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오해와 진실 (13)
기 씨 사형제가 서로 거리를 벌려 파천진을 펼치며 다가오자, 그 위세가 사뭇 강대하였다.
그러나 팽무일은 제 자리를 지키고 서서 이들을 비웃었다.
“기악, 오랜만이로구나. 그래, 온달을 섬겨 벼슬을 얻으니 이전보다 신수가 훤해 보이는구나.”
칼도 뽑지 않고 말하는 모습이 제법 당당해 보였다.
“그대를 섬겨 도적질할 때보다는 살 만하더이다.”
기악이 맞서 대답하며 눈짓하니, 기범이 팽무일의 좌측으로 돌고 기훈과 기룡이 우측을 노려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하였다.
이에, 마음이 답답한 개소문이 소리쳐 만류하였다.
“제자는 멈추라! 그대들도 공격을 중단하시오!”
“사부! 저들이 다짜고짜 먼저 공격하는데, 어찌 내게 멈추라 명하는가? 사부, 너는 보고도 모르는가?”
팽무일이 이렇듯 답하자, 기악이 비웃었다.
“천하의 불학무식한 놈이로다! 어찌 사부라 부르며 하대를 하는가? 설마 벌써 노망이라도 든 게냐? 젊은 놈 망령은 몽둥이가 약이라 하였으니, 내가 매질하여 도리를 깨우쳐 주겠노라!”
“뭐라? 기악, 네놈이 감히!”
팽무일이 입술을 질끈 깨물며 씩씩거렸다.
그러나, 성난 표정과 달리 여전히 검을 뽑지는 않고 있었다.
아마도, 개소문이 안시성의 도움을 받아 성벽 보수 공사를 해야 함을 알고 있기에, 참는 듯했다.
그러나 기 씨 사형제는 여전히 파천진을 펼친 채 팽무일을 압박하며 다가왔고, 싸움은 피할 수 없어 보였다.
이때, 당진평이 소리쳐 말하였다.
“우리는 그대들을 위협할 무기를 지니지 않았소이다. 싸우러 온 것이 아니라 함께 보수 공사를 하고자 온 것이오!”
그러나 경우가 당진평의 말을 비웃으며 소리쳐 맞섰다.
“닥쳐라! 누구를 속이느냐? 네놈들이 지닌 칼과 검들은 무기가 아니고 농기구더냐?”
“하하하, 우리가 그대들을 위협하고자 했다면, 향로를 마련해 가져왔을게요. 내 말을 믿으시오. 우리는 서부 누살을 도와 그대들이 안시성의 성벽을 보수하기를 바라고 있소.”
당진평이 끓어오르는 화를 누르며 애써 웃음 지어 말하였다.
이에, 온동이 누런 연기를 뿜는 화로를 떠올리며 독고영에게 물었다.
“영아, 정녕 화로가 없느냐?”
독고영과 팽운이 동시에 답하였다.
“네, 없습니다.”
“온동 오라버니. 저 사람이 화로를 가지고 다녀요? 그런 건 안 보이는데…….”
온동이 안심해 말하였다.
“그래, 다행이로구나. 그러나 혹시 모르니 너희는 내 뒤에 있거라. 영이는 팽운을 잘 지켜야 한다.”
“네, 오라버니. 팽운, 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독고영이 팽운의 손을 잡아 뒤로 세우며 말하니, 팽무일의 눈이 순간 빛났다.
“팽운? 혹시… 네가 무성의 여식이냐?”
팽무일이 팽운을 천천히 살피며 물으니, 독고영이 경계하며 팽운의 앞을 지켰다.
“다가오지 말라!”
독고영의 외침과 함께 경우의 활살 끝이 팽무일에게로 향하였다.
“팽무일! 한 발만 더 움직이면 네놈의 민둥산 머리에 나무를 심어주겠노라!”
경우의 외침에 팽무일이 코웃음을 치며 답하였다.
“시건방지기가 이를 데 없구나. 네놈의 그 잘난 화살이 내 몸에 흠집이라도 낼성싶으냐?”
기세 좋게 외치면서도 팽무일은 여전히 검을 뽑지 않았다.
‘빌어먹을 사부의 일이 중하다. 이들과 여기서 싸움을 벌일 경우, 사부가 천리장성 보수 공사를 완수하지 못할 수도 있다. 분하지만… 참아야 한다.’
이렇듯 팽무일이 마음을 다스리며 나름 큰 싸움을 피하고자 했으나, 평강은 팽운을 염려하여 독고영을 불렀다.
“영아! 팽운을 데리고 이리 오너라. 저 팽무일이 흉악하여 어떤 수를 쓸지 모른다.”
“도대체 내가 뭔 흉계를 꾸민다고 아까부터 지랄 염병을 하는 게냐! 내가 무엇을 했다고!”
팽무일이 참지 못하여 소리를 지르며 한 발 나서자, 기악이 도끼를 휘둘러 팽무일의 앞을 막았다.
쾅!
급히 파천심검을 펼쳐 맨손으로 도끼날을 쳐낸 팽무일이 뒤로 세 걸음 물러났다.
팽무일의 손에서 굵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져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제자!”
개소문이 팽무일을 염려하여 소리쳤으나, 팽무일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옷소매를 찢어 상처를 감싸며 말하였다.
“사부, 걱정 마. 칼을 뽑아 싸울 생각은 없다고.”
이에, 야수도 뭔가 깨닫고 박도를 거두어 허리춤에 차고는 팽무일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좋… 다. 네가, 옳다.”
평강은 팽무일이 맨손으로 기악의 도끼를 막아낸 것에 놀라며 내심 생각하였다.
‘기악의 저 거대한 도끼를 맨손으로 막아낸 것도 대단하지만, 검을 뽑지 않고 있다. 정녕, 싸울 생각이 없는 것인가?’
사실, 고작 열 살밖에 되지 않은 팽운을 연회장 한편에 앉힌 것은 평강의 생각이었다.
개소문의 일행 중 팽무일이 있다는 이야기를 이미 전해들은 평강은 팽무일이 필경 금강대도를 탐내 본색을 드러낼 것이라 여겼다.
하여, 팽운을 연회장에 앉혀 팽무일을 떠본 것이었다.
역시나 팽무일은 금강대도를 한눈에 알아보고 팽운에게 접근했으나, 결코 위협하지도 않았고 검을 뽑지도 않았다.
‘팽무일은 눈치가 빠른 자다. 우리 장군님이 두려워 일부러 검을 뽑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아직 저자의 속내를 모르니, 믿기 어렵다.’
평강이 이렇듯 생각할 때, 팽무일이 팽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네가 팽운 맞느냐? 팽무성의 여식이 맞느냐?”
팽운이 놀랍고도 의아해 팽무일을 똑바로 쳐다보며 답하였다.
“네, 제가 팽운 맞아요. 제 선친께옵선 팽가장의 장주이셨고요. 제 선친을 아시나요?”
이에, 팽무일이 껄껄 웃으며 말하였다.
“하하하, 살아 있었구나. 내가 너의 백부 팽무일이다. 이리와 인사 올리거라.”
“백… 부님?”
팽운이 놀랍고도 당황스러워 되물었으나, 팽무일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팽운을 향해 발을 옮겼다.
이에, 독고영이 소리쳐 팽무일의 접근을 막았다.
“거북이! 오지 마!”
그리고 이와 동시에, 기 씨 사형제가 일시에 팽무일에게 달려들며 도끼를 휘둘렀다.
“싸우러 온 것이 아니라 말하였다!”
팽무일이 크게 노해 뒤로 물러나며 파천신검을 펼쳐 몸을 보호하였다.
그러나 맨손으로 기 씨 사형제의 도끼를 모두 막기란 불가하였다.
이에, 팽무일의 양손이 피로 물들며 위급해지자, 보다 못한 개소문이 몸을 날렸다.
쾅!
맨손으로 검막을 일으켜 기악의 도끼를 쳐낸 개소문이 급히 팽무일과 함께 뒤로 물러났다.
“감히!”
기악이 크게 노해 소리치자, 기범과 기룡, 기훈이 물러나는 개소문을 향해 일시에 도끼를 내리쳤다.
그러나, 이번에도 개소문과 팽무일은 파천신검을 펼쳐 도끼날을 쳐내고는 뒤로 두어 걸음 더 물러났다.
기 씨 사형제는 자신들의 거대한 도끼를 고작 맨손으로 쳐낸 개소문과 팽무일의 무공에 기가 질려 더는 쫓지 않았다.
이에, 경우가 활시위를 팽팽히 당겨 팽무일에게 살을 날리려 하자, 온달이 경우의 시야를 가려 화살을 날리지 못하게 하였다.
“경우, 기다리시게.”
온달의 묵직한 음성이 연회장 안에 울리자, 개소문 일행은 겨우 숨을 고를 수 있었다.
“기악! 너희도 물러나라. 막바우 자네도.”
온달이 천천히 앞으로 나오며 명하니, 막바우와 기 씨 사형제가 물러나 개소문 일행을 노려보았다.
“개소문, 너는 이곳에 싸우러 온 것이 아니라 말하였다. 맞느냐?”
온달의 물음에, 개소문이 공손히 답하였다.
“그렇습니다.”
“허면, 어찌하여 저 팽무일이란 도적이 팽운의 금강대도를 노린 게냐?”
온달의 이 물음에 팽무일이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뭐라? 도적? 그래 잘난 너희는 어찌하여 내 조카를 데리고 있으며, 백부인 내가 조카와 인사조차 못 나누게 하는 게냐?”
“인사라… 인사를 나누려던 모습이 아니었는데?”
온달이 팽운의 금강대도에 손을 대려 했던 팽무일의 행동을 지적하며 물었다.
“그거야… 나도 모르게… 난 저 아이가 내 조카인 줄 몰랐다고!”
“몰랐다고 하여, 남의 물건에 손부터 대려던 행동은 도적과 다름이 없다.”
온달이 이렇듯 잘라 말하니, 팽무일은 그저 얼굴이 벌게져 씩씩거릴 뿐이었다.
이때, 공손향이 웃으며 온달의 말에 반박하였다.
“장군의 그 말은 틀렸습니다.”
“뭐라 하시었소?”
온달이 불쾌해 공손향을 바라보며 물었다.
거대한 운철대검이 일자로 뻗어 공손향을 가리켰으나, 공손향은 조금도 두려운 기색 없이 답하였다.
“저 금강대도는 팽가장 장주의 신물입니다. 맞습니까?”
“그렇소.”
온달이 짧게 답하니, 공손향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허면, 저 금강대도는 저 아이의 것이 아닌, 여기 팽무일이 지녀야 합니다.”
이에 막바우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뭔 개소리야!”
“개소리라니요. 진실을 그런 식으로 매도하면 아니 되시지요.”
공손향도 물러서지 않고 이렇듯 말하고는 온달에게 한 걸음 다가가 말하였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 금강대도는 팽가장 장주의 신물입니다.”
“그대는 팽무일이 장주라 여기는 게요? 저 금강대도는 장주 팽무성의 여식인 팽운의 것이 맞소이다.”
온달이 명확히 팽운의 것이라 말하니, 두려워 눈치를 살피던 팽운의 얼굴에 안도한 기색이 어렸다.
그러나, 공손향은 여전히 미소를 담아 고개를 저으며 말하였다.
“장군, 틀렸습니다.”
“틀렸다?”
“그렇습니다.”
“그대가 그토록 자신하여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온달의 물음에 공손향이 팽운을 가리켰다.
“저 아이가… 팽 장주의 여식이기 때문입니다.”
“그 무슨 궤변이오?”
온달이 불쾌해 물으니, 공손향이 바로 답하였다.
“금강대도는 팽 씨 일족이 대를 이어 지켜온 보검이옵니다. 헌데, 저 아이가 훗날 자식을 낳아 물려준다면… 물려받은 아이는 팽 씨이옵니까?”
공손향의 지적에 온달이 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
이에, 공손향이 눈웃음을 치며 부드럽게 말하였다.
“장군, 팽 씨 일족의 가전비기인 팽가도법을 비롯한 권법과 장법, 보법, 심법 역시, 대를 이어 지키려면 현재로선 팽무일이 유일한 후계자입니다. 하여, 그가 장주로서 금강대도를 지녀야 함이 옳습니다.”
온달이 아무런 답도 못 하니, 막바우가 대신 소리쳤다.
“닥쳐라! 저자는 도적이다!”
당장이라도 창을 쥐고 달려들 듯한 막바우의 기세에도 공손향은 결코 주눅 들지 않았다.
“도적이었다고 들었습니다. 하온데, 지금은 태왕의 명을 받는 서부 누살 휘하에 있사옵니다. 저들 기 씨 형제들도 도적이었으나, 장군을 따르고 있듯이 말이지요.”
말문이 막힌 막바우는 그저 공손향을 노려볼 뿐 제대로 반발할 수 없었다.
이때, 평강이 팽운의 앞으로 나와 말하였다.
“우리 고구려의 적이었던 그대와 팽무일이 서부 누살을 섬겨 그 휘하에 있다 하여, 그대와 팽무일의 죄가 용서되는 것은 아니지요. 공손향 그대는 여전히 고구려의 적이며, 내 눈에 팽무일 저자는 도적일 뿐이랍니다.”
“공주마마, 저와 팽무일, 당진평, 야수 등은 서부 누살의 휘하 사람이 맞사오나. 서부 누살과 함께 대장군 강이식과 요동성 성주 고승을 모시고 수의 침공을 막아내며 귀순을 증명한 바 있사옵니다. 부디, 죄만 묻지 마시옵고, 수의 황제 양광의 관풍행전을 불태운 공도 기억해 주시옵소서.”
총명한 평강마저 말문이 막히니, 이번엔 경우가 나섰다.
“그래, 관풍행전을 개소문이 불태웠다는 말은 들었다. 너희들이 개소문을 도왔고 대장군이 너희의 귀순을 인정했다는 말이로구나. 공은 인정해야겠구나. 허나, 무공을 훔쳐 배운 죄는 도적질과 같으니, 근골을 잘라 무공을 폐해야 함 또한 너희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경우의 활은 여전히 시위를 팽팽히 하여, 개소문을 겨누고 있었다.
“이미 배워 몸에 익힌 것을 어쩌란 말이냐?”
팽무일이 노해 소리쳤으나, 경우도 지지 않고 맞섰다.
“그러니, 근골을 잘라 무공을 폐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