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고립무의(孤立無依) 안시성 (6)
온동과 팽운이 눈을 피해 안시성을 빠져나갈 무렵, 독고영이 급히 평강을 찾았다.
“공주님! 온동 오라버니와 팽운이 보이지 않아요.”
헐레벌떡 뛰어온 탓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독고영이 단숨에 말하였다.
“둘이? 성안 어딘가에 있는 것 아니겠니?”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오전 수련이 없길래 찾아봤더니, 남서문을 지키던 군사들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았다고 했어요.”
“남서문으로?”
“아니요. 성문이 아니라 성벽을 타고 내려갔다고… 밧줄을 걸고…….”
온동과 팽운은 군사들의 눈을 피해 성벽을 내려갔다고 생각했으나, 실상, 평양성에서 보낸 군대의 공격에 대비해 삼엄한 경계가 이뤄져 들킨 모양이었다.
“밧줄을? 눈을 피해 나갔단 말이더냐?”
“네, 그런 것 같아요. 공주님, 불안해요. 남서문은… 산을 타고 내려가면 평양성의 군사들과 만날 수 있는…….”
독고영과 마찬가지로 평강도 불길한 마음에 급히 몸을 돌렸다.
“장군님께 가자꾸나. 온동과 팽운이 뭔가 일을 벌일 모양이다. 서두르자.”
평강과 독고영이 급히 찾아가 말하니, 온달 또한 놀라 벌떡 일어났다.
“큰일이오! 내가 피를 보기 싫어함에 온동이 대신 나선 모양이구려. 당장 군사들을 이끌고 나가야겠소.”
급히 뛰어나가 누렁이에 오르려는 온달을 평강이 소매를 잡아 만류하였다.
“장군, 일단 고정하십시오. 장군이 지금 나선다면, 큰 싸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허나, 온동과 팽운이 위험하오. 급히 군사들을 이끌고 구하러 가야 하오.”
이때 소식을 접한 막바우와 경우도 달려와 온달을 거들었다.
“막바우와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앞도 못 보는 온동과 어린 팽운을 사지에 둘 수 없습니다.”
“나, 나도? 아! 그렇지! 나도 가야지. 가서 온동을 구해야지. 아무렴.”
당장 군사들을 꾸려 출전하려는 이들에게 평강이 애써 차분히 말하였다.
“아니 됩니다.”
“어찌 안 된다 말하시오?”
평강의 말이라면 뭐든 옳다고 여기던 온달이 제 주장을 꺾지 않고 물었다.
이에, 평강이 한숨을 내쉬며 답하였다.
“장군, 군사들을 이끌고 출병하면 평양성 군의 눈을 피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아직 준비가 덜 되었고, 급히 출병하면 반드시 실수가 있을 것입니다.”
“…….”
“고작 성 하나로 전 고구려를 상대해야 하며, 돌아오는 봄엔 당 군마저 대적해야 할 상황이오니, 군사 한 명이라도 아끼셔야 합니다.”
평강의 말도 일리가 있다 여긴 막바우와 경우가 고개를 끄덕이니, 누렁이에 오르려던 온달이 고개를 떨구고 평강에게 물었다.
“허면, 이대로 온동과 팽운을 사지에 둬야 하는 게요?”
이에, 평강이 잠시 침묵을 유지한 후 결국 온달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입을 열었다.
“소수로 은밀히 온동과 팽운의 뒤를 추적하여, 데리고 오는 것이 상책입니다. 군사들을 끌고 나갈 시, 적들에게 노출될 터이며 싸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힘든 추적이 되겠으나, 이 방법이 최선입니다.”
“좋소! 공주 말 대로, 나와 막바우만 나가겠소.”
온달이 흔쾌히 답하니, 평강이 고개를 저었다.
“장군님은 운철대검을 지녀 누가 보아도 온달입니다. 눈을 끌지 않을 사람이 나가 온동과 팽운을 찾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이에, 온달이 막바우를 바라보니, 평강이 고개를 저었다.
“저도 안 돼요?”
막바우가 자신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으니, 평강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양만춘이 대식과 함께 달려와 말하였다.
“제가 제일 평범하게 생겼으니, 대식과 함께 나가 온동과 팽운을 데려오겠습니다.”
이에, 평강이 고개를 저으며 말하였다.
“성주께선 성을 지키셔야 하오니, 경우님과 대식님, 강혁수 이렇게 셋이 사냥꾼으로 꾸며 추적하면 좋을 듯합니다.”
평강의 제안에 경우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뭔가 떠올리고는 소리쳤다.
“앗! 강혁수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에, 막바우도 뭔가 깨닫고는 소리쳤다.
“헉! 강혁수 그놈!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요!”
* * *
급히 산을 내려간 온동과 팽운은 숨을 고른 후, 나무 사이로 몸을 숨기며 천천히 발을 옮겼다.
“그런데 오라버니, 적의 수장을 어떻게 찾아야 할까요? 얼굴도 모르는데…….”
팽운의 물음에 온동이 바로 답하였다.
“곧장 안시성으로 진격하지 않고, 적당히 거리를 둔 후 진을 칠 것이다. 그때, 가장 크고 경계가 삼엄한 군막을 찾으면 된다.”
“아! 오라버니는 어찌 그리 잘 아세요?”
팽운의 칭찬에 온동이 멋쩍은 미소를 짓고는 그저 말없이 발을 옮겼다.
이에, 온동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오며 팽운이 또다시 물었다.
“그럼 적들이 어디쯤 군막을 칠까요? 아무래도 진을 펼치기 좋은 곳에 치겠지요? 넓은 평지에 치려나? 우리는 밤에 군막을 급습하는 거죠?”
한 번에 여러 개를 물으니, 온동은 그저 미소만 지을 뿐 답하지 않고 부지런히 발을 옮겼다.
발을 옮기면서도 온동의 모든 신경은 귀에 집중되었고, 멀리서 다가오는 평양성 군의 기척을 느끼고 있었다.
“오라버니는 눈도 보이지 않으면서 어찌 그리 산길을 잘 가세요? 정말 대단하세요.”
자신의 도움도 받지 않고 앞서 걷는 온동이 마냥 신기한 팽운이 종알종알 말하던 그 순간, 온 신경을 귀에 집중한 온동이 급히 몸을 돌려 팽운의 입을 막았다.
“쉿!”
팽운의 입을 손으로 막은 온동이 머리를 기울여 바람이 전해오는 소리를 귀에 담고자 집중하였다.
그리고, 뭔가가 전해졌는지 온동이 소리 죽여 말하였다.
“저, 언덕 너머… 놈들이 오고 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온동이 신기하게도 손가락으로 조금 떨어진 구릉을 가리키니, 팽운이 놀라 온동의 눈을 가린 검은 천을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정말 눈 안 보이는 거 맞아요?”
이에, 온동은 대꾸도 없이 팽운의 손을 잡고 구릉을 빠르게 오르기 시작하였다.
구릉 위에 오르자, 바짝 몸을 낮추고는 아래를 가리키며 온동이 물었다.
“운아, 보이느냐?”
이에, 팽운이 구릉 아래를 살피고는 놀라 소리 죽여 말하였다.
“오, 오라버니… 적들이… 바로 앞에 있어요. 그리고…….”
“그리고?”
의아해 묻는 온동에게 팽운이 나지막이 말하였다.
“강혁수 오라버니가 홀로 적들의 길을 막고 있어요.”
* * *
오만의 군사를 이끌고 호기롭게 안시성으로 진군하던 상장군 추자형은 좁은 산길을 막고 선 괴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괴사내는 말에도 오르지 않았고, 커다란 쇠몽둥이를 어깨에 메고 있었는데, 키가 장대하고 골격이 매우 다부져 보였다.
나이는 스물 남짓되어 보였으며, 눈이 부리부리하고 입술이 두툼해 강골로 보였다.
“너는 누군데, 감히 길을 막는 게냐?”
“다 볼일이 있어 서 있는 것이다. 오래 기다려 다리 아프니, 이리 와서 이야기하거라. 어서 오지 못하겠느냐!”
괴사내가 오히려 추자형을 꾸짖으니, 뒤에서 팽무일이 말을 몰아 나와 추자형에게 말하였다.
“미친놈인 듯합니다. 그냥 치우시지요.”
이에, 추자형이 손을 들어 부장을 불러 명하였다.
“괜한 소동 벌이지 말고 조용히 치우게.”
명을 받은 부장이 군사들을 불러 재지시하니, 고작 괴사내 한 명을 치우는데 그 절차가 꽤나 복잡하였다.
창을 든 군사 다섯이 앞으로 나와 괴사내에게 다가갔고, 그중 한 명이 호통을 쳤다.
“이놈아! 감히 대군의 앞을 막으면 어쩌자는 게냐? 실성했으면 발 씻고 잠이나 자야지, 이렇게 나돌아다니면 경치는 게다. 썩 물러나거라!”
제법 기세 좋게 호통을 쳤으나, 괴사내의 기에 눌려 다가가지는 못하였다.
이에, 괴사내가 피식 웃으며 답하였다.
“졸개들 머리 부수러 나온 게 아니니, 너희나 물러가거라.”
“뭐?”
다섯 명의 군사들이 놀라 서로 얼굴을 바라보니, 괴사내가 마저 말을 이었다.
“못 들었느냐? 너희 대가리가 아닌, 저놈 대가리를 노리고 있다 하지 않았느냐? 어서 저놈 이리 오라 하거라!”
이에, 다섯 명의 군사들이 자신도 모르게 뒤돌아 추자형을 바라보았다.
“이놈들! 뭣들 하는 게냐!”
부장이 소리쳐 꾸짖으니, 그제야 다섯 명의 군사들이 정신을 차려 괴사내에게 달려들었다.
“에잇! 나도 모르겠다. 물러나지 않은 네놈 잘못이다!”
선두의 군사가 목을 노리고 창을 찔러가며 소리치니, 괴사내가 쇠뭉둥이를 어깨에 걸친 채 살짝 몸을 틀어 창날을 피하고는 빠르게 발을 놀려 턱을 가격하였다.
“컥!”
턱을 채인 군사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날아가고, 뒤따르던 군사들이 놀라 바라보니, 괴사내가 빠르게 발을 옮겨 바짝 다가와 어깨와 팔꿈치로 군사들의 턱과 명치를 가격하였다.
순식간에 네 명의 군사들이 나뒹굴었고, 격분한 부장이 크게 소리치며 말을 몰아 달려들었다.
“감히 이놈이!”
부장의 검이 햇살에 빛나 검광을 뿌리던 순간, 괴사내가 쇠몽둥이를 어깨에 걸친 채 검을 막고는 발을 들어 올려 말 머리를 걷어찼다.
고통에 겨운 말이 긴 울음을 울며 쓰러지고, 부장이 말에 깔려 신음을 토하였다.
“자꾸 애들만 상하지 않는가? 뭐 하는가? 이제 네가 나설 차례 아닌가?”
괴사내가 추자형을 바라보며 비웃듯 말하였다.
추자형이 기가 막혀 팽무일을 바라보다가 괴사내에게 물었다.
“단기접전이라도 벌이자는 게냐?”
“바로 그것이다.”
당연하다는 듯 괴사내가 답하니, 추자형이 껄껄 웃었다.
“하하하, 네놈이 누구길래 감히 고구려의 상장군에게 단기접전을 청한단 말인가? 무릇 전장에도 예와 격식은 있는 법. 격에 맞지 않는 놈과 단기접전을 벌일 만큼 나는 어리석지 않구나.”
이에, 괴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네놈 말도 일리가 있구나. 격에 맞기를 원하니, 내가 누군지 가르쳐 주겠다. 나는 대고구려의 대장군 강이식의 차남으로 검귀 칭호를 되찾기 위해 네놈의 머리를 으깨고자 한다.”
“뭐라? 강이식의 차남?”
추자형이 놀라 물으며 팽무일을 바라보았다.
이에, 팽무일이 괴사내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물었다.
“네놈이 검귀 칭호를 되찾겠다고?”
“그렇다! 내가 바로 강혁수다! 빼앗긴 선친의 검귀 칭호를 되찾고자 네놈들을 기다렸다!”
강혁수가 기세 좋게 소리치니, 팽무일이 어이없다는 듯 허허 웃었다.
“실성한 놈이로고. 검귀 칭호는 대막리지 합하께서 가져가셨는데, 엄한 데서 분풀이를 하느냐? 검귀 칭호를 찾고 싶으면 평양성에 가보거라. 우린 바쁘니, 네놈과 노닥거릴 여유가 없구나. 허허, 넋 나간 놈.”
“연개소문이 보낸 우두머리의 머리를 으깨면, 속이 뒤집어진 연개소문이 제 발로 올 터이니, 내가 애써 발품 팔 일은 없을 것 같구나. 어서 오지 않고 주둥이만 털 생각인 게냐?”
계속된 강혁수의 도발에 추자형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소리쳐 명하였다.
“뭣들 하느냐! 당장 저놈을 잡아 와 무릎 꿇리거라!”
군령이 떨어지니, 오만의 군사가 명을 받았다.
그러나, 너댓 명의 군사가 지날 만큼 좁은 산길을 강혁수가 바위처럼 서서 지키니, 맹렬히 달려들던 군사들이 맥없이 쓰러지며 비명을 질렀다.
강혁수는 여전히 어깨에 낭아봉을 걸친 상태로 오직 발길질만으로 군사들을 대적하였으나, 조금도 기세에서 밀리지 않았다.
“이렇듯 엄한 군졸들만 상하게 할 터이냐? 우두머리가 직접 나와 겨루면 그만인 것을 이게 뭐하는 짓이더냐?”
거침없이 발길질하며 군사들을 때려눕히면서도 시선을 추자형에게 고정한 강혁수가 소리쳤다.
이에, 잔뜩 기가 질린 추자형이 애원하는 눈빛으로 팽무일을 바라보았다.
“알았다고. 알았어!”
팽무일이 말 잔등에서 몸을 날려 경공을 펼치며 소리치고는 곧장 강혁수를 향해 날아갔다.
이에, 강혁수도 팽무일이 보통내기가 아님을 깨닫고 어깨에 걸친 낭아봉을 일자로 뻗어 거리를 가늠하며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비켜라! 길이 좁다 물러나라!”
좁은 산길에 길게 뻗어 강혁수에게 달려들던 군사들의 어깨와 머리를 밟으며 팽무일이 소리쳤다.
이에, 군사들이 물러나자, 팽무일이 또 한 번 솟구쳐 날아오르더니, 검을 뽑아 들고는 허공에서 곧장 강혁수에게 내리꽂혔다.
“이놈 거북아! 내 낭아봉 맛을 보거라!”
강혁수가 벼락 치듯 소리치며 낭아봉을 휘두르니, 허공에 뜬 팽무일이 급히 파천신검 초식을 펼쳐 몸을 지키고는, 백두검법의 보법을 밟으며 강혁수의 머리를 걷어찼다.
“악!”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혁수가 뒤로 삼 장 날아가 머리부터 처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