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259화 (259/328)

259화 살육 (1)

고구려로 보낼 사절대가 바삐 준비되는 가운데, 조국공 장손무기가 황제 이세민에게 독대를 청하였다.

장손무기는 본래 북주의 황성 중 하나인 탁발 씨의 후손이었으나, 선대에서 성을 바꾸어 장손 씨라 하였다.

그의 선친 장손성은 수의 우호위장군을 지낸 장손성이었으며, 장손무기는 이세민이 황위에 오르기 전부터 섬긴 이른바 최측근이었다.

장손무기의 여동생은 현명하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이세민의 황후, 문덕황후였다.

문덕황후는 자신의 오빠인 장손무기가 제 능력에 비해 과도한 야심을 지녔음을 경계하여 황제 이세민에게 그를 중용하지 말라 말하곤 하였다.

“조국공은 황제께 충성스러운 신하이오나, 그는 야심이 많아 항상 더 많은 공을 세우길 갈망하옵니다. 하여, 그의 과도한 욕심으로 필경 대국을 그르칠 것이 두렵습니다. 폐하께옵선 조국공의 말을 경계하시어, 중용치 마시옵소서.”

그러나 황제 이세민은 줄곧 자신의 곁을 지켜온 장손무기를 멀리하지 못하였다.

이날도 장손무기가 독대를 청하니, 황제 이세민은 흔쾌히 수락하였다.

“폐하, 승상 위증이 이번 사절대의 수장으로 광주사마를 세운다 들었사옵니다.”

“그렇네.”

황제 이세민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하니, 장손무기가 머리를 조아려 물었다.

“폐하, 고구려의 굴복을 원하시옵니까? 고구려 정벌을 원하시옵니까?”

“고구려가 굴복한다면 굳이 정벌할 필요는 없겠지.”

“폐하, 고구려는 결코 굴복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고구려를 정벌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황제 이세민이 오히려 장손무기의 의중을 물었다.

이에, 장손무기는 망설이지 않고 답하였다.

“고구려는 오백 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나라로, 결코 굴복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나라는 작고 백성 또한 그 수가 많지 않으나, 몹시 호전적이고 오만하여 결코 머리를 숙이는 법이 없었습니다.”

“조국공은 고구려를 굴복시키기 위해선 정벌이 필요하다 여기는 게로군.”

“그렇사옵니다. 고구려는 굴복하지 않을 것이기에, 정벌을 통하여 지도에서 지우고, 우리 당의 영토를 백제와 신라에까지 넓혀야 한다고 여기옵니다.”

고구려뿐만 아니라, 신라와 백제까지 흡수하자는 장손무기의 말에 황제 이세민이 잠시 침묵하였다.

살며시 일렁이던 촛불만이 황제 이세민의 한숨에 크게 흔들렸다.

“신라는 우리 당에 매우 충성스런 나라로, 근래 백제의 공새에 시달리고 있다 들었다. 조국공은 신라마저 지도에서 지워 우리 당이 흡수해야 한다 여기는 것인가?”

“국가 간의 외교를 고려한다면 신라의 지위를 유지해줌도 옳다 하겠으나, 실상, 신라는 우리 당이 없으면 하루도 버티지 못할 나라이옵니다. 이렇듯 존재 자체의 의미가 없는 나라이기에, 우리 당의 백성으로 황제 폐하를 섬김이 오히려 신라를 위한 길이라 사료되옵니다.”

근래 들어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연합을 맺으니, 동남쪽 끝에 자리한 신라는 당과의 외교조차 쉽지 않은 형편이었다.

여기에 더해, 백제의 의자가 친히 군을 이끌고 신라의 여러 성들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있었으니, 매우 위급한 상황이었다.

이에, 신라에선 당항성을 통하여 당에 수차례 사신을 보내 고구려와 백제를 정벌하여 주기를 청하는 걸사표를 보내왔었다.

장손무기가 당을 섬기는 신라를 도와 고구려와 백제를 벌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신라마저 흡수하고자 말하고 있으니, 황제 이세민은 다시 침묵하였다.

“음…….”

무겁게 신음을 내뱉은 황제 이세민이 장손무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국공, 그대는 살려달라 도움을 청하는 이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그의 목숨을 끊자 말하고 있는 것이다.”

“폐하, 신라는 매우 작은 나라로, 고구려와 백제가 북과 서를 지키고 있기에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나라이옵니다. 우리 당이 고구려와 백제를 정벌하여 지도에서 사라지게 한다면, 이 보잘것없는 신라는 스스로 자멸할 수밖에 없으니, 폐하께서 어여삐 여겨 흡수하셔야 함을 아뢴 것이옵나이다.”

“하긴, 고구려와 백제가 없다면… 신라는 스스로 자멸하고 말 나라겠지. 그래, 삼한을 모두 흡수하여 지도에서 지우려면 어찌해야겠는가? 그대는 생각한 바가 있는가?”

황제의 물음에 장손무기가 바로 답하였다.

“직방랑중 진대덕을 사절대의 수장으로 삼으소서.”

“진대덕을?”

“그렇사옵니다.”

“직방랑중이라면, 그간 고구려에 보낸 사절대의 수장으로 너무도 격이 떨어지는 직책이 아니던가?”

“바로 그 때문이옵니다.”

장손무기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담아 나지막이 자신의 계책을 아뢰었다.

“진대덕은 직책이 보잘것없고, 외양 또한 볼품없어 의전을 맡을 고구려 왕과 신하들마저 초라하게 만들 것이옵니다. 또한.”

“또한?”

“진대덕은 그 외양과 달리 매우 능청스러운 인물로 아주 태연히 고구려 왕과 신하들을 무시하고 보란 듯이 평양성 안팎의 지도는 물론 한수 이남의 지도까지 확보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보란 듯이? 대놓고 간자 행세를 할 것이란 말인가?”

“그렇사옵니다. 이에 고구려 백성들은 왕에게 실망할 것이며, 민심을 잃은 고구려 왕은 결코 힘을 쓰지 못한 채, 우리 당에게 무릎 꿇고 말 것이옵니다.”

“민심이 왕을 버리게 하란 말인가?”

“그렇사옵니다. 저 작은 고구려가 수의 백만 대군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은 백성들 모두가 스스로 군사가 되어 싸웠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민심이 돌아서게 하여 왕을 따르지 않게 한다면 고구려 정벌은 이뤄진 것이나 다를 바 없사옵니다.”

* * *

다음 날, 황제 이세민은 승상 위증이 세운 광주사마 장손사 대신, 직방랑중 진대덕을 사절대의 수장으로 삼았다.

키가 작고, 지나치도록 뚱뚱하여 자신의 발조차 볼 수 없는 진대덕이 힘겹게 황제 이세민에게 절을 올렸다.

뒤뚱뒤뚱 일어서다가 중심을 잡지 못해 벌러덩 뒤로 누운 진대덕의 몰골에 대전 중신들은 웃음을 참느라 오만상을 찌푸려야 했다.

“누가 나서 도와주거라!”

스스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진대덕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황제 이세민이 웃으며 명하였다.

이에, 호위시랑 황무문이 성큼성큼 다가가 진대덕의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넣어 번쩍 들어 올렸다.

“어이쿠! 고맙습니다.”

간신히 두 발로 선 진대덕이 황무문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으나, 살찐 목이 구부러지지 않아 매우 볼썽사나웠다.

“인사는 됐소이다.”

호위시랑 황무문이 진대덕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차갑게 말하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에 보다 못한 위증이 나서 아뢰었다.

“폐하, 직방랑중은 말에 오르지도 못할 위인이옵니다. 어찌 저런 자를 사절대의 수장으로 삼으시옵나이까? 직방랑중은 평소 행실에 문제도 많아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한 자이오니, 부디 재고하여 주시옵소서.”

거침없고 당당하며 옳고 그름을 명확히 구분하는 위증이었기에, 진대덕의 면전에서 황제 이세민에게 이렇듯 간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사절대의 수장으로 삼은 것이니, 경은 이견을 달지 말라.”

황제 이세민도 진대덕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다는 듯 위증의 간언을 일거에 잘랐다.

이에, 위증도 더는 간하지 못하고 입을 다무니, 진대덕을 수장으로 한 사절대가 바다를 건너 고구려로 향하게 되었다.

* * *

때를 같이 하여, 요동 이십여 성의 보수 공사를 완료한 개소문이 평양행을 시작하였다.

요동성 성주 고승과 서부총관 주용을 비롯하여, 요동성의 백성들이 개소문의 떠남을 아쉬워 배웅하였고, 신성 성주 고정의와 건안성 성주 고돌발도 군사들을 이끌고 요동성으로 와 함께 배웅하였다.

“서부 누살 다시 만날 땐 막리지가 되어 있기를 바라오. 부디, 폐하를 충심으로 보필하여 주시오.”

고정의가 진심으로 개소문을 아끼어 말하였다.

“소장, 아직 어리고 재주가 부족하여 중책을 감당키 어렵습니다. 허나, 폐하를 충심을 다해 모심은 다짐할 수 있습니다.”

개소문이 이처럼 답하니, 고정의가 기뻐 개소문의 두 손을 붙잡고 치하하였다.

“우리 요동 이십여 성이 당의 침입에 대비해 성벽을 보수할 수 있음은 모두가 서부 누살의 공이오. 요동의 백성들과 우리 장수들 모두 그대에게 감읍할 따름이니, 요동의 마음이 그대에게 있음을 잊지 마시구려.”

고정의의 따뜻한 배려에 개소문이 크게 감복하여 정중히 예를 올리고는 말에 올랐다.

요동성을 벗어나자, 개소문이 말머리를 나란히 한 팽무일에게 물었다.

“제자는 금강대도가 탐나지 않는가?”

안시성 팽운이 지닌 금강대도에 팽무일이 미련을 두고 있으리라 여겨 물은 것이다.

“사부답지 않게 사람을 떠보네? 왜? 내가 훔쳐 오지 않은 게 이상하냐?”

팽무일이 오히려 퉁명스럽게 물으니, 개소문이 빙그레 웃었다.

“파천신검을 훔치듯 금강대도를 훔쳐 올까 봐… 요동에 있는 이 년 내내 노심초사했었네. 하하하.”

팽무일이 도적질을 하지 않아 내심 기특한 모양이었다.

“욕심이야 나지. 그런데 말이야. 내 아우의 것이 아닌, 내 조카의 것이라서 말이야. 고작 열 살… 이젠 열두 살이겠군… 그 어린 조카 것을 뺏어서, 안시성의 온달과 불화를 일으켜 사부가 막리지에 오르지 못하게 할 수는 없었다고. 내가 이런 사람이야. 알겠어?”

개소문의 앞길을 막지 않기 위해 도적질을 하지 않았다고 은근히 자신을 내세웠다.

“하하하, 제자가 이처럼 내 벼슬길을 염려하는지 몰랐구먼. 하하하.”

개소문이 껄껄 웃자, 말에도 오르지 않고 뒤따르던 야수가 대뜸 참견하였다.

“아. 니. 다. 팽무일은… 온달이, 두려워… 훔치지… 못. 한. 것뿐이다.”

이에, 얼굴이 시뻘게진 팽무일이 눈을 부라리며 야수에게 호통을 쳤다.

“뭐래? 이 버벅이가 뭐가 어쩌고저쩌고? 말이나 똑바로 하라고! 오밤중도 아닌데 뭘 자꾸 더듬어!”

이유가 어찌 되었든, 팽무일이 금강대도를 훔쳐 자신을 곤란케 하지 않은 것이 기특한 개소문이 씩씩거리는 팽무일을 달래며 길을 재촉하였다.

“야수가 제자의 속을 들여다보지 못해 그런 것이네. 내가 다 아니 그만하시게. 하하하.”

* * *

당의 사절대를 맞이하기 위해 명림신과 동정찬이 포구로 나와 바람을 맞으며 섰다.

먹구름이 빠르게 이동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명림신이 말하였다.

“바람이 불어오고 있네. 거대한 태풍을 타고 당의 사절대가 바다를 건너오는구먼.”

이에, 동정찬도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하였다.

“요동에서도 서부 누살이 평양성으로 돌아오고 있다 하더만, 평양성이 무척 시끄러워지겠구먼.”

시야가 닿는 곳 모두가 먹구름으로 가득하였으나, 무겁게 내려 앉은 먹구름들이 마치 파도처럼 굽이치며 서에서 동으로 흐르고 있었다.

거센 바람이 먹구름을 이동시키며, 사절대의 배들을 고구려까지 밀고 올 것이었다.

아직 수평선 끝에선 사절대의 배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필경 거센 바람 끝엔 그들의 배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태풍이 그들의 배를 가라앉혀 우리 고구려 땅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했으면 좋겠구먼.”

명림신이 이처럼 말하니, 동정찬이 의아한 듯 바라보았다.

“그대는 당을 대국으로 섬기고 있지 않은가? 배가 가라앉길 바라다니 참으로 의외로군.”

“이보게 정찬이. 나는 전쟁을 피하고, 백성들의 곤궁함을 우려할 따름이지, 당을 섬기지는 않네.”

“궤변이네. 중원에 제국이 세워지면 결코 전쟁을 피할 수는 없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네.”

“이보게 정찬이.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하여, 거짓으로 봉역도를 보낸 것인가? 자네의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우리 고구려는 거센 바람 앞에 선 격이 되었다네.”

“…….”

“젊은 황제는 용맹하고 영리하며, 그의 곁엔 뛰어난 책사가 즐비하다네. 그대와 난 결코 을지 공이 될 수 없으니, 저들을 막기란 불가하네.”

명림신이 은연 중에 을지문덕이 세상에 없음을 언급하니, 동정찬이 크게 당황하였다.

“을지문덕 공께서는 홍산을 지키고 계시네. 감히 망발하지 말게나.”

이에, 명림신이 고개 돌려 동정찬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보게 정찬이. 저들도 자네처럼 그리 믿어 주면 참으로 좋겠구먼.”

어느새 수평선 끝에 사절대의 돛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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