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고립무의(孤立無依) 안시성 (3)
함께 번영을 이루자는 김춘추의 제안에 태앙 보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개소문을 바라보았다.
“대막리지, 신라와의 동맹을 어찌 생각하시오?”
태왕 보장이 공손히 물으니, 개소문이 김춘추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답하였다.
“폐하, 송구하오나! 북주 잔당과 돌궐이 연합하여 우리 고구려를 침공하였을 당시, 신라의 각간 김서현은 우리 고구려의 영토를 침범하였나이다. 본디, 삼한은 좁고 나눠 먹을 것이 보족하기에, 함께 번영은 불가하옵나이다.”
이에, 김춘추가 급히 허리를 굽혀 말하였다.
“송구하오나, 당시의 잘못은 저희 신라도 깊이 통감하고 있나이다. 같은 잘못을 반복해 저지를 만큼 어리석지 않사오며, 백제와 동맹을 맺은 고구려가 저희 신라와도 동맹을 맺게 된다면, 고구려의 남녘이 안정되어 고구려의 백성들은 마음 편히 밭을 갈게 될 것이옵니다.”
김춘추의 말도 그럴싸하여, 태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개소문에게 말하였다.
“우리 고구려의 남녘이 안정될 것이란 말은 듣기가 매우 좋구려. 대막리지는 어찌 생각하시오?”
이에, 개소문이 태왕 보장을 잠시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김춘추를 엄히 꾸짖었다.
“통감하고 있다는 말보다, 행동이 중요한 법! 신라가 정녕 잘못을 통감하고 있다면, 당시 침범하여 빼앗은 우리 고구려의 영토를 원래대로 돌려 놓고, 침공군의 수장 각간 김서현을 우리 고구려에 보내어 사죄케 해야 하지 않은가?”
이에, 어린 화랑 김유신의 눈에 잠시 살기가 어렸다.
짧은 순간이었으나, 이를 놓칠 개소문이 아니었다.
‘이 조그맣고 맹랑한 놈 봐라? 순간순간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여 살기를 고스란히 노출하는구나. 스스로는 제법 기개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일국의 사신을 수행하는 신분으로 신중하지 못한 놈이로다. 이런 놈을 성충은 어찌 경계하고 있는 것인가?’
내심 김유신을 업신여긴 개소문의 경계가 느슨해졌다.
이에, 개소문의 눈치를 살핀 김춘추가 공손히 허리를 굽혀 말하였다.
“대막리지 합하의 말씀이 백분 옳습니다. 동맹을 맺기 위한 저희 신라의 자세가 옳바르지 못함을 이해하였사오니, 동맹을 확약 받고 소인이 신라로 돌아간다면, 영토를 바르게 하고, 각간 김서현에게 사죄토록 하겠나이다.”
김춘추의 말에 진정이 담긴 듯하여 태왕 보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또다시 개소문에게 의견을 구했다.
“동맹을 확약한다면 영토를 돌려주고 각간 김서현이 사죄한다고 하니, 우리 고구려로선 해가 될 일은 없는 듯한데… 대막리지의 생각은 어떠시오?”
태왕 보장의 표정에서 김춘추의 말을 신뢰하는 기색을 읽은 개소문이 잠시 눈을 감고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송구하오나 폐하, 하루만 시간을 주시옵소서. 오늘 밤 저자를 저의 집으로 데려가 밤새 대화를 나눈 후, 내일 결과를 말씀드리겠나이다.”
이에, 태왕 보장이 흡족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구려 대막리지.”
* * *
신라의 사신 김춘추와 어린 화랑 김유신을 데리고 집에 돌아온 개소문은 마중 나온 연수영과 단 사부에게 바로 명하였다.
“저들에게 숙소를 내어주고, 누가 저들을 해하지 못하도록 삼엄히 경계를 세워라!”
이에 연수영이 의아해 오라버니 개소문에게 물으려 하니, 눈치 빠른 단 사부가 재빨리 답하였다.
“아무도 저들을 해하지 못하도록 엄중히 경계를 세우겠나이다.”
함께 밤을 새우며 논의하겠다던 개소문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자신들을 감금하고 도망치지 못하도록 경계마저 세우니, 김춘추가 크게 놀라 부르짖었다.
“합하! 어찌 이러시옵니까? 일국의 사신을 어찌 감금하시나이까?”
이에, 개소문이 코웃음치며 말하였다.
“감금이라니, 우리 고구려를 침범하였던 신라의 사신을 누군가 해칠까 두려워 지키는 것이다.”
개소문의 이 말 속엔 김춘추와 김유신의 목숨을 노릴 수도 있음이 담겨 있었다.
단 사부가 사병을 불러 김춘추와 김유신을 강제로 끌고 가 숙소에 감금하고 경계를 세우니, 영락없는 감옥이었다.
‘성충이 죽여야 한다고 말했던 인물들이 내 손에 있다. 언제 죽일지만 결정하면 되니, 김춘추에게서 신라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캐낸 뒤 죽이도록 하자.’
생각을 정한 개소문은 조금도 조급하지 않았다.
* * *
방에 갇힌 김춘추는 개소문이 자신을 불러 동맹을 논하길 노심초사하며 서성였다.
이에, 김유신이 냉정히 말하였다.
“춘추공, 이자들은 결단코 우리를 살려 보낼 마음이 없습니다.”
“뭐라? 일국의 사신을 감금하고도 부족하여 죽인다라? 설마 그 정도로 연개소문이 막무가내일 리가?”
“춘추공, 연개소문은 마음먹은 바를 거침없이 행하는 인물입니다. 그자가 우리를 죽이겠다고 마음먹으면, 이 고구려 땅에선 그를 막을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게다가 여긴 그의 집이니, 우리 둘 죽이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쉬운 일입니다.”
“허면,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김춘추가 겁에 질려 물으니, 김유신이 바로 답하였다.
“도망쳐야겠지요.”
“경계가 이토록 삼엄한데 가능하겠는가?”
“우리는 고작 둘이고 경계가 삼엄하니, 저들의 마음도 느슨해졌을 것입니다. 저를 믿으십시오.”
어린 화랑 김유신이 장담하니, 그제야 김춘추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대만 믿겠소.”
이에, 김유신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후, 소매에서 작은 비수 두자루를 꺼내 양손에 쥐었다.
한 치도 안 되는 길이의 비수였으나 날이 시퍼렇게 살아 있어 매우 뛰어난 보검이 분명하였다.
“춘추공, 고구려는 틀렸으니. 당을 불러들이셔야겠습니다.”
문을 살며시 열며 김유신이 나지막이 말하니, 김춘추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조금 열린 문틈으로 김유신이 경계 서는 인원을 헤아려 보았다.
‘모두 셋. 병장기를 지니고 등에 활을 매었다. 아직 경계가 그리 삼엄하지는 않구나.’
호흡을 가다듬은 김유신이 크게 소리쳤다.
“신라에서 사신으로 오신 김춘추 공께서 대막리지 합하께 따로 드릴 말씀이 있다 하십니다. 말씀을 올려 주십시오!”
이에, 사병 하나가 문틈으로 머리를 내민 김유신을 힐끔 바라보고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시종이냐? 그래, 대막리지 합하를 뵙게 해달라고? 이 야심한 시간에?”
나이 어린 김유신에게 경계를 푼 사병이 어느새 삼 보 거리까지 다가와 있었다.
“나으리, 시간은 중요치 않습니다. 합하를 꼭 뵈어야 합니다.”
“우린 여기를 지키는 처지라서… 합하가 시간을 내어주실지는 모르겠구나. 그래 무엇 때문에 뵙고자 하는지 알아야 말씀을 올리지.”
이에, 김유신이 한숨을 내쉬고는 나지막이 말하였다.
“잠시만, 귀를 내어주십시오.”
고작 열두살 어린 김유신의 청이었기에, 사병은 대수롭지 않게 여겨 성큼성큼 발을 옮겨 김유신에게 귀를 가져다 대었다.
“말해보거라.”
이에, 김유신의 눈에 살기가 담기더니, 양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악!”
짧은 비명과 함께 목이 베인 사병이 휘청이며 쓰러지자, 김유신이 재빨리 사병의 등에서 활을 뽑아 쥐고는 화살을 시위에 먹였다.
놀라 달려오던 사병 한 명이 화살에 맞아 쓰러지니, 다른 한 명이 호각을 입에 가져갔다.
그러나 빠르게 날아든 화살이 목을 뚫으니, 호각을 불기도 전에 명이 끊기고 말았다.
“춘추공 서두르십시오!”
순식간에 경계를 서던 사병 셋을 죽인 김유신이 빠르게 김춘추를 불렀다.
“춘추공, 곧 경계를 강화하기 위해 놈들이 올 겁니다. 서두르시지요.”
등에 활을 멘 김유신이 김춘추에게 검을 건네며 말하고는 발소리를 죽여 앞으로 나아갔다.
* * *
개소문의 집을 벗어나기 전까지 어린 화랑 김유신의 손에 목숨이 끊긴 사병의 수는 도합 아홉이었다.
하나같이 소리도 내기 전 화살을 목에 박아 숨통을 끊었고, 말을 구한 김유신과 김춘추는 빠르게 남쪽으로 말을 달려나갔다.
경계를 삼엄히 하란 개소문의 명이 있었음에도 고작 어린아이 하나와 서생 한 명을 감금한 터라 안이했던 연수영과 단 사부는 크게 당황하여 곧 사병들을 이끌고 추격을 하였다.
밤을 새워 말을 달리니, 한수가 눈에 보일 무렵 김춘추와 김유신이 시야에 들어왔다.
“저들이 배를 기다리는 듯합니다.”
단 사부가 급히 말하며 말을 재촉해 내달리니, 연수영도 사병들에게 명하였다.
“서둘러 따라잡아라! 놓쳐서는 아니 된다!”
이에 단 사부가 앞서가고, 연수영과 사병 이십여 명이 그 뒤를 따르며 김춘추와 김유신을 쫓았다.
마침 멀리서 김춘추와 김유신이 기다리던 배가 강을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아마도 당항성에서 보낸 배인 듯했다.
“서둘러라!”
연수영이 목이 터져라 외치며 말을 달리던 그 순간, 앞서 달리던 단 사부가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악!”
연수영이 급히 단 사부를 바라보니, 언제 날아들었는지 화살 한 대가 단 사부의 목에 박혀 있었다.
“단 사부!”
말에서 떨어진 단 사부를 향해 말 달려가던 연수영의 두 눈에 어느새 배에 오르며 화살을 겨누고 있는 김유신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놈! 이 어린놈이!”
연수영이 노해 소리치던 그 순간, 김유신이 살을 날렸다.
이에, 연수영은 급히 말에서 뛰어 내려 화살을 피했다.
머리 위로 화살이 날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말에서 떨어진 연수영이 고통에 신음을 토했다.
“으…….”
이때, 배에 오른 김춘추가 연수영을 향해 소리쳤다.
“대막리지 합하께 다시 뵙자고 전해주시구려! 환대 고마웠고, 배웅 또한 감사하오! 하하하.”
어느새 배는 멀어져갔고, 발목이 접질린 연수영이 절뚝거리며 단 사부에게 달려갔다.
연태조를 섬기며 숱한 전장과 사지에서도 살아 돌아왔던 단 사부가 고작 열두 살 어린 화랑 김유신의 화살을 피하지 못하고 절명해 있었다.
“이… 찢어 죽일 놈들이…….”
연수영이 기가 막혀 단 사부의 시신을 끓어 안고 오열하니, 사병들은 허망하여 그저 멀어져 가는 배를 바라볼 따름이었다.
연수영이 단 사부의 시신을 말에 태워 데리고 돌아오니, 개소문이 황망히 달려와 중얼거렸다.
“어리다 하여… 너무 방심하였구나. 단 사부, 어찌 이리 허무히 가셨소. 단 사부…….”
쉽게 감정을 드러내던 고작 열두살의 어린 화랑 김유신이었으나, 살생을 함에 있어선 야차와도 같았으니, 성충이 반드시 목을 베어야 한다고 거듭 당부했던 것이 기우가 아니었음을 개소문도 깨닫고 있었다.
“내 나이 때보다 진중하지 못하다고 너무 얕보았다. 김유신은 쉽게 감정을 노출하는 어린아이지만, 살의 만큼은 나보다 윗선이었다. 이런 위험한 아이를 살려 보냈음은, 훗날 우리 고구려에 큰 재앙이 될 것이다. 집에 들이자마자 목을 베었어야 했는데…….”
신라로 돌아간 김춘추의 다음 행보가 불을 보듯 뻔하니, 개소문은 조금도 지체할 수 없었다.
“숭무당으로 사람들을 불러라!”
비밀리 논의를 하기 위해 따로 별채를 꾸민 숭무당으로 개소문 휘하 장수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 * *
단 사부의 죽음을 전해 들은 연정토는 크게 분노하였고, 타인의 죽음을 보는 여인 모용설은 기가 막혀 입도 열지 못하였다.
성미 급한 모용상이 치를 떨며 말하였다.
“성충이 공연히 죽이라 한 게 아니었습니다. 이놈들이 당항성으로 갔다면,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당에 사신을 보낼 것입니다.”
이에, 개소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 지금부터 전쟁을 준비해야겠구나.”
이때, 공손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당과의 일전을 벌이기 전, 안시성부터 제압하소서.”
화근을 남겨 두고 당과 싸울 수 없음을 지적한 것이다.
이에, 개소문이 눈을 감고 답하지 않으니, 당진평이 결단을 재촉하였다.
“안시성이 고립무원 상태가 되면, 당에도 소문이 돌 것입니다. 이는 곧 고구려의 약점이 될 것이니, 반드시 제압하여 큰 전쟁을 대비해야 합니다.”
이에, 개소문도 더는 침묵할 수 없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당은 언제 침공할 것 같소?”
공손향이 차분히 답하였다.
“곧 신라가 걸사표를 보낼 것이고, 봄이 오면 출병할 듯합니다.”
“허면, 겨울이 오기 전에 안시성을 제압하도록 하겠소.”
마침내 개소문이 결단을 내리니, 고구려의 내전이 임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