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살육 (12)
개소문이 몸을 틀어 가장 앞서 달려든 군사의 검을 살짝 피하고는 손을 뻗어 군사의 손목을 낚아채듯 움켜쥐었다.
강한 악력에 군사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고 검을 떨구니, 개소문이 재빨리 몸을 숙여 바닥에 떨어진 검을 쥐었다.
그사이 달려든 군사들이 허리를 굽힌 개소문의 등과 머리를 노려 검과 창을 찔러왔다.
몸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에 급히 몸을 굴러 위기를 모면하였으나, 삼면을 군사들이 에워싸고는 빗발치듯 창과 검으로 개소문을 계속 쫓았다.
“서부 누살!”
위기에 처한 개소문을 구하고자 공손향이 급히 외치며 달려왔고, 이 소리에 강이식이 고개를 돌려 개소문을 바라보았다.
“개소문!”
개소문을 구하고자 강이식이 급히 몸을 돌려 달려가니, 개소문을 에워싼 군사 일부도 몸을 틀어 강이식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문 앞에서 밀려나던 군사들도 정신을 가다듬어 강이식의 배후로 달려들었다.
“내가 바로 검귀 강이식이다!”
앞을 막는 군사들에게 불호령을 내리며 강이식이 상다리를 휘두르니, 창과 검이 상다리에 맞아 날아가고 그 기세에 눌린 군사들이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강이식도 무방비로 등을 내어주어 배후에서 달려든 군사들의 검과 창에 수없이 베이고 찔렸다.
갑주를 걸치지 않은 강이식의 등은 이내 곧 피로 얼룩진 살점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강이식은 결코 비명소리조차 내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며 상다리를 휘둘러 막아선 군사들을 모두 때려눕히고는 개소문 앞을 지켰다.
“대장군, 검을 쥐소서.”
간신히 근처까지 달려온 공손향이 강이식에게 검을 내어주며 말하였다.
그러나 강이식은 고개를 저으며 결코 검을 받지 않았다.
“나의 고구려군이요. 나는 고구려군에게 검을 사용하지 않소이다.”
“불필요한 고집이십니다.”
공손향이 재차 검을 내밀었으나, 강이식은 대답대신 개소문을 일으켜 세우고는 몸을 돌려 대건상에게 소리쳤다.
“대건상! 어찌하여 모반을 꾀하는 것이냐?”
대건상은 대답 대신 궁수들에게 손짓으로 시위를 당기라 명하였다.
이에, 화살들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드니, 강이식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개소문과 공손향의 앞을 막아서고는 양손에 쥔 상다리를 휘둘렀다.
상다리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니, 강이식의 발 앞에 화살들이 떨구어쪘다.
그러나 모든 화살을 막기엔 불가능하여 강이식의 가슴과 어깨에 화살들이 쉼 없이 박혔다.
“대장군…….”
간신히 검을 쥐고 일어선 개소문이 불렀으나, 강이식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대건상을 노려보며 또다시 앞으로 달려나갔다.
“쏴라!”
대건상의 명에 화살들이 날아들어도 강이식은 오직 상다리로 머리만 지키며 대건상과 거리를 좁히기 위해 발을 놀렸다.
“대장군!”
개소문이 강이식을 구하기 위해 몸을 돌렸으나, 어느새 달라붙은 군사들 때문에 길이 열리지 않았다.
“대건상! 너는 내가 황천길 동무로 삼아야겠구나!”
쉴 새 없이 날아든 화살이 살을 파고들고 뼈에 박히는 고통을 안겨 주었으나, 강이식은 결코 발을 멈추지 않았고 이 기세에 궁수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때, 모달 유협이 비호처럼 몸을 날려 강이식의 어깨를 베고는 그 기세를 타고 몸을 틀어 강이식의 등을 베었다.
강이식의 몸이 휘청이자, 도망치던 궁수들이 다시 자리를 잡고 강이식을 겨누었다.
그리고 유협이 검을 고쳐 쥐고는 강이식의 좌측으로 달려들며 검을 일자로 뻗었다.
곧게 뻗은 검이 자신의 옆구리를 노리자, 강이식이 몸을 틀며 검 끝을 피하고는 상다리를 휘둘러 유협의 손목을 쳐 내었다.
“악!”
유협이 비명을 지르며 검을 놓치자, 공손향이 빠르게 달려들어 유협의 목덜미에 검을 찔러넣었다.
“훌륭한 솜씨요.”
강이식이 공손향의 검술을 칭찬하고는 좀처럼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대건상을 노려보았다.
이에 대건상이 고개를 저으며 말하였다.
“대장군, 그만 무릎을 꿇으시오. 고통이 적게 목을 베어드리겠소.”
“내 머리가 탐이 나느냐? 그렇다면 와서 가져가거라.”
강이식이 피 묻은 입술을 훔치며 답하고는 대건상과의 거리를 가늠해보았다.
‘고작, 십여 보… 거리.’
단숨에 닿을 거리였으나,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거리였다.
‘나도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있으나, 저들도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강이식이 크게 외쳤다.
“다들 상석으로 피하시오!”
이에, 개소문이 태왕을 위해 마련한 상석을 바라보니, 벽을 등지고 있어 배후는 걱정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총명한 공손향은 강이식의 말을 금새 이해하여 어느새 고정의와 고돌발을 보호하며 상석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쇼락! 상석으로 이동하라!”
개소문도 상석으로 내달리며 쇼락을 불렀고, 이들이 몸을 피할 수 있도록 강이식이 달려드는 군사들을 계속 때려눕혔다.
대연회장에서 살아남은 이는 개소문 일행과 고정의, 고돌발 뿐이었고 강이식은 이들을 지키기 위해 상석을 등지고 서서 끝도 없이 달려드는 군사들을 때려눕혔다.
“우리도 돕겠습니다!”
벽을 등지고 선 개소문이 앞으로 나와 강이식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려드는 군사들을 향해 비검술을 펼쳤다.
개소문이 바닥에 떨어진 검을 잡히는 대로 날리니 달려들던 군사들이 놀라 급히 거리를 벌렸다.
겨우 한숨 돌린 강이식이 개소문에게 나지막이 말하였다.
“내가 대건상을 잡으러 달려가는 즉시, 너는 태왕 폐하를 구하러 가라.”
이에, 개소문이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하자, 강이식이 숨을 고르며 단번에 대건상에게 달려들 태세를 갖추었다.
* * *
개소문을 구하기 위해 연무장으로 달려가던 연정토 일행을 향해 한 떼의 군사들이 달려왔다.
아마도 개소문의 집에서 벌어진 참극을 듣고 달려온 관군인 듯하였다.
“멈추어라! 무엇 하는 놈들이냐?”
말을 탄 장수가 물으니, 성미 급한 팽무일이 대답 대신 몸을 날려 장수를 말에서 떨구고는 소리쳤다.
“급하다! 당장 길을 열라!”
이에, 말에서 떨어진 장수가 크게 노해 명하였다.
“수상한 놈들이다! 모두 잡아라!”
명을 받은 군사들이 달려들자, 마음이 급한 야수가 앞으로 나서 박도를 휘두르니, 그 기세가 매우 사나웠다.
이내 곧 앞을 막은 군사들의 시신이 쌓이고 겁에 질린 군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그리고 이 소란에 구경 나왔던 백성들이 기겁하며 도망치니, 길은 열렸으나, 연정토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다.
“영락없이 모든 죄를 뒤집어쓰게 생겼구나.”
이에, 연수영이 빠르게 답하며 재촉하였다.
“오라버니, 이미 벌어진 일입니다. 서둘러 큰오라버니를 구해야 합니다.”
“그래, 후회한들 이미 늦었다. 모두를 적으로 돌리더라도 형님부터 구하고 보자. 서두르자!”
마음을 굳힌 연정토가 명하니, 팽무일과 야수가 앞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새 도망쳤던 군사들이 수를 더 늘려 달려와 길을 막았으나, 팽무일과 야수가 거침없이 검과 박도를 휘둘러 찌르고 베기를 거듭하며 길을 여니, 이들이 지나간 자리엔 관군의 시신이 즐비하였다.
* * *
태왕의 안위가 걱정된 강이식이 벼락 치듯 소리치며 다시 길을 열기 시작하였다.
“대건상!”
이에, 잔뜩 겁에 질린 대건상이 급하게 명하였다.
“살을 날리고 앞을 막아라!”
대건상의 명을 받은 궁수들이 일제 사격을 가함과 함께 모달 구진충이 군사들을 이끌고 달려들었다.
어느덧 대연회장 내 군사들의 수도 상당히 줄어들어 천여 명 남짓 되어 보였으나, 이들이 일제히 달려드니 그 함성이 고막을 찢는 듯하였다.
“시끄러운 놈들이로다!”
상다리를 휘둘러 화살을 쳐낸 강이식이 군사들 속으로 뛰어들자, 개소문도 태왕을 구하기 위해 대연회장을 벗어나고자 했다.
군사들 속에 뛰어든 강이식이 상다리를 마구 휘둘러 닥치는 대로 때려눕히며 대건상을 향해 달려가니, 이를 막기 위해 군사들이 먹구름처럼 이동하였다.
이에, 개소문 일행의 앞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화살에 맞아도 서 있고, 칼과 창에 베이고 찔려도 달려드는 강이식의 용맹과 투지에 기가 질린 대건상은 자신도 모르게 계속 뒤로 물러났고 마침내 그의 등이 벽에 닿았다.
그리고, 앞을 막은 군사들을 쓰러뜨려 밟으며 다가온 강이식이 손을 뻗어 겁에 질린 대건상의 목을 움켜쥐었다.
“네놈 목부터 걱정했어야 했다.”
피로 물든 얼굴로 강이식이 으르렁거리듯 말하니, 목이 잡혀 들어 올려진 대건상은 대답도 못 한 채 버둥거리다가 목뼈가 부러져 축 늘어졌다.
이 순간에도 강이식의 등과 옆구리를 검과 창이 베고 찔러왔으나, 강이식은 살점이 패이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 속에서도 결코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그리고 강이식이 간신히 마련한 기회를 노려 개소문 일행이 연회장을 벗어나려고 하니, 대모달 여범이 손을 들어 올려 차분히 명하였다.
“벗어나게 해선 안 된다! 살을 날려라!”
이때, 개소문이 여범을 향해 검을 날리자, 여범이 크게 놀라 몸을 굴려 겨우 목숨을 건졌다.
“개소문! 어서 가 태왕 폐하를 구하라!”
대건상을 내동댕이친 강이식이 몸을 돌려 다시 군사들 속으로 뛰어들며 소리치니, 개소문이 일행들을 이끌고 태왕을 구하기 위해 내달렸다.
이때 별실 방향 복도에서 북장원의 음성이 크게 울려 왔다.
“멈춰라!”
개소문 일행을 향해 살을 날리려던 궁수들이 시위를 거두고, 개소문 일행도 발을 멈추었다.
개소문이 시선을 고정하고 바라보니, 북장원이 누군가의 목덜미를 잡아서 질질 끌고 그 뒤로 군사들이 떼 지어 몰려 왔다.
“태… 태왕 폐하!”
북장원에게 목덜미를 잡혀서 질질 끌려오는 이는 바로 태왕 건무였다.
“연회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어찌 연회장을 벗어나는가?”
북장원이 만면에 미소를 담아 여유만만하게 말하였다.
개소문이 이를 갈며 노려보았으나, 태왕이 북장원에게 잡혀 있어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연회장으로 돌아간다.”
개소문의 명에 쇼락과 공손향이 따르니, 고정의와 고돌발도 뒤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왕 폐하!”
강이식도 북장원에게 목덜미를 잡혀서 질질 끌려오는 태왕 건무의 몰골에 놀라 크게 부르짖으니, 주위를 에워싼 군사들이 오히려 놀라 급히 거리를 벌렸다.
“태왕 폐하! 이놈 북장원, 네 이놈!”
강이식이 이를 바드득 갈며 소리쳤으나, 태왕을 사로잡은 북장원은 의기양양할 따름이었다.
“모두 무기를 버려라. 고구려를 전란에 휩싸이게 한 태왕을 내가 잡아 왔으니, 그대들도 더는 싸울 필요가 없다.”
북장원이 달래듯 강이식과 개소문에게 말하자, 대모달 여범이 아직 경계를 풀지 않은 채 강이식을 노려보며 북장원에게 다가갔다.
“예상보다 피해가 큽니다.”
대모달 여범의 말에 북장원도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였다.
“그렇구나. 천하제일검이란 칭호가 허명은 아니었다.”
단공의 무용에 모달 모석주와 칠백여 군사를 잃고 간신히 태왕을 사로잡은 터라, 북장원도 매우 지쳐 있었다.
“단공은 죽었나이까?”
여범의 물음에 북장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였다.
“살아날까 두려워 목을 베고 사지를 잘랐다. 병풍 뒤에 군사를 숨기지 않았다면 단공 그자 혼자서 모두를 죽였을 것이다.”
이에, 모달 여범이 안심하며 말하였다.
“종리위두대형께서 태왕을 잡아오셔 대연회장도 이제 마무리될 듯합니다.”
여범은 칼로 베고 창으로 찔러도 두 발로 서서 계속 달려드는 강이식에 질린 터라 이렇듯 말하였다.
이에, 북장원이 피를 뒤집어쓴 강이식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여기도 검귀가 있었지. 저 몰골은 마치 야차와도 같구나.”
고슴도치처럼 화살이 박히고, 온몸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베이고 찔렸으나, 여전히 당당한 태도로 노려보는 강이식의 모습에 북장원은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이에, 모달 구진충이 앞으로 나와 소리쳐 명하였다.
“태왕은 잡혔다. 태왕을 구하고자 한다면, 무기를 버리고 무릎 꿇거라!”
강이식이 태왕 건무에게 시선을 두고는 양손에 쥔 상다리를 내던졌다.
이에, 개소문도 검을 내리려 하니, 공손향이 급히 만류하였다.
“검을 버리면, 우리 모두 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