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책사 성충 (2)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북장원의 목을 벤 개소문이 이제 자신의 목에 검을 겨누었음에도 성충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소인은 친위정변을 일으켜 태왕을 돕고자 왔습니다.”
“뭐라?”
개소문이 놀라 물으니, 성충이 손가락으로 살며시 검날을 치우며 태왕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안타깝게도 소인이 늦었고, 태왕을 돕지 못하였습니다. 하여!”
“하여?”
“장군을 도와 정변을 마무리하고 강한 고구려를 만들고자 죽음을 각오하고 이곳에 발을 들인 것입니다.”
“어찌 백제의 왕종이 강한 고구려를 갈망한단 말인가?”
개소문의 물음에 성충이 차분히 답하였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입니다. 우리 백제와 고구려는 강대한 당을 맞아 힘을 보태야 하고, 서로가 서로를 지켜야만 멸망을 초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있는 한! 당은 감히 우리 고구려를 넘보지 못할 것이다! 나는 두려움으로 사람들을 모으고 따르게 할 것이며, 강한 고구려를 만들어 당을 대적할 것이다. 남쪽의 백제가 북방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도울 일은 없다. 나는 너희 백제의 도움 따위는 필요치 않다.”
이에 성충이 살며시 고개를 저어 답하였다.
“장군, 정해가 아니옵니다.”
“뭐라?”
“당은 이전 수와는 다른 나라이옵니다. 당의 이세민은 백이십여 난을 평정하였고, 이때 그가 발휘한 전술은 빠른 기병과 함께 모든 병과가 한데 어우러진 보급이 필요 없는 진영이었습니다.”
“…….”
“오직 기병만으로 고구려를 침공했던 북주와 돌궐의 연합군과 다르고, 보병 위주의 수와도 그 전술이 상이한 군대입니다. 황제 이세민은 전술의 천재이며 그는 이전과 다른 전술로 고구려와 우리 백제를 공략할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냐? 만일 네놈의 말이 내 마음에 닿지 않는다면 나는 가차없이 네놈의 목을 칠 것이다.”
개소문이 단호히 말하니, 평정을 유지하던 성충의 등에서 한 줄기 식은땀이 흘렀다.
“당군은 신라와 연합할 것입니다.”
애써 차분히 성충이 말하였다.
“신라? 한 줌도 안 되는 신라와 연합한들 무엇이 두렵다는 게냐?”
“장군, 신라와 당이 연합한다면 고구려는 그간의 전쟁과 달리 요동과 한수에서 적을 맞아야 합니다.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 정벌에 나선 이상 당은 수군을 보내지 않을 것이고, 당항성의 막강한 신라 수군을 폐수로 보낼 것입니다.”
“…….”
“당군은 요동으로 신라는 당항성과 상주군을 움직여 폐수와 한수로! 강한 고구려군이라 할지라도 결코 두 나라를 상대로 이중 전선을 펼쳐 이길 수 없나이다.”
“하면, 그대의 백제가 신라를 막겠단 말인가?”
“상주군의 진군로는 필경 한수의 당포성이 될 것이오며, 우리 백제가 한수 이남으로 군을 보낸다면 앞뒤로 적을 맞은 신라는 결코 당포성을 넘보지 못할 것입니다.”
“허면, 당항성의 신라 수군은 어찌해야 하는가?”
“당군이 움직이면, 장군이 가장 신뢰하는 이를 수장으로 삼아 당항성을 공략하소서. 당항성은 결코 육로로 함락시킬 수 없는 천혜의 요새이오나, 해상 봉쇄는 가능합니다.”
“…….”
“우리 백제가 한수 이남을 지키고 고구려가 당항성의 수군을 묶어 두기만 한다면 평양성은 건재할 것입니다.”
“너희 백제가 그토록 우리 고구려를 지키려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고구려가 멸망하면 당은 해로가 아닌 육로로 우리 백제를 침공할 것이고, 강대한 고구려조차 무너뜨린 당군을 우리 백제는 육로에서 감당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개소문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네 말에 진정성이 느껴진다. 허나, 너희 백제가 신라를 수차례 침공하여 그 원한이 깊으니, 신라가 당에게 백제를 먼저 치라 걸사표를 보내면 어찌할 것인가?”
이에, 성충이 빙그레 웃으며 답하였다.
“우리 백제가 대야성을 비롯하여 인근 사십여 성을 점령한 이상, 신라는 죽령을 돌아 한수 이남에서 우리 백제를 넘볼 것입니다. 하여, 신라의 침공로인 한수 이남으로 고구려가 군을 보내면 신라는 발을 멈출 것이옵고…….”
잠시 말을 멈춘 성충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이곳 고구려와 달리 당이 우리 백제를 침공하려면 해로밖에 길이 없나이다.”
성충의 말대로 고구려가 북방에 건재한 이상, 당이 신라를 도와 백제를 공격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해상을 통한 수군의 상륙뿐이었다.
“장군, 우리 백제의 서쪽 해안은 뻘이 드넓게 펼쳐져 당군이 대군을 신속히 상륙시킬 수 없으며, 오직 한 군데만 상륙할 수 있나이다.”
“한 군데?”
“그렇습니다. 해안에 펼쳐진 뻘에 발을 들인 당군은 제대로 운신조차 못 하고 화살에 명을 달리할 것이오며, 오직 한군데만 대군을 무사히 상륙시킬 수 있나이다.”
개소문은 성충이 그곳의 위치를 말하지 않으리라 여겨 더 묻지 않았다.
그러나 성충은 개의치 않고 마저 말을 이었다.
“그 한 군데는 바로 기벌포로 이곳만이 유일하게 당의 수군이 상륙할 수 있는 곳입니다.”
“기벌포라…….”
“허나, 이를 우리 백제 역시 알고 있으니, 전력을 투입하여 막아낸다면, 겨우 상륙한 당군은 다시 배를 타고 물러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는 모두, 고구려가 신라를 한수 이남에서 막아준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일입니다.”
백제를 침공할 수 있는 당의 유일한 상륙 가능 지역마저 서슴없이 성충이 말하니, 개소문도 성충을 더는 의심할 수 없었다.
개소문이 고정의에게 시선을 옮겨 물었다.
“당포성은 어떤 곳입니까?”
고정의가 바로 답하였다.
“저자의 말대로 신라가 한수를 넘어 평양성으로 진격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손쉬운 자리에 위치한 성이오. 신라가 평양성을 노린다면 당포성을 함락시키고 진격하는 것이 정해일 게요. 진대덕이 이 당포성 일대의 지도를 그렸던 것으로 알고 있소이다.”
이에 개소문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좋다! 부여성충은 나를 도와 정변을 마무리하도록 하라!”
성충이 바로 허리를 굽혀 명을 받았다.
“소인 백제인이오나, 정변이 마무리될 때까지 성실히 책사가 되겠나이다.”
개소문은 내심 뛰어난 책사를 얻어 크게 기뻤으나, 성충은 이날 남긴 이 말 한마디로 훗날 백제의 왕 의자에게 의심을 사 참형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읽는 성충일지라도 제 앞날은 보지 못하니,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다.
개소문이 드디어 마음을 여는 듯하여 성충도 내심 기뻐하였고, 이내 곧 표정을 가다듬어 개소문의 책사로서 처음으로 크게 명하였다.
“태왕의 죽음은 불행한 일이나, 이제부터 여기 있는 연개소문 장군께서 죽인 것으로 한다! 즉시 태왕의 사지를 자르고 목마저 베라!”
모두가 경악하였으나, 개소문이 고개를 끄덕여 성충의 말에 힘을 보태니, 감히 거역하는 이가 없었다.
야수가 대뜸 나서 두 자루 박도로 태왕의 사지를 절단하고 목마저 잘라 개소문에게 바치니, 개소문이 태왕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싸늘히 시신이 된 강이식에게고 시선을 옮겼다.
‘대장군도 태왕이 죽었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헌데, 대장군은 시신일지라도 태왕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 태왕의 사지를 절단했으니, 내가 정변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이제 와 주장한들 누가 믿겠는가?’
개소문의 집을 급습한 이들이 오히려 가솔들에게 도륙당하리라 여긴 공손향이 팽무일과 연정토 일행을 기다리며 개소문을 만류하지 않았다면, 개소문도 강이식 곁에 시신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개소문은 마음이 울적하였으나, 간신히 사지를 뚫었으니 이제 물러설 수 없다 생각하였다.
공손향을 바라보니, 그녀는 성충의 말에 조금도 이견이 없는 듯했다.
이에 개소문이 바로 명하였다.
“태왕의 사지를 거리를 두고 나누어 폐수 강변에 버려라!”
이에 성충이 개소문의 명을 보충하여 팽무일에게 말하였다.
“고돌발 성주와 그대가 장군 휘하에 있어야 할 군사 일만칠천을 당장 연무장으로 대기시키시오.”
그리고는 연정토와 연수영에게 시선을 옮겨 말하였다.
“즉시 사병들을 이끌고 궐을 장악하시오. 누구도 한 번 이상 말해 따르지 않으면 목을 베시오.”
이어서 태왕의 목을 쥔 야수에게 시선을 옮겨 말하였다.
“폐수로 가며 ‘연개소문이 태왕의 목을 베었다!’라고 크게 외치시오. 감히 엎드려 우는 이가 있으면 목을 베고, 달려들어 덤비는 이가 있어도 목을 베시오.”
마지막으로 고정의에게 시선을 옮겨 말하였다.
“계루부의 왕종들을 불러모으고, 모두 따르도록 엄히 다스리십시오. 내일 궐에 살아남은 귀족들과 대소 신료들이 입궐하고 이곳에서 죽은 이들의 가솔들이 진상 규명을 원할 것이오.”
“네.”
“이때 계루부에서 호응하는 이가 없도록 하시오. 이제 고구려에 오부는 존재하지 않음을 모두가 인정해야 할 것이오.”
이에, 고정의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니,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사병들을 이끌고 궐에 진입한 연정토와 연수영은 태왕이 죽었음을 외치고는 무릎 꿇지 않는 이들의 목을 서슴없이 베었다.
이에, 영문도 모른 채 궐에 남아 있던 신료들과 오부 귀족들은 겁에 질려 도망치다가 죽거나, 살기 위해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이어서 팽무일이 고돌발과 함께 북장원이 일으킨 정변에 참여하지 않은 개소문 휘하 군사 일만칠천을 연무장 안으로 이끌고 오니, 평양성 내에서 개소문을 막을 이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당진평과 함께 야수가 암살대의 호위를 받으며 태왕 건무의 머리를 들고 평양성 내를 누비며 폐수로 향하니, 백성들과 관군들이 겁에 질려 밖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 * *
다음 날, 개소문의 명에 목숨을 연명한 오부 귀족들과 대소 신료들이 입궐하니, 개소문이 다섯 자루의 검을 등에 메고 양 허리에 검을 찬 채 크게 호령하였다.
“북주와 돌궐이 연합하여 우리 고구려를 침범하기 전, 선친께서 낙랑 사냥대회에서 내부의 간적들을 모두 제압하였듯이! 나 또한 당과의 전쟁을 앞두고 당에게 우리 고구려를 바치려는 간적들의 머리를 모두 베었노라!”
이에 모두가 겁에 질려 그저 벌벌 떨기만 하였다.
개소문은 이들을 차갑게 바라보며 다시 호령하였다.
“당을 물리치기 위해! 나는 새로 영민한 태왕을 옹립하였으니 모두 따르기 바란다!”
이어서 고정의가 태왕 건무의 어린 조카 보장을 데리고 나와 용상에 앉혔다.
즉위식도 없이 태왕이 된 보장은 겁에 질려 덜덜 떨었고, 개소문은 그런 태왕을 향해 힘차게 소리쳤다.
“폐하! 당의 침공을 막기 위하여 십오만의 개마무사 양병을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대장군 강이식이 그토록 갈망하였던 십오만의 개마무사 양성은 개소문의 단 한마디로 진행되었다.
“내 비록! 대장군 강이식의 목을 베었으나, 대장군의 뜻을 따라 십오만의 개마무사를 육성하니, 검귀 칭호는 내가 취하도록 하겠다!”
태왕 보장을 비롯한 대전 안 그 누구도 감히 개소문의 말을 거역 못 하니, 검귀 칭호는 강이식을 거쳐 개소문에게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어서 개소문은 스스로 대막리지에 오르고, 자신을 도운 고정의를 막리지에 임명하였다.
요동 일대의 성들은 대부분 계루부의 고 씨들이 장악하고 있었기에, 연개소문에게 힘을 보탠 고정의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
대장군 강이식을 비롯한 용맹한 무장들이 명을 달리한 평양성은 개소문이 공포로 완벽히 장악하였으니, 고구려의 혼란은 결코 크지 않았다.
모두가 개소문을 두려워하는 한, 감히 뜻을 거스르는 이는 없었고 하나 된 듯 보였다.
그러나, 안시성의 이들은 고구려 내의 다른 이들과 달리 개소문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평양성 내의 정변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 바다를 건너 당에도 전해지고, 산과 들을 타고 안시성에도 전해졌다.
태왕 건무의 죽음과 대장군 강이식의 죽음은 안시성 성주 양만춘과 검신 온달을 크게 분노케 하였다.
“뼈를 갈아 마시고 말겠다!”
평소 화내는 법 없던 양만춘이 이토록 분노하니, 오랜 벗 경우는 마음이 불안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와 달리 온달은 분노를 표출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무니, 평강은 그가 죽음으로 개소문과 따르는 이들 모두를 대적하리라 여겨 근심하였다.
‘우리 장군님께선 자신이 개소문을 미리 막지 못함을 책망하시고 계시다. 허나, 우리만으로 고구려의 전 병력을 대적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장군님도 아니신데, 이를 어찌하면 좋을고…….’
평강은 온달이 온 고구려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것이 두려워 이복동생 건무의 죽음조차 슬퍼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