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화 불타는 적봉진 (1)
연개소문의 밀서를 읽은 온달과 양만춘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눈치를 살피던 막바우가 평강에게 물었다.
“저 두 사람은 벙어리가 된 거 같으니, 총명하신 공주님께서 말씀 좀 해주십시오.”
이에, 평강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계루부의 고 씨들이 모두 연개소문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는, 태왕을 시해한 대역무도한 역도를 대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필경, 뭔가 내막이 있는 듯합니다. 또한!”
“또한?”
막바우가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도적이 들면, 도적부터 몰아내고 싸움을 해야 하는 법이니, 일단 고구려의 내전은 없어야 할 것 같습니다.”
평강의 단호한 말에, 온달이 눈을 지긋이 감았다.
“공주, 진실은 개소문이 태왕 폐하를 시해하고, 스스로 대막리지에 올랐다는 것이오. 나는 이를 용서할 수 없으나, 외적을 맞이하기 전, 한 명의 군사라도 아껴야 하니, 개소문의 청대로 내전은 잠시 보류하도록 하겠소.”
이에, 강혁수가 벌떡 일어나 소리쳐 말하였다.
“평양성의 군사들이 안시성 코 앞에 진을 치고 있는데 믿을 수 있다 여기십니까?”
온달이 지긋이 감았던 눈을 뜨고 강혁수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겨울이 오면 돌아가겠다고 하였으니, 방비만 강화한 채 두고 볼 것이다. 어차피 저들이 안시성 앞에 진을 친 이상, 우리도 평양성을 공략하기 위해 출병하기 어렵고, 내가 따로 몸을 움직여 개소문의 목을 베러 가기도 곤란하다.”
이에, 평강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장군님 말씀대로네. 개소문은 치밀한 인간으로 성장한 듯하네. 팽무일이 군사를 이끌고 겨울이 올 때까지 버틴 후 돌아간다면, 실상 우리 고구려의 내전은 일어나지 못하네.”
강혁수도 평강의 말을 이해하여 다시 자리에 앉으니, 양만춘이 입을 열었다.
“허면, 어쩌시겠습니까?”
이에, 온달이 중후한 음성으로 답하였다.
“싸워야지요.”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은, 당 군입니까? 성 앞에 진을 친 평양성 군사들입니까?”
양만춘의 물음에 온달은 그저 담담히 답하였다.
“안시성을 공격하는 모든 적.”
* * *
다행스럽게도 개소문의 밀서대로 평양성의 군사들은 안시성 앞에 진을 치고 공성전을 벌일 듯 부산스럽게 움직였으나, 실상 별다른 공세는 벌이지 않았다.
그리고, 첫눈이 내리니 평양성으로 군을 돌렸다.
온달과 양만춘은 퇴각하는 평양성 군의 배후를 공격하지 않았고, 양측 모두 단 한 명의 군사도 잃지 않은 채 겨울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장안성의 황제 이세민이 은밀히 계필하력을 불러들였다.
계필하력은 본디, 금산을 거점으로 한 돌궐의 복속된 철륵부 족장의 아들이었다.
당에 투한한 후, 여러 원정에 선봉을 서며 그 공을 인정받아 총산도부대총관(蔥山道副大總管)에 임명되었고, 황제 이세민의 신뢰를 받는 어엿한 당 군의 핵심 장수였다.
“봄이 오면, 나는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원정에 나설 것이다.”
황제 이세민이 무겁게 입을 여니, 계필하력이 머리를 조아려 명을 기다렸다.
“너는 내가 아까고 믿는 장수로, 북방의 매서운 추위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황량한 북방 태생이기에, 추위와 끝없는 황야에 익숙하나이다.”
계필하력이 답하니, 황제 이세민이 만족하여 미소 지었다.
“하여, 내 너에게 명하노니! 고구려의 비밀기지 적봉진을 찾아내어 불태워라. 찾아낼 수 있겠느냐?”
이에, 계필하력이 충심을 담아 답하였다.
“황산에 있다는 소문은 들었나이다. 소장 북방의 광활한 황야를 모두 뒤져서라도 반드시 찾아내어 불태우겠나이다.”
“듬직하구나. 허나, 듣자 하니 고구려의 명재상 을지문덕이 그곳에 있다고 한다. 너는 반드시 은밀하고도 조심스럽게 적봉진을 찾아내어 급습해야 할 것이다.”
황제 이세민의 당부에 계필하력이 머리를 조아려 답하였다.
“충심을 담아 명을 받사옵나이다.”
황제 이세민의 명을 받은 계필하력은 그날 밤, 장안성을 몰래 빠져나와 급히 태원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며칠 뒤 태원에서 대기하던 자신의 군사 일만을 이끌고 만리장성을 은밀히 넘었다.
계필하력의 군대는 기병 일색으로 동돌궐과 철륵부에서 투항한 북방의 전사들이었다.
말을 달리며, 잠을 자고.
말을 달리며, 끼니를 때우고.
말을 달리며 전략을 논의할 수 있는 계필하력의 전사들은 서에서 동으로, 남에서 북으로 은밀하면서도 샅샅이 황야를 수색하기 시작하였다.
황야에서 부족을 만나면, 황산의 위치를 묻고 적봉진의 존재를 확인하기를 거듭하던 중, 바이골(바이칼 호수) 인근에서 마침내 황산의 위치를 아는 부족을 만날 수 있었다.
“십여 년 전, 흑룡강 지류에서 소문을 들었지.”
주름 가득한 늙은이가 기억을 더듬어 말하니, 계필하력이 금 한 덩이를 던져주며 물었다.
“지류, 어디?”
황급히 금덩이를 쥐어 품에 넣으며 늙은이가 바로 답하였다.
“카사르란 족장이 거느린 부족이 인근에 있는데… 그 카사르의 부족은 원래 몽고 부족이었지. 그런데 이 천하의 비렁뱅이들이 갑자기 좋은 활을 지니고 구름 같은 양 떼를 지니게 되었다지. 그리고 일대의 다른 부족들을 흡수하여 대족장에 오르고…….”
“내가 듣고자 하는 것은 적봉진이다. 몽고 부족 따위가 아니다.”
북방 초원에서 몽고 부족은 가난한 소수 부족이었고, 대부분 드넓은 광야에 흩어져 지냈기에 계필하력은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들어 봐. 너무 성급히 굴면 큰일 난다고.”
늙은이가 고개를 저으며 말하니, 성미 급한 계필하력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곡도에 손을 대었다.
그러나 늙은이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담히 말을 이었다.
“단칼에 내 목을 베어도 좋지만, 나는 금덩이만큼 값을 내고 싶어서 최대한 아는 것을 모두 말해주려는 거야. 내 이야기를 모두 들어야 적봉진을 찾고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좋다. 어서 말해 보거라.”
계필하력이 애써 성질을 누그러뜨리고 말하니, 늙은이가 빙그레 웃으며 말하였다.
“카사르의 부족을 언급한 이유가, 이것들이 황산 아래를 지키고 적봉진의 존재가 알려지는 것을 막고 있거든. 그대가 전사들을 이끌고 적봉진을 치고자 해도, 우선 카사르의 전사들부터 물리쳐야 할 거야.”
“그것들이 왜 고구려의 군사기지를 지키는가?”
“카사르는 오래전 적봉진을 세운 고구려 장수 온달과 형제 같은 사이거든. 적봉진을 쉽게 보지 않아야 해. 그대의 전사들은 적봉진의 고구려 군사뿐만 아니라, 카사르의 부족 전사들도 상대해야 할 거야.”
늙은이의 거듭된 당부에도 계필하력은 코웃음 치며 말하였다.
“오래 기다려 들려준 이야기가 고작 그것이었나?”
다시 금덩이 하나를 던져주며 계필하력이 말에 올랐다.
“어쨌든 충고 잘 들었다. 너는 나를 만난 일이 없는 것이다. 그것만 명심하라.”
비밀 유지를 당부한 계필하력이 말을 몰아 나가니, 일만 기의 기병들이 북동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 * *
을지문덕의 죽음 이후, 황산의 적봉진은 우랑이 지키고 있었다.
적봉진은 황산에 세운 전초기지와 반나절 거리 계곡에 세운 본진으로 나뉘었고, 우랑은 이 본진을 지켰다.
북주 잔당과 돌궐 연합군과의 전쟁에서부터 수와의 네 차례 전쟁을 치르며, 황산 적봉진의 존재가 서서히 외부에 알려지기 시작하였기에, 황산 적봉진은 목책과 군막만 세워 놓았을 뿐, 군사는 모두 계곡으로 이동해 있었다.
대신, 황산 아래에 카사르의 부족이 넓게 게르를 펼치고 있었기에, 외부인은 황산을 올라 적봉진을 살필 수 없었다.
밤이 찾아올 무렵, 바이골에서 돌아온 호타크가 카사르의 게르를 방문하였다.
“대족장, 철륵부 족장의 아들 계필하력이 적봉진 위치를 묻고 다닌다고 하오.”
“계필하력? 철륵부는 이제 존재하지 않을 터인데… 그래 그자가 왜 적봉진을 찾는 것이오?”
계필하력의 이름을 들어 본 적 없는 카사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이에, 호타크가 전해 들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금산의 돌궐이 무너지며 복속된 철륵부도 와해되었다고 하오. 그때, 당에 투항해 벼슬을 얻은 이들이 있는데, 계필하력이 그중 하나라 하오.”
“당이라… 그래, 적봉진을 왜 찾고 다닌다고 하오?”
“아마도, 당과 고구려가 그리 사이가 좋지 않은 모양이오.”
이에, 카사르가 뭔가를 깨닫고 급히 게르 밖 전사를 불렀다.
“너는 당장 계곡으로 가서 우랑을 데려오라. 급히 나눌 이야기가 있다.”
밤이 깊어 떠난 전사가 해가 뜰 무렵 우랑과 함께 돌아왔다.
“당의 장수 계필하력이 일만 기병을 이끌고 적봉진을 찾고 있다 하오.”
카사르가 대뜸 말을 꺼내니, 우랑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 수는 얼마라 합니까?”
우랑의 물음에 호타크가 답하였다.
“일만 기라 하오.”
이에, 우랑이 안심한 듯 표정이 밝아져 말하였다.
“적들은 우리의 군세와 관계를 모르는 모양이구려.”
“아마도.”
카사르도 빙그레 웃으며 말하였다.
이미 일대의 대세력이 된 카사르의 올루스는 전사가 십만에 달하였고, 부녀자와 아이들, 노인들까지도 화살을 날리며 적과 싸울 수 있었으니 일만 기의 기병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일만 기의 기병이 아니었다.
신중한 호타크가 진중히 입을 열었다.
“문제는 그들이 당 군이라는 것이오. 저들을 물리치면 황산의 위치를 파악한 당 군이 군을 몰아 거듭 공격해 올 것이고, 이는 초원의 패권을 건 큰 전쟁이 될 것이오.”
우랑과 카사르가 호타크의 말에 동의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호타크가 다시 말을 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계필하력에게 금덩이를 받고 정보를 건넨 늙은이가 적봉진의 위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금덩이에 욕심을 내어 거짓으로 흑룡강 지류에 있다고 말한 것 같소.”
황산은 광활한 황야에 우뚝 선 구릉으로 흑룡강의 그 어떤 지류와도 사흘 이상 거리에 있었다.
물론, 초원의 민족에게 사흘 거리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으나, 전쟁을 치름에 있어 사흘 거리는 대비하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라…….”
우랑이 중얼거리더니, 카사르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좋은 수가 있소?”
카사르가 의아해 물으니, 우랑이 바로 답하였다.
“큰 싸움을 피할 방법이 있소이다.”
“무엇이오?”
“흑룡강 지류에서 적봉진을 찾는 당의 군대를 급습하여 이곳으로 유인해 오는 것이오.”
“아니, 왜?”
일부러 적봉진의 위치를 알려주자는 우랑의 말에 카사르가 의아해 되묻고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빙그레 웃는 우랑에게 다시 물었다.
“이곳에서 요절내겠다는 게요?”
“아니오. 저들을 박살 내면, 당 군은 다시 대군을 끌고 올 것이고, 거듭된 전투로 양 떼가 풀을 뜯기 어려워질 것이오.”
“그럼?”
우랑의 의도가 궁금한 카사르가 다시 물었다.
이에, 우랑이 차분하면서도 담담히 답하였다.
“우리는 이곳에서 적들에게 패해 도망치고, 승리를 거둔 적들은 황산에 올라 적봉진을 불태울 것이오. 그리고 돌아가 당의 황제에게 승전을 보고할 것이고…….”
우랑이 말꼬리를 흐리며 말을 아꼈으나, 영리한 카사르는 이미 그 속내를 파악하여 환하게 웃었다.
“좋은 게책이오! 적봉진이 사라졌다 믿게 하여 관심밖에 두자는 말이구려. 하하하.”
이날 오후부터, 카사르 부족은 게르의 대부분을 반나절 거리 계곡으로 옮기기 시작하였고, 황산 아래엔 고작 이천여 개의 게르와 전사 삼천 명만 남도록 하였다.
여전히 초원엔 한가로이 풀을 뜯는 양떼도 일부 남겨 계필하력이 의심치 못하도록 세심히 준비하였다.
그리고, 십여 일 뒤 흑룡강 지류에서 계필하력의 군대가 적봉진을 찾고 있다는 보고가 카사르에게 전해졌다.
“호타크, 그대가 아둔한 적을 잘 데려와야겠구려.”
카사르의 명에 호타크가 아무런 대답도 없이 게르 밖으로 나가 말에 오르니, 기다리고 있던 일천의 전사들이 호타크를 따라 말에 올랐다.
흑룡강 지류로 떠나는 호타크와 전사들을 바라보며 우랑이 말하였다.
“호타크가 데려오면, 잘 패할 수 있도록 우리도 준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