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살육 (3)
국서도 없이 황제 이세민의 전언을 진대덕이 계속 전하니, 대전 안 모두는 숨도 크게 쉬지 않고 진대덕의 말에 집중하였다.
“하여, 내 이를 어여삐 여겨 장성을 쌓도록 허락하니. 아우는 사양치 말고 천리장성을 완공토록 하라.”
천리장성을 쌓아도 좋다는 황제 이세민의 말을 진대덕이 대신 전하니, 태왕 건무가 놀랍고도 기뻐 진대덕을 바라보았다.
이에, 진대덕이 살며시 고개를 숙여 태왕에게 예를 표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장차, 천리장성이 완공되는 날, 내 이를 아우와 함께 기뻐하며 우리 당과 고구려의 영토 경계로 삼을 터이니, 아우는 그리 알고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기뻐하라.”
황제 이세민의 말을 대신 전하던 진대덕이 마침내 말을 마치니, 대전 안 모두가 경악하여, 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
겨우 마음을 진정한 태왕 건무가 진대덕에게 물었다.
“천리장성을 경계로 영토를 나누면, 요동벌은 어찌 되는 것이오?”
“천리장성 안은 고구려의 영토며, 밖은 우리 당의 영토이니, 당연히 요동벌은 우리 당의 영토입니다.”
진대덕이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답하니, 태왕 건무가 오히려 당황하여, 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
이에 강이식이 얼굴을 붉히며 진대덕을 노려보았으나, 조금도 무례한 태도를 보이지 않은 진대덕을 탓하기 어려웠다.
이전 사절대와 달리, 진대덕은 물론 수행하는 이들 모두가 별다른 무장도 하지 않은 채 대전에 들었고, 너무도 말직에 태도 또한 공손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장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니, 태왕 건무가 이를 불안히 여겨 진대덕을 물러나게 하였다.
“직방랑중은 오느라 피로가 쌓였을 터이니, 잠시 쉬며 연회에서 보도록 합시다.”
이에 진대덕이 겨우 목만 숙여 예를 표하고 물러나니, 그제서야 대전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폐하, 이세민의 말은 가당치도 않사옵니다. 이제 우리 고구려는 칼로 답해야 할 때이옵니다.”
대장군 강이식의 말에 북장원이 나서 소리쳤다.
“대장군의 말이야 말로 가당치도 않소!”
강이식이 북장원을 노려보자, 흑비걸이 강이식을 대신하여 북장원에게 소리쳤다.
“뭐라 하셨소? 어찌 대장군의 말이 가당치도 않다 말하는 게요!”
이에 사선종유가 북장원을 대신하여 소리쳤다.
“황제께서 그대들이 그토록 세우고 싶어 하던 장성을 쌓아도 된다 허락하시었는데, 어찌하여 그대들은 불만을 토로하는 것이오?”
“불만? 불만이라 하시었소?”
강이식이 크게 한발 성큼 나서 사선종유 앞으로 다가가니, 기가 질린 사선종유가 급히 뒤로 물러나다가 발을 헛디뎌 벌러덩 자빠졌다.
이에 강이식이 코웃음치며 비웃고는 북장원에게 시선을 돌렸다.
“종리위두대형, 그대는 정녕 우리가 천리장성을 쌓기를 바란다고 여기셨소?”
“항상 당을 경계해야 한다며 방비를 주장하지 않으셨소?”
북장원이 시큰둥히 답하니, 강이식의 눈섭이 꿈틀거렸다.
“개마무사의 수를 십오만으로 늘리고, 우리 고구려의 경계를 엿보는 신라를 백제와 함께 누르자 이야기하였소이다만, 결코 천리장성을 쌓자고 먼저 말한 바는 없소이다. 천리장성을 먼저 언급한 것은 종리위두대형 그대 아니시오?”
강이식을 비롯한 무장들은 천리장성을 쌓기보단 각 산성과 산성 사이에 요새를 세워 방비를 강화하고 개마무사의 수를 늘려 요동벌을 지키길 원하였다.
장성은 적을 막기에 좋으나, 모든 성벽을 지키기 어려우며, 들고 옮길 수 없는 장성보다, 기동력 좋은 개마무사의 보강으로 군세를 강화함이 옳다 여긴 것이었다.
“이보시오 대장군, 개마무사 십오만은 막대한 재정 지출을 요구하오. 또한 우리가 개마무사를 십오만이나 늘리게 될 경우 황제께서 의도를 불순하게 여겨 노하시지 않겠소?”
북장원의 주장을 강이식이 일거에 잘라 말하였다.
“그대는 고작, 당 황제 이세민의 노여움이 두려워 요동을 그냥 바치잔 말이오?”
“이보시오 대장군! 천리장성을 든든히 세운다면 우리 고구려의 북방이 안전해질 것이오. 황제께서 영토로 인정하여 평화를 약속하시지 않으셨소? 헌데 그대는 어찌 이를 마다할 수 있단 말이오?”
북장원이 이처럼 계속 황제 이세민의 뜻을 따르자 주장하니, 무장들이 격분하여 소리쳤다.
이에 오부 귀족들과 대소 신료들이 맞서 소리치니, 대전 안에는 고함이 오고 갈 뿐이었다.
이때 태왕 건무가 소리쳐 소란을 잠재웠다.
“그만! 그만들 하시오!”
간신히 조용해지자, 태왕 건무가 그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상장군 대건상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상장군은 어찌하여 아무런 말도 없었는가?”
이에, 대건상이 한 발 앞으로 나와 아뢰었다.
“소인, 무장들 속에 있어 말을 할 수 없었나이다.”
아마도 자신의 뜻이 다른 무장들과 다름을 말하고 싶은 듯하였다.
이에, 태왕 건무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허면, 할 말은 있으나 못한 게로군. 그래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이에, 대건상이 잠시 숨을 고른 후 아뢰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천리장성을 쌓고 요동성과 요동벌은 버리소서.”
“뭐라?”
강이식이 불같이 노해 소리쳤으나, 태왕 건무가 손을 내저어 제지하였다.
“대장군은 잠시 참으시오. 상장군, 어찌 그리해야 하는지 이유를 듣겠다. 말해 보거라. 우리 고구려가 요동벌과 요동성을 포기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태왕 건무의 물음에 노기가 느껴져 대건상이 머리를 숙여 아뢰었다.
“송구하오나 폐하, 당의 젊은 황제 이세민은 불세출의 영웅으로 백이십여 난을 평정한 인물이옵니다. 이에 비해 우리 고구려는 장수들이 늙고, 군사들은 오랜 전쟁으로 상하고 지쳤으며, 백성들은 밭을 갈지 못해 굶주리고 있나이다.”
대건상의 말처럼 북주와 수의 대군을 막아내었던 고구려의 무장들은 어느새 나이 들어 갔고, 대장군 강이식 또한 오십이 훌쩍 넘었다.
그러나 대건상의 말처럼 고구려에 특출난 젊은 영웅이 없는 상황은 전혀 아니었다.
안시성의 성주 양만춘이 아직 젊고, 온달과 그 휘하 장수들 또한 젊다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건상은 이들이 부각됨을 원하지 않아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수의 대군을 맞아 강이식과 함께 요동성을 지켜낸 요동성 성주 고승도 아직 중년이 되지 않았으며, 이들과 함께 요동성을 지켜낸 새로운 젊은 영웅 연개소문의 존재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이에, 강이식이 격분해 소리쳐 말하였다.
“상장군은 그 입 다물라! 내 비록 늘어 그대에게 모욕을 받을지언정, 우리 고구려에는 온달과 양만춘, 고승, 연개소문 등의 젊은 영웅들이 수두룩한데, 어찌하여 장수된 자가 이들의 존재를 부인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당의 황제 이세민에 비해, 영웅이라 불릴 만한 인물도 아닐뿐더러, 그 공 또한 지엽적인 것입니다.”
“뭐라?”
“온달의 공은 인정하나 그도 이제 중년에 접어들고 있어 젊다 하지 못하며, 양만춘은 그 공이 안시성을 지키고, 평양성을 도운 것뿐입니다.”
“…….”
“연개소문 또한 대장군과 고승을 도와 요동성을 지킨 것뿐이니 대단한 공도 아닙니다. 여기에 요동성 성주 고승은 늙은 대장군을 도와 성을 지킨 것으로, 이는 성주로서 당연한 책무라 할 것입니다.”
대건상이 모두의 공을 낮춰 평하는데도 태왕 건무의 나무람이 없으니, 대전 안 무장들이 치욕스럽고 분해 태왕 건무를 노려보았다.
“대장군은 상장군의 말을 끊지 마시오. 상장군 계속해보시오.”
여기에 더해, 태왕 건무가 상장군 대건상을 두둔하여 말을 이으라 말하니, 무장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충성스러운 대장군 강이식이 그저 예를 올려 뒤로 물러나니, 그 모습이 너무도 힘없고 초라해 보여 무장들의 마음을 찢어 놓았다.
그리고, 상장군 대건상의 말이 다시 이어지니 무장들 모두가 그저 입술을 깨물고 분을 삭여야 했다.
“폐하, 요동과 요동성은 본래 공손 씨 일족의 것이었습니다. 비록 요동벌을 잃고, 요동성을 당에게 넘겨주더라도 우리가 천리장성을 쌓고 방비를 튼튼히 하며 영토를 인정받게 된다면, 장차 힘을 키워 다시 찾을 수도 있을 것이옵니다. 지금은 황제의 뜻을 따를 때이오니, 무리해 힘을 키워 황제의 노여움을 사지 않도록 유념하시옵소서.”
말은 번드르르하였으나, 싸우지 않고 요동벌과 요동성을 당에게 넘겨주고, 천리장성을 경계로 영토를 나누자는 말이었다.
이에, 강이식이 눈을 질끈 감으며 분을 삭이니, 북장원이 이를 비웃듯 나와 말하였다.
“폐하, 상장군 대건상은 만리장성을 공략하였던 전쟁 영웅이옵니다. 용맹한 그는 결코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사옵니다. 상장군이 고작 전쟁을 피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오니, 부디 새겨들으셔야 하옵나이다.”
마치 훈계하듯 말하였으나, 태왕 건무는 그저 묵묵히 듣기만 할 따름이었다.
태왕이 겁을 먹었다고 여겨 기세가 오른 사선종유도 다시 나서 말하였다.
“천리장성을 쌓게 된다면, 우리 고구려는 장성에 의지하여 천년 왕국을 건설할 수 있나이다. 부디, 황제의 명에 따르소서.”
이에, 참다못한 대장군 강이식이 버럭 소리쳤다.
“닥치시오! 중원의 나라들은 그 잘난 만리장성을 쌓고도 숱하게 자멸하기를 반복해 왔소이다! 평화는 장성에 있지 않고, 황제의 아량에 의지해서도 아니 되는 것이오! 우리가 힘이 없다면 평화는 오지 않소이다!”
“그렇다면, 우리 고구려가 힘을 길러 저 강대한 당을 압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허무맹랑한 희망일 뿐이오!”
사선종유도 지지 않고 맞서니, 대전 안은 무장들과 오부 귀족, 대소 신료들의 고성으로 매우 소란스러워졌다.
이에 심신이 지친 태왕이 손을 내저어 모두 물러나라 명하고는 처소로 향하였다.
그리고 밤이 되자, 동정찬이 태왕을 독대하였다.
태왕의 처소엔 여느 때처럼 늙은 환관 단공뿐이었다.
“이세민이 고작 직방랑중을 보낸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태왕의 물음에 동정찬이 머리를 조아리며 답하였다.
“폐하, 송구하오나… 봉역도의 진위를 진대덕이 파악한 듯하옵나이다.”
“뭐라?”
“진대덕은… 산수를 유람하고 명승지를 둘러본다는 핑계를 대며 우리 산천과 산성을 그림에 담았고… 이는 곧 봉역도와 대조하여 비교했을 것입니다. 지도 제작을 관장하는 직방랑중을 이세민이 사절대 수장으로 임명한 이유는 바로… 봉역도의 진위를 파악하고자 함이옵니다.”
이에, 태왕 건무가 한참 동안 침묵을 유지하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봉역도의 진위를 파악한 연유는 아마도 우리 고구려 침략을 위함이겠지…….”
“폐하, 송구하오나 이세민의 뜻을 따라 천리장성을 축조하고 영토를 경계 삼아 당장 전쟁은 피함이 옳다 사료되옵나이다.”
최측근 동정찬마저 천리장성 축조를 받아들이라 청하니, 태왕 건무도 결심을 굳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당장의 전쟁은 피함이 옳겠구나. 그래… 그래야겠지.”
태왕의 한숨이 동정찬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으나, 천리장성 축조 이외에 별다른 수가 없어 이를 악물고 머리를 조아릴 뿐이었다.
그리고 같은 시각, 북장원의 처소에선 명림신이 북장원에게 한 가지 계책을 건네고 있었다.
“진대덕을 죽여야 우리 고구려가 전쟁을 피할 수 있나이다.”
이에, 북장원이 놀라 입만 쩍 벌린 채 명림신을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정적이 흐르고, 북장원이 겨우 정신을 가다듬어 물었다.
“어찌하여 당의 사신을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가?”
“그가 멀쩡히 돌아가면, 봉역도가 허위로 그려졌음을 황제가 알게 될 것이고… 전쟁을 피하기 어려워집니다. 하여, 진대덕을 죽이는 것만이 전쟁을 막을 유일한 방책이옵니다.”
너무도 강경히 당 황제의 사신을 죽여야 한다고 거듭 말하니, 정신이 혼미해진 북장원이 겨우 마음을 다스려 물었다.
“봉역도가 가짜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