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오해와 진실 (10)
모든 일들이 마치 기습 침공처럼 진행되었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하였고, 설령 예상하였다고 하여도 대비책은 없었다.
이세민은 이미 철저히 준비하여 고구려가 굴복할지, 저항할지를 심숙안을 통해 묻고 있었다.
책봉을 받아들인 태왕이 국서에 절을 올리니, 대전 안 그 누구도 따라 머리를 들 수 없었다.
서슬 퍼런 강이식의 눈에선 눈물이 흐르고, 전장에선 그 누구보다 앞장서던 흑비걸도 그저 이를 악물고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태왕이 책봉을 받아들이며 절을 마치자, 심숙안이 수고하였다며 축하를 하였다.
“전하, 감축드리옵니다. 바닥이 차옵니다. 자리에 오르시지요.”
태왕이 자리에 올라 몸을 가다듬고 앉자, 심숙안이 다시 말을 이었다.
“황제 폐하께옵선, 왕세자 저하가 바른 길로 가시길 원하고 있사옵니다. 하여! 황궁에 입조하여 알현하고 국학에 입학하여 왕도를 배우시라 명하셨나이다.”
황명이었다.
책봉을 받아들인 이상, 황명을 거역함은 반역을 의미하였다.
이에, 태왕 건무가 말이 없으니, 심숙안이 빙그레 웃었다.
“마침 제가 왕세자 저하를 모시기 위해 군선을 준비하였으니, 호위는 심려치 않으셔도 되옵니다.”
주저하는 태왕을 돕기 위해 강이식이 나서 말하였다.
“어찌 감히 어리신 태자 전하를 볼모로 삼으려 하는 것이오!”
“닥치시오!”
심숙안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흑비걸이 노해 한 발 앞으로 나왔고, 여기에 맞서 설인귀가 앞을 막으니 또다시 대전 안이 살기로 가득하였다.
“태자가 아니고 왕세자이며, 황제 폐하께서 특별히 어여삐 여기시어 국학에 입학을 허락하신 게요! 그대는 감히 황제 폐하의 배려를 오해하는 게요?”
“…….”
“황제 폐하께옵선 고구려 왕이 충성스럽다 여기고 계시온데, 어찌 볼모로 삼으신단 말이오? 혹여, 그대들이 충성을 바칠 생각이 없는 것이오?”
심숙안이 이처럼 장황히 말을 쏟아내니 강이식은 말문이 막혀 반박할 수 없었다.
이에, 태왕 건무가 한숨을 내쉬며 말하였다.
“황제 폐하의 은혜에 감읍할 따름이오. 형부상서께선 더 할 말씀이 있소?”
“아직 더 있사옵나이다.”
“어려워 말고 해보시구려.”
이미 모든 것을 감내할 결심을 한 건무였으니, 속히 마무리하기 위해 재촉하였다.
심숙안이 깊이 숨을 들이켠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수와 고구려 전쟁 당시, 불행히도 고구려에 사로잡힌 수의 장수들과 군사들을 데려오시라 하시었나이다.”
“무엇이라?”
태왕이 놀라 물으니, 심숙안이 잠시 뜸을 들여 태왕을 더욱 조급하게 만들고는 말을 이었다.
“우리 당은 수에게서 양위 받았으니, 고구려에 포로로 있는 수의 장수들과 군사들은 모두 당의 백성들이옵니다. 제후국이 어찌 황제국의 백성을 포로로 잡을 수 있겠나이까? 이는 두 나라가 불화를 빗을 중차대한 일이기에 황제 폐하께선 고구려와 전하를 진정으로 아끼시어 내린 명이옵나이다.”
이에, 건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니, 강이식을 비롯한 무장들이 분노가 치밀고 치욕스러워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당장이라도 칼을 뽑아 들 장수들을 바라보며 태왕 건무가 입을 열었다.
“좋소, 그리합시다. 그것이면 불화가 없겠소?”
“황명이 더 있나이다.”
“망설이지 말고 모두 전해주시오.”
“평양성 내엔, 수의 수군과의 승리를 기념하는 전승탑 경관이 있다 들었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이르시길, 경관을 부수고 그 자리에서 왕이 직접 안타깝게도 죽음을 맞이한 수의 군사들을 위해 위령제를 올리라 하셨나이다.”
“이자가 정녕!”
마침내 흑비걸이 참지 못해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나오니, 심숙안이 움찔하여 한발 물러섰다.
이에, 백의 일색에 설인귀가 흑비걸의 앞을 막고 노려보니, 두 사내의 손이 검으로 향하였다.
“태왕 폐하 앞이시오.”
강이식의 목소리가 대전을 쩌렁쩌렁 울리자, 흑비걸이 씩씩거리며 물러났다.
이에, 설인귀도 한발 물러나며 살기 어린 눈으로 흑비걸을 노려보았다.
태왕 건무는 험악한 일이 벌어지기 전에 황제의 사신을 궐 밖으로 내보내고자 서둘러 재촉하였다.
“좋소, 다음 명이 또 있으시오?”
“봉역도이옵니다.”
황제 이세민에게 고구려 전역의 지도를 바치란 의미였다.
“봉역도라?”
태왕 건무가 놀라 되물으니, 심숙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였다.
“그렇사옵니다. 충성을 다짐하는 의미로 왕께서 봉역도를 바치시면, 황제 폐하께선 이를 어여삐 여기시어 나라의 경계로 인정하여 주실 것이옵나이다.”
심숙안이 이처럼 태연히 답하니, 강이식도 더는 참지 못하고 호통을 쳤다.
“이보시오 심 대인! 황제가 어찌 고구려의 지도를 원할 수 있단 말이오? 이는 우리 고구려를 침공하고자 발판을 마련함이 아니오?”
그러나 이미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은 심숙안도 물러서지 않았다.
“무엄하다! 어찌 황제의 명을 제후국의 장수가 나서 논한단 말인가?”
“나라의 존망이 걸린 일을 어찌 말도 못 하게 하는 게요?”
강이식이 더욱 소리 높여 말하며 앞으로 나오니, 심숙안도 내심 두려워 자신도 모르게 물러섰다.
이에, 설인귀가 심숙안을 지키기 위해 앞으로 나와 강이식의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마시오.”
강이식의 앞을 당당히 막아선 설인귀의 피풍의가 펄럭이며 매우 용맹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순간, 강이식의 눈섭이 꿈틀거리더니 자신의 가슴팍에 손을 댄 설인귀의 손목을 낚아채고는 획 꺾어 버렸다.
“아악!”
설인귀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고, 저절로 무릎이 굽어졌다.
“이자가 감히!”
심숙안이 노해 소리치니, 당의 장수들이 감히 태왕이 보는 앞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이에 고구려 무장들도 일제히 병장기를 뽑아 드니, 대전 안이 쇳소리와 숨소리로 가득했다.
“그만! 그만들 하시오!”
태왕 건무가 더는 볼 수 없어 소리쳐 명하니, 강이식이 설인귀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이에 고구려의 무장들이 일제히 한발 물러서며 병장기를 거두었고, 당의 장수들도 식은땀을 흘리며 겨우 안심해 칼을 거뒀다.
“봉역도를 마련할 터이니, 심 대인은 그만 물러나 여독을 푸시도록 하시구려.”
태왕 건무가 이처럼 말하자, 심숙안도 예를 올리고는 물러났다.
심숙안을 비롯한 당의 사절이 대전에서 물러나니, 강이식이 바로 엎드려 상소하였다.
“폐하, 불가하옵나이다. 결코 받아들여서는 아니되옵나이다.”
이에 흑비걸을 비롯한 무장들도 일제히 강이식을 따라 엎드려 상소하였다.
“폐하, 그 어느 것도 따라서는 아니 되옵니다. 승전을 기리는 경관을 허물어도 아니 되옵고, 위령제도 불가하옵니다. 태자 전하 역시 당에 볼모로 보낼 수 없사오며, 수의 군사를 돌려보낼 수도 없나이다.”
강이식이 하나하나 불가하다고 언급하자, 북장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반론을 펼쳤다.
“불가하다면, 대장군은 당과 전쟁이라도 벌이겠단 말이시오?”
“수의 백만대군도 막아낸 우리 고구려요. 당과 전쟁을 벌여 이기지 못할 리 없소이다!”
“우리 땅에서 벌어진 전쟁을 이긴들, 우리가 얻을 게 무엇이오? 땅을 얻소? 식량을 얻소?”
“얻지는 못하나 뺏기지는 않소이다! 이처럼 무기력하게 굽힐 수는 없소이다!”
강이식과 북장원이 설전을 벌이니, 이를 따르는 이들간에도 고성이 오가고 대전 안이 무척이나 소란스러워졌다.
이를 한참 동안 말없이 지켜보던 태왕 건무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대장군.”
“하명하시옵소서.”
강이식이 머리 숙여 공손히 명을 기다렸다.
“내가 이미 받아들이겠다 말하였소. 이를 대장군이 번복하라 말하는 게요? 대장군, 궁에는 허언이 없소.”
태왕 건무가 이처럼 단호히 말하니, 충성심 깊은 강이식으로선 더 이상 반대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강이식이 태왕의 명을 따른다 한들, 대전 안 무장들의 마음은 이미 태왕을 떠나고 있었다.
* * *
경관이 무너져 내리자, 사절대의 군사들이 기뻐 소리쳤다.
“경관이 무너졌다!”
“오만한 고구려의 전승탑이 허물어졌다!”
그러나 고구려의 장수들과 군사들은 자존감이 무너져 내려 눈물도 흘리지 못하였다.
평양성 내로 쳐들어왔던 수나라 군사들을 몰살시켰음을 기념하는 전승탑인 경관이 무너짐은 바로, 외세에 저항하던 고구려의 기개도 함께 무너져 내렸음을 의미했다.
여기에 더해 경관을 허문 자리에 단이 세워지고, 태왕이 직접 수나라 군사들의 혼령을 위로하는 위령제를 여니, 평양성 내의 백성들이 슬퍼 통곡하였다.
그리고, 오랜 기간 포로로 잡혀있던 수나라 장수들과 군사들이 풀려나니, 이들이 평양성 내를 활보하며 약탈과 폭행, 강간을 서슴지 않고 벌였다.
이에, 격분한 고구려 군사들이 이들과 크고 작은 충돌을 일으켜 평양성 내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어찌 된 영문인지, 심숙안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음에도 군사들을 통제하지 않고 태왕의 다음 행보를 기다리기만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평양성 내에서 충돌이 크게 번질 것을 우려한 태왕이 동정찬을 심숙안에게 보내었다.
“태왕 폐하께서 보내셨나이다.”
동정찬이 공손히 예를 갖춰 말하니, 심숙안이 코웃음을 쳤다.
“폐하가 아니고, 전하가 맞소이다.”
이에 동정찬이 두 눈을 질끈 감고 심호흡하며 분을 참았다.
“심 대인께 보내라 하명하신 봉역도입니다.”
동정찬이 두 손으로 태왕이 내린 봉역도를 심숙안에게 전하니, 마침내 원하는 바를 모두 이룬 심숙안이 크게 기뻐 껄껄 웃었다.
“황제 폐하께서 고구려 왕에게 어여쁘고 장하다 상을 내리실 것이오. 하하하.”
심숙안이 봉역도를 받아 펼쳐보니, 고구려 전역의 산맥과 하천은 물론이요.
크고 작은 길과 산마다 세워진 산성들이 표시되어 있었다.
“장하오! 훌륭하오!”
심숙안이 연신 칭찬하며 기뻐하니, 동정찬이 예를 올리고 물러났다.
* * *
밤이 깊어서도 심숙안은 불을 켜고 봉역도를 들여다보며 기뻐하였다.
이때, 종리대형 명림신이 홀로 심숙안을 찾아오니 심숙안이 놀라 물었다.
“그대가 어찌… 북장원 대인께서 보내셨소?”
북장원은 이미 당의 조정 대신들과 친분을 쌓고 있었기에, 봉역도를 손에 넣어 하늘에 오른 듯 기뻐하던 심숙안으로선 명림신을 반기지 않을 수 없었다.
“심 대인께서 이처럼 공이 크시니, 황제 폐하께서 대인의 공을 크게 치하하실 듯하옵니다.”
“하하하, 모두가 그대와 북장원 대인께서 도와주신 덕분이오. 그래, 이 야심한 밤에 나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오?”
“봉역도의 진위 여부를 살피기 위해 왔나이다.”
명림신이 담담히 답하니, 심숙안이 놀라 봉역도와 명림신을 번갈아 살피며 물었다.
“이 봉역도가 가짜란 말이오?”
“그런 뜻은 아니옵고, 혹여 부실한 부분이 있거나 지도를 제작한 이가 불순하게 허위로 만들었을 수도 있으니, 황제 폐하께 올리기 전에 진위 여부를 파악함이 옳다 여겨 왔나이다.”
북장원의 최측근인 명림신의 말이었기에, 심숙안도 옳다 여겨 선선히 봉역도를 보여주었다.
“그대의 말이 옳소. 황제 폐하께 가짜를 보여드릴 수는 없지. 그대가 천천히 살펴 진위 여부를 파악해 주시오.”
이에, 명림신이 한참 동안 봉역도를 살피고 또 살피며 꼼꼼히 파악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산성이 자리한 산의 위치가 바르고, 이어진 길 또한 정확하니… 어느 한곳 허술함이 없는 봉역도입니다.”
“그렇소? 하하하! 과연 북장원의 장량 명림신 대인이시오. 고구려 전역을 그린 봉역도를 샅샅이 살펴 진위를 이토록 명쾌히 판단하시다니, 실로 대단하시오. 하하하.”
명림신마저 봉역도를 진짜라 인정하니, 심숙안은 너무도 기뻐 내일 당장 당으로 떠나고자 마음먹었다.
“이제 더는 고구려에 머물 일도 없을 듯하오. 내 돌아가 황제 폐하께 그대와 북장원 대인의 공도 아뢸 것이니, 조만간 큰 상이 내려질게요.”
“신하로서 마땅히 해야할 일이옵니다.”
잠시 뒤, 심숙안의 숙소에서 나온 명림신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어둠에 의지해 빠르게 발을 옮겼다.
심숙안의 숙소에 다녀온 것을 주위에 알리지 않기 위함인 듯했다.
점차 심숙안의 숙소와 거리가 벌어지자, 그제야 바삐 놀리던 발을 잠시 멈추고는 명림신이 중얼거렸다.
“어찌하여… 가짜를? 폐하께선 정녕, 당과의 일전을 준비하시고 계시다는 말인가?”
명림신이 보았던 봉역도는 산성이 자리한 산의 위치는 정확하였으나, 산성으로 향하는 길이 의도적으로 어긋나 있었다.
“길의 시작점은 바르나, 그 끝들은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만일 당이 봉역도만을 믿고 침공한다면, 압록수 이남부터는 길을 잘못 들어 산성 공략에 애를 먹게 될 것이다.”
요동과 달리 압록수 이남은 당에게 낯선 지형이 많았으니, 의도적으로 길의 방향을 틀리게 그렸어도 이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허나, 명림신은 두렵고 불안하여 심장이 요동쳤다.
“태왕 폐하께서… 이세민을 너무 쉽게 보셨구나. 이세민이 검증을 하고자 한다면, 실로 큰일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