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271화 (271/328)

271화 살육 (13)

개소문이 망설이며 검을 버리지 못하니, 북장원이 태왕 건무를 질질 끌고 연회장 중앙으로 이동하며 말하였다.

“그래, 어차피 태왕은 죽는다. 그러나 너희가 검을 버리지 않는다면, 태왕은 고통을 겪으며 죽을 것이다. 모두 무기를 버리고 무릎 꿇어라!”

강이식은 질질 끌려가는 태왕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무릎을 꿇었으나, 개소문 일행은 여전히 검을 거두지 않았다.

“서부 누살… 우리도 검을 버려야 하지 않겠소?”

고정의의 물음에 개소문이 냉정히 말하였다.

“검을 거두고 무릎 꿇으면, 모두가 죽습니다.”

이에, 고돌발이 재빨리 이견을 내었다.

“그렇다고 지금 살 수 있는 방법도 없지 않습니까? 태왕 폐하를 구하기 위해 무릎 꿇어야 합니다.”

그러나 개소문은 여전히 검을 버리지 않고 답하였다.

“살아 있으면, 기회는 옵니다. 지금은 살아야 할 때입니다.”

개소문이 여전히 검을 쥐고 노려보니, 북장원이 태왕 건무를 연회장 바닥에 패대기치고는 명하였다.

“태왕의 다리를 잘라라!”

이에, 도끼를 든 도부수들이 달려오니, 강이식이 크게 노해 소리쳤다.

“이놈 북장원! 네놈이 어찌 감히!”

그러나 강이식의 목소리는 여범의 명을 받아 날린 궁수들의 화살에 끊겼다.

강이식의 무릎에 화살이 박히고, 목에도 화살이 박히며 음성을 막았다.

무릎이 구부러진 강이식이 힘겹게 손을 들어 목에 박힌 화살을 뽑으니, 화살촉이 살을 찢으며 뽑혔다.

화살이 뽑혀 뻥 뚫린 구멍으로 피가 꾸역꾸역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여전히 강이식은 구부러지지도 펴지지도 않는 무릎으로 걸음을 옮기며 태왕을 구하고자 한발 한발 내딛으니, 북장원이 기겁하여 소리쳤다.

“멈춰라! 멈추지 않으면 태왕의 사지를 자를 것이다!”

북장원의 발밑에 쓰러진 태왕 건무는 의식을 잃었는지 꿈틀거림조차 없었다.

이에, 공손향이 나지막이 개소문에게 말하였다.

“태왕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필경, 죽은 것입니다.”

개소문도 유심히 태왕을 바라보니, 공손향의 말대로 죽은 듯하였다.

사실, 태왕 건무는 단공이 죽자, 치욕을 겪지 않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북장원은 태왕의 시신을 끌고 왔던 것이다.

“대장군! 태왕은 이미 죽었습니다! 검을 드소서!”

개소문의 외침에 고정의와 고돌발도 놀라 태왕을 바라보고는 급히 검을 고쳐 쥐었다.

그러나, 강이식은 비틀거리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검 또한 쥐지 않았다.

강이식의 시선은 여전히 태왕 건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죽든 살든, 나의 태왕이시다. 시신이라도 구해야 한다.”

피를 뿜어내는 목으로 강이식이 말하니, 그가 말할 때마다 뻥 뚫린 목구멍에서 바람이 새어 나와 피가 더욱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강이식이 계속 다가오고, 개소문 일행이 검을 거두지 않으니 북장원이 겁에 질려 크게 명하였다.

“잘라라!”

이에, 도부수들이 도끼를 휘둘러 태왕의 양다리를 내리쳤다.

“이놈! 북장원!”

태왕의 두 다리가 잘리자 강이식이 크게 노해 소리치며 달려들었고, 모달 여범이 막기 위해 몸을 날리며 소리쳤다.

“용서하시오, 대장군!”

모달 여범의 칼이 바람을 가르고 강이식의 목을 노렸다.

그러나 이보다 빠르게 강이식이 왼손을 뻗어 칼날을 움켜쥐고는 오른손을 내질러 여범의 안면을 후려쳤다.

“악!”

여범이 크게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고 강이식이 왼손에 쥔 검을 멀리 던지고는 다시 태왕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태왕이 비명을 지르지 않았습니다. 태왕은 이미 죽었습니다.”

공손향이 다시 소리 죽여 말하니, 개소문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태왕을 구하지 않는다. 살기 위해 검을 쥐고 싸운다.”

이 소리에, 북장원이 당황하여 개소문 일행을 힐끔 바라보았으나,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온 강이식의 거친 호흡에 놀라 정신을 가다듬었다.

“베어라!”

북장원의 명에 군사들이 일제히 강이식에게 달려들었다.

개소문도 강이식을 구하기 위해 달려나가려 하니, 공손향이 급히 그의 손을 잡았다.

“이미 늦었습니다. 기다리십시오. 기다려야 합니다.”

공손향의 말처럼, 강이식은 더 이상 팔을 들어 올리지도 못하였고, 군사들이 휘두른 검을 고스란히 몸으로 받아 낼 뿐이었다.

개소문의 눈에 거대한 고목이 쓰러지듯 강이식이 쓰러지는 모습이 각인되었고, 쓰러진 강이식의 몸을 군사들이 칼과 창으로 찌르고 베기를 거듭하였다.

한참을 꿈틀거리던 강이식이 마침내 굳은 듯 움직이지 않으니, 대모달 여범이 달려가 강이식의 목을 베고는 높이 치켜들었다.

“검귀 강이식을 죽였다! 내가 검귀의 목을 베었다!”

이에, 개소문이 분개하여 달려나가려 하니, 공손향이 다시 그의 팔을 잡아 세우며 말하였다.

“아직입니다. 믿으셔야 합니다. 살아 있으면 기회는 옵니다. 아직입니다.”

강이식의 처참한 죽음에 고돌발이 분통을 터트리며 물었다.

“무엇을 믿으란 말이오?”

북장원도 이 소리를 들었는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그래, 무엇을 믿으란 말인가?”

이에, 공손향이 미소를 담아 답하였다.

“살아 있으면, 기회는 온다는 믿음이지요.”

“살아 있으면? 그래, 얼마나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북장원이 다시 물으니, 공손향이 오히려 되물었다.

“종리위두대형께선 태왕을 시해하고 그대가 태왕이 되려 하시는 겁니까?”

“시간을 끌고자 묻는 겐가?”

북장원이 되물으니, 공손향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서 기회를 만들기 위해, 묻는 것이지요.”

“그 기회가 올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태왕이 되려는 게 아니다. 태왕은 대국을 속였고, 황제를 기만하였다. 봉역도를 허위로 만들어 우리 고구려를 전란에 휩싸이게 하였고, 나는 이를 바로 잡아 고구려를 구하고자 한 것이다. 나의 답변은 이것으로 끝이고, 너희의 시간도 끝이다.”

북장원이 손을 들어 올리자, 모달 구진충이 궁수들에게 명하였다.

“살을 먹여라!”

이에, 공손향이 다시 소리쳐 물었다.

“태왕을 시해하고 그대가 무사할 것으로 여기시오? 당 황제는 멀고, 분노한 고구려 장수들은 지척이거늘, 그대는 무슨 대책이라도 있으시오?”

“대책? 나는 태왕을 시해하지 않았다. 나는 연회장에서 그 누구도 죽이지 않았다. 연회장의 군사들은 모두 서부 누살 개소문 휘하 군사들이었고, 이 모든 참극은 막리지에 오르지 못한 개소문이 꾸민 정변일 뿐이다.”

이에, 개소문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

“내게 죄를 뒤집어씌우겠단 말이오?”

“네가 정변을 일으켰다고 내가 말하면, 안시성의 온달도 믿을 것이다.”

북장원이 단호히 답하니, 개소문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여 뛰어나가려 했다.

이에, 공손향이 매달리다시피 개소문의 팔을 잡으며 북장원에게 소리쳐 물었다.

“연회장에서 이토록 많은 이들이 죽었으니, 장차 고구려는 누가 지킨단 말이오? 그대는 대책이라도 있으시오?”

“나는 대국을 섬겨 평화를 취할 것이다. 대국을 섬기니, 황제께서 신라와 백제를 막아 주실 것이고, 고구려의 만백성들은 드디어 태평성대를 맞이하여 밭을 갈고 아이를 키울 것이다. 그리고, 이제 더는 너희에게 시간을 주지 않겠다.”

말을 마친 북장원이 손을 들어 올리자, 대모달 여범이 강이식의 머리를 치켜 들어 올리며 크게 명하였다.

“개소문 일당의 목도 베어오너라!”

이에, 군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개소문 일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모두! 뚫고 나간다!”

개소문이 급히 파천신검 초식을 펼치며 앞장서니, 공손향과 쇼락, 고정의, 고돌발 등이 죽음을 각오하고 그 뒤를 따랐다.

이때, 대연회장 복도에서 크게 함성이 일며 한 무리의 사내들이 달려오기 시작하였다.

“앞을 막는 놈들은 모두 베어라!”

팽무일의 외침이었다.

그리고, 야수가 팽무일보다 빠르게 대연회장으로 뛰어들더니, 닥치는 대로 마구 베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연정토와 당진평이 사병과 암살대를 이끌고 들어와 난전을 펼치니, 북장원이 크게 당황하여 소리쳤다.

“막아라!”

이에, 대모달 여범과 모달 구진충이 군사들을 이끌고 야수와 팽무일을 막으러 달려갔다.

그러나, 기세 올라 달려온 팽무일이 경공을 펼쳐 몸을 훌쩍 띄우더니, 가볍게 칼을 휘둘러 대모달 여범의 목을 베었다.

떼구르르.

대모달 여범의 목이 떨어지자, 군사들이 놀라 주춤하는 사이 야수가 달려와 모달 구진충의 머리를 커다란 박도로 내리찍고는 주위 군사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어서 달려온 사병들과 암살대들이 기가 꺾인 군사들을 마구 베어나가니, 개소문도 북장원을 향해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되자 황망해진 북장원이 별안간 달려든 개소문을 피하고자 급히 뒤로 물러섰으나, 태왕 건무의 시신에 발이 걸려 뒤로 자빠지고 말았다.

이에 개소문이 북장원의 가슴팍을 발로 밟아 누르며 소리쳤다.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그 어떤 간적이 내통하고 있는지 모르니, 모두 죽여라!”

이에, 쇼락과 고정의, 고돌발도 기세 올려 검을 휘두르니, 이들의 검이 부러질 때까지 군사들의 목이 바닥에 떨어져 뒹굴었다.

한참 동안의 살육이 벌어지고, 숨이 턱에 찰 때까지 살육을 펼친 연정토가 개소문에게 다가와 말하였다.

“이놈 빼고는 모두 죽었습니다.”

개소문의 발밑에 깔린 북장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에, 개소문이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하고는 공손향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그대가 시간을 벌어준 덕에 살아남을 수 있었소.”

공손향이 시선을 내려 북장원을 바라보며 답하였다.

“이자가 자만하고 거만한 탓이지요. 이제 북장원의 목도 베시지요.”

이에, 기겁한 북장원이 크게 소리쳐 말하였다.

“나를 죽이면, 고구려는 전란에 휩싸일 것이다! 진대덕이 장안성에 당도하기 전 내가 소식을 전하지 않으면, 황제는 반드시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정벌할 것이다!”

“소식을?”

개소문이 의아해 물으니, 북장원이 한 줄기 희망을 본 듯 답하였다.

“봉역도를 허위로 그려 바친 태왕을 벌하였다는 전언을 내가 보내지 않을 시, 황제는 반드시 고구려를 정벌할 것이다. 나를 죽이면 고구려의 평화는 없다.”

자신감 넘치는 북장원의 태도에 개소문이 발을 치우고 북장원을 무릎을 꿇렸다.

“네가 살아야 고구려의 평화가 온단 말인가?”

“그렇다. 나의 모든 행위는 오직 고구려의 평화를 위함이었다. 나를 죽이면, 고구려는 필경 당군에게 짓밟히고 말 것이다.”

이에, 개소문이 북장원을 죽이길 망설이니, 팽무일이 다가와 말하였다.

“사부, 뭘 망설이나? 이놈은 우리를 죽이려던 놈이야. 살려둬선 안 돼.”

당장이라도 북장원의 목을 벨 듯 팽무일의 검이 번뜩였다.

“나를 죽이면, 고구려는 멸망할 것이다.”

북장원도 필사적으로 자신이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를 주장하니, 개소문이 잠시 눈릉 감고 생각에 잠겼다.

이때, 누군가 연회장 안으로 발을 들이며 낭랑히 소리쳤다.

“그자를 죽이든 살리든 당은 반드시 고구려를 정벌할 것입니다!”

모두가 놀라 시선을 돌려 바라보니, 키가 훤칠하고 이목구비가 반듯한 사내였다.

“부여성충!”

개소문이 알아보고 소리치니, 연정토가 급히 손을 들어 명하였다.

“백제의 간자다! 잡아라!”

이에, 사병들과 암살대가 일제히 달려가 성충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하하하, 이렇게 대놓고 간자질하는 인간도 있단 말입니까? 저는 간자가 아니라… 그대들을 돕기 위해 왔습니다.”

성충이 자신의 목을 겨눈 검들을 손가락으로 살며시 치우며 말하니, 연수영이 노해 소리쳤다.

“닥쳐라! 부여 씨가 고구려 내 정변을 염탐하러 온 것 아니더냐?”

이에, 성충이 난처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였다.

“태왕을 돕고자 와 보니, 이런 살육이 벌어져 있어 저도 난처한 상황입니다. 제가 이미 벌어진 정변에서 무엇을 얻을 게 있어서 간자 노릇을 하겠습니까?”

성충의 태도가 조금도 주눅 들어 있지 않고 당당하니, 개소문은 내심 감탄하여 말하였다.

“성충, 오랜만이오. 그래, 북장원을 죽이든 살리든 전쟁은 벌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차라리 저자를 죽이고 전쟁을 대비하는 게 순리라 생각합니다.”

“순리라…….”

개소문이 중얼거리니, 성충이 자신을 겨눈 칼들을 손으로 밀어 길을 만들고는 뚜벅뚜벅 다가와 말하였다.

“저자가 꾸몄듯이 그대가 태왕을 시해한 것으로 하십시오.”

“뭐라?”

팽무일이 기도 안 차 물었으나, 성충은 팽무일에겐 시선도 주지 않고 개소문에게 마저 말하였다.

“이 정변을 그대가 일으킨 것으로 하십시오. 그리고 그대가 강한! 막강한 권력을 직접 쥐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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