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284화 (284/328)

284화 전장의 신, 이세민 (1)

북에서는 돌궐과 거란이 군을 움직여 당 황제 이세민의 원정을 돕고, 남에서는 신라가 북진하니, 일대의 모든 세력이 군을 움직이는 형국이었다.

당 황제 이세민은 어려서부터 자신을 가르치고 충심을 다한 교두 황무문을 행군근위장으로 명하여 원정에서도 자신을 지키게 했다.

또한 고구려를 도울 단 하나의 세력, 백제에 진대덕을 밀사로 보내었다.

은밀하면서도 빠르게 바다를 건넌 진대덕이 백제왕 의자를 독대해 황제 이세민의 밀서를 올렸다.

[의자는 듣거라.

내가 어여삐 여겨 책봉한 고구려왕 건무를 대역무도한 연개소문이 무참히 살해하고 그 시신마저 욕을 보였다.

이에, 나는 의를 지키고 정도를 걷고자, 연개소문을 벌하기 위해 친히 대군을 일으켜 원정에 나서고자 한다.

강대하던 돌궐과 고창국마저 내게 무릎을 꿇고 힘을 보태며, 거란 역시 의를 따르고자 군을 일으켜 나섰다.

이에, 원정군 백만에 보급부대 이십만이 패배를 모르는 내게 있으니, 제아무리 고구려가 강한들 어찌 감당하겠는가.

또한 신라 역시 정예 상주군을 이끌고 출병하였으니, 이미 전쟁의 승패는 불을 보듯 알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와 너희 백제는 고작 한수를 사이에 두고 경계를 이루고 있다 들었다.

한수가 제아무리 넓다 한들, 장강만 하겠는가.

나의 군대가 파죽지세로 고구려를 무너뜨린다면 너희 백제와 나의 대군이 강을 마주 보게 될 것이다.

이 밀서가 의자 너에 대한 나의 배려임을 감사히 생각하라.

너는 네 나라의 운명을 생각하여 경거망동하지 말라.

감히 고구려의 연개소문을 돕고자 한다면, 나의 군대는 고구려를 멸한 뒤, 한수를 넘어 백제로 향하게 될 것이다.

듣거라.

의자 네가 나에 대한 충심을 보인다면, 나는 너를 백제왕에 책봉할 것이니, 이는 너희 백제가 국가로서 지속될 수 있음을 의미하노라.

네가 나를 따를 따르고자 한다면, 연개소문에게 힘을 보태자 주장한 부여성충의 목을 베어 효시해 의지를 보이거라.

하면, 내 너를 어여삐 여겨, 백제왕으로 책봉하고 신라의 여자 왕에게 감히 너와 맞서지 말라 명을 내리겠노라.]

밀서를 읽은 백제왕 의자가 물끄러미 진대덕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대는 황제의 명으로 고구려에도 사신으로 갔었다지?”

“그렇습니다. 전하.”

“그래, 고구려에서 지도를 그렸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전하.”

“어디의 지도를 그려 황제께 바쳤는가?”

“한수 일대의 지도였고, 주로 당포성 인근을 상세히 그렸나이다.”

진대덕의 답변에 백제왕 의자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오직 촛불만이 흔들릴 뿐 고요만이 흘렀고, 백제왕 의자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성충은 우리 백제의 왕종이며 좌평이네. 황제께서 성충의 목을 원하시니, 내 반드시 칠 것이나… 많은 반발이 우려되어 시기를 따져야 하네.”

“시기라 하심은?”

진대덕이 조심스럽게 물으니, 의자가 빙그레 웃으며 답하였다.

“황제께서 요하를 건너시면 그때 치겠네. 황제의 대군이 요동에 들어왔으니, 누가 감히 성충의 목 따위를 염려하겠는가?”

이에, 진대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허면, 그전에도 고구려를 돕기 위해 군을 움직이시지는 않겠군요.”

“나는 셈에 능하다네. 아무리 더하기와 빼기를 해도, 고구려의 군사는 늘지 않고, 당 군의 수는 줄지 않으니 어찌 내가 황제를 거역할 수 있겠는가?”

“하오면, 황제 폐하께 들은 대로 아뢰겠나이다.”

진대덕이 예를 올린 후 조용히 물러나니 백제왕 의자가 낮게 혼잣말을 하였다.

“나는 이미 백제의 왕인데 뭘 또 책봉한다고 하는지… 허허, 참. 번잡스러운 황제로다.”

이에, 성충이 병풍 뒤에서 나오며 말하였다.

“제 목은 안심할 수 있사옵니까?”

“내가 이미 백제왕인데 왕이 되고자 네 목을 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허나, 고구려를 돕고자 군을 일으키는 것은 생각해 볼 일이구나.”

성충도 의자와 생각이 일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황제가 요동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군을 움직일 수 없겠습니다만, 수가 있나이다.”

“수가 있다? 그래, 어떤 수인가?”

이에, 성충이 자신의 목을 가리키며 미소 지었다.

“이 목입니다. 제 머리가 몸에서 떨어진다면, 황제는 전하를 의심치 않을 것입니다. 허면, 신라도 소식을 접하겠지요. 그때, 군을 신속히 움직이면 되옵니다.”

백제왕 의자가 성충의 목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허허 웃었다.

“과연 충신이로다. 자신의 머리로 적을 방심케 할 생각을 하다니, 성충 자네 말고는 누가 이런 계책을 내겠는가? 하하하. 그 목, 참으로 쓸모가 많도다. 하하하.”

백제왕 의자의 호탕한 웃음에 성충도 희미한 미소로 답하였다.

“성충 자네의 머리가 잘렸다는 소식을 접하면 연개소문이 무척 당황하겠구먼.”

“하오나 전하, 이로 인하여 기세 오른 황제와 신라가 곧 크게 낭패할 것입니다.”

이에, 백제왕 의자가 껄껄 웃으며 성충의 목을 어루만졌다.

* * *

고구려는 남과 북으로 적을 맞이할 형국이었다.

평양성으로 요동 각 성의 성주들과 새로 임명된 장수들이 집결하며 당 황제 이세민의 침공을 막기 위한 회의가 진행되었다.

“지금이라도 전시조정을 요동성으로 옮겨야 합니다.”

고정의의 추천으로 새로 요동성의 성주가 된 고영의가 불만을 토로하였다.

“대막리지, 요동이 무너지면 당 군은 곧장 압록수를 넘어 평양성까지 진격할 것입니다. 전시조정을 요동성으로 옮겨 당 군을 요동에서 묶어두는 것이 시급합니다. 평양성과 요동은 거리가 멀어 서로 논의하고 호응하기 어렵습니다.”

요동성 성주 고영의의 말이 끝나자 막리지 고정의가 고개를 끄덕이며 개소문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고정의도 고영의의 말에 동의하는 듯하였다.

이에 건안성의 젊은 성주 고돌발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전시조정이 어디 있든 제 맡은 바 책무를 다하면 될 일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이 회의가 요동과 평양의 마지막 회의가 될 터이니, 최대한 대막리지의 전략을 알고 싶습니다.”

정중하면서도 단호한 요청이었다.

개소문이 자리에서 일어나니, 등 뒤에 세워진 지도가 가려졌다.

“이세민은 평양성의 군대가 한수로 침공하는 신라로 인하여 발이 묶일 것이라 생각할 것이오.”

등 뒤에 세워진 지도로 다가가며 개소문이 말을 이었다.

“이곳! 바로 당포성이 신라의 침공로가 될 것이오. 허나! 백제의 왕종이자, 백제왕 의자의 책사인 좌평 부여성충이 나와의 약조를 지킨다면, 필경! 황제 이세민이 결코 예상치 못한 시기에 우리 고구려의 반격이 이뤄질 것이오.”

개소문은 무척 자신감이 넘쳐 있었다.

그러나, 성충과의 약조를 들어 본 적도 없는 장수들은 여전히 불안한 기색이었다.

“성충과 어떤 약조를 하셨습니까?”

막리지 고정의가 여러 장수들을 대신하여 개소문에게 물었다.

이에, 개소문이 당포성을 가리키며 자신있게 말하였다.

“이곳 당포성을 향하여 신라군이 밀려드는 그때! 백제가 한수 이남으로 군을 보내 우리를 도울 것이오. 허면 신라의 상주군은 발이 묶일 것이고, 그때! 내가 평양성의 군을 이끌고, 요동에서 당 군을 몰아칠 것이오.”

장수들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어렸고, 고정의도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폐수로 진입할 당항성 군은 어찌하실 생각이신지요?”

“내 아우, 연정토에게 수군을 맡기어 당항성의 수군을 묶어 둘 생각이오. 당항성을 점령하지는 못하겠지만, 발은 묶어 둘 수 있을 게요.”

이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안심하니, 개소문이 마저 말을 이었다.

“개마무사 십오만이오! 서둘러 양병하였지만, 십오만의 개마무사는 적이 아무리 그 수가 많다한들 짓밟아 으깰 수 있을 군세요. 황제는 우리 평양성의 군대가 신라로 인하여 발이 묶일 것이라 확실하고 있소.”

“…….”

“그때, 우리의 개마무사가 벼락 치듯 나타나 지축을 울린다면 필경! 당 군은 지리멸렬하고 말 것이오!”

개소문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두 눈엔 자신감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하면 대막리지, 이 계책을 온달도 알고 있습니까?”

막리지 고정의가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온달을 염려하여 물었다.

“온달 장군은 모르오. 알리지 않았고, 안시성이 고립무의 상태라 여기는 황제를 속여 뒤를 치고자 세세한 계획을 알릴 수 없었소. 기세 오른 항제는 요동에서 생각지 못한 평양성의 군대를 맞이하게 될 것이고, 그때 온달 장군에게도 도움을 청할 것이오. 나를 오해하고 증오해도 적을 몰아냄에 반드시 힘을 보탤 것이라 믿소.”

“온달이라면… 대막리지에 대한 복수보다 우선하여 당 군을 몰아내는 데 힘을 쏟겠지요. 과연 옳은 판단이십니다.”

고정의가 개소문의 계책에 탄복하며 나름 승리를 자신하던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당진평이 뛰어 들어왔다.

평소 결코 서두르지 않는 당진평의 행동과 달라, 개소문이 의아해 바라보았다.

“무엇인가?”

개소문의 물음에 당진평이 머뭇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마도 보고 듣는 이들이 많아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 듯하였다.

이에, 개소문이 손짓하며 말하였다.

“이제는 비밀을 함께 나눠야 할 때다. 말해도 좋다.”

당진평이 잠시 주위를 살피고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성충이 죽었습니다.”

“아니! 성충이?”

침착하던 개소문이 놀라 소리쳐 물으니, 모든 장수들도 덩달아 놀라 당진평의 입만 바라보았다.

“백제에 심어둔 제 수하에게서 온 소식입니다.”

“성충이 어찌 죽었단 말인가?”

개소문이 놀랍고도 당황스러워 다시 물었다.

“기벌포 때문이라 합니다.”

“기벌포?”

“그렇습니다. 성충이 훗날 당 군이 백제를 공략하기 위하여 상륙할 지점을 대막리지께 말한 일을 백제왕 의자가 역심을 품어 기밀을 누설하였다 오해하여 참수하였다 합니다.”

“진정… 진정 사실인가? 당을 기만하기 위한 술책이 아니고 사실인가?”

개소문이 듣고도 믿지 못해 거듭 물었다.

“성충의 몸이 내걸렸고, 머리는 개의 밥으로 던져졌다 합니다.”

당진평의 말에 모두가 침묵하였고, 성충과의 약조를 믿고 전술을 세운 개소문 또한 크게 당혹스러워 지도만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르고, 마침내 개소문이 입을 열어 침묵을 깼다.

“내가 당포성으로 가서 신라군을 박살 낸 후, 바로 요동으로 가겠소. 막리지가 개마무사 십오만을 비밀리 이끌고 신성에서 기회를 엿보시오. 요동성은 모용상이 따로 군을 이끌고 고영의 성주를 도울 것이오.”

“허면, 평양성은 누가 지키나이까?”

고돌발이 불안한 시선으로 물었다.

이에, 개소문이 단호히 답하였다.

“내 아우 연정토가 남아 지킬 것이오.”

이에, 고정의가 지도의 당항성을 가리키며 바로 물었다.

“허면 당항성의 수군은 누가 묶어 둡니까?”

“내 여동생 연수영이 수군을 이끌 것이고, 당진평이 보좌할 것이오. 그대들은 내가 신라 군을 요절내고 요동으로 향할 때까지 버텨 주기 바라오. 전쟁은 시작되었소. 모두 서둘러 맡은 책무를 다해 주기 바라오.”

이에, 모두가 굳은 표정으로 명을 받았다.

“신라와 당을 요절낸 후! 내 반드시 백제왕 의자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의자… 이놈!”

* * *

개소문이 이를 갈며 백제왕 의자에 대한 분노를 터트리던 그 순간.

성충은 아우 윤충과 함께 오천의 군사를 이끌고 신속히 한수로 진군하고 있었다.

“머리가 없는 몸만 저잣거리에 내걸어도 내가 죽었다고 믿으니, 과연 삼인성호일세.”

성충이 빙그레 웃으며 말하니, 윤충이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연개소문에게 소식을 전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전해야지. 일단 우리가 한수까지 올라간 후 전하도록 하세.”

“그 사이, 연개소문이 실수라도 하면 어찌합니까? 지금이라도 사람을 보내십시오.”

“아니네. 적을 속이려면 아군도 속여야 하는 법. 우리 백제에서도 내가 죽은 줄 아는데, 고구려에서 먼저 내가 살아 있음을 알면 안 되지.”

“…….”

“그러다가 황제와 신라가 알게 되면 방비할 게야. 우리 백제를 두려워하지 않고 신라가 한수로 진군하는 지금은 내가 죽어 있어야 하네.”

성충의 단호한 말에 윤충도 더는 이견을 내지 않았다.

‘연개소문과 내가 세운 계획이 조금 어긋났으나, 황제와 신라를 방심케 할 수 있으니 오히려 잘 되었다. 내가 신라 군을 빠르게 물리친다면 연개소문도 군을 몰아 요동으로 갈 수 있을 것이야. 나를 믿고 연개소문 그자를 믿자.’

성충도 내심 불안하였으나, 연개소문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진군을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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