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화 살육 (5)
날이 밝기도 전에, 성충이 고구려로 떠날 채비를 마치고 인사를 올리니 의자가 마음이 불쾌하여 건성으로 인사를 받았다.
의자에게 인사를 올리고 나온 성충이 곧장 말에 오르자, 오랜 벗 흥수가 다가와 올려다보며 말하였다.
“왕께서 노여워하시네.”
“나도 아네.”
“아는 사람이 어찌 왕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이렇듯 급하게 고구려 태왕을 돕고자 떠나는가?”
“왕께서도 이미 전에 허락하셨던 일이었네.”
“허나, 지금은 신라 정벌 중이지 않은가?”
흥수의 물음에 성충이 한숨을 내쉬며 말하였다.
“이보게 흥수, 어제 왕의 행동은 우리 백제가 분노하였듯 신라를 분노케 하였을 걸세. 물론 지금 우리 백제가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보다 강하나, 신라는 반드시 당을 끌어들여 복수하고자 할 것이네. 그렇다면, 고구려가 온전해야 우리 백제를 지킬 수 있다네.”
“자네가 고구려에 가면, 고구려가 온전할 수 있단 말인가?”
흥수가 답답하다는 듯 이렇듯 물으니, 성충이 자신 있게 답하였다.
“길이 멀어 태왕은 구하지 못할지언정, 고구려는 지킬 수 있을 것이네.”
“태왕을 지키지 못한다? 설마, 고구려에서 정변이 일어날 것이란 말인가? 헌데, 태왕이 죽는다면, 고구려가 온전하지 못한 것 아닌가?”
“고구려의 정변은 필연이네. 나는 그 정변이 우리 백제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완성되도록 하려는 것이네. 태왕이 살아 있어 우리 백제의 편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으나, 그렇지 못한다면 다른 수라도 내야겠지.”
말을 마친 성충은 마음이 급하여 흥수에게 바로 인사를 건넸다.
“갈 길이 머네. 돌아와 이야기하세나.”
자신의 인사도 받지 않고 성충이 말을 재촉하여 떠나니, 흥수는 그저 멀어져가는 성충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만 볼 뿐이었다.
“저리도 급한가? 도대체 고구려에 뭔 일이 생긴다는 것인지…….”
* * *
“형님, 궐에선 아직 연락이 없습니까?”
개소문의 아우 연정토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마도 요동 이십여 성의 보수 공사를 완수하였음에도 막리지 승계가 미뤄지고 있음이 염려스러운 모양이었다.
“당의 사절로 궐이 무척이나 바쁜 듯하다.”
개소문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하니, 이번엔 연수영이 물었다.
“오라버니, 요동에서 온달을 만났다고 들었습니다. 온달이 자복하던가요?”
자복이란 표현에 개소문이 허허 웃었다.
“허허, 수영아… 온달 장군께선 이미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셨단다. 그러니, 더 자복할 일도 없으실 듯하구나.”
이에, 가만히 듣고 있던 팽무일이 한소리하였다.
“온달이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였으나, 그 태도는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닌, 우리를 적으로 여겨 경계하는 모양새였다고. 내가 혼쭐을 내주고 싶어도, 우리 사부의 출셋길을 막고 싶지 않아 참은 거야. 내게 고마워하라고.”
쉴 새 없이 떠들어 대는 팽무일이 귀찮은 듯 개소문이 귀를 후비고는 시큰둥히 답하였다.
“그래, 제자의 그 뜻이 갸륵하고 고맙구나.”
“왠지 건성같은데…….”
팽무일이 개소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말하였다.
이때, 하인이 들어와 아뢰었다.
“궐에서 내일 사절대의 환송연이 있으니, 모레 입궐하라 연락이 왔습니다.”
“뭐? 내일 연회가 있으면 내일 연회에 참석하라 명해야지. 어찌 연회는 빠지고 모레 들어오라 하는 거야? 아니, 우리 사부는 연회에 초대도 않는 거야? 설마 눈치 없이 연회에 참석할까 봐, 모레 들어오라 알려주는 거야?”
팽무일이 공연히 하인에게 역정을 내니, 개소문이 손을 내저어 팽무일의 입을 막았다.
“우리 집 하인이 뭔 죄가 있다고 화를 내는 게냐? 궐에서 소식이 와 전한 것뿐이거늘…….”
“아니 그럼 내가 여기서 누구에게 화를 내? 저 하인 말고는 화낼 사람이 없는데, 뭘 어쩌라고?”
오히려 팽무일이 따지고 드니, 개소문은 어이 없허 손을 내저었다.
“허, 제자가 어찌… 허.”
말문이 막힌 개소문을 대신하여 공손향이 팽무일에게 말하였다.
“연회에는 부르지 않았으나, 모레 궐에 들라 명한 것으로 봐선, 반드시 그간 내리지 않은 상을 내릴 듯합니다. 허니, 그만 고정하시지요.”
상이란 말에 팽무일이 솔깃하여 구겨졌던 안색을 활짝 폈다.
“상? 우리 사부가 이제 막리지가 되는 거야? 고구려의 재상이 되는 거야? 하하하.”
선대 태왕의 명도 있을뿐더러, 개소문이 세운 공이 작지 않으니 모두가 이렇듯 내심 기대하였다.
“좋아! 그깟 환송연 따위야 뭐 상관없지. 우리 사부를 위해 내가 호랑이를 한 마리 잡아 올 테니, 내일은 우리끼리 연회나 벌이자고!”
마음이 들뜬 팽무일이 이렇듯 장담하며 사냥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이제 곧 날이 저무네. 호랑이는 됐고, 제자는 사고나 치지 말게.”
“어허! 사부는 이렇게 세상 물정을 모르네. 밤이 돼야 오랑이가 나오지. 가만히 있어 봐. 크고 튼실한 놈으로 한 마리 잡아 올 테니, 시끌벅적하게 술자리나 벌이자고.”
“아니… 그래도 이 사람이…….”
팽무일이 사고 칠까 염려된 개소문이 이렇듯 말하니, 공손향이 개소문의 근심을 덜기 위해 자처하였다.
“제가 함께 따라 나설 터이니, 심려치 마시옵소서.”
이에, 개소문이 고개를 끄덕여 답하니 그동안 조용히 있던 야수가 입을 열었다.
“헌데. 당. 진. 평이 안. 보. 인다.”
“뭐? 정말 그 친구가 안 보이네. 어디 간 거야?”
팽무일도 오늘 하루 종일 당진평이 보이지 않던 것을 떠올려 물었다.
이에 공손향이 차분히 답하였다.
“나루터에서 누군가와 약속이 있다 하더군요. 저녁 무렵에 들어올 것이라 했습니다.”
“약속? 당 장주가 우리 고구려 땅에서 약속하고 만날 이가 있던가?”
개소문이 의아해 물었으나, 공손향도 더는 아는 바가 없는지 그저 미소 지을 따름이었다.
* * *
명림신은 태왕의 명을 따라 진대덕의 환송연 준비를 책임지었다.
해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내일 있을 연회 준비를 마친 명림신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약속 장소로 이동하였다.
해 저무는 나루터에 먼저와 기다리는 이가 있었다.
중년의 사내로 몇 차례 안면을 익힌 사내였다.
“어제 말한 것을 생각해 보았는가?”
명림신이 대뜸 물으니, 중년의 사내가 나지막이 답하였다.
“신중하신 종리대형께서 허튼소리를 하셨을 리도 없으니, 저도 신중히 생각하여 위에 아뢰었습니다.”
“비밀은 잘 유지해야 하네.”
“우리 형제단은 비밀을 목숨처럼 여기옵지요. 비밀을 지키기 위해 죄를 덮어쓰기도 한다는 것 아시는지요?”
“그래, 그 점은 믿네. 그래 어찌 되었는가?”
명림신이 목소리를 낮춰 물으니, 중년 사내도 소리 죽여 답하였다.
“말씀하신대로 산동에서 비적 떼로 꾸며 급습할 수는 있사옵니다. 하온데, 그 금액이…….”
“금액은 걱정하지 말게나.”
명림신이 이렇듯 장담하니, 중년 사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종리대형께서 이렇듯 장담하시는데, 처음 거래도 아니고 믿어야겠지요.”
“그럼 계약이 성사된 것으로 알고 돌아가겠네. 좋은 소식 전해주시게.”
명림신이 기뻐 중년 사내의 등을 두드리고는 몸을 돌렸다.
그때, 황혼빛을 받은 화살 한 대가 바람을 가르고 날아 명림신의 가슴팍에 박혔다.
“헉!”
신음을 토한 명림신이 중심을 잃자, 또다시 정면에서 화살 십여 대가 날아와 명림신의 가슴과 어깨에 박혔다.
“크윽…….”
짧은 신음과 함께 한 모금의 피를 토한 명림신이 중심을 잃고 강물에 빠졌다.
“종리대형!”
갑자기 날아든 화살에 명림신이 물에 빠지자 중년 사내가 놀라 소리지르고는 무작정 내달렸다.
그러나, 이보다 빠르게 십여 대의 화살이 뒤를 쫓아 중년 사내의 등과 목덜미에 박혔다.
목이 꿰뚫린 중년 사내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고꾸라졌고, 풀숲에서 여범이 십여 명의 수하들을 이끌고 모습을 드러냈다.
“강물에 던져라.”
여범의 명에 중년 사내도 명림신처럼 강물에 던져졌다.
“돌아간다. 누가 보았는지 모르니, 주변을 정리해라!”
여범이 목격자도 없애기 위해 명하였으나, 다행스럽게도 나루터엔 다른 이들이 없어 살육은 이어지지 않았다.
잠시 뒤 여범이 수하들을 이끌고 떠나자, 나무 위에서 당진평이 사뿐히 내려와 나루터로 몸을 날렸다.
강물에 떠내려갔는지 명림신과 중년 사내의 시신은 보이지 않았다.
“저들은 누구길래, 나의 수하와 고구려의 종리대형을 죽인 것이지?”
당진평은 개소문을 따라 고구려에 들어와 있었으나, 아직도 그의 수하들은 중원 각지의 약방을 거점으로 정보를 취합하고, 살수 집단인 형제단도 운영되고 있었다.
평소 북장원을 도와 정적 제거를 형제단에 의뢰하던 명림신이 이번 진대덕의 사절대 급습도 형제단에게 의뢰했던 것이다.
이에, 당진평은 당의 사절대 급습을 의뢰한 이가 누군지 직접 확인하기 위해 나루터에 나와 숨어서 지켜보았고, 결국 여범이 명림신을 암습한 광경도 목격하게 된 것이다.
“당의 사절대 암습을 고구려 대신이 의뢰하고, 이를 또 누군가 암습하였으니… 명림신을 죽인 이는 당의 사람인가? 어쨌든 더는 관여하지 않는 것이 좋겠구나.”
당진평은 풀리지 않는 의문을 남겨 두고 살육이 펼쳐진 나루터에서 멀어지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사람이 떠내려왔잖아!”
공손향과 함께 호랑이 사냥을 나온 팽무일이었다.
이에, 당진평이 당황하여 날듯이 팽무일의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달려갔다.
“어이쿠! 화살도 박혀 있네. 이게 대체 몇 개야?”
당진평이 달려가면서 보니, 팽무일이 강물에서 명림신을 건져 올리고 있었다.
“아니! 팽무일 이 사람아! 그 시신 강물에 그대로 둬!”
마음이 급한 당진평이 팽무일에게 달려가며 소리쳤다.
“시신? 아직 살아 있는데? 그냥 강물에 버려? 그런데 너 언제 온 거야?”
팽무일이 의아해 물었다.
명림신이 살아 있다는 말에 당진평이 당황하여 묻는 말에 답하기보다 오히려 되물었다.
“살아 있는가?”
“응, 살아 있더라고… 스스로 자맥질하여 떠오르더니, 헤엄쳐 오다가 축 처졌길래… 내가 건져 올렸지.”
팽무일의 말에 당진평이 놀라 명림신의 목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미세하게 맥이 느껴졌다.
“이 자가… 일부러 물속에 숨어 목숨을 건졌구나.”
당진평의 행동이 의아한 공손향이 바로 물었다.
“아는 사람입니까?”
명림신의 몸에 박힌 화살을 뽑고 지혈하느라 당진평이 답하지 못하니, 팽무일이 의심스러운 듯 당진평을 위아래로 살피며 물었다.
“당 장주, 자네가 답하지 못하는 거 보니… 자네가 죽인 게야? 자네, 우리 사부 따르면서 뭔 수작 부리고 있는 거야? 그런 거야?”
당장이라도 당진평의 뒤통수에 검을 쑤셔 넣을 듯 팽무일이 엄히 물었다.
“내가 죽일 거면, 화살 따위는 사용하지 않는다.”
명림신의 지혈을 마친 당진평이 차갑게 답하니, 그제야 팽무일도 안심하여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면 말고. 그런데, 아는 사람이야?”
“의뢰인이다. 일단 눈을 피해 데려가자.”
“의뢰인?”
팽무일이 의아해 물었으나, 당진평은 대답도 하지 않고 수레를 구하기 위해 달려갔다.
“저거 수상한데… 확 죽여 버려?”
팽무일이 의심의 눈초리로 달려가는 당진평을 바라보니, 공손향이 부드럽게 말하며 팽무일을 달랬다.
“일단 서부 누살께 데려가 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서부 누살 휘하이니, 서로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의심하지 마세요. 의심은 저 혼자 하겠습니다.”
“왜 그 좋은 걸 혼자만 한다고… 뭐 아무튼 알았다고.”
잠시 뒤, 수레를 구해온 당진평이 명림신을 수레에 싣고는 앞서 달리니, 팽무일과 공손향도 그 뒤를 따랐다.
어느새 밤이 깊어 인적이 끊겼기에, 마주치는 이들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