐?”
황제 이세민의 물음에 엽입덕이 떨며 답하였다.
“행군을 책임지는 장작대장이옵니다.”
“그러하냐?”
“송구하오나, 그렇사옵니다.”
엽입덕이 몸을 부르르 떨며 답하니, 황제 이세민이 엄히 명하였다.
“허면, 너는 장작대장으로 맡은 바 책무를 다하라. 산을 허물어서라도 당장 이 요택을 메꿔 대군이 지날 수 있게 하라!”
지엄한 황제의 명에 엽입덕이 머리를 조아려 답하고는 끝없이 펼쳐진 요택을 응시하였다.
그리고는 이내 곧 부장들을 불러 지시를 내렸다.
“당장 군사들을 이끌고 이 요택을 벗어나 마른 흙을 퍼오너라!”
이에, 부장들은 십만의 군사에게 각기 흙을 퍼담아 짊어지고 올 자루를 준비시키고는 발이 푹푹 빠지는 요택을 건너기 시작하였다.
엽입덕이 간신히 요택을 벗어나니, 언제 왔는지 영주에서 온 수레들이 광활한 대지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놀랍게도 수레 위엔 마른 흙이 쌓여 있었다.
이에 놀란 엽입덕이 물었다.
“어찌 된 일이냐?”
이에, 영주에서 수레를 끌고 온 군사들이 답하였다.
“이미 황제께서 준비하게 한 흙이옵니다. 영주 총관께서 소인들에게 명하여 쉬지 말고 나르라 하였습니다. 어서 흙을 가져가십시오. 저희는 수레가 비워지면 다시 채우겠습니다.”
이에, 엽입덕은 황제 이세민의 혜안에 탄복하며 바로 군사들에게 명하였다.
“황제 폐하께서 내린 성은이다! 무엇 하느냐? 당장 흙을 자루에 담아 나르거라! 한시도 지체할 수 없다!”
십만의 군사들이 자루에 흙을 담아 나르고, 비워진 수레는 다시 흙을 채워 대기하기를 반복하니, 황제 이세민이 이끈 친정군의 앞은 점차 마른 땅으로 변하였다.
“조금도 지체할 수 없다. 서두르거라!”
황제 이세민이 엄히 진군을 명하니, 친정군이 나아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엽입덕이 이끈 군사들은 이들 친정군이 멈추지 않도록 쉬지 않고 흙을 요택에 퍼부어 마른 땅을 만들었다.
마침내, 이백여 리가 넘던 요택의 늪지대에 길이 열리고 황제 이세민의 친정군은 요하 앞까지 무사히 진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요하 앞에서 장량이 보낸 전령이 황제 이세민에게 아뢰었다.
“고구려의 수군기지 비사성을 함락시켰사오며, 고구려의 함대가 귀환하기를 기다려 수장시킬 계획이옵니다.”
이에, 이세민이 껄껄 웃으며 말하였다.
“하하하. 너 같으면, 고구려 수군이 비사성으로 귀환할 것 같으냐?”
이에, 전령이 답하지 못하고 머리를 조아리니, 황제 이세민이 웃으며 명하였다.
“장량에게 애썼다고 전하라! 그리고 장랑에게 이렇게 이르거라! 고구려 수군은 결코 비사성으로 귀환하지 않을 터이니, 장량 너는 바닷길을 단단히 지키며 해상 보급로가 끊기지 않도록 만반의 태세를 갖추도록 하라!”
이에, 전령이 절을 올리고 몸을 일으켜 자리를 벗어나려 하였다.
“잠깐!”
이때 황제 이세민이 전령에게 거듭 명하였다.
“결코 비사성을 비워선 안 된다. 고구려 수군을 찾아다니려 애써도 안 된다. 오직 바닷길만 지켜 해상 보급로만 화복하도록 하라!”
이에, 전령이 머리를 조아려 명을 받고는 황급히 비사성으로 향하였다.
“전장의 모든 것은 이미 나의 머릿속에 있다. 이 전장에서 일어날 모든 일들은 나의 예측 범위 안에 있고, 내가 예견하지 못한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 전쟁, 나의 승리다.”
강한 자신감에 찬 황제 이세민의 이 중얼거림처럼, 전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이미 그가 예견한 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당 군은 장수부터 일개 군졸까지 황제 이세민이 세운 계책이 들어맞을 때마다 탄복하며 더욱 기세를 올렸다.
이윽고, 하늘을 찌를 듯한 사기를 지닌 황제 이세민의 친정군도 드디어 요하를 넘으며, 요동 최대의 요충지 요동성으로 진격하였다.
황제 이세민이 친히 군을 이끌고 진격해온다는 소식을 접한 요동성 성주 고영의는 바로 신성 성주 고정의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모용상이 기병 십여 기만 이끌고 신성으로 말을 몰았고, 모용설이 남아 고영의를 도왔다.
“듣기로, 그대는 타인의 죽음을 본다고 하였소?”
“송구하오나, 그저 헛것을 보는 것뿐입니다.”
모용설이 다소곳이 답하니, 고영의가 껄껄 웃었다.
“하하하! 헛것이라? 허면 나는 그대가 보는 헛것 속에서 어떤 몰골이오?”
이에, 모용설이 고영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주위 군사들과 백성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어찌 말이 없소?”
고영의가 재차 물으니, 모용설이 한숨을 내쉬며 답하였다.
“송구하오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소? 그대의 죽음 속에 아무것도 없다니 그나마 다행이구려. 하하하.”
고영의가 시원히 웃으며 성벽을 둘러보기 위해 발을 옮겼다.
이에, 홀로 남은 모용설이 또다시 고영의와 주위 군사는 물론 백성들까지 하나하나 세심히 바라보더니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아마도 하고 싶은 말은 많으나,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듯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