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전장의 신, 이세민 (2)
수의 백만 대군을 세 차례나 막아냈던 요동의 각성들은 이번 당의 공격도 반드시 막아내리란 자신감을 지니고 있었다.
“제아무리 수가 많다 한들 요동의 성들은 높고 단단하며, 군사들과 백성들은 겨울이 올 때까지 버텨낼 용기를 지니고 있다.”
비사성 성주 고광의 이 말처럼 요동의 장수들은 물론, 군사들과 백성들 모두 어느 성 하나도 내어주지 않을 자신감을 지니고 있었다.
팔십만에 이르는 대군이 요동으로 향하고 있으니 두려움은 컸으나, 강한 용기로 두려움을 누르고 적과 맞설 준비를 갖춘 것이다.
허나, 이를 황제 이세민이 모를 리 없었다.
출병에 앞서 황제 이세민은 장수들에게 엄히 말하였다.
“위증이 말하길, 요동의 성들은 오만하며 자부심과 긍지가 대단하다 하였다. 이는 저들이 그간의 전쟁 중 빼앗긴 성이 없기 때문이다. 북주 잔당과 돌궐의 연합군은 요동벌에서 헤매다 요하로 쫓겨나 패하였고. 수의 황제 양견과 양광은 네 차례나 공격하였으나, 변변히 빼앗은 성이 없었다.”
자신이 직접 세운 침공로가 그려진 지도를 가리키며 황제 이세민이 말을 이었다.
“이로 인하여 저들의 자부심과 긍지는 드높아지고, 꺾이지 않는 기개 변하였으며, 각 성의 방비 또한 충실히 하고 있다. 허나! 저들의 약점은 바로 이 무적의 방어에 있느니라.”
황제 이세민의 단호한 어조에 모든 장수가 침을 꿀꺽 삼켰다.
“단 한 차례도 빼앗기지 않았던 요동의 성이 단 한 곳이라도 무너지기 시작하는 순간! 그간의 용기와 기개 또한 한순간에 무너져 우리에 대한 두려움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황제 이세민이 현도성을 가리켰다.
“보아라! 나는 백이십여 난을 평정한 황제 이세민이니라! 내가 이 난들을 평정할 당시, 강한 적은 뒤로 미루고 약한 적부터 누르며 군의 사기를 드높였노라!”
황제 이세민이 현도성 공략을 맡은 이세적을 바라보며 묵직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우리의 사기가 높아지면 적의 사기는 꺾이니, 너희의 책무가 매우 중하노라! 어리석은 수의 황제 양광과 달리 나는 요동성이 아닌 주변 작은 성을 먼저 공략할 것이고, 주변 성들을 함락할수록 요동성의 사기는 나락에 처하고 말 것이다.”
현도성을 가리키던 황제 이세민의 손가락이 건안성과 개모성, 신성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요동성에서 손이 멈추니 모든 장수가 이세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요동성은 내가 직접 나서겠노라!”
이미 그 어느 장수보다 많은 전장을 누볐고, 승리한 황제 이세민이었기에, 그보다 전장을 잘 아는 이는 없었다.
하여, 국정을 논할 때화 달리 전장에선 책사들과 장수들이 오히려 그에게 의견을 구할 만큼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었다.
하여, 그가 세운 이번 고구려 침공 계획을 의심하는 장수는 아무도 없었다.
“공성전에 앞서 적의 보급로를 끊고 공격은 야습을! 전장에선 육화진을 펼쳐 우리의 병종이 서로 호응하도록 최대한 활용할지어다. 우리의 수가 많다 자만하지 말고, 눈앞의 적을 최대한 기만할 수 있도록 능동적으로 움직여라!”
이세민이 언급한 육화진은 오랜 세월 전해 내려오던 진법으로 고구려의 을지문덕도 북주의 잔당과 돌궐이 연합하여 요동을 침공하였을 때, 사용하였던 진법이었다.
황제 이세민은 이 육화진을 당 군의 각 병과에 맞게 더욱 다듬어 각 병종들이 서로 호응하며 제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 육화진으로 백이십여 난을 평정하고, 고창국을 정벌하였으며 동돌궐을 제압하여 무릎 꿇렸으니, 모든 장수가 무한 신뢰하여 따름은 지극히 당연하였다.
* * *
고구려와 당의 전쟁은 당의 총사령관이자 선봉인 이세적이 이끈 요동도행군이 열었다.
이세적은 본래 서 씨로 그의 이름은 서세적이었다.
선황제 이연은 이밀과 함께 당에 귀순한 그에게 국성을 내리며 은혜를 베풀었고, 모두가 그를 이세적이라 부르며 존중하였다.
이후, 이세적은 이세민을 따라 여러 난을 평정하고, 동돌궐과 설연타를 공격하여 무릎 꿇리는 데 일조하며 황제 이세민이 아끼는 무장이 되었다.
은혜를 입고 신뢰를 받으면 충심으로 보답하는 이세적의 성품상, 황제 이세민과 같은 세 자를 사용할 수 없다며 자신의 이름을 이적이라 변경까지 하였다.
허나, 황제 이세민은 그를 아끼어 자신과 같은 세 자 사용을 허락하는 의미로 여전히 이세적이라 불렀다.
이를 이세적은 은혜를 입었다 여겨 더욱 충심을 다하니, 이번 고구려 침공에서 황제 이세민이 그를 총사령관 겸 선봉에 세운 것이다.
“은혜를 입으면, 변심하지 않는 장수. 허나, 은혜를 입지 않으면 결코 성심을 다해 따르지 않는 장수. 이세적에게 은혜란 재물과 땅이 아닌 마음을 주는 것이다.”
황제 이세민은 이처럼 이세적을 평하였고, 훗날 그의 아들에게도 이세적을 중하게 사용하기 전, 반드시 은혜부터 베풀라는 당부를 남기기도 하였다.
“우리는 황제께서 믿고 맡기신 선봉이다! 결코 실수가 있어선 안 된다. 모두 명심하고 또 명심하라!”
충성스런 장수 이세적이 요하를 앞두고 부장들에게 엄히 명하였다.
“보아라! 우리는 회원진을 향할 것처럼 고구려 군을 속인 후, 이보다 더 북쪽인 통정진으로 요하를 넘을 것이다. 회원진에서 우리를 맞이하려던 고구려 군의 배후를 친 후, 현도성까지 밀고 들어가 야습으로 성을 취할 것이다.”
이세적이 세운 계획은 황제 이세민의 전술을 토대로 하고 있었으니, 황제 이세민에 대한 그의 신뢰를 짐작할 수 있었다.
빠르게 진격하여 당장이라도 회원진에 당도할 것 같던 이세적의 군대가 샛길로 방향을 틀어 크게 돌아 통정진으로 요하를 넘으니, 당 군의 도하를 막기 위해 대비하던 고구려 군이 크게 놀라 당황하였다.
이에, 이세적은 질풍 같은 속도로 고구려 군의 배후를 급습하여 대승을 거두고는 밤을 틈타 현도성을 급습하였다.
신속하면서도 공격로를 예측할 수 없는 이세적의 기동력에 현도성은 너무도 쉽게 함락되었다.
이에 요동의 각 성들이 놀라 급히 문을 닫아걸며 수성에만 전념하였다.
“황제께서 원하신 첫 승이다. 성이 함락되기 시작하였으니 고구려 놈들의 오만한 자부심도 봄날 아지랑이처럼 사그라들게 될 것이다.”
이세적의 이 말처럼, 현도성 함락은 고구려 군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현도성은 비록 작은 성이었으나, 쉽게 함락되지 않는 성이란 나름의 자부심을 지닌, 고구려 최선방을 지키는 성이었다.
이에, 고구려 군은 자신들이 지키는 성도 어느 한순간 함락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지니게 되었고, 황제 이세민은 이를 백분 활용하였다.
“고구려 놈들에게, 난공불락의 성은 없다는 인식을 갖게 하라! 더 빠르게 기동하여 요동의 작은 성들을 취하라!”
황제의 명은 신속히 각 군에게 전달되었고, 고구려의 성을 노린 당 군이 요하를 넘기 시작하였다.
* * *
“신성은 요동은 물론, 고구려 제일의 요충지다. 왕의 사냥터가 있는 곳이며, 이를 지키는 장수는 항상 왕의 신망을 받는 자였다. 지금은 연개소문이 가장 믿는 이가 이곳을 지키고 있음이 당연할 것이다.”
신성 공략에 앞서 황제 이세민은 부대총관 이도종에게 이렇듯 당부하였다.
“하여! 신성 공격은 요동성 공략보다 결코 수월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공략하는 척 강하게 압박한 후, 개모성을 함락하라.”
개모성은 작은 성이었으나, 신성과 인근 성의 보급 물자를 나를 수 있는 교통의 요충지에 자리한 성이었다.
이에 이도종이 빠르게 신성으로 향하여 압박을 가하였다.
“과연, 황제께서 말씀하신 대로 신성 공략은 쉽지 않겠구나.”
신성을 올려다보며 이도종이 이렇듯 말하니 절충도위 조삼랑이 나서 말하였다.
“소장이 성문 앞으로 다가가 도발하며 적의 군세를 살피겠나이다.”
이에, 이도종이 흔쾌히 승낙하였다.
“장군이라면 내 믿어 의심치 않소이다. 다만, 적의 활이 무섭다 하니, 부디 조심하시오.”
조삼랑이 머리 숙여 명을 받은 후, 고작 기병 십여 기만 대동한 채 신성 앞으로 내달렸다.
“이곳의 성주가 누구더냐? 당장 성문을 열고, 나와 백 합만 겨뤄보자!”
성문 앞까지 말을 몰아 다가선 조삼랑이 이처럼 말하니, 성벽 위 고구려 군사들이 기가 막혀 바라만 보았다.
“사정거리에 들었는데, 살이나 날려볼까?”
“떼로 몰려와 놓고는 고작 열 명이 성문을 열라 하니, 이거야 원. 확 그냥… 화살 날려?”
조삼랑을 겨누며 군사들이 중얼거리던 그때, 신성 성주이자 막리지 고정의가 성벽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내 나이가 예순이 넘었다. 은퇴할 나이에 손주 뻘인 너와 단기접전을 벌일 이유가 있겠느냐? 거리를 두고 물러나면 네놈 목은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할 게냐? 그곳에서 고슴도치가 되고 싶으냐?”
고정의의 조롱 섞인 말에 조삼랑이 무안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니, 성벽 위 고구려 군이 일제히 활을 겨누며 소리쳤다.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어서 물러나라!”
“이놈아! 열 명만 오지 말고, 더 데리고 오너라!”
“우리 성주님이 어찌 네놈 같은 애송이와 검을 겨누겠느냐? 버르장머리 없는 못 배워 쳐먹은 놈아! 이 호랑말코 놈아!”
고구려 군의 야유에 조삼랑이 물러나니, 고정의가 이도종의 군세를 살피며 의아해 고개를 갸웃하였다.
“대막리지에게서 온 서신엔 분명, 이도종의 군세는 육만에 달한다고 하였는데… 어찌 수천에 불과하단 말인가?”
단단히 준비하며 당의 대군을 신성에 묶어둘 생각이었던 고정의였기에,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도종은 고정의가 의심하지 못하도록 삼천의 군사로 거칠게 공세를 퍼부었고, 이미 대비가 철저한 신성은 이를 십여 일간 무난히 막아내었다.
그리고 마침내 십 일이 지나고, 이도종이 미리 배치한 군사들이 신성에 보급을 전하는 개모성으로 밀려들기 시작하였다.
이에 앞서 연개소문 역시 당 군의 개모성 공격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가시성 성주 고창에게 서신으로 명을 내린 바 있었다.
[만일 적이 개모성을 공격하면, 가시성에서 지원하기 바라오.
적의 보급로를 끊는 것만으로도 개모성에 큰 도움이 될 것이고, 이후는 신성이 개모성을 구원할 것이오.]
고창은 개모성이 공격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곧바로 군사 칠백을 이끌고 당 군의 보급로를 끊었다.
또한 개모성 성주 고원국 역시 미리 방비를 철저히 하였기에, 이도종의 육만 군사를 막아내며 보급이 끊긴 적의 뒤를 신성의 고정의가 치기만 기다렸다.
밤마다 개모성의 공방은 치열하였고, 이도종의 부장 강확이 활에 맞아 즉사하니, 이내 곧 당 군의 사기가 급락하였다.
“이제 곧 신성에서 지원군이 올 것이다.”
개모성 성주 고원국은 기세를 올리며 군사들을 독려하였고, 개모성의 군사들과 백성들은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황제 이세민은 결코 만만한 전략가가 아니었다.
“현도성의 이세적을 이곳으로 옮겨라! 신성의 고정의보다 빨라야 한다.”
장기판의 말을 옮기듯 지도 위에 이세적의 군대를 개모성 앞으로 옮기며 황제 이세민이 명하였다.
이에, 명을 받은 이세적이 신속히 군사들을 몰아 개모성으로 향하였다.
밤이 되자, 신성의 지원군을 기다리던 개모성을 이도종의 군사 육만과 이세적의 군사 육만이 야습을 강행하였다.
당 군의 화공으로 밤새 개모성은 물에 탔으며, 새벽 무렵 성을 넘은 돌격대에 의해 마침내 개모성의 성문이 열리고 말았다.
이에, 십이만의 당 군이 개모성 안으로 밀려들며 학살을 벌이니, 개모성 내의 군사와 백성 모두가 명을 달리하였다.
이만 호가 넘던 개모성은 일시 모든 백성이 사라졌고, 당 군은 비축된 양곡 십만 석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날이 밝아 당도한 신성의 고정의는 개모성 성벽 위에 펄럭이는 당 군의 깃발에 놀라 급히 말을 몰아 돌아가야 했다.
이때, 이세적은 고정의가 이끌고 온 군세를 눈여겨보고는 급히 황제 이세민에게 전령을 보내었다.
[폐하, 신성의 고정의가 개모성을 구원하기 위해 왔다가 돌아갔사온데, 그 수가 오만에 달하였고 모두 개마무사였나이다.
신성 내에는 필경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수의 개마무사가 준비되어 있는 듯하오니, 주의하고 또 주의해야 할 것이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