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살육 (2)
이전 사절대와 달리 직방랑중 진대덕을 수장으로 한 사절대는 꽤나 단출하였다.
배는 고작 두 척으로, 수행 인원은 모두 이백여 명이었다.
진대덕이 힘겹게 몸을 뒤뚱이며 배에서 내리자, 기다리고 있던 명림신과 동정찬이 말에서 내려 다가가 예를 표하였다.
이에, 진대덕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답하였다.
“오래 기다리셨소. 직방랑중 진대덕이라 하오.”
명림신이 진대덕을 살펴보니, 몸은 둥글고 크며, 머리 또한 동그랗고 목이 없으니 영락없는 표주박이었다.
또한 팔다리가 몸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짧아 움직임이 무척이나 기괴해 보였다.
“의전으로 종리대형과 종리소형이 나오신 게요?”
진대덕이 이처럼 물으니, 명림신이 바로 답하였다.
“태왕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진대덕이 이전 사절대처럼 태왕의 의전을 받길 원하는 듯해 미리 신경 써 말한 것이다.
이에 진대덕은 여전히 서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하였다.
“내 꼴이 이래서… 말을 탈 수 없으니, 왕께서 마중 나오실 필요는 없겠습니다. 하하하.”
진대덕이 지나칠 정도로 짧은 자신의 팔다리를 움직여 보이며 말하니, 그 모습이 매우 우스꽝스러웠다.
허나, 명림신은 조금도 웃음기 없는 얼굴로 의아해 물었다.
“무슨 말씀이시온지?”
“내가 말을 타지 못한다는 이야기지요. 하하하.”
진대덕이 말을 마치자, 배에서 화려하게 꾸민 가마가 내려 진대덕에게로 다가왔다.
“가마를 탄 나를 말을 탄 왕이 의전할 수는 없지 않소이까? 하하하.”
진대덕이 부축을 받으며 가마에 오르니, 명림신과 동정찬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다가 자신들도 말에 올랐다.
“평양성으로 모시겠습니다.”
명림신이 가마에 오른 진대덕에게 공손히 말하였다.
“아니오. 나는 본래 산수를 좋아해 평양성에 가기 전 명승지를 둘러보고 싶소이다. 괜찮으시겠지요?”
당의 황제가 보낸 사절대 수장의 요청이었기에, 명림신은 감히 거절할 수 없었다.
“왕께서 기다리고 계시오니, 진 대인의 행차가 조금 늦음을 알려야겠습니다.”
명림신의 말에 진대덕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허허 웃으며 답하였다.
“허허허, 그리 하십시오. 나는 보는 것처럼 여유롭고 넉넉한 사람입니다. 천천히… 천천히… 가도 제 할 일은 다 한답니다. 허허허.”
기다리고 있을 태왕을 생각하여 명림신이 급히 군사를 불러 평양성으로 보냈다.
그 사이 진대덕은 이미 가고자 하는 곳을 정하였는지, 품에서 지도를 꺼내 살펴 보고는 명림신과 동정찬을 향해 히죽 웃었다.
“자, 우리 함께 유람을 해봅시다. 하하하.”
이전 사절대가 보였던 격식과 오만함은 진대덕에게서 느낄 수 없었으나, 지나칠 정도로 여유로운 모습이 명림신과 동정찬을 오히려 경계케 하였다.
명승지를 보고 싶다고 말한 진대덕을 위해 명림신과 동정찬이 길 안내를 하고자 했으나, 진대덕은 이미 정한 길이 있는지 평양성과 방향을 달리하여, 한수로 행선지를 정하였다.
“한수 일대에 그리도 명승지가 많다 들었습니다. 평양성과 한수는 그리 멀지 않으니, 며칠 둘러보고 평양성으로 올라가도 되겠지요?”
“그리 하시지요.”
진대덕의 행동이 무척이나 수상하고 의아했으나, 명림신은 내색하지 않고 진대덕이 무엇을 꾸미는지 지켜보고자 했다.
진대덕의 행차는 미추홀을 거쳐 당포성으로 향하였고, 성과 마을을 지날 때마다 진대덕은 백성들에게 비단을 내리며 환심을 샀다.
진대덕은 백성들에게 산천과 풍속에 대해 묻고, 포로로 잡혀 있던 수의 군사들에 대해 묻기도 하였다.
또한 인근에 중국인이 머물고 있거나 거주 중인 경우엔 반드시 불러 대화를 나누었다.
이렇듯 진대덕이 마치 유람을 나온 듯 여유로우니, 동정찬은 기다리고 있을 태왕이 염려스러워 마음이 매우 불안하였다.
“저자가 어찌 저러는가?”
멀리 떨어져 진대덕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동정찬에게 명림신이 나지막이 말하였다.
“그러게나 말일세. 분명 뭔 꿍꿍이가 있는 듯한데, 도통 속을 알 수가 없구먼.”
고구려에 포로로 잡혀 있다가 풀려난 중국인과 한참을 대화하던 진대덕이 후한 상을 내리며 위로하고는 명림신과 동정찬을 향해 짧은 팔을 흔들며 웃었다.
이렇듯 진대덕의 행차는 마치 유람을 다니듯 느릿느릿 당포성으로 향하였다.
사절대 수행원으로 함께 온 십여 명의 화공들은 진대덕의 가마가 멈출 때마다 주변 풍경을 매우 빠르게 그려 진대덕에게 보여주기를 반복하였다.
화공들의 그림이 마음에 들 때마다 진대덕은 후한 상을 내렸고,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한참을 그 자리에 머물며 다시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이런 진대덕의 행동이 의심스러운 동정찬이 유심히 바라보면 진대덕은 태연히 미소 지으며 말하곤 하였다.
“산수가 참으로 좋소이다. 하하하.”
진대덕의 행차가 덕진산성과 호루고보루를 거쳐 마침내 당개나루터에 이르니, 절벽 위에 성이 보였다.
진대덕이 보고자 했던 바로 당포성이었다.
당포성은 강에 접해 있는 두 면이 절벽이었기에, 별도의 성벽을 쌓지 않았으며 평지와 연결된 동쪽 방면에만 높고 견고한 성벽을 쌓아 적의 공격을 방비하고 있었다.
당포성이 자리한 지점은 강이 크게 굽어 강물의 흐름이 느려지는 지점으로, 쉽게 강을 건널 수 있는 여울목이었다.
바로 이 지점이 양주방면에서 북상하는 신라군의 침공로가 될 수 있기에, 고구려 입장에선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다.
“성안까지 들어갈 필요는 없소이다. 산수가 매우 좋습니다. 하하하.”
절벽 위 당포성을 바라보며 진대덕이 매우 흡족해 웃으니, 화공들이 바로 자리를 잡아 일대 산수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이쯤 되면 제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진대덕이 무엇을 하는지 눈치챌 수 있을 지경이었다.
“저자가… 우리 고구려를 염탐하고 있는 것이네.”
동정찬이 소리 죽여 말하니, 명림신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포성 일대의 산수를 화공 둘이 그려 보이자, 진대덕은 꽤나 세심히 살펴보고는 상류 쪽으로 이동하며, 일정 간격마다 세워진 고구려 성들을 화공들에게 그림으로 남기게 하였다.
이에, 명림신은 마음이 매우 불안하여 동정찬에게 나지막이 말하였다.
“저자가… 아니, 당의 황제가 봉역도를 신뢰하지 않는 모양일세.”
동정찬도 명림신과 생각을 일치하여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을 보내 태왕 폐하께 아뢰어야겠네.”
동정찬이 소리 죽여 말하니, 명림신이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네. 저자는 보기와 달리 눈치가 상당하니, 섣부르게 의심을 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네.”
명림신의 말처럼 진대덕이 뭔가 낌새를 눈치챘는지, 명림신과 동정찬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아마도 진대덕 본인도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들이 수상함을 잘 알고 있는 듯하였다.
* * *
진대덕이 마치 보란 듯이 간자 행위를 하는 동안, 개소문 일행은 평양성으로 돌아와 태왕을 알현하였다.
아무런 지원 없이 요동 이십여 성의 보수 공사를 마친 개소문에 대한 소문은 평양성 내에서도 자자하여 백성들의 신망이 매우 높았고, 이를 오부 귀족들이 무척이나 불편해하였다.
태왕 건무는 엎드려 절을 올리는 개소문을 내려다보며 담담히 치하하였다.
“애썼다. 일정을 상당히 줄였으니, 너의 공이 크다. 먼길 오느라 피곤할 터이니 물러나 쉬거라. 내 후일 다시 불러 상을 내리겠노라.”
이에, 개소문이 예를 올리며 물러났다.
궐을 나선 개소문에게 기다리고 있던 팽무일이 달려와 물었다.
“사부, 상 받았어? 태왕이 뭐래? 막리지 승계하래?”
“피곤할 터이니, 집에가 쉬자꾸나.”
개소문이 제대로 답도 하지 않고, 말에 오르니 팽무일이 화가 치밀어 주먹을 치켜 들며 소리쳤다.
“아니, 사람 말에 대답은 해야지! 제 말만 하고 지랄이야!”
이에, 야수가 팽무일을 번쩍 들어 말에 올리고는 심드렁이 말하였다.
“닥. 쳐… 피곤하다.”
“뭐, 이 자식이! 너까지 나를 무시해?”
팽무일이 말 위에서 야수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으나, 쉽게 맞을 야수도 아니었다.
이에, 공손향이 말을 몰아 팽무일 곁으로 다가와 부드럽게 말하였다.
“서부 누살께서 집에 돌아가 하실 말씀이 있을 겁니다. 서둘러 가시지요.”
“아하! 그런 거야?”
귀가 솔깃한 팽무일이 기뻐 말을 몰아 개소문을 쫓으며 소리쳤다.
“사부, 집에 가면 할 말 있는 거야? 그런 거였어?”
“그런 거 없다. 피곤하니 가서 그냥 좀 쉬자.”
“뭐, 없다고? 아니 태왕이 상 안 준대? 뭐라고 말 좀 해봐!”
팽무일이 지겹도록 쫓아가며 물었으나, 개소문도 더는 할 말이 없어 그저 입을 다물고 말을 몰아 나갈 뿐이었다.
* * *
달이 바뀌도록 산수를 즐기며 유람하던 진대덕이 마침내 평양성에 당도하였다.
이에 태왕이 직접 나와 의전을 하니, 그 모양새가 무척이나 우스꽝스럽고 초라하였다.
진대덕은 화려한 가마에 올랐고, 고구려의 태왕은 말을 타고 그 곁에서 의전을 하니, 고구려의 대소 신료들은 물론, 구경 나온 백성들은 참담하여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
직방랑중은 당의 관직 상 종오품에 해당하는 직책으로 사절대의 수장이 되기엔 지나칠 정도로 말단이었다.
여기에 더해 직방랑중은 당의 국내외 지도 제작과 군사시설 관리 및 기밀 유지와 수집 등의 책무를 맡고 있었으니, 누가 보아도 수상한 사절대의 수장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노골적이다.”
당에 친화적인 북장원조차 이렇듯 혼잣말을 할 정도로 직방랑중은 의심할 만한 직책이었다.
“저자가 도대체 한 달간 무엇을 하였는가?”
북장원이 소리 죽여 명림신에게 물었다.
이에 명림신이 한숨을 내쉬며 답하였다.
“산수를 구경한다는 구실로 명승지를 탐방하였습니다.”
“명승지 탐방? 그래 어디를 갔던가?”
“당포를 비롯하여… 호루고(임진강) 일대의 우리 고구려 성들이었습니다.”
“뭐… 뭐라? 아니 왜 그 성들을?”
북장원이 놀라 바로 물으니, 명림신은 입을 다물고 답하지 않았다.
아마도 차마, 벗인 동정찬이 그린 봉역도가 가짜였음을 진대덕이 파악하여 진위를 확인하고 있다는 말을 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명림신이 답을 하지 않으니, 북장원의 마음은 더욱 불안하기만 하였다.
“도대체 이 일이 어찌 된 것인가? 지도 제작을 관장하는 당의 직방랑중이 사절대의 수장으로 오다니… 분명 뭔가 있음이야.”
* * *
태왕의 의전을 받아 궐로 들어선 직방랑중 진대덕이 가마에서 내려 뒤뚱뒤뚱 걸음을 옮기니, 훤칠한 태왕 건무가 보폭을 맞추기 위해 멈춰 걷기를 반복하였다.
태왕이 한낱 직방랑중 따위의 비위를 맞추는 모습에 강이식을 비롯한 무장들은 마음이 불편하였고, 북장원을 비롯한 오부 귀족들은 내심 비웃었다.
‘무장들의 마음이 떠난다면, 태왕을 폐위하고 새로운 태왕을 옹립할 수도 있다. 나에겐 좋은 일이다.’
북장원이 이처럼 생각하며 살며시 미소 지으니, 명림신이 힐끔 쳐다보고는 외면하였다.
태왕이 직접 의전하여 대전에 들어선 진대덕은 용상에 앉은 태왕 건무를 올려다보며 제법 정중히 예를 올렸다.
“태왕 폐하께옵서 친히 의전을 하시어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왕이 아니라 태왕으로 칭하였으며, 전하가 아닌 폐하라 칭하니 대전 안 모두가 놀랍고도 기뻐하였다.
태왕 건무도 내심 기뻐 웃으며 물었다.
“그래, 우리 고구려의 산수는 잘 즐기셨소?”
“종리대형과 종리소형의 안내로 유람을 잘 즐기었나이다.”
“그것 참 다행이구려. 그래, 황제 폐하께옵서 사절대를 보내신 연유가 어찌 되시오?”
이에, 진대덕이 웃는 낯으로 답하였다.
“폐하, 기뻐하소서.”
“기뻐하라?”
“그렇사옵니다. 황제 폐하께옵선 봉역도를 기쁘게 받으시옵고, 저를 보내어 이렇게 이르라 하였나이다.”
진대덕이 잠시 뜸을 들인 후 다시 말을 이었다.
“나를 섬기는 아우, 고구려 태왕이 가상하여 이에 상을 내리겠노라. 아우가 요동에 천리장성을 쌓고자 원한다 들었다. 허나, 이는 허울 뿐인 성으로 천리에 이어진 장성은 결코 아니다. 아마도 아우가 나를 의식하여 장성을 쌓고 싶어도 쌓지 못하는 것일 터이다.”
국서도 없이, 진대덕이 황제의 말을 전하니, 태왕을 비롯한 모두가 그저 진대덕의 얼굴만 빤히 바라볼 따름이었다.
국서를 펼쳐 진대덕이 읽었다면, 태왕이 절을 올리고 무릎 꿇은 채 진대덕의 말을 들어야 했을 터이니, 모두가 내심 진대덕의 배려에 감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진대덕의 말이 다시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