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고립무의(孤立無依) 안시성 (1)
고구려의 모두가 개소문을 두려워하였고, 모두가 개소문을 증오하였다.
감히 태왕을 시해하고, 시신을 절단하여 폐수에 버린 대역무도한 행위는 공분을 불러있으켰다.
그러나 오랜 세월 고구려에서 세를 과시해 온 오부 귀족들은 연회장에서 살해되었고, 가솔들은 대대로 내려온 권세와 부마저 빼앗겨 복수를 다짐할 겨를조차 없었다.
이로써 평원 태왕부터 염원해 왔던 오부 귀족 해체는 이뤄졌고, 성충은 이들의 부를 모두 국고로 환수 조치하였다.
이 조치는 평양성을 비롯한 온 고구려 백성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자리에서 밀려난 이가 있으면 그 자리를 차지하는 이도 있는 법.
성충은 개소문에게 간하여 당과의 굴욕 외교를 반대하였던 이들을 중용하여 새로 조정을 꾸려 개소문의 세를 다졌다.
조정이 자리를 갖춰가자, 하룻밤 만에 비명횡사한 대소 신료들과 무장들의 가솔들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 혹은 복수를 다짐하기 위해 평양성을 탈출하였다.
이어서 성충이 백제와의 관계를 더욱 굳건히 다지라 개소문에게 간하니, 신라는 외롭고도 위태로운 신세가 될 처지였다.
모두가 증오하였던 개소문이 점차 자신만의 조정을 갖춰가니, 증오는 사라져 가고 두려움만 더해 갔다.
요동으로 돌아간 고정의와 고돌발이 요동 이십여 성의 충성을 확인하여 개소문에게 고하니, 고구려에서 개소문을 공개적으로 부정하는 곳은 오직 안시성뿐이었다.
개소문에 대한 증오를 품은 이들이 숨을 죽여 목숨을 연명하거나, 복수를 다짐하며 안시성으로 향하니, 이는 곧 새로 개소문을 따르게 된 이들의 심기를 불편케 하였다.
“안시성의 성주 양만춘은 새로 즉위하신 태왕 폐하께 충성을 다짐하지 않았을 뿐더러, 대막리지 합하를 따르지 않고 있나이다. 이들을 벌하여 기강을 바로 세우소서.”
새로 태대사자에 오른 극우여가 태왕에게 읍하며 아뢰었다.
이에 용상에 앉은 태왕 보장이 개소문의 눈치를 살피니, 개소문이 열에서 나와 태왕에게 말하였다.
“폐하, 지금은 평양성 안팎을 살피고, 요동의 민심을 다독일 때이옵니다. 개마무사 십오만을 양병하기에도 바쁜 시기이기에, 안시성을 벌할 여력은 없나이다.”
개소문이 안시성을 벌하지 않겠다며 잘라 말하니, 태왕 보장이 안심하여 안색이 밝아졌다.
“대막리지의 말이 옳습니다. 안시성을 벌하는 것은 추후 다시 논의하십시다.”
이에 개소문이 태왕 보장에게 고개를 끄덕여 간단히 답하고는 대전에 늘어선 신료들에게 호령하였다.
“바쁘고 급한 일이 따로 있으니, 그대들은 일의 경중을 가리기 바라노라!”
태왕을 등지고 서서 호령하는 개소문의 모습은 마치 범과도 같아서 그 누구도 감히 거역하지 못하였다.
대전을 나선 개소문에게 공손향이 다가와 살며시 말하였다.
“하지도 않은 태왕 시해를 합하께서 뒤집어쓰시어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안시성에 따로 기별을 넣어 오해를 푸시는 것이 어떠하온지요?”
이에 개소문은 쳐다도 보지 않고 담담히 말하였다.
“이제 갓 약관이 지난 나를 모두가 따르고 있다. 내 능력을 인정함이 아닌, 두려움 때문이다. 감히 태왕마저 사지를 절단하는 만행을 서슴지 않는 대악인. 그게 바로 나다. 고구려는 이 두려움으로 하나 되어 당을 대적해야 한다.”
“하오나, 합하. 온달과는 오해를 푸심이 당을 대적하기 수월하옵니다.”
“아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숱한 오해와 질시를 받아왔고, 단 한번도 오해를 스스로 푼 일이 없다. 오해가 있다한들, 이해득실만 못하니 애써 오해를 풀 필요는 없다. 안시성과 나는 이해 관계에 따라 각자 입장을 취하면 될 뿐이다.”
개소문이 안시성을 힘으로 제압하여 따르게 하지도 않고, 오해를 풀 생각도 없으니 공손향은 마음이 무척 답답하였다.
이에 뒤따르던 팽무일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공손향에게 말하였다.
“고작 성 하나뿐이야. 너무 신경 쓸 필요 없다고. 안시성은 그냥 무시하자고. 설마 온달이 군을 이끌고 내려오기야 하겠어?”
자신의 어린 조카가 안시성에 있기에, 피를 보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때, 대전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성충이 빠르게 다가왔다.
“합하, 아뢸 것이 있나이다.”
“무엇인가?”
개소문의 물음에 성충이 주위 시선을 의식하니, 개소문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말하였다.
“가서 말하자.”
자리를 옮겨 개소문의 측근들만 주위에 있으니, 성충이 입을 열었다.
“합하, 송구하오나 소인은 이제 백제로 돌아가야 할 듯합니다.”
“그대가 생각한 정변은 완성된 것인가?”
개소문의 물음에 성충이 빙긋 웃으며 답하였다.
“모둑 두려워하고, 모두가 합하를 따르니. 이제 합하가 고구려에서 못하실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에, 개소문도 성충을 붙잡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성충은 백제의 왕종 부여 씨다. 그를 껄끄러워하는 이들도 대전에 있고, 백제 왕 의자도 그가 내 곁에 오래 남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떠나고자 한다면 보내 주는 것이 나를 도운 그에게 내가 의를 지키는 길이다.’
개소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성충이 허리를 굽혀 예를 올리며 말하였다.
“합하의 배려 감읍하나이다. 합하, 제가 떠난 뒤 신라에서 사신으로 김춘추가 온다면 반드시 그의 목을 베소서.”
“김춘추?”
개소문이 의아해 물으니, 성충이 차분히 설명하였다.
“신라는 여자가 왕으로 대를 이을 후손이 없나이다. 하여, 다음 왕은 여왕 선덕이 아끼는 김춘추가 될 것이온데, 이자는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지위와 나이를 따지지 않고 벗으로 삼으니, 나이 어린 화랑들이 그를 성심으로 따르고 있나이다.”
“화랑? 화랑은 어린애들 아닌가? 마흔이 넘고, 다음 왕이 될 이가 어린애들과 벗으로 지낸다라… 그래, 그자를 내가 왜 죽여야 하는가?”
개소문이 의아해 물으니, 성충이 바로 답하였다.
“김춘추는 다음 왕이 될 인물이며, 이자를 따르는 이들인 화랑들 또한 신라의 장수가 될 아이들입니다. 이 아이들은 죽음으로 전장에 나서, 물러서지 않음을 도리라 배워 따르기에, 반드시 고구려와 백제에 큰 위협이 될 것입니다. 또한…….”
“또한?”
“사신으로 온 김춘추를 살려 보낸다면 이자는 반드시 당에 걸사표를 보낼 것입니다.”
이에 개소문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답하였다.
“걸사표는 두렵지 않네. 이미 당과 일전을 각오하고 정변을 일으킨 죄를 덮어쓴 것이네. 허나, 자네가 그토록 김춘추를 두려워하니, 내 그가 오면 살피고 또 살핀 후 생사를 결정하겠네.”
두말하지 않는 개소문이었기에, 성충도 더는 간하지 않고 일어나 예를 올렸다.
“합하, 곧 전란이 있을 것입니다. 소인 백제로 돌아가 합하와 약조한 바를 성실히 이행하겠나이다.”
“나 역시 그대와의 약조를 지킬 것이네.”
두 사람이 무엇을 약속하였는지 팽무일이 궁금하여 입을 열려하자, 야수가 옆구리를 쿡 찔러 막았다.
공손히 예를 올리던 성충이 뭔가 떠올랐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김춘추의 벗 중에는 각간 김서현의 아들 김유신도 있사온데, 고작 열두 살의 나이로 화랑 중에 으뜸이라 손꼽히고 있나이다. 만일 김춘추가 이 아이와 함께 사신으로 왔다면, 반드시 둘 다 죽여야 하옵니다.”
개소문은 자신이 한번 결정하면 더는 간하지 않던 성충이 백제로 떠나기 전 이토록 김춘추를 죽이라 청하니, 무척이나 의아하여 성충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흐르고, 개소문이 입을 열었다.
“그대가 이토록 원하니, 김춘추의 머리는 내가 갖도록 하겠네.”
이에 성충이 감사를 표하며 재차 말하였다.
“함께 온 화랑 김유신도 베소서.”
* * *
개소문이 두려워 평양성을 탈출한 이들이 연일 안시성을 찾아왔다.
어떤 이는 증오를 담아 개소문을 처단해야 한다며 안시성 성주 양만춘에게 출병을 강권하였고, 어떤 이는 복수를 다짐하며 때를 기다리자 말하였다.
폐족이 된 귀족들이 재물과 사병을 이끌고 투항하기도 했고, 비명횡사한 무장들과 신료들의 가솔들이 힘을 보태고자 군사들을 이끌고 오기도 하였다.
하루가 다르게 안시성의 군세는 커져만 갔고, 이를 지켜보는 주변 성들과 평양성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언제든 개소문이 군사들을 이끌고 안시성을 무력으로 진압할 듯하였고, 그전에 안시성 성주 양만춘과 온달이 군사들을 이끌고 개소문을 벌하러 출병할 것만 같았다.
신성 성주 고정의와 건안성 성주 고돌발이 직접 안시성을 방문하여 양만춘과 온달을 만나고자 했으나, 안시성의 성문은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굳게 닫혀 있을 따름이었다.
개소문을 반대하는 이들에겐 열리던 성문이 자신들에겐 굳게 닫혀 있으니, 고정의와 고돌발은 안시성의 뜻을 백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계절이 두 번 바뀌어 가을이 시작되는 무렵, 거대한 낭아봉을 손에 쥔 청년 장수가 말도 없이 안시성을 찾아왔다.
개소문이 대군을 이끌고 무력으로 안시성을 제압할 것이란 흉흉한 소문이 돌았기에, 안시성의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셩벽 위 군사들은 경계를 삼엄히 하고 있었다.
“성문을 열라!”
청년 장수의 외침에 마침 성벽 위에 있던 막바우가 내려다보며 물었다.
“뭐냐?”
대뜸 짧게 묻는 막바우를 올려다보며 청년 장수가 답하였다.
“나다! 성문을 열라!”
“뭐? 나다? 나다는 내가 네놈에게 할 소리고! 너 뭐냐고?”
막바우가 인상을 험악히 구기며 호통을 쳤으나, 청년 장수는 조금도 주눅들지 않고 답하였다.
“내가 나라 답하는 것이 뭐가 잘못이냐? 어서 성문이나 열라!”
이에 막바우가 분통을 터트리며 소리쳤다.
“이놈이 그래도! 너 거기 꼼짝 말고 있어! 내가 아니, 나다님이 내려갈 테니 기다려!”
씩씩거리며 성벽을 내려간 막바우가 성문을 지키는 군사들에게 명하였다.
“성문 열어! 내가 나가서 나다 좀 혼내주고 와야겠다!”
육중한 성문이 열리고 긴봉을 쥔 막바우가 청년 장수를 노려보며 봉을 겨누었다.
청년 장수의 키는 막바우보다 훨씬 컸으며 체격 또한 제법 다부졌고, 각진 턱은 매운 튼튼해 보였다.
눈은 범을 닮아 사납고도 당당하였으며, 오른손에 쇠로 만든 낭아봉을 쥐었는데 장정 키를 훌쩍 넘어 무척이나 거대하였다.
‘이놈 봐라? 위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체구도 제법이고 힘이 장사네. 어디 실력이 얼마나 되는지 살펴나 볼까?’
막바우가 청년 장수를 훑어 보고는 가늠하기 위해 도발하였다.
“매 맞고 돌아갈래? 그냥 갈래? 아니면 공손히 인사 올리고 들어올래?”
“네가 내게 매질할 실력이 있다면 나는 네놈에게 맞고 돌아갈 것이다. 허나, 네놈이 그런 실력이 없다면 네놈이 매 맞고 나를 성 안으로 들여야 할 것이다.”
“뭐라?”
오히려 청년 장수가 도발하니, 울화통이 치민 막바우가 달려가며 봉을 휘둘렀다.
독고선에게 배운 독고창법을 열심히 수련한 덕에 막바우의 봉 끝이 살아 움직이듯 휘며 바람을 갈랐다.
이에 청년 장수는 손에 쥔 거대한 낭아봉을 가볍게 휘둘러 봉끝을 막았다.
탕!
경쾌한 울림이 봉을 쥔 막바우의 손끝까지 전해졌다.
이에, 막바우가 보폭을 빠르게 좁혀 청년 장수에게 바짝 접근하며 봉을 옆으로 길게 휘두르니, 봉 끝이 획 돌아가며 청년 장수의 뒤통수를 노렸다.
정면에서 공격해 오던 막바우의 봉이 자신의 뒤통수를 노리자, 청년 장수가 크게 놀라 소리쳤다.
“대단하다!”
청년 장수는 막바우가 휘두른 봉끝을 피하거나 막지 않고 그대로 막바우에게 달려들었다.
탁!
막바우의 봉끝이 청년 장수의 뒤 통수를 찍었고, 이와 동시에 청년 장수가 내지른 왼손이 막바우의 턱을 강타하였다.
“큭!”
강한 타격에 턱이 살짝 들어 올려지자, 막바우가 이를 악물며 신음을 입속으로 삼키고는 바짝 다가온 청년 장수의 가슴팍으로 머리를 들이 박았다.
퍽!
막바우의 이마가 자신의 가슴팍을 후려치자, 청년 장수가 휘청이며 한발 물러 났다.
이에 막바우가 소처럼 달려들며 청년 장수의 가랑이와 목을 양손으로 잡아 번쩍 들어 올렸다.
“이놈! 어서 이름을 대거라!”
이때까지도 청년 장수는 오른손에 든 낭아봉을 막바우에게 휘두르지 않았고, 막바우도 청년 장수가 조금도 자신을 해치려 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내가 이놈을 들어 올렸지만, 내 양손은 이놈을 들고 있느라 무방비 상태다. 그럼에도 이놈은 낭아봉을 휘둘러 내 머리를 노리지 않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