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책사 성충 (1)
성충을 바라보는 개소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이자가… 내게 역적이 되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겨우 정신을 가다듬을 여유가 생긴 상황에 나타난 백제의 왕종 성충의 말을 개소문은 곱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대는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는 게요?”
개소문의 물음에 성충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바로 답하였다.
“당연히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장군께 역적이 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무도 당당히 답하니, 개소문은 어이없어 그저 허허 웃었고, 성미 급한 팽무일이 대뜸 달려들어 성충의 멱살을 쥐었다.
“이놈이! 죽다 살아난 사람에게 다시 죽을 길로 들어서라 말하는 거냐? 네놈은 정녕 백제의 간자가 맞구나. 내가 네 놈의 주둥이를 뭉개어 더는 허튼소리를 못 하게 하겠다.”
당장이라도 성충의 안면에 주먹을 날릴 듯 매우 사나웠다.
그러나 팽무일에게 멱살을 잡힌 성충은 조금도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개소문이 성충을 바라보니, 매우 침착하고 그 태도가 당당하였다.
‘나를 역적으로 만들고자 백제에서 왔을 것 같지는 않다. 이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들어나 보자.’
생각을 정한 개소문이 성충의 턱 밑에서 주먹을 치켜들고 위협하는 팽무일에게 말하였다.
“제자는 주먹을 거두라. 먼길 와 역적이 되라 말하는 이유나 들어보자.”
“이유가 뭐가 있겠소? 고구려에서 난리가 벌어지니, 백제가 뭔 이득을 취하려고 하는 것이지.”
팽무일이 여전히 성충의 멱살을 놓지 않고 답하니, 개소문이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엄히 말하였다.
“일단 놓아주거라.”
이에, 팽무일이 씩씩거리며 멱살을 놓으니, 성충이 팽무일에게 살짝 머리를 숙여 예를 표하고는 개소문을 향해 미소지었다.
“백제의 왕종인 성충 그대가 죽고 싶어 이곳까지 찾아와 허튼소리를 하는 것 같지는 않소만, 내가 그대의 말을 따라야 할 이유가 있는 게요?”
개소문의 물음에 성충이 빙그레 웃으며 답하였다.
“장군께서 제 말을 따르지 않아도, 장군은 결국 역적으로 몰리실 것입니다.”
“뭐라? 이놈이 그래도! 네놈이 정녕 나를 화나게 만드는구나!”
팽무일이 또다시 주먹을 치켜들고 엄포를 놓으니, 성충이 한숨을 내쉬며 말하였다.
“화가 많으시군요.”
“뭐라 이놈이!”
팽무일이 크게 호통을 쳤으나, 성충은 개소문의 명이 없는 한 팽무일이 결코 자신을 해하지 못하리란 것을 이미 알고 있기에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저는 그대를 놀리지도 않았고, 그대에게 욕을 하지도 않았거늘 그대는 어찌 계속 제게 이놈 저놈 하며 주먹을 들이대는 것이오? 제 말을 다 들어보지도 않았잖소.”
성충의 말에 팽무일도 생각해 보니, 자신이 무엇 때문에 화를 낸 것인지 헷갈렸다.
이에 성충이 주위를 둘러보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아마도 그대들은 내가 서부 누살에게 역적이 되라 말한 것에 화가 난 듯하오만, 내 말을 따르지 않아도 그대들은 결국 역적이 되고 말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리된다 장담하는가?”
개소문의 물음에 성충이 답하였다.
“오늘 이곳에서 큰 정변이 일어나 태왕을 비롯한 오부 귀족과 대소 신료 백여 명이 죽었고, 수많은 장수들과 고구려의 큰 기둥인 대장군 강이식마저 죽었습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이들은 서부 누살과 따르는 이들뿐이지요.”
성충이 시신들을 밟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발을 놀려 개소문에게 다가오며 말을 이었다.
“보십시오. 누가 살아남았고, 누가 죽었나이까? 그리고 이 정변을 일으킨 군사들은 누구의 군사들이었나이까?”
성충의 물음에 개소문이 주위를 둘러보니, 정변은 북장원과 대건상이 일으켰으나, 군사들은 모두 자신에게 배속된 군사들이었다.
“장군 보소서, 대모달 여범을 비롯하여, 모달들은 모두 장군의 휘하 장수들이었고 이들이 이끈 군사들 또한 장군의 군사들이었습니다.”
“아니… 그건!”
팽무일이 반박하려 했으나, 개소문이 손을 들어 제지하며 말하였다.
“계속하시오.”
“감사하옵니다, 장군.”
성충이 허리를 깊이 숙여 예를 올리고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제가 오면서 보니, 연무장으로 향하는 길에 관군들의 시신이 즐비하였습니다.”
“관군들의 시신?”
개소문이 눈살을 찌푸리며 팽무일에게 시선을 옮겼다.
이에 팽무일이 당황하여 급히 변명하였다.
“그건, 사부를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길을 막으니…….”
연정토도 팽무일을 두둔하여 말을 거들었다.
“형님, 이 말이 맞습니다. 모달 사순이 쳐들어와 그들을 물리치고, 형님을 구하고자 연무장으로 향하던 중 소란을 전해 들은 관군들이 몰려와 길을 막았고, 마음이 급해 무력이 사용된 것입니다.”
개소문이 한숨을 내쉬며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니, 성충이 미소 지으며 말하였다.
“장군을 구하기 위해 급히 달려오며 앞을 막는 이들을 쓰러뜨렸다고 하나, 이는 장군을 구해야 한다는 마음을 지닌 이들만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장군을 믿지 못하고 제거해야 한다 생각하는 이들에겐 빌미를 줄 뿐이지요.”
“해명하면 되는 일이오.”
개소문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니, 성충이 허허 웃었다.
“허허허, 해명하시면 지금 당장은 두려워 모두 믿을 것입니다. 하오나, 새로 태왕이 정해지고 두려움이 차츰 가시면 모두가 장군을 의심하게 될 것입니다. 의심을 받는 장군은 결코 막리지에 오르지 못하겠지요.”
“막리지에 오르지 않아도 좋소. 나는 그 자리를 탐해 본 적 없소이다. 올라야 할 자리라면 언젠가 공을 세워 오르면 그만이오.”
“그 언젠가가 오기 전 장군은 역신으로 몰려 여기 있는 모두와 함께 목이 베이거나, 살기 위해 정변을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너무도 당연히 말하는 성충의 태도에 개소문이 노해 소리쳤다.
“뭐라? 내가 살고자 정변을 일으킬 것이라? 감히… 나를 무엇이라 여기는 게냐!”
“장군, 저는 순리를 말했을 따름입니다.”
“순리라? 순리는 하지도 않은 정변을 내가 했다고 말하여 스스로 역신이 되기보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여 이 자리에 없었던 이들을 이해시키는 것이다.”
“이해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에, 개소문이 고정의와 고돌발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여기 신성 성주 고정의님과 건안성 성주 고돌발님이 계시다. 이분들이 나와 함께 자초지종을 설명하신다면 충분히 이해시킬 수 있을 것이다.”
“아니옵니다.”
“아니라?”
“저 두 분은 요동에서 신망이 높고, 고정의 성주님께선 고구려의 왕종인 계루부의 고추가이시나, 장군이 요동 이십여 성을 보수하실 때 지지하셨던 분들이기에, 장군과 함께 역모를 꾸며 정변을 일으켰다 의심을 살 것입니다.”
“…….”
“저분들은 결코 요동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평양성 내에 남아 조사를 받아야 할 것이며 결국엔 장군과 함께 목이 베일 것입니다.”
“이놈이!”
성충의 말에 젊은 고돌발이 역정을 내었으나, 연륜이 깊은 고정의는 수염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시게, 일리가 있는 말이네.”
“성주!”
고돌발이 바라보며 소리치니 고정의가 한숨을 내쉬며 말하였다.
“정변이 일어났고, 공교롭게도 우리만 살아남았네. 태왕 폐하와 대장군이 시해된 정변이었으며, 오부 귀족과 대소 신료 백여 명이 죽었네. 그들의 가솔들은 반드시 진실 규명을 원할 것이고, 우리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네.”
“하오나, 성주…….”
“설령, 우리의 말을 믿는다고 해도… 정적 관계에 있는 우리만 살아남은 것을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네. 결국 그들은 우리를 역당으로 몰아 반드시 죄를 씌울 것이네.”
고정의의 말에 성충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역시, 계루부의 수장이십니다. 정변이 일어나 살육이 벌어지면, 살육의 현장에서 누가 살아남고 누가 죽는지만 생각하시면, 그게 세상의 순리이옵니다. 아무리 사실을 말하여도 세상 사람들은 살아남은 이들이 태왕을 시해하였다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충이 손을 들어 살아남은 이들을 가리키니, 모두가 개소문의 가솔들과 그를 지지하는 이들뿐이었다.
“장군의 휘하 장수와 군사가 삼천이나 동원되어 태왕이 시해되었습니다. 장군이 아무리 결백을 주장한들 그 누구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믿지 않을 것이니, 차라리 역적이 되어 정권을 쥐란 말인가?”
개소문의 물음에 성충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개소문이 코웃음을 치며 말하였다.
“내가 고작 죽음이 두려워하지도 않은 짓을 했다고 말할 성싶은가?”
“장군 혼자만의 죽음이 아닙니다.”
“나를 따르는 이들은 모두가 명예를 목숨처럼 여긴다.”
개소문이 단호히 말하니, 팽무일과 야수가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의아해하였다.
“난… 목숨이 더 소중한데…….”
“내… 목. 숨보다… 중한. 것은… 없다.”
나지막이 중얼거렸으나, 개소문의 귀에도 전해졌다.
그러나 개소문은 듣고도 못 들은 척 표정 변화가 없었다.
이에 성충이 한발 다가서며 개소문에게 말하였다.
“장군의 가솔들과 지지하는 이들의 죽음으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장군이 정권을 취해 혼란을 잠재우지 않으면, 이 혼란으로 인하여 당의 침략을 받은 고구려는 결국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내가 역당의 수괴가 되어 정권을 취하면 혼란이 잠들 것이라 여기는가?”
개소문의 물음에 성충은 매우 당연하다는 듯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혼란을 잠재울 수 있으며, 당의 침입을 대비하여 강한 고구려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으로 장담하는가?”
“두려움입니다. 공포지요.”
“공포?”
개소문이 의아해 물으니, 성충이 사방에 널린 시신들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장군, 보소서. 태왕을 시해하고 검귀라 추앙받던 대장군 강이식마저 죽였나이다. 막리지 승계를 반대하던 이들도 이곳에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마치 개소문이 죽인 듯 말하였으나, 아무도 성충의 말을 끊지 않았다.
“장군, 이곳은 바로! 장군을 따르지 않는 이들은 모두 일거에 죽임을 당함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장군이 정변을 진압하였다고 말한다면 모두가 의심하여 장군을 제거하려 들 것이나! 장군이 정변을 일으켜 모두를 죽였다고 외친다면! 그 누구고 감히 장군에게 맞서지 못할 것입니다.”
“내가… 내가 모두를 죽였다라…….”
개소문은 순간, 수의 황제 양광을 떠올렸다.
대운하를 뚫고, 만리장성을 구축하며 산마저 옮길 정도의 위세가 당당하였던 황제 양견.
그의 말을 거역하는 이들은 모두 죽임을 당할 뿐만 아니라, 가솔들과 인근 마을까지 초토화시키는 포악한 황제 양광.
그러나 이 포악한 황제 양광은 진시황도 하지 못한 대운하와 만리장성을 완공하였고, 한번 명하여 백만의 대군을 세 차례나 모은 강력한 황제였었다.
‘만일 양광이 우리 고구려에 패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직도 황위에 있었을 것이다. 그 누구도 감히 그와 맞서지 못하였고, 그는 혼란 속에서도 막강한 군대를 순식간에 동원할 수 있었다. 공포의 힘이다.’
개소문이 말없이 생각에 잠기자, 성충도 말을 끊고 조용히 기다렸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개소문이 북장원에게 물었다.
“평화를 원하기에 정변을 일으켰고, 봉역도를 진대덕에게 건넨 것이냐?”
“그렇다.”
북장원이 짧게 답하니, 개소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정변도 평화를 위한다는 명분은 있었군. 허나, 그대는 틀렸다. 평화는 구걸로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애원하고 간청하면, 오히려 우습게 여겨 짓밟을 뿐이다.”
“…….”
“그대가 봉역도를 바쳤으니, 이세민은 지도를 따라 군을 이끌 것이고, 그대가 고구려의 영웅 고건무와 강이식을 시해하였으니, 당군은 이제 무엇이 두렵겠는가?”
북장원이 답을 못하니, 개소문이 검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내가 이제 공포가 되고, 당의 두려움이 되어 고구려를 지키겠노라!”
단칼에 북장원의 목이 떨어지니, 정변을 일으킨 장본인들 중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였다.
그리고, 개소문이 아직도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들어 성충의 목을 겨누며 물었다.
“나는 이제 백제의 간자를 잡아, 목을 칠 것이다. 네놈이 이곳에 온 이유가 무엇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