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오해와 진실 (8)
황위에 오른 이세민은 자신을 따르는 장량과 장손무기를 비롯하여 방현령, 두여회, 단지현, 울지경덕, 굴돌통 등을 모두 승찬시켰다.
또한 최측근인 황 교두에게 호위시랑과 근위장을 겸하게 하였다.
여기에 더해, 평양 공주에게 특별히 낭자군 일만을 지휘케 하였는데, 이는 그녀가 세민이 백이십여 난을 평정할 당시, 함께 전장을 누볐던 공을 인정한 것이었다.
이렇듯 자신만의 통치 기반을 다지던 세민에게 불쾌한 소식이 전해졌다.
위증이 황제와 독대하여 무겁게 입을 열었다.
“고구려의 왕이 요동의 산성들을 보수 공사한다고 하옵나이다.”
“수와 오랜 전쟁으로 성벽이 매우 부실할 것이다. 하여 보수 공사를 하는 것일 터이니, 개의치 말라.”
황제 세민이 이렇듯 대수롭지 않게 여기니, 위증이 다시 아뢰웠다.
“하오나 폐하, 이 보수 공사의 명칭이 무엄하게도 천리장성이라 하옵나이다.”
“뭐라? 천리장성? 우습구나. 고구려의 북방은 성벽을 고작 천 리밖에 쌓지 못할 만큼의 땅이로구나.”
가소롭다는 듯 말하는 세민에게 위증이 다시 머리를 조아려 말하였다.
“하온데, 이 장성 보수 공사의 책임자가 연개소문이라 하옵나이다.”
개소문의 이름을 듣자, 여유롭던 세민이 벌떡 일어나 불같이 화를 내었다.
“뭐라? 고구려 왕이 갓쉰동에게 천리장성 보수 공사를 맡겼단 말이더냐?”
“그렇사옵나이다. 고구려의 왕은 선황 폐하께서 누차 입조하여 책봉을 받으라 권하였음에도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고사하더니, 기어코 장성 보수 공사를 시행하고 있나이다.”
젊은 황제 세민이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한참을 씩씩거리더니, 다시 자리에 앉아 숨을 골랐다.
“하여, 어찌하면 좋겠는가?”
황제의 물음에 위증은 이미 머릿속에 담아 두었던 계책을 아뢰었다.
“지금 고구려가 시행하는 천리장성 보수 공사는 실상, 장성을 축조하는 것이 아닌 각기 떨어진 요동의 성들을 개별적으로 보수하는 것이옵니다.”
“명칭만 천리장성이란 말인가?”
“그렇사옵나이다. 허나, 이 명칭은 무엄하게도 만리장성을 흉내내어 지은 것으로 향후 장성을 쌓지 말란 법은 없나이다.”
“허면, 그대의 생각은 무엇인가?”
“보수 공사를 마치면, 반드시 장성을 쌓게 하시옵소서.”
“뭐라? 고구려가 천리장성을 쌓도록 내버려두란 말이 아닌, 쌓게 하란 말이더냐?”
“그렇사옵니다.”
“어찌 그리해야 하는가?”
황제 세민의 물음에 위증이 바로 답하였다.
“장성이란 본래 외부와 내부의 경계를 나누는 것으로, 크게는 나라 간의 영토를 구분하옵나이다. 하여, 천리장성을 따라 영토를 구분하여, 그 안을 고구려의 것으로. 밖을 우리 당의 것으로 나눌 수 있나이다.”
이에 황제 세민이 크게 만족하여 껄껄 웃었다.
“명쾌한 말이로다. 고구려가 제 발에 도끼질한 셈이로구나. 하하하.”
당시 당은 세민이 황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동돌궐 제압이 고구려를 굴복시키는 것보다 우선되고 있었다.
하여, 세민은 노기를 누르고 위증의 말을 따라 고구려가 천리장성 보수 공사를 마무리 짓기만을 기다렸다.
“내가 정한 경계를 따르지 않는다면, 고구려 왕의 충심을 의심할 수밖에 없겠지.”
이렇듯 세민이 미소 지으며 말하니, 위증이 머리를 조아려 아뢰었다.
“형부상서 심숙안(沈叔安)을 보내 고구려 왕을 상주국 요동군공 고구려국왕(上柱國 遼東郡公 高句麗國王)으로 책봉하시옵고, 왕자 환권(桓權)을 대신 입조하게 하소서.”
“오! 그것이 좋겠구나. 고구려 왕이 바빠 입조할 수 없다 하니, 내 너그러이 왕자의 입조로 대신하는 아량을 보여주겠노라. 하하하.”
태자 고황권의 나이 고작 다섯이었으니, 어린아이를 볼모로 삼겠다는 의미였다.
* * *
평양성 내에서도 태왕과 동정찬의 밀담이 진행되고 있었다.
“요동의 개소문에게 노역비를 지원해야 하니, 그대가 은밀히 다녀오시게.”
태왕의 명에 동정찬이 조심스럽게 답하였다.
“폐하, 개소문에게 노역비 지원은 필요치 않을 듯하옵나이다.”
“어찌 그런가? 고작 오천의 군사로 요동 이십여 성을 모두 보수할 수 없지 않은가? 그를 계속 요동에 묶어 둘 셈인가?”
“아니옵니다.”
“허면, 그대의 의중은 무엇인가?”
“개소문은 이미 노역비를 마련한 것으로 알고 있나이다.”
“뭐라? 그 막대한 비용을 어찌 마련할 수 있단 말인가?”
“공손 씨 일족의 공손향이란 여인이 마련하여 노역비를 지급할 것으로 알고 있나이다.”
동정찬의 말에 태왕이 공손향을 떠올리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그 여인이 개소문의 휘하에 들어와 일을 돕고 있다는 말을 듣기는 하였으나, 이토록 성심을 다해 충성을 바치고 있었구나.”
“이 일로 요동은 물론, 평양성 내의 오부 귀족들에게 그녀의 존재가 알려질 것이기에, 개소문이 평양성으로 돌아올 시, 반드시 공손향의 존재를 오부 귀족들이 따져 물을 것이옵니다.”
“그렇겠구나. 그녀는 우리 고구려의 적이었고, 개소문에게 충성을 바친다고는 하나 정식 귀순이 아니었으니, 그 죄를 사하였다고는 할 수 없겠지. 사면장을 내림이 옳지 않겠는가?”
“아직은 때가 이르옵나이다. 향후, 개소문이 맡은 바 책무를 다하고 평양성에 돌아올 시, 치하하며 사면장을 내리심이 옳을 듯하옵나이다.”
이에 태왕이 고개를 끄덕이니, 동정찬이 다시 말을 이었다.
“폐하, 당에서 형부상서 심숙안이 국서를 지닌 채 오고 있다 하나이다.”
“또 책봉을 받으러 입조하란 말을 전하러 오는 것인가?”
“황제가 따로 명을 내려 당의 조정에서도 자세한 내막은 모르는 듯하오나, 필경 폐하를 당의 제후로 책봉하겠다는 국서일 것이옵니다.”
“뭐라? 책봉을 받으러 입조하란 내용이 아닌, 책봉을 알리는 국서란 말이더냐?”
“소신이 생각하건대 필경 그러할 것이옵나이다.”
이에 태왕 건무가 잠시 침묵을 유지하며 말이 없으니, 동정찬은 그저 송구스러워 고개를 푹 숙였다.
“폐하, 송구하오나… 현재… 우리 고구려는 당을 대적할 힘이 부족하나이다.”
“당 또한 이제 나라를 세워 혼란스럽지 않겠는가? 힘이 있겠는가?”
“당은 땅이 넓고, 백성이 많으며, 황제 이세민은 기병 운용에 탁월한 정복 군주이옵나이다. 당장 우리 고구려를 침범할 여력은 없을 것이오나, 우리 고구려가 힘을 기르기 전에 공격할 것은 분명하나이다. 하여.”
“하여?”
“책봉을 받으소서.”
이에 태왕이 또다시 침묵을 유지하니, 동정찬이 죄스럽고 송구하여 머리를 조아렸다.
“폐하, 이세민의 당이 아직 혼란스럽다고는 하나, 우리 고구려 또한 마찬가지옵나이다. 아직은 때가 아니오니, 받아들이셔야 하옵나이다.”
“그대의 말이 옳다. 부끄러움은 내가 감당하면 되며, 수치는 되갚아 주면 그만이다. 고구려 내엔 아직 나를 따르지 않는 오부 귀족이 있으니, 당장의 전쟁은 피함이 옳다.”
건무가 이처럼 결정을 내리니, 동정찬이 감격하여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 * *
계루부의 수장 고정의와 건안성의 젊은 성주 고돌발이 진정을 다해 개소문을 도우니, 요동 일대 고 씨 일족이 성주로 있는 성들 모두가 천리장성 보수 공사에 적극 참여하였다.
또한 노역비를 지급받고 노역에 참여한 백성들은 생계가 해결되어 기쁜 마음으로 성벽을 보수하였다.
여기에 더해, 점차 단단해지는 방비에 노역을 나오지 않는 백성들의 마음까지 든든하게 만들었다.
“당의 이세민이 흉악하여 근심이었는데, 성벽이 제 모습을 찾아가니 한시름 더는 기분이구먼.”
“그러게나 말일세. 그 누가 자신의 사재를 털어 노역비를 지급할 수 있겠는가? 과연 막리지 연태조 합하의 장자다운 모습일세.”
이처럼 요동 일대의 많은 백성들이 개소문을 진심으로 칭찬하고 따랐다.
그러나, 안시성을 비롯하여 계루부에 속하지 않은 여러 성들은 아직도 개소문을 꺼려하여 천리장성 보수 공사에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
“고정의 성주와 고돌발 성주가 앞장서 따라준 덕에 여러 성들이 함께 보수 공사에 참여하고 있소. 허나, 아직도 참여하지 않는 성들이 있으니, 내가 방문하여 성주들을 설득해야겠소이다.”
개소문이 이처럼 말하니, 팽무일이 시큰둥하게 물었다.
“가서 설득하는 건 좋은데, 따르지 않는 성들은 대체 이유가 뭐라 하던가요?”
이에, 공손향이 빙그레 웃으며 바로 답하였다.
“저 때문이지요.”
“그대가 왜?”
팽무일이 의아해 바로 물으니, 공손향이 또박또박 이유를 대었다.
“저는 본래 고구려와 적으로 만났습니다. 장군께 귀순하였다고는 하나, 제 본심을 아직도 의심하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제가 일만이나 되는 사람들을 요서와 요동에서 즉시 데려왔으니, 이 또한 불안케 했을 겁니다.”
“하긴… 그런데 일만이나 되는 사람들은 어떻게 그리도 빨리 데려온 거요?”
팽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으니, 공손향이 당진평을 가리켰다.
“당 장주의 도움으로 흩어졌던 제 사람들을 모았고, 그들이 또 사람들을 모아 영주 인근에서 제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여, 요동성에 당도하자마자 그들이 저를 찾아올 수 있었지요.”
팽무일도 당진평의 수하들이 도처에 약방을 운영하며 정보를 취합하고 있음을 알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먼, 이미 평양성을 떠나기 전부터 준비가 되어 있었구먼. 헌데, 이런 사정을 다른 이들에게 말할 수는 없을 터이니… 공녀가 오해를 좀 받아야겠소이다.”
“감내해야겠지요.”
공손향이 담담히 말하니, 개소문이 고개를 저었다.
“나를 따르는 이가 감내할 일은 아니오. 내가 해결하고, 내가 감내할 일이오. 안시성을 시작으로 각 성들을 방문할 터이니, 준비들 하시오.”
“하오나, 안시성에는 온달이 있고… 온달은 결코 장군을 반기지 않을 것입니다.”
공손향이 근심을 담아 말하였으나, 개소문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지금껏 환대보다, 문전박대가 많았으니 실망할 일도 없소. 나를 따르며 박대를 두려워하면, 세상 어디든 몸 둘 곳이 없을 것이오.”
개소문이 이처럼 말하니, 팽무일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였다.
“하긴, 우리가 그 누구에게 환대받을 신세들이던가. 가 보자고.”
* * *
요동성의 개소문이 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안시성이 분주해졌다.
“그놈이 연태조의 한을 풀고자 오는 겐가?”
막바우가 대뜸 이렇듯 말하니, 경우가 면목 없어 고개를 숙였다.
“경우 이 친구야. 괜찮아! 개소문인지 개금인지 오면 내가 혼쭐을 내줄 터이니, 염려 말게나.”
막바우가 경우의 어깨를 툭 치며 이처럼 말하니, 이번엔 온동이 머리를 푹 수였다.
“넌 또 왜 풀이 죽어서 머리를 처박고 그러냐?”
막바우가 풀 죽은 온동의 기를 살리기 위해 웃는 낯으로 물었다.
그러나 온동은 아무 답도 못 하고 그저 머리만 숙일 뿐이니, 답답한 막바우가 온달을 바라보았다.
“장군, 얘가 왜 이런데요? 어라? 장군은 또 왜 얼굴이 그러시오?”
온달의 얼굴에 온통 수심 가득이라 써 있으니, 눈치 빠른 막바우가 못 알아볼 리 없었다.
이에, 평강이 한숨을 내쉬며 말하였다.
“성주, 안시성의 보수 공사에 들어갈 노역비는 어느 정도이옵니까?”
“안시성의 백성들은 항상 군사들을 도와 자발적으로 참여하였고, 보수 공사가 마무리되면 군사들이 백성들의 일을 도왔습니다. 하여 노역비는 크게 필요치 않습니다.”
“하오면, 안시성은 알아서 보수 공사를 할 터이니, 오지 않아도 된다 개소문에게 전해주소서.”
평강이 이처럼 말하니, 양만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온달이 고개를 저으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니오. 오라 하시오.”
“장군…….”
양만춘이 조심스럽게 온달을 살피며 부르니, 온달이 마저 말을 이었다.
“선친의 한을 풀고 싶으면 언제든 찾아오라 하였소이다. 개소문이 보수 공사 때문에 오는 것인지, 선친의 한 때문인지 알 수 없으니… 그를 막아선 아니 되오.”
이에 막바우가 참다못해 버럭 소리 질렀다.
“아니, 그래서 오지 못하게 하려는 것 아니오! 입 꾹 다물고 고작 생각한 게 남들 다 걱정하는 그거였소? 개소문이가 와서 한판 붙자고 청하면 개소문이를 죽일 거요? 아니면 장군이 죽을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