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266화 (266/328)

266화 살육 (8)

개소문은 자신을 천거한 사선종유에게 잠시 시선을 주고는 태왕을 향해 당당히 말하였다.

“폐하, 소신 천라징정 축조 책임자가 되어, 십오만 개마무사를 양성할 수 있도록 시간을 마련하겠나이다.”

태왕 건무가 개소문의 의견에 만족하여 고개를 끄덕이고는 모두에게 물었다.

“그대들의 생각은 어떻소?”

“서부 누살 개소문을 천리장성 축조 책임자로 임명하소서.”

이에, 강이식을 비롯한 무장들 모두가 개소문을 천리장성 축조 책임자로 임명하기를 원하였다.

천리장성 축조를 주장하던 오부 귀족들과 대소 신료들도 개소문을 천리장성 축조 책임자로 임명하는데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천리장성 축조 책임자로 서부 누살 개소문을 임명하도록 하겠소.”

태왕 건무의 명에 따라 개소문이 천리장성 축조 책임자가 되며 긴 논쟁도 끝을 맺었다.

모두가 만족한 결과였으나, 오직 북장원만이 미간을 구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개소문은 대장군 강이식보다 생각의 폭이 넓구나. 역시 내 계획대로 개소문을 살려둬선 아니 된다.’

살의를 담아 개소문을 바라보는 북장원에게 사선종유가 웃으며 말을 건네었다.

“종리위두대형, 그대의 뜻대로 되어 만족하셨소?”

이에, 북장원이 사선종유를 바라보며 허허 웃었다.

“뜻대로라 하시었소? 하하하, 그래… 그리되었구려. 하하하.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서둘러야겠소이다. 하하하.”

사선종유에게 짧게 머리 숙여 예를 건넨 북장원은 태왕을 독대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개소문의 요동행을 서둘러야, 진대덕이 장안성에 당도하기 전 소식을 전할 수 있다.’

* * *

개소문이 집으로 돌아오니, 팽무일이 급히 달려와 물었다.

“그래, 막리지에 임명되었나?”

“막리지가 아니라, 천리장성 축조 책임자가 되었다네.”

“뭐? 뭐? 또 성 쌓는? 도대체 사부는 장수가 맞소?”

팽무일이 기가 막혀 이처럼 물으니, 개소문은 낙심한 팽무일의 어깨를 다독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명림신은 의식을 차렸는가?”

기다리고 있던 당진평에게 개소문이 물었다.

“아직 의식은 없습니다.”

당진평의 대답에 개소문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 앉으며 말하였다.

“다시 요동으로 가야 할 것 같소. 그전에 명림신이 의식을 차리면 좋으련만…….”

“요동에 가신다고 하시었습니까?”

공손향이 놀라 물으니, 개소문이 대전 회의 결과를 모두에게 들려주었다.

개소문의 말이 끝나자, 공손향이 한숨을 내쉬었다.

“천리장성 축조는 십 년 이상 걸릴 대공사입니다. 그 공사를 서부 누살께서 맡으신다면, 언제 막리지에 오르겠나이까? 거절하셔야 하옵니다.”

“거절할 수 없소. 내 일신의 영달도 중하나, 고구려의 안위가 걸린 일이오.”

개소문이 뜻을 꺾지 않으니, 팽무일을 비롯한 모두가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성벽이나 쌓자고 사부를 쫓아 이 고생한 줄 아나? 사부는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제자는 들으라. 우리 고구려가 없으면, 내가 막리지에 오른들 뭔 소용이겠는가?”

이에, 팽무일이 답을 못하였다.

“이런 제길… 장성 쌓으러 가야겠네.”

팽무일이 체념할 때, 하인이 들어와 아뢰었다.

“모달 여범께서 오셨습니다.”

“여범이? 들라하라.”

하인을 따라 들어온 모달 여범은 개소문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어 당황한 듯 머뭇거렸다.

“그래, 어찌 오셨소?”

개소문이 물으니, 여범이 안색을 바꾸어 답하였다.

“이번에도 제가 서부 누살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벌써 그런 결정이 나온 게요?”

“종리위두대형께옵서 태왕 폐화와 독대하시어, 결정이 빨리 났다 들었습니다.”

“종리위두대형께서?”

“그렇습니다. 지난 요동행과 달리, 이번에는 군사 이만을 이끌게 되었습니다. 감축드리옵니다.”

여범이 이렇듯 축하를 건네니, 개소문이 빙그레 웃으며 답하였다.

“고맙소만, 그 군사들이야 모달이 이끄는 군사 아니오? 그래, 이번엔 대모달로 승찬하신게요?”

“송구하오나, 서부 누살을 돕고자 대모달에 올랐습니다.”

여범이 대모달로 승찬하였다는 말에 팽무일의 인상이 구겨졌다.

“뭐? 고생은 누가 하는데, 상은 그대가 받아? 뭐 이런 경우가!”

“제자는 조용히 하라!”

개소문이 엄히 말하였으나, 팽무일은 성질을 참지 못하고 더 극성을 부렸다.

“아니, 이게 조용히 할 일이냐고! 세상에 뭐 이런 경우가 있냐고? 누구는 팍팍 위로 올라가고, 누구는 정해진 직책도 못 받냐고!”

개소문이 무안하여 여범에게 말하였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고, 내일 봅시다.”

이에, 여범이 웃으며 답하였다.

“마음 쓰지 마십시오. 곧 요동으로 떠나셔야 하오니, 내일 사열을 받으십시오.”

“벌써 사열을?”

“그렇습니다. 한시가 급하여 서두르게 되었습니다. 사열식엔 태왕 폐하를 비롯한 대신들과 귀족들도 참석할 것이며, 환송연도 함께 치러질 것입니다.”

연회가 있을 예정이란 말에 팽무일의 귀가 쫑긋했다.

“연회? 태왕이 참석한 연회? 참말이오?”

“그렇습니다. 서부 누살뿐만 아니라, 여기 계신 모두가 참석하란 종리위두대형의 당부도 있었습니다.”

자신도 참석할 수 있다는 말에 팽무일의 귀가 입에 걸렸다.

“그거 좋구만! 좋아! 하하하.”

금세 얼굴이 펴진 팽무일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개소문이 허허 웃었다.

“허허, 제자가 좋다니 다행이구나. 허나, 사고는 쳐선 아니 된다.”

“사고는 개뿔… 사람 뭐로 보고.”

분위기가 누그러지자, 안심한 여범이 인사를 건네고는 자리를 떠났다.

여범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그동안 조용히 있던 모용설이 개소문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자는 연회에서 죽나이다.”

“뭐? 왜?”

팽무일이 크게 놀라 바로 물으니, 모용설이 그에겐 시선도 주지 않고 개소문에게 말하였다.

“여기, 이자가 저자를 죽이나이다.”

“뭐? 왜? 내가? 내가 왜 여범을 죽여?”

팽무일이 당황하여 재차 물었으나, 모용설은 여전히 쳐다도 보지 않았다.

이에, 개소문이 팽무일과 모용설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그래, 왜 죽이는가?”

“아니, 내가 그걸 어찌 아냐고!”

개소문의 물음에 팽무일이 버럭 소리를 지르니, 공손향이 대신 나서 답하였다.

“여기, 모용설은 타인의 죽음을 보나이다. 결코 틀리지 않으니, 이는 필경 정해진 운명일 것입니다. 하여, 일시를 알아야 대책을 마련할 수 있나이다.”

이에, 개소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모용설에게 물었다.

“언제 어디서 죽이는가?”

“정확한 일시는 모르오나, 멀지 않은 장래이오며… 장소는 연회장입니다.”

“연회장?”

개소문이 놀라 되물으니, 모용설이 표정을 굳혀 답하였다.

“술과 음식이 가득한 상에 피가 넘쳐흐르며, 시신이 쌓여 있나이다. 그리고 격분한 저자가 여범의 목을 베나이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개소문이 입을 열었다.

“내일 사열식에 제자는 참여하지 마라.”

“뭐? 왜?”

“연회장에서 살인한다고 하니, 연회장에 제자가 없으면 살인도 없을 것이다. 허니, 제자는 남아라.”

“아니, 내가 왜 여범을 죽이냐고! 사람 정말 억울하네. 이게 말이 되냐고? 내가 왜 아무 이유 없이 여범을 죽여?”

펄펄 날뛰는 팽무일을 야수가 어깨를 눌러 앉히며 말하였다.

“개. 소. 문… 염려하지… 마라. 나도… 남아. 팽무일을… 지키겠다.”

“뭐? 네가 뭔데 나를 지켜? 감시지, 그게 지키는 거야?”

팽무일이 기가 막혀 언성을 높였으나, 이미 개소문과 야수의 마음은 정해져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에, 당진평도 입을 열었다.

“우리가 요동으로 다시 가기 전에 명림신 저자가 깨어나야 하니, 내일은 저도 연회장에 가지 않고, 명림신이 의식을 차릴 수 있도록 살피겠습니다.”

“가능하겠소?”

“최선을 다해야겠지요.”

당진평의 답변에 개소문이 공손향과 쇼락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그럼 내일 연회는 두 사람이 나를 따르도록 하고, 단 사부와 상이는 남아 정토와 수영을 돕도록 하시오.”

혼자만 연회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기에 팽무일도 조금 누그러졌다.

“도대체가… 타인의 죽음을 본다는 게 말이 되냐고. 괜히 술자리만 빠지게 되었네. 제길…….”

* * *

다음 날, 날이 밝기 무섭게 팽무일이 개소문을 닦달하였다.

“이봐 사부! 사열식이 있다고 하니, 얼른 준비해서 가라고. 오늘 태왕도 온다고 하니, 먼저 가서 준비해야지.”

자신은 참석 못 할 사열식이었지만, 개소문의 준비를 돕기 위해 나름 열심이었다.

개소문은 그런 팽무일의 행동을 내심 고맙게 여겨 아무 말 없이 준비하고는 공손향과 쇼락을 대동하고 사열식이 펼쳐질 연무장으로 향하였다.

“여범이 잘 준비할 터인데, 어찌 그리 서두르나? 천천히 가셔도 될 터인데…….”

단 사부가 공연히 서두르는 팽무일에게 한소리 하였다.

“자그마치 이만이라고. 따르는 군사가! 그 군사들이 우리 사부를 따라야지, 여범을 따르면 되나. 일찍 나가 군사들이 얼굴도 익힐 시간도 주고 해야지… 내가 도적 떼 괴수 노릇을 해봐서 아는데, 밑에 놈 믿을 게 못 된다고.”

자신의 경험이 담긴 이야기였기에, 단 사부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 * *

연무장에 당도해 보니, 군사들의 기강이 잘 잡혀 있는 듯하여 개소문이 여범을 칭찬하였다.

“이전부터, 이끌던 군사들이오?”

“저들은 상장군 대건상 휘하 군사들이었습니다. 소장이 상장군을 모실 때, 수차례 지휘하였기에, 뜻을 거스르지 않지요.”

여범과 군사들이 오래도록 호흡을 맞춘 듯한 이유를 깨닫고 개소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사정이 있었구려. 잘 되었소. 헌데, 태왕 폐하는 언제 오시오?”

“대장군 강이식을 비롯한 무장들이 먼저와 배석한 후, 오부 귀족들과 대소 신료들이 좌정할 것입니다. 그 후, 태왕 폐하께옵서 자리하실 터이니… 두 시진쯤 뒤겠습니다.”

“두 시진이라…….”

해가 머리에 오를 때쯤 태왕이 연무장에 자리할 것이란 말에 개소문이 중얼거렸다.

* * *

여범의 말대로 강이식을 비롯한 무장들이 먼저 연무장에 당도하여 배석하였다.

고정의와 고돌발, 고승, 주용 등도 요동에 개소문과 함께 돌아가기 위하여 떠나지 않고 연무장을 찾았다.

그리고 사선종유를 선두로 오부 귀족들과 대소 신료들이 연무장에 들어와 좌정하며 태왕의 행차를 기다렸다.

“종리위두대형은 안 오시는 게요?”

오부 귀족 속에 북장원이 보이지 않자, 개소문이 의아해 여범에게 물었다.

“종리위두대형께서 오시지 않을 리가 있겠나이까? 태왕 폐하를 모시고 오시겠지요.”

여범이 대수롭지 않게 답하니, 개소문도 고개를 끄덕였다.

“태왕 폐하를 모시고 오신다라… 그럴 수도 있겠구려.”

이때, 공손향이 무장들 속에서 상장군 대건상이 보이지 않음을 이상히 여겨 개소문에게 말하였다.

“대건상이 보이지 않습니다. 모든 무장들이 참석하는 게 아닌가 봅니다.”

“그렇군. 상장군이 보이지 않는군.”

개소문도 이상히 여겨 여범에게 물으려 할 때, 군사들이 나팔과 북을 울리며 태왕의 행차를 알렸다.

“태왕 폐하 납시오!”

이에, 모두가 일어나 연무문을 바라보니, 태왕이 말에서 내려 들어왔고 그 곁을 늙은 환관 단공이 지키며 따라 들어왔다.

그리고, 백여 명의 호위가 태왕의 뒤를 따르니, 태왕의 행차치고는 꽤나 간소하였다.

“폐하의 호위가 너무도 적구나.”

개소문이 의아히 여겨 이처럼 말하니, 여범이 빙그레 웃으며 답하였다.

“이만의 군사가 사열한 연무장이기에, 감히 폐하의 안위를 위협할 이가 없어 호위를 간소하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소? 누구의 뜻이오?”

개소문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시큰둥하게 물으니, 여범이 바로 답하였다.

“종리위두대형의 뜻이었을 겁니다만, 폐하께선 호위는 단공 하나로도 충분하다 여기실 것입니다.”

여범이 늙은 환관 단공을 가리키며 미소지었다.

이에 개소문이 단공을 바라보니, 늙고 깡마른 몸에 눈만이 빛을 내고 있었다.

“저자 한 명으로 충분하다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