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살육 (9)
“와아아아!”
태왕 건무가 말에서 내려 연무문으로 들어오자, 연무장에 도열한 군사들이 병장기를 들어 올리며 환호하였다.
열렬한 환호에 태왕 건무도 흡족하여 손을 들어 올려 화답하였고, 이에 군사들이 더욱 크게 함성을 지르며 만세를 불렀다.
“태왕 폐하 만세!”
군사들은 평양성을 지켜낸 전쟁 영웅 고건무를 기억하였고, 건무도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에 겨워 도열한 군사들 앞을 천천히 지나 귀빈석으로 향하였다.
“보라! 단공, 나의 군사들이다.”
태왕 건무가 뒤따르는 단공에게 말하니, 단공이 병장기를 들고 환호하는 군사들을 힐끔 쳐다보았다.
병장기들이 내는 쇳소리에 곳곳이 살기였다.
전장에서 느낄 살기였으나, 이만의 군사들이 도열한 연무장이었기에 단공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귀빈석 중앙 가장 높은 곳에 마련된 상석에 오르기 위해 건무가 계단을 오르는 동안에도 군사들의 환호는 끊이지 않았고, 마침내 건무가 자리에 앉자 환호가 멈추었다.
태왕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대장군 강이식을 비롯한 무장들이 앉았고 우측으로는 사선종유를 포함한 오부 귀족들과 대소 신료들이 자리했다.
그리고 귀빈석 아래는 태왕의 호위들이 눈을 빛내며 도열한 군사들과 마주하고 섰다.
“이만의 군사가 연무장에 도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인 듯하구나.”
태왕 건무가 연무장을 내려다보며 말하였다.
넓은 연무장을 가득 채운 군사들의 위용이 제법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이때, 대장군 강이식이 조심스럽게 다가가 태왕 건무에게 속삭였다.
“폐하, 어찌 말을 타지 않고 들어오셨나이까?”
“안이 좁아 혹여 말이 놀랄 수도 있다고 모달 사순이 근심하여 연무문 앞에 말을 두고 온 게요. 모두가 나의 군사들이니 대장군은 너무 심려치 마시오.”
태왕 건무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고는 대모달로 승찬한 여범에게 손을 들어 명하였다.
“사열식을 거행하시오.”
이에, 대모달 여범이 소리 높여 외쳤다.
“사열식을 거행하라!”
북이 울리고, 연무장 좌측 끝에서부터 모달 사순이 오천의 군사를 이끌고 행진을 시작하였다.
고구려군 특유의 검은색 일색의 갑주와 두개의 뿔이 달린 투구를 쓴 군사들이 칼을 차고 창을 쥔 채 발을 맞춰 행군하다가 귀빈석을 지날 때 태왕 건무를 향해 창을 치켜들며 예를 표하였다.
이어서 모달 유협이 오천의 군사를 이끌고 뒤를 따랐고, 모달 구진충과 모달 모석주도 각기 오천의 군사를 이끌며 행군하였다.
귀빈석을 지나 연무장을 한 바퀴 돈 모달 사순의 오천 군사가 우측 끝에 도열하자, 모달 유협과 구진충, 모석주의 오천 군사들이 거리를 벌려 차례대로 도열하였다.
꽤 기강이 잡힌 모습들이었다.
“어찌 모달들이 군사 오천을 이끌게 된 거요?”
대장군 강이식이 의아해 대모달 여범에게 물었다.
“소장이 신뢰하는 이들로 상장군께 아뢰어 각기 오천의 군사를 이끌게 되었습니다.”
대모달 여범이 이처럼 공손히 답하니, 강이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대도 오천을 이끌고 서부 누살을 도왔으니, 이채로울 것도 없군.”
이때, 도열한 군사들 속에서 십여 명의 군사가 나와 귀빈석을 향해 예를 올리고는 합을 맞춰 검무를 펼쳤다.
동작이 빠르고 힘이 넘쳐 귀빈석에서 박수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일개 사병들이 펼칠 무예가 아니로다.”
태왕 건무가 크게 만족하여 이렇듯 말하니, 모달 여범이 머리 숙여 답하였다.
“이만 군사 중에서 무예가 뛰어난 이들로 선출하였나이다.”
“대모달, 그대가 고생이 많소.”
태왕의 칭찬에 여범이 허리를 굽혀 감사를 표했다.
어느새 검무를 펼치던 군사들이 물러나더니, 연무문에서 열 필의 말이 내달려 오는데, 말에 오른 군사들이 서로 합을 맞춰 창을 휘두르며 재주를 부렸다.
“참으로 잘하는구나!”
태왕 건무의 칭찬에 대장군 강이식도 박수를 치며 유심히 바라보았다.
“일개 군졸의 실력이 아니로군. 대모달은 어찌 이 짧은 시간에 이처럼 강한 군대를 만들었소?”
강이식의 말에 대모달 여범이 담담히 답하였다.
“제가 상장군 대건상 휘하에 있을 때부터 훈련시킨 군사들입니다.”
“헌데, 상장군 대건상과 종리위두대형은 아니 오시는 게요?”
“이미 오시어, 대연회장을 살피고 계십니다.”
“대연회장을 상장군과 종리위두대형이?”
“태왕 폐하를 모셔야 할 연회이기에, 종리위두대형께서 특별히 손수 살펴야겠다 하시었습니다.”
“그렇소?”
대장군 강이식이 의아해 되물었으나, 여범은 그저 미소로 대답을 대신할 뿐이었다.
마상 무예를 펼치던 군사들이 태왕에게 예를 올리고 물러나니, 이번엔 활을 든 군사들과 병장기를 지니지 않은 군사들이 나와 거리를 두고 서로 마주 보았다.
북이 울리고, 활시위를 팽팽이 당긴 군사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지니지 않은 군사들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바람을 가르는 화살촉이 햇살에 빛남과 동시에 맞은편에 서 있던 군사들이 몸을 틀어 맨손으로 화살을 낚아채었다.
“와아아!”
도열한 군사들 속에서 함성이 울리고, 태왕을 비롯한 귀빈석에서도 박수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참으로 대단하오.”
강이식도 흥에 겨워 군사들이 펼치는 무예에 푹 빠져들었고, 어느덧 석양이 연무장에 붉은빛을 뿌리기 시작하였다.
이때 북장원이 상장군 대건상과 함께 귀빈석으로 올라 태왕에게 허리 굽혀 예를 올리고는 아뢰었다.
“따로 대연회장에 자리를 마련했나이다.”
이에, 여범이 손을 들어 올리니 다시 북이 울리고 도열한 군사들이 발을 맞춰 연무문으로 행군하였다.
“아니, 군사들도 함께 연회를 즐기는 것 아니오?”
태왕 건무가 이상히 여겨 물으니, 여범이 공손히 대답하였다.
“기강 잡힌 군사들이오나, 그 수가 많고 술에 취해 소동이 벌어질 수도 있사옵기에, 예를 지킬 수 있는 군사들만 남게 하였나이다.”
여범의 말처럼 이만의 군사 중 사천의 군사만 남아서 도열하였는데, 모달 사순과 유협, 구진충, 모석주 등이 각기 일천의 군사를 이끌고 있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자리를 지키고 선 모습이 꽤 기강이 잡혀 보였으나, 연회를 즐길 모습은 아니었다.
이에, 북장원이 태왕 건무에게 아뢰었다.
“폐하께옵서 대연회장에 드셔야, 저들도 편히 술과 음식을 즐길 수 있사옵니다.”
“종리위두대형의 말이 옳소. 군사들이 편히 연회를 즐길 수 있도록 자리를 비워줘야겠구려.”
태왕 건무가 이처럼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니, 대장군 강이식을 비롯한 무장들과 오부 귀족들 및 대소 신료들이 그 뒤를 따랐다.
연회에 참석할 이가 모두 이백여 명이 넘었고, 태왕 건무의 호위 백여 명도 그 뒤를 따랐다.
연무장에서 대연회장까지의 거리는 백여보 남짓으로 태왕의 호위들이 대연회장 앞을 지켰고, 대연회장 안으로 들어간 태왕이 상석에 자리하였다.
이에, 북장원이 삼족기에 술을 따라 태왕에게 바치며 아뢰었다.
“연회를 시작하겠나이다.”
태왕 건무가 술잔을 받으려 하자, 단공이 허리를 굽혀 앞으로 나오더니 매서운 눈으로 삼족기를 살폈다.
은으로 만든 삼족기의 색이 변하지 않아 독은 의심되지 않았다.
이에, 태왕 건무가 빙그레 웃으며 단공에게 말하였다.
“여기는 평양성 내 우리 고구려의 연무장이네. 감히 나의 군사들 앞에서 누가 허튼짓을 하겠는가?”
“송구하옵니다.”
단공이 조심스럽게 물러나며 답하니, 태왕 건무가 북장원이 올린 삼족기를 받아 들었다.
“연회를 시작하시오.”
태왕 건무의 명에 모두의 술잔에 술이 채워지고 연회가 시작되었다.
삼족기에 든 술을 태왕이 들이켜자, 북장원이 태왕의 곁으로 살며시 다가와 나지막이 아뢰었다.
“폐하, 별실에서 잠시 아뢸 것이 있나이다.”
북장원의 표정이 심상치 않으니, 태왕 건무가 삼족기를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자리를 비울 터이니, 모두들 즐기고 계시구려.”
대장군 강이식이 의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태왕 건무가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말하였다.
“대장군은 서부 누살과 대모달을 격려해 주시구려.”
이에, 강이식이 자리에 앉으니, 북장원이 안내하고 태왕이 뒤를 따랐다.
태왕은 호위가 고작 단공 한 명뿐이었으나, 전혀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한편, 연무장에도 술상이 마련되고 도열하였던 군사들이 각기 자리를 잡아 술잔을 기울였다.
모두 사천의 군사가 연무장에 남아 있어야 하나, 어찌된 영문인지 모달 사순이 이끄는 일천의 군사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삼천의 군사들이 기울이는 술잔엔 술이 담겨 있지 않았다.
* * *
같은 시각, 당진평의 노력 끝에 명림신이 마침내 의식을 차리고 있었다.
“의식이 드시오?”
힘겹게 눈을 뜬 명림신에게 당진평이 물었다.
“나는… 산 것이오?”
“그렇소.”
“그대는… 누구요?”
명림신이 고개조차 들지 못한 채 당진평에게 물었다.
이에, 당진평이 빙그레 웃으며 답하였다.
“그대가… 의뢰한 형제단의 단주, 당진평이라 하오.”
명림신이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니, 당진평이 껄껄 웃었다.
“괜찮소. 어차피 나도 당당히 내세울 수 없는 처지이니, 의뢰한 일과 의뢰인의 비밀은 지킬 것이오. 헌데… 어찌하여 당의 사절대를 몰살하려고 한 것이고, 여범이 그대를 죽이려 한 것인지나 알려주시구려.”
이에, 명림신이 대답 대신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물었다.
“여범? 여범이라 하셨소?”
“그렇소. 여범이었소.”
당진평의 장담에 명림신이 크게 놀라 바삐 몸을 일으켰다.
“태왕… 폐하를 뵈어야 하오.”
“태왕을? 태왕은 지금 연무장에서 연회를 즐기고 있을 터인데?”
“그대에게 다시 의뢰하겠소. 나를 도와주시오. 태왕께 가야 하오.”
이제 막 의식을 차린 명림신이 비틀거리면서도 태왕에게 가야 한다고 말하니, 당진평이 어깨를 으쓱하며 난색을 표하였다.
“그 몸으로 아직 걸음은 무리요. 태왕 앞에 그대를 데려가는 것은 내게도 무리한 의뢰라 받아들일 수 없구려.”
“속히 가야 하오. 제발… 부탁하오.”
명림신이 거듭 부탁하니, 당진평이 곤혹스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때, 밖에서 하인들의 비명소리와 함께 병장기들이 내는 쇳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이지?”
당진평이 크게 놀라 급히 방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갑주를 걸친 군사들이 하인들을 마구 베고 있었다.
“나으리! 살려주십시오!”
하인들이 당진평을 발견하고는 달려오며 도움을 청하였다.
그러나 그 뒤를 군사들이 쫓으며 칼을 휘두르니, 매우 위급해 보였다.
이에, 당진평이 급히 몸을 날려 하인들의 머리 위를 넘고는 칼을 휘두르는 군사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적수공권의 당진평이었으나, 손놀림만으로 병장기를 지닌 군사 셋을 단숨에 제압하며 소리쳤다.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살육을 펼치는 것이냐?”
이에 뒤쫓아오던 군사들이 주춤하여 멈추자, 군사들 속에서 장수가 나와 당진평에게 칼을 겨누며 소리쳤다.
“모달 사순이다! 대역죄인 연개소문 일족을 도륙 내러 왔으니, 감히 저항하지 말고 목이나 길게 빼 기다리거라!”
“뭐라? 이 시건방진…….”
당진평이 기도 안 차 이를 갈며 말하였으나, 무기를 지니지 않은 상태였기에 대적할 적의 수부터 가늠해 보았다.
‘내 앞에 백여 명, 대문 밖에서 들리는 함성소리로 미뤄 짐작하건대… 담을 둘러 포위한 이들이 사백여 명 남짓, 안채와 별당 등에서도 소리가 들리고 있으니… 최소 팔백에서 천여 명이다.’
모달 사순이 이끈 일천 군사들이었으니, 당진평의 계산은 제법 정확한 셈이었다.
적의 수를 가늠한 당진평이 방 안에 있는 명림신을 떠올리며, 시선을 자신에게 집중시키기 위해 도발을 감행하였다.
“감히, 잔챙이들이 나의 주군을 대역죄인이라 말하였는가?”
“이놈이 죽고자 환장하였구나. 오냐! 소원대로 해주마. 당장 저놈의 목을 베라!”
모달 사순의 명에 군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당진평을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