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고립무의(孤立無依) 안시성 (2)
청년 장수에게 제법 호감이 생긴 막바우가 애써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말하였다.
“땅에 처박기 전에 어서 이름을 대고 용서를 구하거라!”
기세 좋은 막바우가 여전히 청년 장수를 번쩍 들어 올린 채였으나, 순간 청년 장수의 무릎이 획 구부러지더니 막바우의 관자놀이를 가격하였다.
“악!”
청년 장수가 쥔 낭아봉만 경계하던 막바우였기에, 예기치 못한 공격에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막바우에게 잡혀 번쩍 들어 올려진 청년 장수도 머리부터 바닥에 처박히며 쓰러졌고 충격이 심한 듯 움직이지 못하였다.
청년 장수보다 먼저 충격에서 벗어난 막바우가 급히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던 청년 장수가 낭아봉을 놓고 번쩍 일어나 막바우의 머리를 걷어찼다.
“어이쿠!”
그러나 비명은 막바우가 아닌 청년 장수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청년 장수의 발길질에 머리를 내어 줄 것만 같았던 막바우가 오히려 맹렬히 달려들어 청년 장수의 허리춤을 쥐고는 번쩍 들어 올린 뒤 자신의 허리를 뒤로 확 제쳐 머리 뒤로 집어 던진 것이다.
또다시 바닥에 머리부터 처박힌 청년 장수가 큰 대자로 뻗자, 막바우가 히죽 웃으며 다가가 비웃었다.
“맹랑한 놈이로고.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버르장머리 없는 놈 같으니.”
이때, 큰 대자로 뻗은 청년 장수의 눈이 빛나더니, 막바우의 발목을 낚아채고는 빠르게 당겼다.
순간 중심을 잃은 막바우가 벌러덩 넘어가니, 청년 장수가 막바우의 몸에 올라타고는 안면에 주먹을 날렸다.
“아이고!”
막바우의 코에서 피가 흐르고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에 청년 장수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이제 그만 항복하고 나를 곱게 안으로 들여보내는 것이 어떠냐?”
막바우의 얼굴에 주먹을 들이밀며 청년 장수가 엄포를 놓으니, 막바우가 오만상을 쓰며 소리쳤다.
“오냐! 어디 쳐보거라!”
이에 청년 장수가 당황하여 주먹을 날릴지 말지 주저하는 사이, 막바우가 강하게 허리를 튕겨 몸을 깔고 앉은 청년 장수를 들어 올렸다.
순간 몸이 자유로워진 막바우가 양손을 뻗어 청년 장수의 목을 쥐었고, 청년 장수도 급히 막바우의 목을 쥐며 버텼다.
서로가 서로의 목을 쥐어 누르는 형국이 되니, 구경하던 군사들이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누, 누가 이기고 있는 건가?”
“그… 글쎄, 서로가 서로의 목을 쥐고 누르니 알 도리가 없구먼.”
밑에 깔린 막바우의 얼굴도 벌겋게 달아올랐고, 올라탄 청년 장수의 얼굴도 타오르듯 붉어져 있었다.
“주… 죽고… 싶지… 않으면… 손 놔!”
막바우가 간신히 입을 열어 청년 장수를 협박하였다.
그러나 청년 장수 역시 만만치 않았다.
“숨… 숨… 쉬고 싶으면 살려달라… 빌어! 어서… 빌라고… 살려 줄게… 살려 줄 거라고!”
“너부터… 살려… 달라고 빌어! 숨… 못 쉬면… 죽는다… 살려 줄 때… 살아라!”
“편해지고… 싶지… 않은가? 이 맑은… 공기… 마시고 싶지… 않은가?”
서로가 서로에게 먼저 빌라 애원하였으나, 그 누구도 먼저 손을 풀 생각이 없는 듯하였다.
“사… 살려… 줄게… 어서 빌어…….”
막바우가 간신히 애원하듯 말하였고 청년 장수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내… 가… 먼저… 살려 준다… 말한 것 같은데…….”
“아니… 아니야… 내가 먼저… 살려 줄 것이라… 말했다고…….”
점점 더 얼굴이 붉어지던 두 사람이 끝까지 고집을 부리니, 군사들의 보고로 달려온 경우가 한숨을 내쉬며 청년 장수의 뒤통수를 손날로 후려쳤다.
“컥!”
짧게 비명을 토한 청년 장수가 막바우의 얼굴을 덮고 쓰러졌고, 그 틈에 손이 풀린 막바우가 기뻐 소리쳤다.
“내가 살려준다고 했지! 하하하. 내가 이겼다! 내가 살려줬다고! 하하하.”
기절한 청년 장수에게 깔리고도 막바우가 크게 기뻐하니, 경우가 혀를 찼다.
“잘났다 정말…….”
* * *
군사들이 청년 장수를 꽁꽁 묶어 양만춘과 온달의 앞에 무릎 꿇리니, 막바우가 낭아봉을 들고 와 청년 장수의 옆에 놓았다.
“너는 누구냐?”
양만춘의 물음에 청년 장수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이에, 막바우가 청년 장수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말하였다.
“나라고 말하면 혼난다. 성실히 답해.”
이때, 온달이 청년 장수의 낭아봉으로 시선을 옮겨 바라보더니 고개를 갸웃하였다.
“너 혹시?”
온달의 물음에 청년 장수가 방긋 웃으며 답하였다.
“그렇소! 나요!”
청년 장수가 또다시 나라 말하니, 막바우가 청년 장수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꾸짖었다.
“이놈아! 나라고 말하지 말라 했지?”
이에, 온달이 손을 내저으며 막바우를 제지하였다.
“막바우! 그만하게!”
“이놈 버르장머리 좀 고쳐 놓고요.”
“아니, 아니 그만하시게!”
온달이 버럭 소리 지르며 청년 장수에게 바짝 다가가 얼굴을 살폈다.
“그래, 너… 너 맞구나!”
“그렇소. 나 맞습니다.”
온달이 급히 청년 장수의 포박을 풀어주니, 의아한 막바우가 경우에게 바짝 다가가 살며시 물었다.
“장군과 아는 사이인가 봐.”
이에, 경우가 한심하다는 듯 막바우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청년 장수의 옆에 놓인 낭아봉을 가리켰다.
“봐! 보라고… 보면 몰라?”
“뭘 봐? 저거? 낭아봉이잖아. 저게 왜? 어… 어?”
낭아봉을 바라보던 막바우의 눈이 점차 커져 갔다.
“서… 설마? 너 혹시?”
막바우가 급히 청년 장수를 일으켜 세우며 얼굴을 천천히 살폈다.
“너… 혹시?”
“그렇소이다. 나요, 장군.”
“그래… 너 맞구나! 어릴 적에 보고 못 봤더니… 그래! 너 맞구나!”
막바우도 청년 장수를 알아봤는지 번쩍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사실, 청년 장수는 강이식의 차남 강혁수로, 온달과 막바우는 그가 어릴 적 강이식의 집에서 자주 보곤 했었다.
강혁수가 열살되던 해 조의선인에 들어가 집을 떠나며 얼굴을 보지 못한 지 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혁수의 얼굴에서 강이식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이제야 알아보는 모양이네.”
한심하다는 듯 막바우를 바라보며 경우가 중얼거렸다.
“아냐, 알아봤다고!”
막바우가 일부러 크게 소리쳤으나, 경우는 조금도 믿지 않았다.
“그래, 알았으니 소리 지르지 마. 시끄러워.”
강혁수는 막바우를 알아보고 짓궂게 장난친 듯하였으나, 막바우는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죽일 듯 살릴 듯 싸웠으니 꽤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이내 곧 술상이 마련되고 온달이 강혁수의 잔에 술을 따라주며 말하였다.
“많이 컸구나. 우리 동이와 나이가 같았던가?”
“그렇습니다, 숙부.”
강혁수가 답하며 온동을 힐끔 바라보았다.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온동이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려서 몇 차례 본 적 있었으나, 십 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많이 변했을 것 같습니다.”
앞을 볼 수 없는 온동이 기억 속 강혁수의 모습을 떠올리며 말하니, 온달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에, 평강이 부드럽게 말하였다.
“동아, 혁수의 모습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단다. 네 기억 속 그대로란다.”
강혁수도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맞습니다. 동아, 내 모습은 네 기억 속 그대로란다.”
이에, 막바우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였다.
“조금도 그대로는 아니지만, 아무튼 잘 왔다. 고생 많았겠구나.”
“고생은 없었으나, 울분은 참기 어려웠습니다.”
강혁수가 단번에 술을 들이킨 후, 잔을 온달에게 바치며 마저 말하였다.
“온달 숙부! 제게 군사를 주십시오. 대역무도한 연개소문의 목을 가져오겠습니다.”
이에, 모두의 시선이 온달에게로 향하였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온달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혁수, 너의 뜻은 잘 알겠다. 허나, 고구려 군사들끼리 피를 흘려서는 아니 된다.”
“허나, 숙부!”
“나 역시 태왕 폐하의 한과 대장군의 복수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까지 갈 수는 없다. 요동 이십여 성이 이 안시성을 고이 두지 않을 것이고, 고구려 군사들 간의 싸움은 당만 이롭게 할 따름이다.”
“허면, 숙부는 개소문을 이대로 둘 생각입니까? 감히, 선친의 칭호마저 함부로 사용하며 스스로 검귀라 칭하고 있습니다!”
강혁수가 주먹을 불끈 쥐고 말하니, 마치 강이식이 살아 돌아온 듯하였다.
온달은 강혁수의 모습에서 강이식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혁수야, 이제 곧 겨울이 올 것이다. 나는 봄이 오면 홀로 평양성에 가, 개소문의 목을 벨 것이다. 나 혼자면 충분하니, 군사는 일으킬 필요가 없단다.”
이에 강혁수가 크게 감동하여 온달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였다.
“온달 숙부, 오해하여 죄송합니다. 용서하십시오. 우리에게 봄이 오면, 저도 숙부를 따라 평양성에 가겠습니다.”
선친의 원한을 풀고자 동행을 청하니, 온달도 만류할 수 없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성미 급한 막바우도 강혁수를 따라 동행하겠다고 외치려는 것을 경우가 옆구리를 쿡 찔러 막았다.
“막바우 자넨 좀 조용히 있게.”
군사들을 일으켜 평양성을 공략할 생각이었던 양만춘은 온달과 강혁수 둘만의 평양행을 찬성하지 않았다.
“온달 장군의 무용은 익히 잘 알고 있으나, 개소문은 결코 장군을 평양성 내로 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봄이 오기 전, 출병 준비가 완료될 터이니, 함께 가시지요.”
양만춘이 신중히 제안하니, 막바우도 이 말이 옳다 여겨 고개를 끄덕였다.
“성주의 말이 백번 옳구먼. 장군! 경거망동하지 말고, 봄에 함께 출병합시다!”
* * *
안시성에서 봄에 있을 출병으로 여러 말이 오가던 그 시점, 평양성엔 신라의 사신이 당도해 있었다.
김춘추가 어린 화랑 한 명만을 대동하고 동맹을 맺고자 온 것이다.
신라의 사신이 대전 안으로 들어와 태왕에게 예를 올리니, 개소문이 매서운 눈빛으로 물었다.
“그대가 여자 왕이 애가 닳도록 아낀다는 김춘추인가?”
조롱이 담긴 물음이었으나, 김춘추는 조금도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송구하오나, 합하. 왕께옵선 소신보다 이 화랑을 더 아끼시옵니다.”
김춘추가 자신의 뒤에 조용히 선 어린 화랑을 가리키며 답하였다.
“그래? 신라의 여자 왕은 어린 남자를 무척 좋아하는 모양이로다.”
개소문이 김춘추의 뒤에 선 화랑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라보며 말하였다.
이에, 어린 화랑의 눈에 순간 살기가 감돌았으나, 빠르게 평정을 되찾아 잔잔한 눈빛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개소문은 어린 화랑의 눈에 감돌았던 살기를 감지하여 유심히 바라보았다.
“얘야,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개소문이 일부러 어린 화랑을 자극하기 위해 조롱하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이에, 어린 화랑이 순간 분을 참지 못한 듯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김유신이라 하오.”
제법 당당히 답하였으나, 사신을 수행하는 신분으로서 예법에 맞지 않는 행동이었다.
어린 화랑 김유신이 쉽게 감정을 노출하니, 개소문이 빙그레 웃었다.
“네 나이가 몇이고?”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개소문이 물으니, 대전 안 모두가 껄껄 웃었다.
이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김유신이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답하였다.
“올해 열두 살이오.”
“열두 살? 생각보다 나이가 많구나. 다 컸네. 하하하.”
김유신에겐 놀리듯 들렸으나, 실상 개소문은 진정이었다.
개소문 자신은 열 살에 온달을 따라 적봉진으로 떠났으니, 열두 살이면 다 컸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래, 김춘추공과 어린 화랑 김유신이 우리 고구려를 찾은 이유가 무엇이오?”
김유신에게서 김춘추에게로 시선을 옮긴 개소문이 담담히 물었다.
이에, 김춘추가 태도를 공손히 하여 답하였다.
“대고구려의 강대한 힘을 믿고, 백제가 감히 우리 신라의 영토를 침범하고 있나이다. 이에, 우리 신라는 백제를 대적하고자, 고구려와 동맹을 원하오니, 부디 맹약을 통하여 함께 번영을 도모하소서.”
김춘추의 말에 개소문이 빙그레 웃으며 중얼거렸다.
“함께 번영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