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오해와 진실 (14)
또다시 연회장 안에 살기가 감돌고, 당장이라도 경우의 화살이 개소문을 향해 날아들 듯하였다.
시위를 더욱 팽팽히 당기며 안시성 최고의 명궁 경우가 물었다.
“개소문! 무공을 폐하겠는가?”
이에 격분한 팽무일이 참지 못하고 허리춤에 찬 검으로 손을 뻗었다.
이 모습에 온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칼, 뽑으면 머리를 으깰 것이다.”
온달의 묵직한 음성에 팽무일이 흠칫 놀라 자신도 모르게 한발 물러났다.
‘이런 바보같이…….’
겁에 질린 자신의 몰골에 팽무일이 내심 부끄러워 이를 갈았다.
이에, 경우가 비웃으며 다시 재촉하였다.
“개소문! 어찌하겠는가?”
개소문이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자, 공손향이 대신하여 답하였다.
“서부 누살께선, 선친의 한도 덮으시고 온달 장군께 죄를 묻지 않으십니다. 헌데, 어찌하여 온달 장군께선 근골을 잘라 무공을 폐하라 겁박하시옵니까?”
“…….”
“서부 누살께서 이곳 안시성에 온 것은 태왕 폐하의 명을 받아 성벽을 보수하고자 함이온데, 태왕 폐하의 명마저 거역하시려 하나이까?”
공손향이 연태조의 죽음을 언급하니, 마음이 어진 온달로선 변명할 말이 없었다.
이에 평강이 대신 나서 물었다.
“선친의 한을 따지지 않겠다?”
“그렇습니다. 서부 누살께선 안시성의 성벽 보수를 원하오며, 선친의 한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시옵니다. 그러하니, 부디 몸에 익힌 무공 또한 덮어 주십시오.”
공손향이 예를 다해, 엎드려 절을 하며 이렇듯 말하니 온달이 시선을 돌려 평강을 바라보았다.
평강이 짐짓 표정을 굳혀 엄하게 말하였다.
“안시성 성벽의 보수는 양만춘 성주께서 백성들과 함께 진행하실 것이다. 결코 태왕의 명을 받아 따르는 너희를 곤란케 하지 않을 것이니, 그 점 염려치 않아도 된다.”
“감읍하옵니다.”
공손향이 개소문을 대신하여 예를 올려 답하였다.
이에, 평강이 공손향을 내려다보며 냉정히 물었다.
“허나, 무공을 훔쳐 배운 죄는 어찌할 생각이냐?”
“온달 장군께옵선 이미 서부 누살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바 있나이다. 허나, 서부 누살께선 평소 온달 장군의 인품을 믿사옵기에, 그 죄를 묻지 않겠다 하였습니다. 선친의 한도 덮는 서부 누살이옵니다. 몸에 익힌 무공은 온달 장군께옵서 죄를 묻지 않는다면 그 누가 알아 죄를 묻겠나이까?”
공손향이 온달과 평강을 번갈아 바라보며 간청하였다.
연태조의 죽음을 거론하며 파천신검을 익힌 죄를 묻지 말아달라 애원하니, 온달과 개소문은 서로 할 말이 없어 그저 눈을 감았다.
이에, 총명한 평강도 난처하여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연태조의 죽음과 파천심검을 맞바꾸자는 말이로구나. 참으로 영리하며 영악한 여인이다. 마음 약한 장군께선 이 여인의 청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장차 이 여인이 우리 고구려의 적이 된다면 크나큰 위협이 될 수도 있다. 지금 죽여야 하나?’
냉정히 마음을 정리한 평강이 경우에게 시선을 보내며 입을 열려던 그 순간.
온달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막리지 연태조 합하의 죽음은 모두 나의 잘못이다. 개소문 네가 언제든 나에게 죄를 묻고자 한다면, 나는 받아들일 것이다. 허나, 아직 우리 고구려에 미력하나마 내가 남아 힘을 보태야 하니, 네게 양해를 구하고 싶다.”
이에, 개소문이 아무런 답이 없자, 온달이 마저 말을 이었다.
“몸에 익힌 무공을 폐하기 위해 근골을 자를 만큼 나는 모질지 못하다. 이미 익혔으니, 부디 고구려를 위해 사용하기 바라며… 혹여, 네가 그 무공으로 우리 고구려를 어지럽힐 시 그 죄는 내가 묻고, 나 또한 죗값을 받겠다.”
자신을 믿지 않는 듯한 온달의 말에 개소문은 참담하여 그저 묵묵히 듣기만 하였다.
“연회는 끝났다. 나는 대장군과 달리 속이 좁은 장수로, 귀순하였다고는 하나 저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 안시성은 양만춘 성주가 보수할 터이니 안심해도 좋다. 개소문 너는 저들을 데리고 이만 물러나도록 하라.”
온달이 말을 마치자, 개소문이 엎드려 온달에게 절을 올리고는 몸을 돌려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사부! 가는 거야? 같이 가! 갑자기 벙어리가 돼서… 말도 없이…….”
팽무일이 급히 개소문의 뒤를 쫓으니, 야수와 당진평도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공손향도 예를 다해 온달과 평강에게 절을 올리고 몸을 돌렸다.
그동안 아무 말 없이 서 있던 쇼락이 온달과 온동을 잠시 바라보고는 공손향의 뒤를 따랐다.
개소문 일행이 모두 떠나자, 경우가 활을 거두며 중얼거렸다.
“아비의 한 대신, 무공을 달라 말하다니… 말은 그럴싸하나, 자식된 도리는 아니로군. 나로 인하여 오옥을 데려와 연태조가 죽었으니, 모두가 내 탓인데, 온달 장군께서 괜한 곤욕을 치르시는구나.”
경우의 중얼거림을 들은 막바우가 고개를 저었다.
“경우, 자네 탓이 아니네. 온달 장군의 잘못 또한 아니고. 그저… 일이 안 되려니, 꼬이고 꼬여서 막리지가 죽은 게지.”
막바우의 위로에도 경우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고, 온달 또한 마찬가지였다.
“죄는 우리가 짓고, 공연히 개소문을 닦달한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소.”
온달이 이렇듯 말하니, 평강이 막바우처럼 고개를 저었다.
“을지문덕 공의 서신을 상기하소서.”
개소문을 경계하라던 을기문덕의 서신을 상기시키니, 온달은 그저 몸을 돌려 자리로 돌아가 앉을 뿐이었다.
온달의 어깨가 조금 처져 보여 안쓰러운 평강이 공손향의 말을 떠올리며 혼자 생각하였다.
‘냉정한 여인이다. 은연중 우리 장군님의 죄를 물어 연태조의 죽음과 파천신검을 맞바꾸다니… 개소문 역시 그녀의 말에 동의하듯 아무런 말이 없었으니, 이 얼마나 냉정한가? 이들에 비해 우리 장군님은 마음이 여리시니, 훗날 을지문덕 공께서 우려하신 일이 벌어질 경우, 우리 장군께서 개소문을 막아 낼 수 있을 것인가?’
평강의 눈에, 마음이 울적해 술잔을 기울이는 온달이 들어왔다.
평강의 뜻을 따라 개소문의 속내를 파악하기 위해 박대한 것이 무척이나 마음이 불편한 듯 보였다.
이에, 평강이 고개를 저어 마음을 다졌다.
‘아니다. 장군님께선 옳고, 바른 분이시다. 장군님이 모질지 못하다면 내가 모질면 된다. 우리 장군님은 그 누구보다 선하고 강하신 분이시니, 나 같은 아녀자가 우리 장군님을 낮춰 봐선 아니 된다.’
이때, 양만춘의 부장이 어지러운 연회장 안으로 뛰어 들어와 양만춘에게 아뢰었다.
“당의 사절대가 태왕 폐하를 알현하고, 승전탑인 경관과 우리 고구려 전역을 그린 봉역도를 가져갔다 하옵니다.”
이에, 모두가 깜짝 놀라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 * *
요동성으로 향하는 내내 개소문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 없었다.
이에, 쇼락이 말을 몰아 개소문과 말 머리를 나란히 하고 담담히 말하였다.
“온달은 그대를 걱정해 찾고자 했다.”
“장군께선 나를 걱정하셨을 것이다. 그런 분이시지.”
“온달을 이해하는가? 그렇다면 어찌 그리도 침울한가?”
“내, 친아우와 같던 온동이 나를 경계해 마음이 무겁다.”
어득구의 죽음으로 온동이 자신을 의심하는 줄 모르니, 무척이나 섭섭하고 마음이 불편했던 모양이다.
개소문이 이처럼 온달을 존중하고 온동을 아낀다고 말하니, 쇼락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해를 많이 받는 사람이 있다. 그대가 그런 경우다. 그러나 오해를 받는다고 하여, 좋은 이를 멀리하고 경계해선 안 된다. 온달과 온동 모두 좋은 사람이다.”
쇼락의 말은 어눌했으나, 진정을 다하고 있었다.
이에, 개소문이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하니, 뒤따르던 여범이 급히 말을 몰아와 아뢰었다.
“지금 막 요동성에서 소식이 도착하였습니다.”
“무엇인가?”
“당의 이세민이 태왕을 고구려 왕에 책봉하였고, 수의 포로를 데려갔다 합니다.”
“뭐라?”
개소문이 놀라 물으니, 여범이 다시 또 아뢰었다.
“또한 태자 저하를 볼모로 데려갔으며, 승전탑인 경관을 허물고 수의 군사들의 혼령을 달래고자 태왕께서 친히 위령제를 올렸다 합니다.”
“아니! 어찌?”
개소문이 할 말을 잃어 여범을 바라보았으나, 여범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여기에 더해, 우리 고구려 전역을 그린 봉역도를 당의 황제 이세민에게 바쳤다 합니다.”
“전쟁에서 패한 것도 아닌데, 어찌 태왕께서 당에게 무릎 꿇을 수 있단 말인가? 서둘러 요동성으로 가자!”
개소문이 너무도 치욕스러워 이를 갈며 명하니, 모두가 급히 말을 몰아 요동성으로 향하였다.
* * *
요동성에 당도한 개소문이 고승과 주용을 찾아가 평양성 내의 일을 물었다.
“모두가 사실이네.”
고승이 두 눈을 감은 채 답하니, 개소문이 더욱 참담하여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에, 주용이 개소문을 진정시키며 말하였다.
“서부 누살은 진정하게. 우리는 우리의 임무를 다하면 되네. 봉역도를 지닌 당의 황제가 우리 고구려를 침략하지 말란 법 없으니, 그대는 서둘러 보수 공사를 완수하게나. 내 주변 성에 사람을 보내 그대를 도우라 전하겠네.”
개소문이 겨우 분을 삭이며 감사를 표하니, 고승이 입을 열었다.
“평양성 내의 일로, 요동 일대가 무척이나 소란스럽네. 각 성의 성주들과 장수들의 불만이 상당하네. 허나, 이 일로 그대의 보수 공사는 진행이 빨라질 터이니, 그대는 서둘러 임무를 완수한 후 평양성으로 돌아가 태왕 폐하를 보필하시게.”
선대 태왕이 연태조의 장자가 성인이 될 시 막리지 지위를 승계토록 하라 명한 것을 상기하여, 개소문이 막리지에 올라 태왕을 보필하란 말이었다.
고승의 말처럼, 고구려의 북방을 지키는 요동의 모든 성들과 장수들은 평양성 내의 일로 모두 격분해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목숨을 바쳐 지켜온 고구려의 기개를 태왕이 한순간에 무너뜨렸다고 여겨 치욕과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여기에 장차 막리지를 승계할 개소문이 천리장성 보수 공사를 책임지고, 백성들에게 노역비마저 지급하니, 안시성을 제외한 요동의 모든 성들이 개소문을 따르고 지지하기 시작하였다.
요동 이십여 성을 보수하는 천리장성 공사는 계획보다 순조로웠고, 공사가 완료될 무렵엔, 요동 일대에서 개소문에 대한 신망이 무척이나 드높았다.
이 년의 공사 기간 동안, 단 한 차례도 노역비 지급이 밀린 적 없었으며, 공사에 필요한 모든 재원을 태왕의 지원 없이 개소문이 충당했음을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태왕의 지원 없이도 이렇듯 요동 이십여 성을 탄탄히 보수 공사하였으니, 서부 누살님 같은 인물은 없을 것이야.”
“아무렴, 우리 요동 이십여 성을 아끼고 생각하는 것은 태왕보다 서부 누살님이시지.”
“태왕은 싸우기도 전에 당의 황제에게 절을 올린 인물 아닌가? 그런 태왕이라면, 우리 요동을 당 황제에게 바치지 말란 법도 없을 것이네.”
이렇듯 요동 일대 백성들의 민심은 태왕을 떠나 개소문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리고, 천리장성 보수 공사를 기뻐하는 이가 또 한 명 있었으니, 바로 당의 황제 이세민이었다.
“이름뿐인 천리장성이 완성되었다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허울뿐인 천리장성이 아닌 돌로 장성을 쌓아 영토의 경계를 삼으라고 명해야겠구나.”
이세민이 이처럼 비웃으며 말하니, 책사 마주가 나서 말하였다.
“고구려 왕이 바친 봉역도의 진위를 파악한다는 명분으로 사절대에게 평양성 안팎과 한수 이남의 지리를 그리게 하소서. 반드시 훗날 도움이 될 것이옵니다.”
“평양성 안팎의 지도라?”
“그렇사옵니다. 천리장성을 경계로 영토를 나누면, 요동벌은 우리 당의 땅이 될 터이니, 필경 요동 이십여 성의 반발이 있을 것입니다. 만일 고구려가 우리 당에 맞서려 한다면, 평양성 내의 지도를 마련하여 내호아의 패전과 같은 일이 없도록 주의함이 옳사옵니다.”
“그대의 말이 옳다. 즉시 사절대를 준비토록 하라.”
당 황제 이세민의 명에 따라 또다시 사절대가 준비되니, 개소문의 평양행과 그 시점이 일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