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오해와 진실 (11)
황제 이세민에게 바치는 봉역도가 가짜임을 확인한 명림신은 불안한 심정으로 북장원에게 향하였다.
“자네 왔는가?”
어두운 표정으로 들어선 명림신을 북장원이 반기며 안색을 살피고는 이내 바로 물었다.
“자네 표정이 어찌 그런가? 태왕의 봉역도에 문제라도 있던가?”
정곡을 제대로 짚은 북장원의 물음에 명림신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명림신이 답하지 못하고 주저하니, 북장원이 재촉하였다.
“어찌 대답이 없는가? 봉역도에 문제가 있는 겐가?”
“아니옵니다. 봉역도는 분명 고구려 전역을 상세히 기재하였나이다.”
명림신이 거짓으로 고하니, 북장원이 더욱 그의 안색을 살피며 의심하였다.
“봉역도가 정확하다면서 자네의 표정은 어찌 그런가?”
“평화를 위해 봉역도를 바쳐야 함이 옳다고 하지만, 고구려 전역을 상세히 그린 봉역도를 황제에게 바침이 과연 옳은지 판단이 서지 않아 마음이 편치 않아 그렇습니다.”
이렇듯 거짓으로 둘러대니, 북장원도 이해한다는 듯 수염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네. 허나, 당의 황제가 마음만 먹는다면 사람을 풀어 우리 고구려 지도쯤은 언제든 그릴 수 있을 것일세. 지도 한장과 태자의 입조로 평화를 얻을 수 있다면 이보다 좋은 일은 없네. 너무 상심치 말게나.”
북장원의 위로에도 명림신은 속내를 들킬까 두려워 속히 자리를 피하고자 했다.
“국장 어른의 말씀이 백 번 옳습니다. 소인이 괜한 걱정을 한 모양입니다. 심려를 끼쳐 송구합니다. 밤이 깊었으니 쉬시지요.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래, 그만 쉬게나. 헌데…….”
북장원이 말꼬리를 흐리자, 명림신이 불안해 급히 물었다.
“말씀하소서. 하명하실 것이 있사옵니까?”
“우리는 고구려의 충신임을 잊지 말게나. 선대 태왕들이 입조하여 수의 황제에게 머리만 숙였다면, 우리 고구려의 백성들은 결코 고난을 겪지 않았을 것일세. 우리는 비록 태왕에게 충성스런 신하가 아닐지언정, 고구려의 충신임을 잊어선 아니 되네.”
명림신이 안도해 한숨을 내쉬고는 바로 답하였다.
“알고 있나이다. 쉬소서.”
명림신이 몸을 일으켜 나가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북장원이 눈을 빛내며 중얼거렸다.
“공연한 일로 심기가 어지러울 사람이 아닐 터인데…….”
* * *
봉역도를 손에 넣은 심숙안은 마음이 급해 날이 밝기를 눈이 빠져라 기다리다가 문득 설인귀를 떠올렸다.
“무명 소졸이지만, 제법 용감하였다. 설인귀를 불러오너라!”
심숙안의 명에 설인귀가 처소에 들어와 무릎 꿇었다.
“설인귀 대령하였나이다.”
일개 군졸로 사절대를 따라온 것치고는 갑주와 피풍의가 매우 호사스러웠다.
이에, 심숙안이 설인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너는 어찌하여 복색을 다른 군졸과 달리하였는가?”
설인귀가 살며시 고개 들어 심숙안의 안색을 살피고는 차분히 답하였다.
“소인 출세를 갈망하옵고, 대인의 눈에 들기를 원하였나이다. 하여, 뇌물을 바쳐 복색을 따로 하였나이다. 부디, 용서하소서.”
이에, 심숙안이 껄껄껄 웃으며 말하였다.
“매우 솔직한 놈이로다. 내가 복색을 멋들어지게 한 덕에, 고구려 궐 내에서도 네놈이 무명소졸임을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였다. 하여 네가 내 곁을 지킬 수 있었으니, 어찌 생각해보면 대견하고 장한 일이었구나.”
벌을 예상하였건만, 오히려 심숙안이 칭찬을 하니 설인귀는 내심 안도하여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황공하옵니다.”
“내 너의 복색과 잘 어울릴 말 한 필 내릴 터이니, 장차 전장에서도 선두에 서서 돋보이도록 하라.”
“황공하옵니다. 소인 사지가 찢어지고 목이 잘릴 때까지 전장을 누비며 그 누구보다 돋보이도록 하겠나이다.”
심숙안이 만족하여 껄껄 웃으며 나가보라 손짓하니, 설인귀가 예를 올리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이미 심숙안의 명으로 군사들이 백마 한 필을 대령해 기다리고 있다가 설인귀에게 말 고삐를 건네었다.
“형부상서께서 타시던 말일세. 소중히 타게나.”
심숙안의 말이란 소리에 설인귀가 놀랍고도 당황하여 백마에게 넙죽 절을 올렸다.
“설인귀라 한다. 부디, 나를 네 주인으로 삼아다오.”
말에게 절을 올리는 설인귀의 모습이 우스워 주위 군사들이 손가락질하며 조롱하였으나, 설인귀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말 고삐를 소중히 쥔 채 물러났다.
* * *
심숙안에게 봉역도를 바친 동정찬이 태왕의 처소 앞에 서니, 환관이 그가 왔음을 태왕에게 알리지도 않고 문을 스르르 열었다.
넓은 처소에 붉을 밝힌 태왕이 들어오는 동정찬을 바라보았고, 늙은 환관 단공이 조금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전하였는가?”
예를 올리는 동정찬에게 태왕 건무가 급히 물었다.
“심숙안이 기뻐하며 받았나이다.”
“믿던가?”
“소신이 재주는 부족하오나, 공을 들여 그렸기에, 진위 여부 파악을 하기 어려울 것이라 사료되옵나이다.”
태왕 건무가 만족해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하였다.
“애쓰고 고생하였다. 우리 고구려를 지키기 위한 그대의 공이 매우 크다.”
이에, 동정찬이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를 표하였다.
“황공하옵고 송구하옵니다. 이 모두가 태왕 폐하께서 치욕을 감내하시고 내린 결단 덕분이옵나이다.”
“그대가 있어, 내가 치욕을 감내할 수 있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허니, 이 모두가 그대의 공이다.”
태왕 건무는 모든 공을 계속 동정찬에게 돌리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에, 동정찬이 감복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였다.
“송구하오나, 폐하. 태자 전하는 언제 모셔와야 하오리까?”
태자 황권이 입조하여 황제를 알현하고, 당의 국학에 입학하는 것이 무척이나 불안한 모양이었다.
“볼모, 인질로 당에 있어야 하니, 데려오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내가 죽어야 대를 잇기 위해 돌아올 수 있을 게야.”
태왕 건무가 이처럼 처량히 말하니, 동정찬은 가슴이 먹먹하여 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
이에, 태왕 건무가 오히려 동정찬을 위로하였다.
“마음 쓰지 말게나. 우리 고구려가 힘을 기르고 당에 맞서 싸울 수 있도록 내적을 제거한다면, 그땐 따로 사람을 보내 태자를 데려올 수도 있을 것이네.”
“내적을 몰아내고 외적을 맞아 싸울 수 있도록 소신이 견마지로를 다하겠나이다.”
동정찬의 다짐에 태왕 건무가 만족하여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하였다.
* * *
날이 밝자, 심숙안은 태왕을 알현해 당으로 돌아갈 것을 아뢰었다.
이에, 태왕이 노고를 치하하고는, 사절대를 태왕이 직접 의전하여 배웅하니, 어린 태자가 심숙안을 따라 배에 올랐다.
사절대의 배들이 수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던 태왕이 말에 올라 환궁을 하니, 볼모로 당에 끌려간 어린 태자가 안쓰러워 그 누구도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먹먹한 심정으로 자신의 집으로 향하던 동정찬의 발이 천근만근처럼 무거웠다.
“고구려 역사상 이처럼 참담하였던 일이 있었던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동정찬의 어깨를 누군가 부드럽게 다독였다.
동정찬이 놀라 돌아보니, 오랜 벗이자 상관이며, 정치적 적대관계인 명림신이었다.
“동정찬 자네 어찌 이리도 어깨가 축 처졌는가? 힘내시게.”
명림신이 연신 어깨를 다독이며 말하니, 동정찬이 냉정한 손길로 명림신의 손을 뿌리쳤다.
“내게 할 말이 있던가?”
동정찬의 물음에 명림신이 주위 시선을 의식하여 나지막이 말하였다.
“봉역도 때문에 할 말이 있네. 조용한 곳에 가서 이야기했으면 하네.”
총명한 명림신이 난데없이 봉역도를 언급하니, 동정찬은 내심 두려워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앞장서 걸었다.
자신의 처소에 들어서자, 동정찬이 하인들에게 명하였다.
“아무도 근처에 오지 않도록 하라.”
이에 하인들이 명을 받아 근처에 아무도 얼씬조차 하지 못하도록 거리를 두고 지켰다.
“말하시게.”
자리에 앉으며 동정찬이 재촉하였다.
이에, 명림신이 동정찬의 두 눈을 잠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태왕의 충신은 아닐지언정 진정을 다해 이 고구려를 아끼고 지키고자 하네.”
“태왕 폐하의 충신이 아니라면, 우리 고구려의 적일 뿐이네.”
동정찬이 차갑게 답하니, 명림신이 허허 웃었다.
“내가 적이라면 고구려는 전란에 휩싸일 것이네. 이보시게 동정찬, 세상은 적과 동지로만 나뉘지 않는다네.”
“궤변이네. 그래 자네가 하고자 하는 말이 고작 그것이었나?”
동정찬의 눈빛이 너무도 차가워 명림신은 씁쓸히 웃으며 말하였다.
“국서에 절을 올리고, 고구려 전역을 그린 봉역도를 바침은 옳은 판단이었네. 허나, 강골의 우리 고구려 무장들 중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이들이 많을 것이네.”
“탐탁지?”
불쾌한 표정으로 동정찬이 물으니, 명림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구려 역사상 단 한 차례도 없던 치욕이라 여길 것이네. 그들은 태왕을 끌어내려 폐위할 수도 있네.”
“당치도 않은 소리! 어찌 감히!”
동정찬이 버럭 소리 지르자, 명림신이 잠시 말을 멈추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겨우 마음을 진정한 동정찬이 먼저 입을 열었다.
“충성스런 강이식 대장군이 평양성 내에 있고, 을지문덕 공께서 적봉진을 지키고 계시네. 그 누가 감히 역심을 품겠는가?”
이에 명림신이 동정찬과 눈을 맞추며 되물었다.
“을지문덕 공께서 정녕 적봉진에 게시는가?”
“그게 무슨 소리인가? 공께서 적봉진으로 향하셨음은 온 고구려가 다 아는 사실이네. 자네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겐가?”
동정찬이 이처럼 단호히 답하며 물으니, 명림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공께서 적봉진을 지키고 계시다면 안심일세. 허나, 평양과 홍산은 거리가 멀고, 평양성 내에서 정변이 벌어질 땐, 을지문덕 공께선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실 것이네.”
“이 사람 명림신! 을지문덕 공께선 천기를 읽고 장래 벌어질 일을 사전에 대비하시는 분이시네. 그분이 어디에 있으시든 감히 역심을 품는 이들의 목은 온전치 못할 것이네.”
동정찬이 이처럼 장담하니, 명림신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네. 헌데, 어찌하여 자네는 봉역도를 허위로 그렸는가?”
이처럼 명림신이 대뜸 물으니, 정곡을 찔린 동정찬이 크게 당황하였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봉역도를 허위로 그렸다니… 자네 지금 나를 음해하려는가?”
“동정찬 자네를 내가 음해하고 해하려 했다면, 이처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지 않을 것이네.”
명림신이 부드럽게 답하니, 동정찬도 겨우 마음을 가라 앉혀 나지막이 물었다.
“봉역도는 허위로 그리지 않았네. 누가 그런 소리를 자네에게 했는지 모르겠으나, 가당치도 않은 소리이니 무시하시게.”
“내게 누가 그런 소리를 전하지는 않았네. 심숙안이 내게 보여주어 내가 직접 진위를 파악하였네.”
“뭐, 뭐라?”
동정찬이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며, 벽에 걸린 검을 쥐었다.
‘벗이지만, 목을 베어야 한다.’
허나 명림신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동정찬을 올려다보며 차분히 말하였다.
“심숙안에겐 고구려 전역이 바르게 그려졌다고 말하였네. 안심하여도 좋네.”
“진정 그리 말하였는가?”
동정찬이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로 물었다.
“믿어도 좋네. 내가 일부러 죽고 싶어 자네를 따라오지 않은 이상, 사실이네.”
이에, 동정찬도 조금 누그러져 물었다.
“명림신 자네는 태왕을 폐위하고 싶어 하는 북장원의 사람이네. 헌데, 그런 자네가 어찌 태왕을 도왔는가?”
“나는 태왕의 사람은 아니나, 고구려의 충신은 맞네. 전란에서 백성들을 지키고픈 고구려의 충신이네.”
“궤변이네. 태왕께 충성하지 않는 자가 어찌 고구려의 충신이란 말인가?”
“고구려는 태왕 것이 아니네. 고구려는 고 씨들의 것이 아닌, 이 땅에 터를 잡고 사는 백성들의 것이네. 나는 고구려에 충성하고, 백성들을 따를 뿐이네.”
“명림신 자네의 그 말… 역심으로 간주하여 고하면 자네의 목은 몸과 따로 놓이게 될 것이네.”
동정찬이 이처럼 엄포를 놓았으나, 명림신은 조금도 개의치 않은 듯 허허 웃었다.
“허허허, 이보게 동정찬. 나의 목을 걱정할 때가 아니네. 황제 이세민은 의심이 많고, 휘하에는 권모술수에 능한 책사가 많네. 그들은 봉역도를 반드시 검증하러 들 것이네. 내 목을 벨 시간에 대비책을 마련하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