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오해와 진실 (12)
당의 황제 이세민의 국서에 태왕이 절을 올리고, 고구려 전역을 그린 봉역도를 바침은 긍지 높은 고구려 무장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였다.
당의 사절대가 떠나자, 밤이 깊어 흑비걸이 불쑥 강이식을 찾아왔다.
“대장군, 태왕 폐하께서는 전쟁의 영웅이셨으나, 지금은 기개가 예전 같지 않으신 듯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강이식이 매우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으나, 흑비걸은 전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평소 태왕 페하를 폐위하고자 수를 꾸미던 북장원, 사선종유와 같은 인물들 이외에도… 여러 장수들이 태왕 폐하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또한 평양성 내의 백성들도 태왕 폐하를…….”
흑비걸이 차마 말을 마치지 못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음…….”
이에, 강이식이 무겁게 신음을 내뱉으니, 정적만이 흐를 따름이었다.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지고, 그저 촛불만이 일렁이었다.
먼저 정적을 깬 것은 강이식이었다.
“역심을 품은 장수들이 보이던가?”
“장수들뿐만이 아닙니다. 백성들의 마음도 태왕 폐하를 떠나고 있습니다.”
“음…….”
강이식이 다시 신음을 토하니, 흑비걸이 입을 다물었다.
잠시 뒤, 강이식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래, 대모달 그대가 내게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가?”
“이미, 태왕 폐하의 뜻은 정해지셨고… 이제 우리 고구려를 지키기 위해서는 먼저 선수를 쳐야 한다 판단합니다.”
“선수?”
강이식의 물음에 흑비걸이 망설임 없이 바로 답하였다.
“태왕 폐하를 지키고, 고구려를 지키기 위해선… 다른 마음을 품은 이들의 목을 먼저 베어야 합니다. 그 길만이 평화를 지키는 길입니다.”
“음…….”
다시 강이식이 신음을 내뱉으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일다경 동안 촛불만 일렁였고, 이번에도 강이식이 침묵을 깼다.
“친위정변이라도 일으키자는 말인가?”
이에 흑비걸이 망설이지 않고 답하였다.
“그렇습니다.”
“허나, 평소 대국을 섬겨야 한다고 주장해온 오부 귀족들로선 이번 일로 태왕 폐하께 불만이 없을 터인데?”
“그들은 자신들의 뜻과 태왕 폐하가 일치한다고 하여 태왕 폐하를 따를 이들이 아닙니다. 반드시 이번 일로 불만을 품은 장수들을 포섭하여 태왕 폐하를 폐위하고, 허수아비 태왕을 내세울 것입니다.”
흑비걸이 이처럼 단호히 답하니, 강이식이 잠시 눈을 감았다.
“대모달… 불만을 품은 장수들은 다독여 함께 힘을 다해 고구려를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고구려는 당에 비해 작은 나라인데, 서로 분열하여 죽고 죽여 권력을 유지한들, 이후 누가 남아 당의 공격을 막겠는가?”
“대장군께선, 봉역도를 바쳤음에도 당이 우리 고구려를 침공하리라 여기시옵니까?”
“침공하지 않을 것이면, 지도가 왜 필요하겠는가? 영토 경계로 삼고자 지도가 필요하다면, 당이 자신들에게 이로운 지도를 그려 영토 경계로 삼지 않았겠는가?”
강이식의 물음에 흑비걸도 내심 동의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대모달, 자네의 우려는 백분 이해하네. 허나, 아직 이 정도 일로 친위정변을 일으킬 만큼, 우리 고구려의 내치가 불안하지는 않네. 좀 더… 좀 더 지켜보며 숙고하세.”
대장군 강이식이 흑비걸을 아껴 친위정변 언급을 탓하지 않고, 기다리라 말하였다.
이에, 흑비걸도 더는 제 주장을 펴지 않고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올리고 떠났다.
* * *
평양성이 혼란스러운 그 시점, 개소문은 안시성 앞에 진을 세우고 연락을 기다렸다.
“아니, 사부. 그냥 안시성에 찾아가면 될 일이지. 언제까지 이렇게 기다릴 거냐고!”
성미 급한 팽무일이 불만을 토로했으나, 개소문은 눈도 꿈적하지 않고 답이 없었다.
“듣고 있는 거야? 귀가 먹었어? 벌써 열흘이라고! 열흘! 이럴 거면 돌아가자고! 가야 할 성도 많은데, 여기서 뭔 지랄이냐고?”
팽무일이 제 성미를 못 이겨 성질을 부리니, 보다 못한 야수가 한마디 하였다.
“닥. 쳐. 거북이.”
“뭐? 이 버벅이 자식이! 말이나 똑바로 해!”
팽무일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주먹을 치켜들었으나, 야수는 눈길도 주지 않고 무시할 따름이었다.
이때, 안시성 궁노수의 수장이자, 경우의 아비인 대식이 개소문의 군막으로 들어왔다.
“안시성 양만춘 성주님을 모시는 대식이라 합니다.”
백발에 걸맞은 흰 수염이 무척 멋스러워 팽무일이 내심 탄복하였다.
‘나는 민둥산이건만… 참으로 보기 좋구먼. 부럽다.’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팽무일에게 시선 한번 준 대식이 성큼성큼 걸어 개소문에게 예를 표하였다.
이에, 개소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답하였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소. 그래, 안시성에 들어가도 되겠소?”
“소인이 안내하겠나이다.”
드디어 안시성에 들어갈 수 있게 되자, 모두가 기뻐 서둘러 진을 거뒀다.
대식이 앞장서 길을 여니, 안시성의 외성 성문이 열렸다.
“외성은 산등성이를 빙 둘렀고, 내성은 계곡에 있으니… 결코 작지 않은 성이로군요.”
공손향이 안시성의 위용에 감탄해 말하였다.
이에, 개소문이 성벽을 둘러보니, 수의 수차례 공격을 받았음에도 허물어진 곳이 한 군데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 안시성은 돌을 쌓아 성벽을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덮어 적의 공격에도 성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였나이다.”
성벽을 둘러보는 개소문에게 대식이 이처럼 차분히 설명하니, 공손향과 당진평도 주위를 살피며 내심 감탄하였다.
“인근 십만여 백성들이 전란을 피해 내성으로 들어와 지낼 수 있으며, 이들이 안시성 또한 지키옵니다.”
내성으로 향하며 대식이 다시 설명하니, 어느새 내성 성문이 열리며 양만춘이 나와 이들을 맞이하였다.
“안시성 성주 양만춘이요. 서부 누살, 고생하셨소.”
“개소문이라 합니다.”
서로가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는 내성 안으로 발을 옮겼다.
“오래도록 진을 치고 계시느라 고생하셨을 터이니, 연회장으로 가시어 노독을 풀도록 합시다.”
“오! 연회!”
연회를 마련했다는 양만춘의 말에 팽무일이 기뻐 소리치니, 양만춘이 고개 돌려 팽무일을 빤히 쳐다보았다.
서로가 익히 잘 아는 얼굴이라 팽무일이 겸연쩍어 히죽 웃었다.
“오랜만에 보네. 망우산 이후 처음이지?”
별로 반갑지 않은 인물이기에, 양만춘은 대답도 하지 않고 외면하였다.
“뭐야? 사람 무안하게.”
팽무일이 일부러 양만춘이 듣도록 소리 높여 말하였다.
이에, 개소문이 고개 돌려 팽무일을 바라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제자는 조용히 하라.”
이 소리에 양만춘이 미간을 구기며 묵묵히 앞장섰다.
아마도 대악인 팽무일을 제자로 둔 개소문이 못마땅한 듯하였다.
연회장에 들어서니, 이미 온달 일행이 좌측에 자리하고 있었다.
온달을 시작으로 평강, 막바우, 경우, 기악, 기범, 기룡, 기훈 등과 안시성의 장수들이 앉았고, 좌측 끝에 온동과 독고영, 팽운도 자리했다.
이제 열 살 된 팽운이 자신의 키만 한 금강대도를 등에 메고 있었으니, 팽무일의 시선을 사로잡기 충분하였다.
“어라? 저 검은… 금강대도?”
팽무일이 순간, 자신도 모르게 경공을 펼쳐 팽운 앞으로 미끄러지듯 다가가더니 손을 뻗었다.
“안 돼! 내 검이야!”
팽운이 놀라 소리쳤다.
이에, 독고영이 망우산에서 팽무일에게 납치당했던 기억을 떠올려 급히 몸을 일으키더니, 봉을 뻗어 팽무일의 머리를 후려쳤다.
독고 씨 일족의 가전비기인 독고창법의 오의로 독고영이 오래도록 수련한 덕에 그 위력이 매우 강하고 빨랐다.
경공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던 팽무일이었으나, 갑작스러운 독고영의 공격에 몸을 피하지 못하고 급히 손을 뻗어 방어할 뿐이었다.
팽무일의 두 발이 백두검법의 보법을 밟고, 두 팔이 마치 검을 쥐고 휘두르는 듯 원을 그렸다.
이 모습이 마치 파산귀검의 초식과 매우 흡사하였다.
“파천신검!”
온달이 놀라 부르짖던 순간, 독고영의 봉이 팽무일의 손날에 맞아 튕겨 나갔다.
이때 개소문이 급히 달려와 팽무일의 어깨를 잡아끌며 명하였다.
“제자는 멈춰라!”
그러나, 팽무일이 펼친 무공이 파천신검임을 확인한 막바우와 경우가 벌떡 일어나 죄를 물었다.
“감히! 나도 배우지 못하는 파천신검을 중원의 도적 떼가 펼치다니!”
막바우가 노해 소리치며 장창을 비켜 들고 달려들었다.
그리고 경우가 막바우를 지키기 위해 활을 들어 시위에 화살을 먹이니, 당진평과 야수도 앞으로 나와 개소문과 팽무일을 지켰다.
“허튼짓하면 눈에 살을 박아주겠노라!”
경우의 매서운 외침에 당진평이 껄껄 웃었다.
“연회를 베푼다고 하여 왔거늘… 어찌하여 눈을 뽑으려 하오?”
이에, 당진평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온동이 몸을 부르르 떨며 자리에서 일어나 독고영과 팽운의 앞을 지키며 말하였다.
“그대는… 당진평 아니오? 그대가 황후의 연회에서 사단을 일으켜 팽 장주가 음해 받아 죽임을 당하였으니, 그대의 죄가 결코 작지 않소.”
“그것은 내 의도가 아니었다. 팽 장주의 죽음은 한왕과 관련 있는 일이야. 내 탓이라 말하면 서운하지. 세상에 나만큼 억울한 사람도 없으니, 너무 오해는 하지 말게나.”
당진평이 억울하다고 말하였으나, 오히려 온동의 분노를 일으킬 뿐이었다.
“무엇이 억울하단 말이오?”
온동이 버럭 소리 지르며, 당진평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이에, 경우가 온동을 염려해 화살을 날리니, 야수도 당진평을 지키기 위해 두 자루 박도를 빼어 들고는 몸을 날렸다.
눈보다 빠른 화살이 당진평의 눈을 노려 날아듬과 동시에 야수의 박도가 불빛을 받아 일렁였다.
퍽!
경우가 날린 화살이 두 동강이 나서 바닥에 떨어지고, 야수의 발도 바닥을 단단히 밟았다.
그러나, 이미 당진평을 향해 몸을 날린 온동이 빈손으로 마치 검을 쥔 듯 휘둘렀다.
“파산귀검!”
온동의 외침과 동시에 야수의 등을 노려 검기가 날아들었다.
“맨손으로 검기를?”
야수가 놀라 돌아보며 중얼거리다가 급히 박도를 휘둘러 검기에 맞섰다.
그러나 형체가 없는 검기를 박도로 막을 수 없었다.
쾅!
두 자루 박도가 허공을 베고, 야수가 당황하여 눈이 휘둥그레진 순간.
맹렬히 날아든 검기가 야수의 두툼한 흉곽을 후려쳤다.
“컥!”
단단히 바닥을 밟은 두 다리의 힘이 풀려 야수가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나다가 피를 토하였다.
“야수!”
팽무일이 야수를 걱정하여 달려오고, 이를 막바우가 장창으로 앞을 막았다.
“창 치워라!”
팽무일이 파천신검 초식을 펼쳐 막바우의 장창을 밀어내고는 야수를 지키기 위해 몸을 날렸다.
이에, 온동이 소리에 집중해 팽무일을 향해 파산귀검 초식을 펼쳤다.
빈손으로 마치 검을 휘두르듯 초식을 펼치자, 바닥이 일어나 팽무일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러나 팽무일도 파천신검 초식을 펼치며 맞섰다.
쾅!
날아들던 바닥이 허공에서 부서져 먼지를 일으켰다.
“그만하세요!”
공손향이 소리쳐 싸움을 막아보려 했으나, 오히려 온동의 신경을 자극할 따름이었다.
“장군! 이 여인은 공손향입니다.”
공손향의 목소리를 기억해 온동이 말하니, 마침내 온달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운철대검을 일자로 뻗어 개소문을 가리켜 물었다.
“개소문! 너는 어찌하여 저들을 끌고 온 것이냐? 저들이 우리 고구려와 적대적임을 정녕 모르고 있단 말이더냐?”
엄히 묻는 온달의 기세가 마치 태산과도 같았다.
이에, 개소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와 담담히 답하였다.
“오해를 풀고자, 일부러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나, 경우는 이를 믿지 않고 다시 시위에 화살을 먹이며 소리쳤다.
“허튼소리! 오해를 풀고자 왔다면서 어찌 팽운의 금강대도를 탐할 수 있단 말이더냐?”
경우의 화살 끝이 천천히 움직여 개소문의 눈을 겨누었다.
그리고 기 씨 사형제들도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도끼를 쥐니, 연회장에 살기가 요동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