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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검귀-283화 (283/328)

283화 불타는 적봉진 (3)

눈은 이틀 넘게 내렸고, 계필하력은 눈에 찍힌 말발굽을 쫓아 말을 몰았다.

“필경 황산으로 향하고 있다. 놈들은 우리가 추적하고 있음을 모를 것이다. 알고 있다면 흔적을 지웠을 게야. 놈들이 눈치 채기 전에 서둘러 황산에 당도해야 한다.”

나지막이 중얼거리던 계필하력이 급히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추었다.

“저, 저건?”

하늘에서 내리는 눈 사이로, 멀리 붉은색의 구릉이 보였다.

황야에 홀로 우뚝 선, 산이라기엔 낮지만 주위를 굽어보며 살필 수 있는 요충지.

고구려 군의 비밀기지 황산이 분명하였다.

거리는 세 식경 남짓, 계필하력이 손을 들어 천부장을 불렀다.

“말에게 재갈을 물려라.”

이에, 재갈을 물린 말들이 거친 숨을 내쉬며 천천히 전진하니, 늦은 오후쯤 황산과 거리를 좁힐 수 있었다.

거리는 삼천 보 남짓, 황산 위에 펄럭이는 삼족오 기가 계필하력의 시야를 자극하였다.

“장군, 게르가 이천여 개며 주위에 양 떼도 있습니다.”

눈 위에 찍힌 말발굽도 황산을 향해 있었고, 의심할 여지조차 없었다.

계필하력이 손을 들어 올리며 명을 내리려다가, 붉게 물들어가는 석양을 바라보고는 숨을 골랐다.

“날이 저물면 야습하여 황산을 불태우고 적들을 궤멸시킨다.”

다행스럽게도 적들은 아직 자신들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듯하였다.

황산 아래 게르는 여전히 한가로웠고, 양 떼들은 눈을 헤치며 풀을 찾고 있었다.

황산의 크기로 미뤄 짐작하건대, 결코 자신들의 군세를 능가할 군사들이 숨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적이 대비하고 있을 수도…….”

이견을 내는 천부장의 말을 계필하력이 단호히 잘라 말하였다.

“대비한들 소용없다. 게르가 고작 이천여 개다. 또한 황산 위에 적이 몇이든 우리가 압도할 수 있다.”

구천 기의 기병이 일시에 돌진하며 살을 날리고 곡도를 휘두른다면, 고작 이천여 개의 게르에서 뛰어나올 적들 따위는 문제 되지 않았다.

그리고 단숨에 말을 몰하 황산을 오르면 지키고 있을 군사 또한 일거에 쓸어 버릴 자신도 있었다.

“작아, 작아… 저 작은 황산에 우리를 대적할 만한 군사는 없을 거야. 저 게르가 문제일 뿐. 날이 어두워지면, 불화살을 날리며 공격을 가한다.”

계필하력이 재차 명하니, 천부장이 명을 받아 백부장들에게 전하였다.

* * *

서쪽으로 해가 저문 뒤, 어둠이 내리자 계필하력의 눈이 살기로 번뜩였다.

“짙게 내리는 눈 때문에 놈들이 우리를 아직 발각하지 못한 듯하다. 소리 없이 접근하여 일시에 공격한다. 이동하라.”

계필하력이 낮게 명하니, 천부장이 주먹을 들어 올려 신호를 보냈다.

이에, 구천 기의 기병들이 천천히 말을 몰아 나가니, 말들도 사람의 마음을 읽은 듯 소리 죽여 조심스럽게 눈을 밟았다.

점차 거리를 좁혀 게르와 천 보 이내가 되었다.

이에, 계필하력이 손을 들어 신호를 보내니, 천부장이 소리 높여 명하였다.

“공격하라! 궁기병은 불화살을 날리고 창기병은 적들을 짓밟아라! 단숨에 황산을 오른다!”

뿔나팔이 사방에서 울리고 창기병이 앞서 달리는 순간, 후미의 궁기병들이 게르를 향해 불화살을 날렸다.

게르가 불타고 뛰어나온 적들이 급히 말에 올랐으나, 밀려드는 창기병들의 기세에 놀라 도주하기 바빴다.

이어서, 궁기병들이 불타는 게르에 도착하여 황산을 향해 불화살을 날리니, 황산 위에서도 비명이 울리며 아우성이 일었다.

“돌진하라!”

계필하력이 불타는 황산을 향해 말을 몰아 나가니, 검은색 일색의 갑주를 걸친 고구려 군이 기겁하여 말을 몰아 황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도주하는 고구려 군의 수가 고작 오백 남짓으로 대수롭지 않자, 계필하력은 코웃음 치며 소리 높여 명하였다.

“그대는 저것들 쫓아라. 나는 황산을 마저 불태우겠다.”

이에, 명을 받은 천부장이 창기병 천여 기를 이끌고 뒤쫓았고, 계필하력은 계속해 불타는 황산을 올랐다.

목책이 불타고, 군막들이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모두 태워라! 다시는 이런 쓸데없는 것을 세우지 못하도록 모두 태우고 허물어라!”

계필하력의 명에 황산에 오른 기병들은 불을 지르고 군막을 짓밟았다.

이때, 황산 정상 한켠에 작은 봉분을 발견한 계필하력이 다가가 살피니, 묘비석에 비문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쉬노라. 길지 않으리.]

이외엔 누구의 봉분인지 적혀 있지 않았다.

그러나 계필하력은 단번에 봉분의 주인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랬구나. 그랬어. 그가 죽었기에, 황산도 유명무실해지고 있던 거였어.”

봉분 앞에 선 계필하력이 사방을 둘러보니, 시야가 탁 트인 것이 과연 일대의 요충지가 분명했다.

“잘 타는구나.”

황산 아래에서도 궁기병들이 게르를 불태우고 허무는 광경이 계필하력의 시야에 들어왔다.

단 한 번의 공격에 너무도 쉽게 황산을 함락시켰으니 계필하력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매서운 추위 속에서 동에서 서로, 남에서 북으로 헤맨 끝에 발견한 황산.

그러나, 황산은 황제 이세민의 우려와 달리 보잘것없었다.

“황제께서 황산에 을지문덕이 있을 것이라 염려하시더니, 있긴 있었구나.”

봉분의 비석을 손으로 쓰다듬은 계필하력이 말에 올라 껄껄 웃었다.

“찾느라 고생은 하였으나, 황제께 아뢸 것이 제법 많구나. 군막은 물론, 군량미와 물자를 모두 불태웠으니, 고구려 놈들이 돌아온들 겨울을 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하하.”

* * *

황산 위 고구려의 비밀기지가 발각되어 불탄 지 사흘 뒤, 우랑과 카사르, 호타크는 군사들을 대동하지 않고 말을 몰아 황산에 올랐다.

이미 계필하력은 떠난 뒤였고, 목책과 군막은 모두 불에 타 허물어져 있었다.

말에서 내린 우랑이 작은 봉분으로 다가가 무릎 꿇고 묘비석을 살폈다.

손상된 부분은 없어 보였다.

“놈이 이 봉분을 봤다면, 매우 만족하여 돌아갔을 게요.”

등 뒤로 다가온 카사르에게 우랑이 말하며 봉분에 공손히 절을 올렸다.

절을 마친 우랑에게 카사르가 의아한 듯 물었다.

“헌데, 당 군이 황산을 찾을 동안 어찌 고구려에서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것이오? 고구려는 당 군의 낌새를 모르는 게요?”

“우리 고구려에 정변이 일어났다고 들었소. 아마도 그 난리로, 이곳을 신경 쓸 여력이 없나 보구려.”

우랑이 씁쓸히 답하니, 카사르가 놀라 말하였다.

“그렇다면 큰일 아니오? 이곳 황산을 급습했다는 것은, 봄에 고구려를 공격하겠다는 의미일 것인데, 어서 속히 온달에게 알려야 하지 않소?”

이에, 우랑도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였다.

“당연히 군사를 보내 알린 뒤, 명을 기다리지 않고 우리도 출병해야 할 듯하오. 카사르 대족장 부디 이번에도 우리 고구려에 힘을 보태주시기 바라오.”

이에 카사르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답하였다.

“온달과 나는 형제와도 같소. 또한 그대와도 오랜 벗으로 지냈으니, 당연히 아끼지 않고 힘을 보탤 것이오.”

* * *

봄이 다가올 무렵, 장안성에 당도한 계필하력이 은밀히 황제 이세민을 독대하였다.

“명하신 대로 적봉진을 붙태웠나이다.”

계필하력이 머리를 조아려 아뢰니, 황제 이세민이 껄껄 웃었다.

“고생하였다. 그래 그곳에 을지문덕이 있더냐?”

“있었나이다.”

“그래? 만나 보았느냐?”

“만나 보았습니다.”

“그래, 어떻더냐?”

“잠시 쉰다는 비문 밑에 있더이다.”

이에, 황제 이세민이 의아한 듯 계필하력을 바라보다가 껄껄 웃었다.

“재밌었겠구나! 하하하. 그래, 애썼다.”

“송구하오나, 폐하. 모두 섬멸하지 못하였고, 도망친 놈들이 있었나이다.”

이에, 황제 이세민이 손을 내저으며 말하였다.

“별 것 아니다. 놈들이 도망쳐 우리의 공격을 평양성 연개소문에게 알렸다고 한들, 이미 적봉진의 존재를 우리가 알고 있으니, 더 이상 적봉진에 군사를 보내진 않을 것이다. 영주에서도 고구려 군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으니, 쉽게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적봉진을 불태워 흡족한 황제 이세민은 계필하력을 크게 칭찬한 후 다음 날 즉시 고구려 정벌을 진행하였다.

“요동은 본디, 우리 중국의 땅이었다!”

무겁게 입을 연 황제 이세민이 조정 대신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수나라가 네 차례 군사를 일으켜 취하지 못해 오만한 고구려의 기만 살려주었다. 여기에 더하여, 역도 연개소문이 내가 책봉한 왕을 무참히 죽여 그 시신마저 욕보였으니, 이는 나를 업신여긴 것과 다름이 없다.”

어린 시절 연개소문과의 만남과 수 황제 앞에서 자신이 연개소문에게 머리를 조아렸던 치욕스러운 과거를 떠올린 황제 이세민이 이를 갈며 말을 이었다.

“이에 내가 지금 동정(東征)함은 우리 중국을 위해 자제(子弟)의 원수를 갚고! 고구려를 위하여 군부의 치욕을 씻으려 할 뿐이다!”

황제 이세민의 강한 의지에 모두가 침을 꿀꺽 삼키니, 넓은 대전 안엔 오직 황제 이세민의 음성만이 울려 퍼질 따름이었다.

“내가 군을 일으켜 백이십여 난을 평정하고 고창국과 토역혼은 물론, 돌궐마저 무릎 꿇어 사방이 크게 평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고구려만 평정되지 않았으니, 내가 이제 다시 군을 일으켜 이를 취하려 하노라!”

역사상 가장 많은 승리를 거둔 황제 이세민이 마지막 전장으로 고구려를 택하는 순간이었다.

* * *

영주로 물자가 이송되기 시작하였고, 비사성 공략을 앞둔 장량도 물자를 해상으로 수송할 준비를 하였다.

오십만이 넘는 원정군이 낙양에 집결하며, 돌궐과 거란 등의 이민족 군대도 동원되었다.

황제 이세민은 총사령관으로 이세적을 임명하였고, 육만의 정예병을 맡겼다.

이세적의 목표는 현도성으로 공성병기와 보급을 지닌 채 진군을 시작하였다.

또한 이도종에게도 육만의 군사를 이끌게 하여 신성을 치게 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장검에게 육만의 군사를 맡겨 건안성을 공략하게 하니, 고구려의 서북 방면을 무력화하여 비사성 공략 후 물자 수송을 용이하게 하고자 했다.

이는 안시성 공략을 염두에 두지 않은 전술로, 이미 고립무의 상태의 안시성이 연개소문에 협력하여 당 군과 싸우지 않으리라 여긴 것이다.

“안시성이 감히 내게 맞선들 도륙 내면 그만이다.”

이미 안시성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은 황제 이세민은 이렇듯 자신하고 있었다.

또한 황제 이세민은 이십만의 중군이 이세적과 이도종, 장검 등을 지원케 하였다.

여기에, 황제 이세민도 친히 육도행군 삼십육만을 이끌고 본진이 되어 출병하며 승리를 다짐하였다.

“패한 적이 없어, 패배의 아픔을 알지 못한다. 하여, 고구려가 얼마나 참담할지 모르니, 유감이로다. 고구려 정벌 후 새로 왕을 책봉하여, 고구려 백성들의 아픈 마음을 다독여 주리라.”

한편, 장량(張亮)도 비사성 공략을 위한 사만삼천여 명의 상륙군과 십만의 수군, 천여 척의 전선으로 등주에서 출병하였다.

수의 황제 양광이 수송부대를 원정군보다 더 많이 편성했던 것에 비해, 황제 이세민은 원정군이 별도로 보급을 지니고, 영주와 비사성 공략을 통한 해상 수송을 염두에 둬 이십만의 수송부대만 편성하였다.

이에, 원정군 팔십만과 수송부대 이십만의 도합 백만의 대군이 거센 파도와 같이 고구려를 향해 움직였다.

봄을 맞아 움직이기 시작한 당의 원정군과 때를 같이 하여, 북방 초원에서도 거대한 올루스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바로, 카사르의 몽고 부족과 호타크의 커레이트 부족이었고, 우랑이 이끈 고구려 기병 일만 기도 함께 하고 있었다.

양 떼와 게르가 함께 움직이는 이 거대한 물결은 세상 그 어느 군대와도 달리 별도의 보급이 필요치 않았고, 지치지 않는 말을 지니고 있었다.

북방 초원은 광활하고, 타 부족 간의 게르와 게르 사이는 너무도 멀기에, 이들의 움직임은 거란과 돌궐은 물론, 당 군의 보급이 집결되는 영주에서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각간 김서현이 이끈 신라의 최정예 상주군도 북진을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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