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살육 (7)
진대덕의 환송연이 치러진 다음 날, 개소문은 아침 일찍 입궐할 채비를 하였다.
“사부, 너무 빨리 들어가 봐야 오늘은 진대덕을 배웅하느라 태왕도 없을 거야. 오후 늦게 나가라고.”
아침부터 팽무일이 뒤를 졸래졸래 따라다니며 잔소리를 했다.
“제자는 여기 있으면서, 궐 사정을 어찌 그리 잘 아는가?”
개소문이 허허 웃으며 물으니, 팽무일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하였다.
“사부가 부산 떠는 동안, 태왕이 직접 의전하여 진대덕을 평양성 밖까지 배웅 나갔거든. 나도 밖에 나가서 구경했는데, 몰랐지?”
태왕이 일개 직방랑중을 직접 의전했다는 말에, 개소문이 씁쓸해 허허 웃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당의 사절을 태왕이 직접 의전하는 일이 처음은 아니라더군. 사부도 들어서 알고 있지?”
팽무일의 물음에 개소문은 답하지 않고 입궐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이에 팽무일이 뒤를 쫓으며 물었다.
“아니, 벌써 가서 뭐 하려고? 태왕도 없을 건데, 천천히 가도 된다고.”
개소문은 팽무일의 물음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담담히 답하였다.
“신하된 자로서, 먼저 입궐하여 태왕 폐하를 기다려야 하지 않겠는가?”
“아무도 없을 거라니까! 말 되게 안 듣네.”
궐에 들어서니, 아무도 없을 거라던 팽무일의 말과 달리, 진대덕을 배웅 나가지 않은 무장들이 가득하였다.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는 이들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개소문이 구석에 자리 잡고 서니, 누군가 그를 알아보고 반갑게 불렀다.
“개소문 아닌가!”
위엄있고 당당한 목소리, 대장군 강이식이었다.
강이식의 음성에 모두의 시선이 개소문에게 향하였다.
이에, 개소문이 강이식에게 머리 숙여 예를 표하자, 또 다른 누군가가 그를 반겨 불렀다.
“왜 그런 구석에 있습니까? 이리 오십시오!”
건안성의 젊은 성주 고돌발이었다.
“그래, 이리 오시게나.”
고돌발의 곁에 서 있던 신성 성주 고정의가 인자한 표정으로 웃으며 개소문을 불렀다.
개소문이 다가가 인사를 올리니, 그 곁에 요동성 성주 고승과 서부총관 주용도 자리해 있었다.
“여기서 뵙습니다. 어인 일이신지요?”
요동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 모두 대전에 들어와 있으니, 개소문이 의아해 물었다.
“요동이 당의 수중에 떨어지게 생겼는데 어찌 이대로 있을 수 있겠는가? 내가 모두 불렀다네.”
강이식이 이처럼 답하니, 개소문이 의아해 다시 물었다.
“요동이 당의 수중에 떨어진다니, 어인 말씀이십니까?”
개소문이 한가한 소리를 하니, 서부총관 주용이 언짢은 기색으로 말하였다.
“이 사람 개소문, 자넨 소식도 못 들은 것인가?”
“진대덕의 일은 들어서 알고는 있사옵니다만, 태왕 폐하께옵서 요동을 내어준다 하셨나이까?”
개소문이 오히려 되물으니, 고정의가 한숨을 내쉬며 답하였다.
“태왕께서 그간 당의 요구를 거절하시지 않으셨으니 이번에도 수락하실 거라 여겨 급히 온 것이네.”
고정의의 말 속엔 태왕 건무에 대한 깊은 불신이 담겨 있었다.
개소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전 안을 둘러보니, 오부 귀족들과 대소 신료들은 모두 태왕을 따라나선 듯 보이지 않았고, 무장들만 가득할 따름이었다.
‘고구려가 전쟁도 하기 전부터 둘로 나뉘었구나. 이세민의 술책이 참으로 간교하기 이를 데 없구나.’
모두가 뜻을 합쳐 힘을 모아도 강대한 당을 상대하기 힘든 상황에 서로 반목하고 있으니, 개소문은 마음이 답답하였다.
* * *
오후가 되어, 진대덕을 배웅한 태왕이 환궁하였다.
“대장군 강이식을 비롯한 무장들이 대전에 모여 있다 하옵니다.”
동정찬이 다가와 아뢰니, 태왕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태왕의 씁쓸한 표정에 동정찬이 잠시 머뭇거리다 마저 말을 이었다.
“요동에서 고정의와 고승 등도 들어와 있나이다.”
“나를 꾸짖고자 온 모양이로다. 그래, 오래 기다렸을 터이니, 대전으로 가도록 하자.”
태왕 건무가 환복도 하지 않고 대전으로 발을 옮기니, 동정찬이 뒤를 따르며 나지막이 말하였다.
“하온데, 폐하… 명림신이 보이지 않나이다.”
“연회 준비를 책임지고도 어제 보이지 않더니, 오늘도 안 보이는가?”
태왕이 발을 멈춰 동정찬을 돌아보았다.
이에, 동정찬이 바짝 다가가 소리 낮춰 말하였다.
“명림신은 봉역도가 가짜임을 알고 있었나이다. 그런 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심상치 않사옵니다.”
이에, 태왕 건무가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하고는 몸을 돌려 대전으로 향하였다.
‘명림신이 누군가에게 봉역도가 가짜였음을 말하였다면…….’
태왕 건무는 필경, 명림신이 누군가에게 봉역도가 가짜였음을 말하였으리라 단정 내렸고, 그 누군가로 북장원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북장원이다. 북장원이 알고 있을 것이다.’
태왕 건무가 무겁게 발을 옮겨 대전 안으로 들어서니, 북장원을 비롯한 오부 귀족들과 대소 신료들도 모두 늘어서 기다리고 있었다.
‘저자가… 북장원 저자가… 봉역도가 가짜임을 알고 있다.’
북장원과 잠시 시선을 교환한 태왕 건무가 용상에 올라 대전 안에 늘어선 모든 이를 하나 하나 살폈다.
천리장성 축조 반대를 위해 요동에서 급히 달려온 이들도 보였고, 북장원을 비롯하여 당을 섬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보였다.
그리고, 그 속에 공을 세우고도 제대로 상도 받지 못한 개소문이 보였다.
‘연태조의 장자도 나를 원망하겠지. 논공행상은 분명해야 하거늘, 내가 챙겨주지 못하였구나.’
대전 안 모두가 적으로 가득한 듯하여 건무의 마음을 울적하게 하였다.
굳은 표정으로 용상에 등을 기댄 태왕 건무가 어두운 표정의 고정의를 바라보며 물었다.
“요동에서 오느라 애쓰셨소. 그래, 어인 일로 오신 게요?”
신성 성주이자, 고구려 왕종 계루부의 수장 고추가인 고정의가 요동을 벗어나 대전에 들어선 것은 나름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고정의의 뜻은 요동의 뜻이며, 고구려 왕종 계루부의 입장이었다.
“송구하오나 폐하, 우리 고구려가 존망지추의 위기에 처하였기에 늙은 몸을 이끌고 왔나이다.”
고정의가 차분히 답하니, 태왕 건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내게 하고픈 말들이 많아 보이는구려. 그래, 누가 먼저 하시겠소?”
태왕 건무의 물음에 대전 안에 침묵이 잠시 흐르고 사선종유가 이를 먼저 깼다.
“폐하, 당의 사신이 답을 듣지 못하고 갔나이다. 한시라도 빨리 천리장성 축조를 결정하시어 황제께 전하여야 하옵나이다.”
황제 이세민의 진노를 우려한 사선종유의 발언에, 대장군 강이식이 눈을 부릅뜨며 언성을 높였다.
“태대사자는 우리 고구려가 전쟁도 하지 않고, 요동을 내어줘야 한다고 말하는 게요?”
“허면, 대장군은 저 강대한 당과 전쟁이라도 치르고 싶은 것이오?”
사선종유도 물러서지 않고 소리 높여 말하니, 강이식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뭐라? 전쟁이 무서워 피로 지켜온 요동을 내주겠단 말인가? 폐하! 요동을 버리자는 이 간악한 자의 목을 베어 황제에게 보내시고, 십오만의 개마무사를 양성하시어 애송이 황제 이세민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으시옵소서!”
“감히, 내 머리를 벤다고! 대장군은 실성한 게요?”
태왕의 앞에서 고성이 오가니, 이 광경에 개소문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세민이 원하는 바가 이런 것이겠구나. 그자의 뜻대로 되어서는 안 된다.’
개소문이 참담한 심정으로 태왕을 올려다보니, 태왕 역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태왕의 눈빛이 너무도 처량하여 개소문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이때, 강이식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태왕 건무를 불렀다.
“태왕 폐하! 우리 고구려는 결단코, 중원의 나라들보다 무궁할 것이옵니다. 요동을 버리지 마시옵소서. 우리가 물러날 경우, 당은 더 심한 요구를 해올 것이고, 그때는 이미 늦나이다.”
“…….”
“우리 고구려의 강대함은 요동이 근원이며, 요동을 잃은 우리 고구려는 신라의 등살조차 견디지 못할 것이옵나이다.”
강이식의 말이 끝나도록 태왕 건무가 아무런 말도 없으니, 요동 이십여 성을 대표하여 고승이 아뢰었다.
“폐하, 요동을 탐하는 당은 이미 우리의 적이옵니다. 적의 간교한 술책에 말려들어선 아니 되옵나이다. 천리장성 축조는 그 안에 우리를 가두는 것이옵나이다. 진취적 기상으로 개마무사를 양성하여 요동벌을 지키시옵소서.”
이에, 사선종유가 앞으로 나와 이견을 내었다.
“폐하, 우리 고구려는 북주에 이어 수와 오랜 전쟁을 치르며, 국고가 비었나이다. 지금은 전쟁을 치룰 여력이 없나이다. 지급은 땅을 경작하여 굶주린 백성들을 돌봐야 할 때이옵나이다. 천리장성 축조는 우리 고구려의 내실을 다질 절호의 기회입니다.”
“절호의 기회라니 가당치도 않소!”
강이식이 노해 소리치니, 그를 따르는 무장들과 오부 귀족들의 고성이 오고갔다.
이에, 태왕 건무가 잠시 눈을 감고 마음을 다스린 후 개소문에게 시선을 옮겼다.
“연태조의 장자, 서부 누살 개소문은 어찌 생각하는가?”
무장들 속에서 개소문이 한발 앞으로 나와 태왕 건무에게 예를 올린 후 차분히 답하였다.
“소신 개소문 아뢰겠나이다. 천리장성을 축조하소서.”
개소문의 이 말에 강이식을 비롯한 모든 무장들이 놀라 멍하니 개소문을 바라보았고, 오부 귀족들이 쾌재를 불렀다.
이에, 흑비걸이 화를 참지 못하고 개소문을 엄히 꾸중하였다.
“개소문! 어찌 감히 천리장성 축조를 찬성한단 말인가? 선친인 연태조 합하를 너는 어찌 뵈려 하는가?”
이에 개소문이 고개 돌려 흑비걸을 잠시 바라보고는 다시 태왕을 향해 아뢰었다.
“폐하, 지금은 원하는 것을 할 때가 아닌! 필요한 것을 해야 할 때이옵니다.”
“필요한 것을 해야 할 때라? 그래, 그대는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 여기는가?”
태왕 건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으니, 개소문이 망설이지 않고 답하였다.
“시간이옵나이다.”
“시간?”
태왕이 다시 물으니, 개소문이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폐하, 천리장성을 축조하시고, 축조되는 기간 동안 개마무사를 양성하소서.”
이에, 강이식이 앞으로 나와 이견을 말하였다.
“둘 다 하기엔 너무도 막대한 자금이 소요됩니다. 폐하, 천리장성 축조는 불가하옵나이다.”
강이식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바라보며 천리장성 축조를 반대하니, 태왕이 한숨을 내쉬며 개소문에게 다시 물었다.
“대장군의 말을 어찌 생각하는가?”
이에, 개소문이 당당히 가슴을 펴고 답하였다.
“폐하, 시간은 그 자금을 마련해 줄 것이며, 개마무사가 양성되면 자연스럽게 요동은 지켜질 것이옵니다.”
“시간이 자금을 마련해 줄 것이라?”
태왕이 다시 물으니, 개소문이 막힘 없이 답하였다.
“천리장성 축조는 한두 해에 끝날 공사가 아니옵니다. 최소 십여 년이 걸릴 대공사로, 우리 고구려는 이 기간 동안 개마무사를 양성하면 되옵고, 때에 따라 천리장성 축조를 늦추어 개마무사를 양성해도 되옵나이다.”
“십여 년? 그동안 요동은 어찌 되는가?”
태왕이 다시 물으니, 개소문이 매우 자신있게 답하였다.
“황제 이세민은 천리장성을 경계로 영토를 나누자 하였나이다. 허면, 천리장성이 완공되기 전엔 경계로 삼아 영토를 나누지 않아도 되니, 요동을 당에게 뺏길 일은 없나이다. 우리는 이 기간 동안 개마무사를 양성하여, 요동벌을 지키면 되나이다.”
개소문의 말대로라면, 천리장성을 축조해 당의 공격을 방비하고, 개마무사를 양성해 요동벌을 지킬 수 있었다.
천리장성 축조를 반대하던 무장들 모두 입을 다물고 개소문을 바라보았고, 개마무사 양성을 반대하던 오부 귀족들과 대소 신료들 역시 이견을 내지 못하였다.
이에, 태왕이 고개를 끄덕이니, 눈치를 보고 있던 사선종유가 앞으로 나와 아뢰었다.
“폐하, 개소문의 말이 타당하옵나이다. 이에 개소문을 천리장성 축조 책임자로 임명하시옵고, 당에도 속히 사신을 보내시옵소서.”
북장원의 계획대로 개소문을 천리장성 축조 책임자로 천거한 사선종유가 살며시 시선을 옮겨 북장원을 쳐다보았다.
기뻐할 줄 알았던 북장원의 얼굴이 매우 굳어 있었다.
‘아니, 저자 얼굴이 왜 저렇단 말인가? 개소문을 천리장성 축조 책임자로 천거하라 해놓고는 뭐가 저리 못마땅한 표정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