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286화 (286/328)

286화 전장의 신, 이세민 (3)

이세적의 서신을 받은 황제 이세민이 고개를 갸웃하며 지도를 응시하였다.

“신성은 산 위에 세운 성으로 공략이 용이하지 않고, 군세를 파악하기도 용이하지 않다. 이세적의 말대로 고정의가 오만의 개마무사를 이끌고 왔었다면, 필경 신성의 모든 전력은 아닐 것이다. 연개소문은 신성에 군사를 숨겨두고 반격의 시기를 노리고 있음이 분명하다.”

생각을 정리한 황제 이세민이 명하였다.

“개모성을 개주(蓋州)로 개칭하니, 너희는 이를 받아 개모성의 성벽과 성문을 허물고 적이 이용하지 못하게 한 후, 속히 이동하라!”

명을 받은 이세적과 이도종은 즉시 개모성의 성문을 모두 부수고, 주요 지점의 성벽을 허문 후 다음 목표 지점으로 신속히 이동하였다.

이에, 요동 일대의 고구려 성들은 모두 당 군의 빠른 기동력과 공성 능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고구려의 해군기지 비사성 역시 당 군의 기세에 크게 놀라 대책 회의가 마련되었다.

비사성의 군사 예곤이 탁자 위에 펼쳐진 지도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적은 우리가 이전에 상대하였던 그 어느 군대보다 기동력이 빠르고 각종 병과가 더불어 호응하니, 공성전과 야전 모두 약점 없이 강합니다.”

이에, 공별이 심드렁이 물었다.

“강한 것은 알고, 대책이 뭐냐니까요?”

강이식의 부장 공별과 황우는 연무장에서 살육이 벌어지던 날, 평양성 내에 없었다.

이들은 강이식에 의해 비사성에 임시로 배속되었었고, 강이식이 참변을 당하였다는 소리에 즉시 군을 이끌고 평양성으로 향하여 연개소문의 목을 베고자 하였다.

그러나, 평양성에서 돌아온 고정의와 고돌발이 비사성을 방문하여 은밀히 사정을 설명하니,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비사성에 머물며 당과 맞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놈! 어디서 군사께 불학무식한 태를 내느냐?”

공별의 아비 서해가 엄히 꾸짖으니, 예곤이 다시 말을 이었다.

“당의 장량이 수군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고 있다 합니다. 이들의 상륙 지점은 크게 두 곳으로 예상 가능합니다.”

“아니, 그러니까 그게 어디냐고요?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이야기 좀 하시자고요! 바빠 죽겠는데, 이렇게 한가로이 뜸 들이면 안 되시죠.”

이에, 서해가 공별의 머리를 쥐어박고는 예곤에게 머리 숙이니, 예곤이 두 부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본론입니다. 본론… 당의 수군이 무엇을 목적으로 하느냐에 따라… 상륙지가 예상됩니다. 원정군에게 보급 전달을 목적으로 한다면, 우리 비사성의 북쪽… 아마도 건안성 인근이 될 듯하며… 평양성 직공이 목적이면 남으로 방향을 틀어 폐수로 진입할 것입니다.”

“평양성 직공? 그렇다면 큰일 아니오?”

비사성 성주 고광이 놀라 물으니, 예곤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배를 띄워 당의 수군을 찾아야 하지 않습니까?”

공별도 물으니, 아비 서해가 한숨을 내쉬었다.

“봄이 오며, 근래 안개가 짙어졌어. 쉬이 찾기는 어려울 게야. 당의 수군이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지 파악하여 이동하는 게 좋아.”

비사성의 수군이 해상에 나가 바다를 헤매는 동안, 당의 수군이 먼저 상륙한다면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이에, 공별도 한숨을 내쉬며 지도만 바라보니, 침묵하던 황우가 예곤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군사께선 어디를 예상하십니까?”

이에, 예곤이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곳입니다.”

예곤이 가리킨 곳은 비사성의 남서쪽이었다.

“아니, 여기는 군사가 이야기한 두 지점과 다르지 않소?”

고광이 당황해 물으니, 예곤이 한숨을 내쉬며 말하였다.

“상식적으로는 보급 물자를 지닌 수군이 상륙할 지점은 아닙니다. 원정군에게 보급 물자를 전달하기도 어렵고, 우리 비사성 군에게 발각되어 요격당하기도 쉽지요.”

“헌데, 군사께선 왜 이곳을 지목하신 거요?”

공별이 의아해 바로 물었다.

이에, 예곤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목적이 우리 비사성이라면, 이곳이 유일한 상륙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예곤이 가리킨 지점은 비사성의 유일한 육상 진입로인 서문이 있는 방향이었다.

“놈들이 우리를 노린다고? 원정군에게 전달할 보급을 지닌 수군이 우리를 공격하다가 오히려 보급 물자를 털리면 어쩌려고 그런 계책을 세우겠습니까?”

오랜 세월 바다에서 생을 보낸 서해가 이렇듯 물으니, 예곤이 난처한 듯 어깨를 으쓱하며 답하였다.

“필경 상식적인 예상 상륙 지점은 건안성 인근이 가장 유력하며, 다음은 폐수입니다. 허나, 저는 이 지점이 계속 마음에 걸립니다.”

이에, 공별이 지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건안성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적이 만일 안시성과 건안성을 공격한다면, 당의 수군은 반드시 건안성 인근에 상륙할 것입니다. 안전한 상륙 지점을 두고 위험을 감수하면서 우리 비사성의 남쪽으로 상륙할 이유가 없습니다.”

“어찌 이유가 없다는 게냐?”

아비 서해의 물음에 공별이 머뭇거림 없이 바로 답하였다.

“이 두 성! 건안성과 안시성이 버티고 있는 한, 비사성을 함락한들 원정군에게 보급을 전할 보급로가 마련되지 않습니다.”

이에, 예곤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상식적이고 납득할 수 있는 말입니다. 허나, 저는 왠지 이곳이 여전히 마음에 걸립니다. 그리고, 당의 황제 이세민은 건안성은 공략하겠지만, 안시성은 공격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찌 그렇소?”

비사성 성주 고광이 물으니, 예곤이 한숨을 쉬며 답하였다.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안시성은 현재 고립무의의 상태로 요동의 우리 고구려 각 성들과 단교한 상태입니다. 하여, 황제 이세민은 안시성을 포섭할 마음마저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아니, 어찌 안시성을? 그곳엔 온달님이 계신데! 황제가 미친 겐가? 어찌 온달님이 고구려를 배신할 것이라 여기는 겐가?”

공별이 크게 화를 내며 말하였으나, 예곤은 침착하였다.

“황제는 온달님이 그대들처럼 대막리지를 곡해하고 있을 것이라 여기는 게지요.”

예곤의 말처럼 온달은 여전히 태왕과 강이식을 개소문이 시해하였다고 여기며 극히 증오하고 있었다.

허나, 외부의 강적을 맞아 개소문과 함게 싸울지언정, 고구려를 배신할 마음을 온달이 지닐 리 없음을 황제 이세민은 모르고 있었다.

“온달님께 사람을 보내어 오해를 풀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황우가 고광을 바라보며 물으니, 예곤이 고광을 대신하여 답하였다.

“성문을 굳게 닫고, 요동 일대의 성에서 온 전령은 그 누구도 안으로 들이지 않기에, 비밀리 사정을 이해시킬 수도 없습니다.”

이에, 모두가 한숨을 내쉬니 예곤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온달 장군이라면, 외부의 강적을 몰아낸 후, 대막리지와 일전을 벌일 것입니다. 우린 그렇게 믿도록 하시지요.”

“그렇게만 된다면 그나마 다행인데…….”

공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니, 예곤이 다시 말을 이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저는 당의 수군이 상륙할 지점으로 이곳을 예상하오나, 백분 장담하지는 못하겠습니다. 하여!”

“하여?”

비사성 성주 고광이 물으니, 예곤이 지도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건안성 인근으로 당의 수군이 상륙할 수 있음을 감안하여, 우리 비사성의 수군을 이동 배치하고, 비사성 서남 방면으로 적의 상륙 또한 방비함이 옳을 듯합니다.”

예곤의 계책을 채택할지 고광이 망설이던 그때, 건안성의 전령이 급히 안으로 뛰어 들어오며 아뢰었다.

“고돌발 성주의 전언입니다! 적들이 건안성으로 몰려오고 있으니, 비사성도 대비하라십니다!”

이에, 공별이 지도를 바라보다가 예곤에게 말하였다.

“적이 수군의 상륙지를 안전히 확보하기 위해 건안성을 공략하는 듯합니다. 적의 상륙지는 필경! 건안성 인근이 분명합니다.”

예곤도 수심 가득한 표정으로 지도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 예상이 빗나가기만 바라겠습니다. 당장 수군을 건안성 인근으로 배치하도록 하시지요. 성주, 출병이옵니다.”

“알겠소. 나와 그대가 서해와 함께 건안성 인근으로 수군을 이끌고 나가 당의 수군을 맞이합시다. 서해 즉시 준비하시게.”

고광의 명에 서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도 가겠습니다.”

서해를 따라 공별도 자리에서 일어나 청하니, 고광이 머리를 저었다.

“그대들은 혹시 모를 당의 공격에 대비하여 남아 비사성을 지키시게.”

이에, 고광이 수상전에 익숙하지 않은 공별과 황우를 남겨 비사성을 지키게 하였다.

공별이 마지못해 명을 받으니, 노비 출신의 장수가 성주 대행을 맡게 된 셈이었다.

* * *

영주 도독 장검은 이민족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요하 남서쪽을 도하한 후, 빠르게 건안성으로 진격하였다.

거란과 돌궐은 물론 철륵부의 전사들마저 합류한 장검의 군대 속에 황제 이세민이 극히 신뢰하는 장수 계필하력도 속해 있었다.

기마 민족 위주의 이민족 군사로 구성한 탓에 당의 다른 부대와 달리 장검의 부대는 기병 일색이었다.

이는 요하를 지키며 도하를 막을 고구려 군을 겨냥한 황제 이세민의 전술이었다.

장검의 군대는 기병 특유의 속공으로 요하를 돌아 건넌 후, 지키고 있던 고구려 군을 배후에서 급습하였다.

이에 맞선 고구려 군은 기병 일색의 이민족 군대의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크게 패하여 건안성으로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뭐라? 적이 기병 일색의 군대라고?”

보고를 접한 건안성 성주 고돌발이 크게 놀라 급히 명하였다.

“이는 필경! 당의 수군이 상륙할 지점을 확보하기 위한 계책이다! 이를 막지 못하면 상륙 지점을 확보한 당의 수군이 원정군에게 무사히 물자를 나를 것이다. 즉시 출병 준비하라!”

야전에서 적을 요격하여 물리치지 못할 시, 보급로를 확보한 당의 원정군이 요동 일대를 여유롭게 공격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였으니, 고돌발은 마음이 무척 급하였다.

즉시, 출병 준비가 진행되었고, 말에 오른 고돌발이 앞장서 성문을 나섰다.

“적의 수가 몇이든, 당장 몰아내어 당의 수군이 상륙하지 못하게 하리라! 서둘러라!”

이와 동시에, 비사성에도 전령을 보내 상황을 알리니, 비사성 성주 고광도 예곤과 함께 건안성 인근 해상으로 수군을 이끌고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시점, 당의 수군을 이끈 장량은 천여 척의 군선으로 비사성 서남 방면에 당도하고 있었다.

“사만의 상륙부대다! 밤을 틈타 상륙하여, 즉시 비사성을 공략한다. 노를 저어라!”

어느새 해안가에 당도한 당의 군선에서 상륙 부대가 뛰어내리기 시작하였고, 밤의 어둠이 장막처럼 내려 이들의 모습을 가려주고 있었다.

상륙 지점에서 비사성까지의 거리는 반나절 남짓이었으나, 체력이 뛰어난 군사들로 구성된 상륙부대는 쉬지 않고 달려 아직 어둠이 깔린 새벽 무렵 비사성 서문 방면에 당도할 수 있었다.

“어둠은, 동이 트기 전이 가장 어둡고, 경계서는 군사들도 가장 지칠 때다.”

어둠 속의 비사성을 바라보던 장량이 빙그레 웃으며 중얼거리고는 손을 들어 신호를 보내었다.

이에, 호각도 북도 울리지 않은 채, 공격 명령이 군사들에게 수신호로 전달되더니, 소리를 죽인 당 군이 비사성으로 새까맣게 달려가기 시작하였다.

휙!

갈고리를 단 밧줄이 일제히 성벽에 걸리고, 군사들이 빠르게 성벽을 오르기 시작하니, 그제야 성벽 위 고구려 군사들이 적의 공격을 깨닫고 호각을 불었다.

삐이익!

이어서 북이 울리고 횃불이 환하게 밝혀지더니, 군사들이 성벽 아래로 횃불을 던져 적의 군세를 살폈다.

사만에 달하는 당 군이 새까맣게 성벽에 붙어 있었고, 갈고리를 끊기도 전에 이미 기어오른 당 군이 성벽 위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당장 갈고리를 끊고 성벽 아래로 기름을 부어라!”

급히 전갈을 받고 달려온 공별이 소리쳐 명하였으나, 이미 성벽 위는 혼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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