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살육 (4)
촛불에 비친 북장원의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이보게 신이. 자네 방금 한 말이 무엇인가? 정녕 봉역도가 가짜란 말인가?”
북장원이 다시 물으니, 명림신이 한숨을 내쉬며 답하였다.
“봉역도는 가짜이옵니다. 진실을 담은 듯 그렸으나, 실상… 거짓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릇 지도라함은 조금도 거짓이 없어야, 지도로 길을 살피는 이가 헛된 걸음을 하지 않는 법이온데, 봉역도엔 우리 고구려의 주요 성들의 위치는 바르나, 찾아 들어가는 길이 어긋나 있사옵니다.”
명림신이 사실대로 말하니, 북장원이 크게 놀라 다시 물었다.
“봉역도는 자네가 심숙안에게 청하여 진위를 파악했던 것으로 아는데? 어찌 된 일인가?”
“송구하오나, 봉역도의 진위를 파악하고자 심숙안에게 청하여 봉역도를 살폈사온데 그때, 소인이 거짓을 말하였나이다.”
“뭐라? 어찌 그랬는가?”
“그 자리에서 봉역도가 가짜라 말할 경우, 태왕께서 가짜를 바친 것을 황제가 알게 될 것이고… 진노한 황제가 반드시 우리 고구려를 벌하려 할 것이었기에…….”
“그렇다고 하여, 나까지 속였단 말인가?”
북장원이 노기를 억누르며 애써 차분히 물으니, 명림신이 살며시 북장원의 안색을 살피며 말하였다.
“비밀을 지켜, 전쟁을 막고자 하였습니다.”
“어리석은 소리! 그래서 지금 그 비밀이 지켜졌는가? 황제는 봉역도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진대덕을 파견하여 직접 살피게 하였고, 이제 그 진위를 파악한 진대덕이 당으로 돌아가 황제에게 아뢰면, 우리 고구려는 당의 침략으로 멸망하고 말 것일세!”
엄히 꾸짖는 북장원에게 명림신이 무릎 꿇어 사정하였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허나, 이를 황제가 모르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이번 사절대의 규모는 이전 사절대와 달리 그 규모가 크지 않습니다. 사절대가 우리 고구려를 떠나 당에 도착하면… 장안까지는 그 길이 멉니다. 소인이 따로 산동에 사람을 동원하여… 진대덕을 없애겠나이다.”
당의 사절대를 당의 땅에서 급습하여 몰살시키겠다는 말이었다.
너무도 위험한 발상에 북장원이 깜짝 놀라 멍하니 명림신을 바라보았다.
“우리 고구려를 구할 길은 이 길뿐이옵니다. 당은 건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라로, 아직 반기를 든 이들이 산에 숨어 비적질하고 있습니다. 비적 떼가 진대덕을 급습해 죽이고 재물을 약탈한 것으로 꾸민다면, 황제는 우리 고구려를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간절한 청을 올리듯 명림신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니, 북장원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북장원이 나지막이 말하였다.
“알겠네. 자네의 뜻대로 하게나.”
“감사드리옵니다.”
북장원이 마음 깊이 감격하여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해야 할 일이 많을 터이니, 자네는 이만 물러나 일 보시게.”
북장원의 명에 명림신이 공손히 예를 올리고는 물러났다.
홀로 남은 북장원은 자신의 숨결에도 흔들리는 촛불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지금 우리 고구려가 처한 이 형국이 마치… 이 초와 같구나.”
잠시 촛불을 바라보던 북장원이 소리 높여 하인을 불렀다.
“너는 당장 가서… 상장군 대건상과 모달 여범을 불러오너라.”
* * *
밤이 깊어 상장군 대건상과 모달 여범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북장원의 집을 방문하였다.
“부르셨나이까?”
상장군 대건상이 예를 표하며 물으니, 북장원이 자리를 권하며 말하였다.
“그대들 둘은 나의 사람이라 믿고 있소이다. 맞소이까?”
“여부가 있겠나이까.”
상장군 대건상이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답하니, 북장원이 만족해 수염을 쓰다듬었다.
“내 사람이라 믿었던 이가 있었으나, 그가 내게 그동안 진실을 가렸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그동안의 정을 생각하여 다시 신뢰하는 게 좋겠소?”
북장원이 이렇듯 물으니, 여범이 눈을 빛내며 답하였다.
“무엇을 감추었는지가 중요하겠지요. 그가 무엇을 감추었나이까?”
이에, 북장원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답하였다.
“봉역도요.”
“봉역도? 태왕이 황제에게 바친 그 봉역도 말이옵니까?”
대건상이 놀라 되물으니, 북장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바로 그 봉역도요. 봉역도는 가짜였고, 내가 신뢰하는 명림신은 봉역도가 가짜임을 속였소. 그리고… 태왕은 감히 가짜 봉역도를 황제에게 바쳤고 말이오.”
대건상은 너무도 놀랍고 당황하여 그저 마른 침만 꿀꺽 삼켰다.
이와 달리 여범은 눈을 빛내며 소리 낮춰 말하였다.
“죽여야 합니다.”
짧고 간결하였으나, 어조는 매우 단호하고 강경하였다.
그러나 대건상은 여범과 달리, 잔뜩 겁을 집어먹어 목소리를 떨며 물었다.
“어느… 선까지 해야… 하오리까?”
이에, 북장원이 여범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대신 답하라 눈치를 주었다.
“진위를 파악하고도 속인 명림신, 가짜를 바쳐 우리 고구려를 전란에 빠뜨린 어리석은 태왕 그리고 태왕을 따르는 무장들과 향후 국장 어른께 정적이 될 수 있는 귀족들 모두이옵니다.”
너무도 많았고 그 속에 태왕마저 포함되어 있으니, 대건상은 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
그러나 북장원은 만족한 듯 다시 수염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여 말하였다.
“다 좋은데… 평양성 내의 살육을 탓하기 위해 요동에서 군이 내려온다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이에, 여범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일은 없나이다.”
“어찌 그런가?”
“이 모든 살육은 연개소문이 벌인 것으로 하시면 되시옵나이다. 국장 어른께선 연개소문의 살육을 진압한 충신이자 고구려의 영웅이 되시는 것이옵지요.”
이에, 북장원이 크게 만족하여 껄껄껄 웃었다.
“하하하. 과연 여범이로다! 어찌 자네처럼 지모가 뛰어난 이가 고작 모달에 머물고 있단 말인가? 이 모두가 자신의 측근만 요직에 앉히는 대장군 강이식 때문이로세. 내 반드시 정변을 평정하고 그대를 상장군 자리에 앉히겠네.”
북장원이 이처럼 장담하니, 여범이 감격하여 넙죽 절을 올렸다.
* * *
밤이 깊어도 북장원은 매우 바빴다.
상장군 대건상과 모달 여범을 대동하고, 어둠을 틈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사선종유의 집을 찾았다.
깊은 밤 돌연 찾아온 정적 북장원을 사선종유가 언짢은 표정으로 맞이하였다.
“종리위두대형께서 저들마저 이끌고 어찌 찾아오셨소?”
사선종유가 자리도 권하지 않고 물었으나, 북장원은 제법 느긋이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태대사자께서 나를 좀 도와주셔야겠소이다.”
“도와달라? 그래, 무엇을 도와드리오리까?”
귀찮다는 듯 사선종유가 하품까지 하며 물었다.
이에, 북장원이 바로 답하였다.
“연개소문을 천리장성 축조 책임자로 천거해 주시오.”
“뭐요? 연개소문을?”
“그렇소이다. 연개소문이 천리장성 축조 책임자가 된다면, 나는 태대사자를 수일 내로 막리지에 천거할 것이오.”
“막리지?”
북장원의 제안이 솔깃한 사선종유가 미끼를 덥썩 물고 말았다.
“그렇소. 막리지에 천거할 것이오. 선대 태왕께서 성년이 된 연개소문에게 막리지를 승계하라 명하시었으나, 천리장성 축조 책임을 맡은 연개소문은 당장 막리지에 오르지 못할 터이고, 막리지를 언제까지 공석으로 남겨 둘 수도 없으니, 내가 태대사자를 막리지에 천거할 것이오.”
이에, 사선종유가 입이 귀에 걸리도록 좋아하며 승락하였다.
“내 반드시 연개소문을 천리장성 축조 책임자에 앉혀 요동으로 쫓아 버리겠소이다. 하하하.”
* * *
같은 시각, 대야성을 점령한 백제의 왕 의자는 책사 성충을 불러 인근 사십여 성 공략을 논의하고 있었다.
“성왕께서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신 후, 무엄하게도 신라의 개들은 성왕 전하의 목을 잘라, 머리는 신라 왕궁 북청 계단에 묻고는 밟고 지나기를 거듭하고 있다. 내가 오늘 이 대야성의 성문을 열어, 성주와 그의 처의 머리를 계단에 묻었으니, 나에 대한 오해를 조금이나마 푼 듯하구나.”
의자가 대야성과 인근 성들이 그려진 지도를 내려다보며 크게 흡족해 말하였다.
의자는 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 공주의 맏아들이었으나, 사택왕후를 어미로 모실 정도로 자신의 친모를 부인하고 있었다.
성왕의 비참한 죽음과 신라의 야만스러운 행위로 백제의 모든 이들은 신라를 극도로 증오하고 있었으니, 왕위에 오르기 위해 의자는 친모를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사택왕후를 친모처럼 모신들, 백제의 모든 이들은 그가 신라의 피를 이어받았음을 알고 있었기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반드시 스스로 군사들을 이끌고 신라를 정벌해야 했다.
하여, 의자는 태자 시절부터 신라의 여러 성들을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왕에 오른 뒤에도 그 정벌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낮, 책사 성충의 책략과 거듭된 의자의 공세로 신라의 주요 거점인 대야성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의자는 항복한 대야성 성주 김품석과 그의 처 고타노의 머리를 베어 감옥 바닥에 묻고는 죄수들이 오가며 밟게 하였다.
성왕에 대한 복수였다고는 하나, 김품석의 처는 신라의 왕족으로 김춘추의 딸이었다.
이에 성충은 낮에 있었던 의자의 과격한 결정으로 인하여 장차 백제에 닥쳐올 일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야성은 인근 사십여 성과 이어진 사통팔달의 요충지이옵니다. 이곳을 점령하면 신라의 각성들을 공략하기 쉬우나, 역으로 생각하오면, 신라의 각성들이 대야성을 지원하기 무척이나 용이하옵니다. 하여.”
성충이 잠시 말을 끊으니, 의자가 의아해 물었다.
“그래 무엇인가?”
“전하께서 김춘추의 딸과 사위의 머리를 감옥 계단에 묻으신 일은 신라 왕족들과 귀족들의 분노를 사게 할 것입니다. 신라의 명장 각간 김서현과 김춘추의 관계를 고려하시오면, 신라의 정예 상주군이 곧 움직일 것입니다.”
“허면, 어찌해야 하는가?”
“날이 밝기 무섭게 인근 사십여 성을 휘몰아쳐 함락시키시옵고, 함락된 성엔 우리 군사들을 남기지 마시옵소서.”
“어찌 그런가?”
“지키지 못할 것이기에 남길 필요가 없사옵니다. 성을 함락하면 바로 이동하여 다른 성을 함락하는 방법으로 크고 작은 인근 사십여 성을 함락하신 후 바로 군을 물리소서. 그리하면, 군사들의 손실이 적고 패하지 않으실 것이옵니다.”
성충의 판단이 옳다 여긴 의자가 고개를 끄덕여 답하였다.
“그래, 그대의 말을 따르겠다.”
이에, 성충이 머리를 조아려 감사를 표하고는 말을 이었다.
“소신이 천문을 보니, 고구려에서 별들이 땅에 내려앉을 듯하옵니다.”
“고구려에서?”
“하여, 소신이 고구려의 태왕을 도와 친위정변을 일으켜야 할 듯하옵니다.”
“지금 이곳의 일이 급한데, 자네가 자리를 비우면 어찌하는가?”
의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니, 성충이 담담히 답하였다.
“대야성을 점령한 이상, 인근 성들을 빠르게 공략하면 승리를 거듭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절대로 군사들을 점령한 성에 남기지 마시옵소서.”
“그것은 따르겠네만, 그래도 자네가 있어야 하지 않은가?”
“고구려가 없으면, 우리 백제도 없사옵니다.”
너무도 성충이 단호히 말하니 의자가 의아해 물었다.
“고구려가 그리 위급한 상황인가?”
“당의 황제가 직방랑중을 사절대의 수장으로 삼았나이다.”
“직방랑중?”
“그렇사옵니다. 직방랑중은 당에선 말직에 해당하오나, 지도 제작을 관장하는 직책이옵니다. 이것은 즉, 당의 황제가 고구려 태왕이 바친 봉역도의 진위를 파악하고자 함이옵니다.”
“봉역도의 진위 여부라… 자네는 고구려 태왕이 바친 그 봉역도가 가짜라 여기는 게로군.”
“그렇사옵니다. 건무는 봉역도를 가짜로 바쳤을 것이고, 이를 계기로 고구려는 전란에 휩싸일 것이니, 그 전에 친위정변을 일으키도록 도와야 우리 백제의 안위가 마련될 것이옵니다.”
이에, 의자도 더는 성충의 뜻을 꺾지 않았다.
“그대의 뜻이 그렇다면, 내 믿고 따라야겠지.”
선선히 승락하였으나, 의자의 표정은 정벌에 나선 자신을 두고 고구려로 향하겠다는 성충에 대한 서운함으로 가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