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오해와 진실 (9)
막바우의 물음에 온달이 답을 못하니, 평강이 대신하여 말하였다.
“장군께서 원하시니, 개소문이가 온다면 안으로 들이소서.”
이에 양만춘이 온달과 막바우를 힐끔 쳐다보고는 답하였다.
“안으로는 들이겠으나, 방비도 하겠습니다.”
양만춘의 신중함에 평강이 고마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니, 막바우도 더는 역정을 내지 못하였다.
“개소문이 녀석, 파천신검 비급을 훔쳐 달아나더니 이제 와서 우리 장군께 해코지하려고? 어디 엉뚱한 수작만 부려 봐라. 목을 비틀어 버릴 테니.”
귀가 밝은 온동은 막바우가 구시렁거리는 소리에 한숨을 내쉴 따름이었다.
* * *
며칠 지나지 않아 개소문이 팽무일, 공손향, 당진평, 야수, 쇼락 등과 함께 여범이 이끄는 오백 군사를 거느리고 안시성 앞에 당도하여 진을 세웠다.
“쇼락, 그대가 안시성에 들어가 내가 왔음을 알리시게나.”
개소문의 명에 따라 쇼락이 홀로 말을 몰아 안시성으로 향하니, 공손향이 다가와 개소문에게 물었다.
“안시성을 제일 먼저 방문하신 연유가 어찌 되시옵니까?”
이에 개소문이 담담히 답하였다.
“이곳에 온달 장군이 있기 때문이오.”
“온달은 장군에게 파천신검 초식을 사용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이미 몸에 익힌 무공을 사용하지 않기 위해선, 근골을 잘라야 함을 아시옵니까?”
“설마 그런 뜻을 담아 말씀하셨겠소? 나는 온달 장군이 그런 분이라 여기지 않고 있다오.”
“장군께서 온달을 생각하는 것만큼, 온달도 장군을 생각한다면 좋겠으나,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는 법입니다. 만일 온달이 무공을 폐하지 않음을 탓한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이 물음에 개소문이 답하지 못하니, 공손향도 더는 묻지 못하고 그저 한숨만 내쉴 따름이었다.
* * *
쇼락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그 시점, 형부상서 심숙안이 바다를 건너 고구려에 당도하였다.
단순한 황제의 사신이 아닌, 군선 이백여 척을 거느린 대규모 사절이었다.
고구려에선 종리위두대형 북장원과 종리대형 명림신이 의전을 맡아 심숙안을 맞이하였다.
허나, 심숙안은 바로 평양성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군막을 치고 머물며 말하였다.
“그대들은 돌아가 의전을 다시 갖추도록 하시오.”
“대인, 어찌 그러십니까?”
평소 당의 조정 대신들과 친분을 쌓아온 북장원이었기에, 심숙안의 이런 냉랭한 태도에 크게 당황하였다.
“나는 황제 폐하의 국서를 지니고 있소이다. 그에 맞는 의전을 갖추기 바라오.”
심숙안이 이처럼 냉랭한 태도를 유지하니, 북장원과 명림신도 별수 없이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사신은 어찌 두고 그대들만 온 것이오?”
태왕 건무의 물음에 북장원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하였다.
“의전을 다시 갖춰 오라 하였나이다.”
평소 태왕 건무를 업신여기던 북장원조차 꺼내기 힘든 말이었다.
고구려는 재상 격인 막리지는 물론이요.
대대로조차 새로 선출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선대 태왕의 장인인 북장원보다 높은 의전은 오직 태왕과 태자뿐이었다.
태자 황권은 아직 어려, 의전을 할 수 없었으니, 태왕 건무가 당의 형부상서 심숙안의 의전을 맡아야 함을 의미했다.
이에, 대소 신료들과 오부 귀족들이 두려워 태왕의 눈치를 살폈고, 무장들은 분통을 터트리며 씩씩거렸다.
“어찌 이다지도…….”
“허나, 의전을 안 할 수도 없지 않소.”
대전 안이 소란스러워지고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태왕의 심기를 불편케 하였다.
이에, 대장군 강이식이 불같이 노해 소리쳤다.
“다들 조용히 하시오! 폐하, 소장이 심숙안의 의전을 맡겠나이다.”
낭아봉으로 심숙안의 머리를 으깨 놓을 듯 서슬 퍼런 강이식의 눈빛에 태왕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저, 대전 안으로 데리고 오면 그만인 일이오. 그가 의전을 원하니, 내가 친히 나서겠소.”
태왕 건무가 이처럼 말하니, 무장들이 치욕스러워 고개를 땅에 떨구었다.
“폐하…….”
강이식이 두 손을 모아 읍을 하며, 안타까운 시선으로 태왕 건무를 바라보았다.
“괜찮소, 대장군. 그저 의전일 뿐이오.”
“하오나, 폐하. 한낱 당의 형부상서 따위의 의전을 폐하께서 하시게 된다면, 저들은 다음에도 의전을 원할 것이오며, 더 낮은 이가 폐하의 의전을 받게 될 수도 있나이다.”
이에, 북장원이 강이식을 노려보며 말하였다.
“군사 일만을 거느리고 온 대규모 사절이오. 대장군이 힘으로 굴복시켜 궐로 끌고 들어올 수는 있으나, 이후에는 어찌할 것이오? 황제의 국서를 지닌 심숙안은 결코 돌아가지 않을 것인데, 저대로 계속 둘 수도 없지 않소?”
“그대로 둘 수 없다면, 쫓아 버리면 되지 않소!”
강이식도 지지 않고 맞서니, 대전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강이식을 따르는 무장들과 북장원을 지지하는 오부 귀족과 대소 신료들이 서로 고성을 지르며 제 주장을 펼치니, 태왕 건무의 이마에 주름이 늘었다.
“경들은 그만들 하시오.”
건무가 엄히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서니, 그제야 조용해졌다.
“내 친히 의전에 나설 것이니, 그리 아시오.”
이로써 고구려 역사상 처음으로 태왕이 사절을 의전하는 진기한 광경이 벌어졌다.
* * *
평양성 내로 쳐들어온 수의 대군을 물리친 전쟁 영웅이자, 고구려의 태왕인 건무가 직접 의전에 나셨다는 소문은 곧 평양성 내에 퍼져 백성들도 알게 되었다.
“우리 고구려가 당에 항복이라도 한 것인가?”
“난데없이 항복을? 에이 아닐 거야.”
“허면, 어찌하여 태왕께서 친히 의전을 맡으신단 말인가? 저쪽은 일개 신하 아닌가?”
“그야 그렇지만… 설마 우리 고구려가 이제 막 생겨난 당에게 항복할 리가… 당 따위는 수처럼 곧 사라지지 않겠는가?”
오백 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고구려의 백성들은 나름 자부심이 상당하였다.
고작 이백 년도 못 넘기고 사라지는 중원의 숱한 나라들을 내심 비웃으며, 감히 고구려에 맞서면 허망하게 멸하리라 믿고 있었다.
이런 믿음과 자부심은, 이날 태왕의 의전으로 무너져 내리게 되었다.
나팔이 울리고, 북을 치며 태왕의 행차가 시작되니 평양성 내의 백성들은 마치 나라를 잃은 듯 슬퍼하였다.
“아니… 어찌…….”
“정녕 사실이었단 말인가?”
“폐하께서 어찌하여… 일개 사신을 친히 맞이하신단 말인가?”
태왕 건무의 말처럼 단지 의전일 뿐이었으나, 그 격이 맞지 않음을 고구려의 백성들 모두는 잘 알고 있었다.
엎드려 우는 이와 통곡하는 이들이 태왕의 행차를 막았으나, 호위들이 이들을 끌어내며 길을 열었다.
이에, 백성들은 길을 열어주면서도 태왕의 행차 뒤를 울며 따랐다.
평양성 밖으로 나온 건무의 행차 뒤로 백성들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니, 멀리서 이 광경을 바라본 심숙안이 허허 웃었다.
“여기서 국서를 받게 하면 태왕이 국서를 든 내게 절을 해야 할 것인데, 허허.”
백성의 행렬이 너무도 길어 심숙안으로서도 난처한 상황이었다.
“필경 저 많은 백성들이 나를 잡아먹으려 들 것이다. 그렇다고 궐에 들어가 국서를 내리면 고구려의 장수들이 나를 난도질할 것인데, 어찌하면 좋을고.”
이처럼 심숙안이 중얼거리니, 뒤에 늘어선 장수들도 답을 내지 못하였다.
이때 미관 말직으로 사절을 따라온 백의 사내가 나서 아뢰었다.
“소인이 곁에서 대인을 반드시 지키겠나이다.”
너무도 듬직한 말에 심숙안이 사내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투구와 갑주는 물론이요.
피풍의까지 백색으로 일개 군졸치고는 범상치 않은 용모였다.
나이는 이제 스물이 갓 지나 보였으며, 키가 크고 몸이 무척 빨라 보였다.
‘일부러 눈에 띄는 복색을 하고 있는 사내로다. 필경 출세욕과 공명심이 상당할 게다.’
심숙안이 이처럼 생각하며 백의 사내에게 물었다.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설인귀라 하옵니다.”
“장수들도 못 할 일을 일개 군졸인 네놈이 나를 지키겠다는 게냐?”
“소인 보시다시피, 큰 공을 세우고 출세하고 싶어 이렇듯 눈에 잘 띄는 옷을 입고 있나이다. 공을 세울 기회가 있다면 그 무엇도 마다하지 않는 놈이오니, 믿어 의심치 마시옵소서.”
솔직한 답변에 심숙안이 껄껄 웃었다.
“좋다. 네 너를 믿고, 호랑이 굴에 들어가 보겠노라.”
심숙안이 마음을 굳게 다져 장수들에게 엄히 명하였다.
“고구려의 왕이 의전에 나섰으니, 우리도 군막을 걷고 앞으로 나가도록 한다.”
이에 곧 군막이 걷히고, 심숙안을 비롯한 당의 사절대도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하였다.
“전하를 뵈어 기쁨이 강물과 같사옵니다.”
태왕 건무와 마주한 심숙안이 말에서 내리지 않고 이처럼 말하니, 대장군 강이식이 노해 눈썹을 꿈틀거렸다.
당장이라도 낭아봉을 휘둘러 심숙안의 머리통을 으깰 듯한 강이식의 눈매에 설인귀가 장창을 들고 심숙안의 곁에 바짝 섰다.
창을 비켜 들면 태왕 건무의 목에 닿을 듯한 거리였기에, 강이식을 비롯한 고구려 무장들의 분노가 극에 달하였다.
“이 무엄한 놈이!”
강이식의 입에서 마침내 호통이 터져 나오자, 심숙안이 움찔하였다.
그러나 설인귀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당당히 심숙안의 곁을 지키며 태왕과의 거리를 유지하였다.
이에 태왕이 손을 들어 강이식을 불렀다.
“대장군 이리 오시어 심 대인께 인사하시구려.”
강이식도 낭아봉을 비켜 들고 태왕과 말머리를 나란히 하니, 태왕과 강이식, 심숙안과 설인귀가 서로 마주 보는 형국이었다.
* * *
일만이 넘는 사절대가 평양성 내로 들어서고도 멈추지 않고, 궐에까지 들어왔다.
모두가 무장한 상태였고, 설인귀를 비롯한 장수들은 무장을 한 채 심숙안을 따라 대전에까지 발을 들였다.
태왕이 직접 의전에 나서 심숙안을 데리고 들어서니, 대전에서 기다리고 있던 대소 신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여, 대장군 강이식이 충돌을 일으킬까 무척이나 걱정했던 모양이었다.
허나, 대전에 들어선 심숙안이 용상에 오른 태왕 건무에게 등을 돌려 대전에 늘어선 대소 신료들과 무장들을 바라보며 말하니, 모든 이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고구려의 왕은 내려와 황제 폐하의 국서를 받으라!”
오백여 년이 넘도록 중원의 나라들이 숱하게 사신과 사절을 보내며 국서를 가져왔으나, 단 한 번도 태왕이 내려와 국서를 받은 일은 없었다.
중원의 황제와 동격으로 태왕이라 칭하며 그 격을 맞췄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허나, 태왕이 내려와 국서를 받게 되면, 황제가 보낸 국서에 절까지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는 지금까지 맞춰온 격이 송두리째 무너짐을 의미했다.
잠시 대전 안에 침묵이 흐르고, 고구려의 무장들과 사절대의 장수들 간의 살기가 흘렀다.
강이식은 언제든 태왕의 명이 떨어지면 몸을 날려 심숙안의 머리를 으깰 듯 낭아봉을 단단히 쥐었고, 이에 맞서 설인귀도 발검할 준비를 갖추었다.
이미 궐 안까지 사절대의 일만 군사가 들어온 상황으로 큰 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었다.
이에, 태왕 건무가 조용히 일어나 발을 옮기더니, 대전에 늘어선 대소 신료들과 무장들 앞에 섰다.
심숙안이 마른 침을 삼키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용상 바로 앞에 서더니, 국서를 펼쳐 들고 엄히 말하였다.
“황제 폐하의 국서다. 모두 예를 갖추어라!”
이에 또 한 번 살기가 대전 안에 흘렀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태왕 건무가 심숙안이 든 국서 앞에 무릎을 꿇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에, 대소 신료들과 오부 귀족들이 겨우 안도하여 한숨을 내쉬고는 태왕을 따라 무릎을 꿇으니, 무장들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그러나, 충성심 강한 강이식이 태왕을 따라 무릎을 꿇으니, 무장들도 분을 삼키며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다.
심숙안도 등에 흐르는 땀을 느끼며 간신히 국서를 읽었다.
“고건무 네가, 나를 대신하여 변방을 지키니, 어찌 어여쁘다 하지 않겠는가? 하여, 내 너를 가상히 여겨 상주국 요동군공 고구려국왕(上柱國 遼東郡公 高句麗國王)에 책봉하니, 너는 이후에도 충심을 다해 나의 변방을 지키라.”
심숙안이 이렇듯 국서를 읽으니, 예법에 따라 태왕 건무가 절을 올려 책봉을 받아들였다.
이에, 강이식의 가슴이 찢어지며 울분이 치솟았으나, 국서에 절을 하는 건무의 등이 너무도 초라하고 안쓰러워 그저 땅에 머리를 박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