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고립무의(孤立無依) 안시성 (4)
당항성에 도착한 김춘추는 바로 당항성 성주 석진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였다.
“성주, 이대로 내가 돌아가면 우리 신라는 백제의 등쌀에 살아도 산 것이 아닐 게요.”
아비 석원에 이어 성주에 오른 석진이 김춘추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안 돌아가시면, 여기 남겠다는 말이시오?”
“여기 남는다고 한들 백제왕 의지의 공세를 막을 방도는 없으니, 뭔가 수를 낸 후 돌아가야 할 것이오.”
이미 생각해 둔 말이 있는 듯한 김춘추가 심중의 있는 말을 꺼내지 못하니, 석진이 빙그레 웃었다.
“내게 하고픈 말이 무엇이오?”
이에, 기다렸다는 듯, 김춘추가 석진의 손을 붙잡고 애원하였다.
“부디, 성주가 당 군을 움직여 주시오.”
“당 군이라 하셨소?”
석진의 물음에 김춘추가 품에서 한 장의 서신을 꺼내 건네었다.
“내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갈 때, 이미 왕께 아뢰어 걸사표를 마련하였소이다.”
“걸사표?”
“그렇소. 고구려와 동맹이 불가할 경우, 당에게 보내기 위해 준비한 것이오.”
“허허, 걸사표를 지닌 채, 연개소문을 만나다니… 만일 연개소문에게 죽임을 당했다면 지니고 있던 이 걸사표도 발각되었을 터인데… 어쨌든 이렇게 그대가 목숨을 연명하여 실로 다행이구려. 허허, 이것 참.”
무모하게 걸사표를 지닌채 고구려에 사신으로 다녀온 김춘추의 행동이 기가 막혀 석진은 그저 웃었다.
“성주, 내 행동이 무모했음은 나도 잘 알고 있소. 허나, 지금 우리 신라는 바람 앞에 작은 불꽃과도 같은 신세요. 그대는 이 당항성에 있어 모를 듯하나, 하루가 멀다 하며 백제왕 의자가 공격을 가해오고 백제와 연합한 고구려도 우리 신라에 적의를 지니고 있소.”
장황히 말하는 김춘추의 말을 석진이 잘라 물었다.
“허면, 그대는 내가 무엇을 하길 바라는 게요?”
이에 김춘추가 바로 답하였다.
“그대가 사신으로 당 황제를 만나 이 걸사표를 전해 주시구려.”
김춘추의 부탁에 석진이 의아해 고개를 갸웃하였다.
“내가? 내가 직접 당 황제에게 이 걸사표를 건네고, 당 군을 끌어들이란 게요?”
“그렇소, 성주.”
“허면, 그대는 무엇을 하고?”
이에, 김춘추가 탁자 위에 놓인 찻잔에 손가락을 넣어 찻물을 묻히고는 찻물로 탁자 위에 한수를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는 이곳으로 상주군을 이끌고 올 것이오.”
“이게 뭐요?”
석진이 김춘추가 그린 한수를 보며 물으니, 김춘추가 다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답하였다.
“한수요.”
“한수? 그럼 이쯤이 평양성이고, 여기는 당항성이요?”
석진도 찻물을 손가락에 묻혀 탁자에 그리니, 김춘추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였다.
“그렇소. 그리고 여기는 한수의 고구려 거점 당포성이요. 당군이 요동으로 고구려를 공격하면, 우리 신라는 상주군을 이끌고 당포성을 친 후, 평양성으로 들어갈 거요. 그리고 성주가 당항성의 수군을 이끌고 폐수로 들어가면 고구려는 삼면으로 공격 받아 필히 무너질 것이오.”
“우리 당항성 군도 움직여 폐수로 들어가야 한다?”
석진이 자신의 의견도 묻지 않고 마음대로 출병을 정한 김춘추가 못마땅해 물었다.
이에, 김춘추가 고개를 끄덕이며 석진의 손을 잡고 답하였다.
“성주, 고구려는 강한 나라요. 당포성으로 내가 상주군을 이끌고 진격한들 반드시 평양성을 함락시킬 것이라 장담할 수는 없소. 그대가 폐수로 진입해야만 평양성 함락이 가능하오. 왕께서도 그대의 도움이 필요하다 여기시니, 성주 그대가 힘을 보태주시기 바라오.”
“당 황제 이세민은 불세출의 영웅으로 그의 군대는 패배를 모르고 있소. 그런 당 군이 요동을 치고 내려온다면 평양성 함락은 손쉬울 터인데, 굳이 상주 군과 당항성 군이 움직여야 할 이유가 있소?”
석진이 출병을 꺼리며 이렇듯 답하니, 김춘추가 석진의 두 손을 붙잡고 사정하듯 말하였다.
“당은 외세요. 그 외세가 고구려를 삼키면, 훗날 우리 신라도 삼키려 들 수 있소. 하여, 우리 신라가 당 군보다 먼저 평양성을 함락하여 고구려 땅에 지배력을 확보하려는 게요.”
당 군을 불러들여 고구려를 멸한 뒤, 고구려 땅의 지배권을 신라가 차지하겠다는 의도였다.
김춘추의 계책에 석진이 껄껄 웃었다.
“허허, 당 군은 결국 먼길 원정와서 군사들만 잃고, 고구려 땅은 우리 신라가 차지한다는 말이구려.”
“그렇소. 요동은 당 군이! 압록수 이남부터 평양성에 이르기까지는 우리 신라가 차지하게 될 게요.”
“당 황제가 가만 있겠소?”
이에, 김춘추가 빙그레 웃으며 답하였다.
“요동에서 지친 당 군이기에, 우리가 빠르게 평양성을 함락시키면 당 황제도 요동에서 숨을 고르고 머문 뒤, 돌아갈 수 밖에 없을 게요.”
김춘추의 말에 석진이 묘한 미소를 띠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평양성이라…….”
* * *
긍정도 부정도 표하지 않은 석진이 밤을 핑계로 김춘추를 침소로 보낸 후, 책사 장솔을 불렀다.
“이것이 한수고, 여기는 평양성이며… 이곳은 당포성이라 하네.”
석진이 찻물로 그려진 지도를 가리키며 말하니, 장솔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허면, 이것은 폐수이옵니까?”
평양성으로 이어진 하나의 물줄기를 바라보며 석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당항성의 수군이 이 폐수로 진입하겠군요. 당군은 요동을 공격하고 말이지요.”
“그렇다고 하네.”
“하오면, 김춘추가 성주에게 당 황제를 만나 걸사표를 전하라 청하더이까?”
장솔이 마치 본 듯 물으니, 석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장솔이 미소지으며 말하였다.
“성주, 응하십시오.”
“수락하라?”
“그렇습니다.”
“이 전쟁으로 우리가 얻는 게 무엇인가?”
“평양성이옵니다.”
“평양성?”
석진이 의아해 물으니, 장솔이 차분히 답하였다.
“상주 군은 쉽게 당포성을 넘지 못할 것입니다. 연개소문은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오며, 백제가 고구려를 도와 한수 이남으로 군을 보낼 시, 상주 군은 한수를 넘기 어렵습니다.”
“허면?”
“우리가 폐수로 진입해 평양성을 함락하고, 요동의 당 황제를 불러들인다면, 황제는 크게 기뻐하며 성주를 왕으로 책봉할 것입니다.”
이에, 석진이 크게 기뻐 껄껄 웃었다.
“하하하, 과연 장솔이오! 날이 밝으면 황제에게 걸사표를 바치겠다고 김춘추에게 말하겠소. 하하하.”
날이 밝아 석진이 바라던 답을 전하니, 김춘추가 크게 기뻐하며 두 손을 잡고 감사를 표하였다.
“성주, 고맙소! 왕께 그대의 충심을 내 그대로 전하겠소이다.”
* * *
나름 성과를 거두었다고 믿은 김춘추가 떠난 뒤, 석진도 장솔과 함께 바다를 건너 당으로 향하였다.
오랜 여정 끝에, 장안성에 당도한 석진이 입조하여 황제 이세민을 알현하고 걸사표를 바쳤다.
“그대가 명성이 자자한 당항성 성주 석진인가?”
걸사표를 펴 읽지도 않은 채, 황제 이세민이 물었다.
“송구하옵니다.”
석진이 머리를 조아려 답하니, 황제 이세민이 빙그레 웃었다.
“그래, 그대가 바친 이것은 무엇인고?”
“걸사표이옵니다?”
석진의 대답에 황제 이세민은 아직 펴지도 않은 걸사표를 왼손바닥에 탁탁 치며 웃었다.
“걸사표라? 허허허. 그대들 신라는 수의 황제에게도 걸사표를 바치며 전쟁을 구걸하였다지? 어찌 그대들은 스스로 군을 일으켜 살길을 찾지 않고, 외세에 의지하려는 겐가? 부끄럽지 않은가?”
마치 꾸짖듯, 조롱하듯 묻는 황제에게 석진이 공손히 답하였다.
“부끄럽사옵니다.”
“부끄럽다?”
“그렇사옵니다.”
“부끄러운데도 이 걸사표를 들고 왔다?”
이세민이 조롱하듯 물으니, 석진이 자세를 바로하고 진중히 답하였다.
“왕께서 이르시길, 황제께서 군을 일으켜 요동을 공략하시면, 신라의 상주 군은 한수를 넘어 평양성으로 진격할 것이고. 저희 당항성 군은 폐수를 통해 평양성을 공격할 터이니, 삼면에서 고구려를 압박하게 될 것이라 하셨나이다.”
“그래? 그대들 신라도 싸우겠다 이 말인가?”
“그렇습니다.”
이에, 황제 이세민이 껄껄 웃었다.
“하하하, 참으로 후안무치하구나. 네놈들이 나를 기만할 생각인가?”
웃음기를 거둔 황제 이세민의 눈빛이 이글이글 타오를고 있었다.
석진이 머리를 조아리고 아무런 답이 없자, 황제 이세민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요동을 공격하는 동안 너희 신라가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고구려를 취하겠다는 술책 아니더냐? 우리 당에겐 요동만 넘길 수작이겠지. 감히 나를 기만하고도 무사할 성싶은가?”
황제 이세민이 김춘추의 계책을 꿰뚫고 물었으나, 석진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폐하, 신라 왕의 생각이 어떠한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 당항성의 군은 폐수를 통해 평양성을 함락시킨 후, 황제 폐하께 고구려를 바칠 것입니다.”
“뭐라? 그 말이 진정이냐?”
황제 이세민이 놀라 바로 물으니, 석진이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며 답하였다.
“폐하, 신라의 상주 군은 결코 당포성을 쉽게 넘지 못할 것입니다. 상주 군이 움직이는 순간, 백제가 군을 움직일 것이고, 신라 상주 군의 발은 묶일 것입니다. 허나! 물길로 움직인 우리 당항성 군은 다르옵니다.”
“허나, 네가 평양성을 취한 후 내게 바치면, 신라 왕이 너를 벌하지 않겠는가?”
“황제 폐하를 모심에, 신라 왕의 벌이 두려울 리 있겠나이까? 저희 석 씨도 신라의 왕성이었으니, 지금의 신라 왕과 비교 시, 그 격이 낮다고는 말하기 어렵나이다.”
석진이 자신은 신라 왕보다 황제 이세민에게 충성을 바칠 것이며, 자신 또한 신라의 왕성임을 은연중 내세우니, 황제 이세민이 흡족해 빙그레 웃었다.
“너의 충심을 믿겠노라. 네가 평양성을 바친다면, 나는 너를 고구려 왕에 책봉할 것이다. 내 너를 믿고 요동으로 출병할 것이니, 너 역시 성심을 다해 평양성 공략에 임하라!”
“황은이 망극하나이다. 소신 석진 필히! 평양성 함락에 선봉을 서겠나이다!”
* * *
석진이 물러나자, 황제 이세민에게 위증이 아뢰었다.
“폐하, 수의 두 황제가 요동 공략을 네 차례나 했으나, 결과는 참담하였나이다. 고구려가 제아무리 강대하다 여기며, 고개를 치켜세운들 변방의 작은 오랑캐일 뿐입니다. 작은 오랑캐를 벌하기 위해 요동 정벌에 나서면 손실만 크고 얻을 것은 작으니, 정벌은 불가하옵니다.”
이에, 장손무기가 나서 이견을 내었다.
“폐하, 위증의 말은 앞뒤가 다르옵니다. 변방의 작은 오랑캐를 벌함에 손실이 크다고 말하나, 전쟁을 치르지 않고 어찌 손실을 논할 수 있겠나이까? 또한 고작 변방의 작은 오랑캐를 벌함에 우리 당 군의 손실은 가당치도 않나이다.”
“그대의 말이 옳다.”
황제 이세민이 고개를 끄덕이니, 장량도 장손무기의 말을 거들고 나섰다.
“폐하, 지금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왕을 시해하는 극악무도한 악행을 저지르고 전권을 휘두르는 형국이옵니다. 이에, 요동의 안시성은 연개소문을 따르지 않고 반기를 들고 있으니, 우리 당 군이 요하를 넘을 시 필경 안시성의 온달이 기뻐 성을 바치며 폐하를 맞이할 것이옵니다.”
이에, 위증이 헛웃음을 지으며 말하였다.
“안시성의 성주가 따로 있고, 온달은 몸을 의탁한 신세거늘 어찌 성을 황제께 바치고, 어찌 온달이 황제를 기뻐 맞이할 것이라 여기는 게요?”
자신의 말을 위증이 날카롭게 지적하니, 장량이 얼굴을 붉히며 황제 이세민에게 아뢰었다.
“안시성은 요동은 물론, 고구려 내에서 고립무의 신세로 언젠가는 반드시 연개소문에게 함락되어 도륙 날 처지입니다. 이 고달픈 처지를 폐하께서 위로하신다면 안시성의 성주와 온달은 폐하를 섬기고자 안시성을 바치며 충성을 다짐할 것이옵니다.”
“고립무의?”
황제 이세민이 바로 물으니, 장량이 머뭇거림 없이 답하였다.
“그렇사옵니다. 현재 안시성은 성문을 굳게 닫고는 요동 이십여 성과 일체의 교류를 끊었으며, 평양성 연개소문의 지휘도 받지 않고 있나이다.”
이에, 위증이 앞으로 나와 황제 이세민에게 간하였다.
“온달과 안시성 성주가 연개소문을 따르지 않는다고 하여, 폐하를 따르란 법은 없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