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오해와 진실 (7)
황위에 오른 이세민은 상하를 중랑장에 앉혔고, 상하의 식객이자 책사였던 마주를 자신의 책사로 임명하였다.
그리고는 자신의 목숨을 노렸던 위징을 불러들여 엄히 물었다.
“너로 인하여 내가 죽을 뻔하였다. 어찌하여 우리 형제를 이간시킨 것이냐?”
이에 위징이 껄껄 웃었다.
“이간이라 하셨소? 나는 이간이 아니라 앞날을 예측하고 사실을 고한 것 뿐이오. 만일 태자께서 나의 말을 따르셨더라면 목이 잘린 이는 그대였을 것이오. 하하하.”
“앞날을 예측했다라… 너의 능력이 상당하구나.”
세민이 위증을 칭찬하고는 손수 결박을 풀어주었다.
“형님에게 했듯이 내게도 앞날을 예측해 사실을 고하거라.”
세민이 이처럼 말하며 위증에게 첨사주부의 벼슬마저 내리니, 위증이 감격하여 머리를 조아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이세민이 이연에 이어 당 황제에 오르니, 고구려에도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였다.
백이십여 난을 평정한 젊은 영웅이자, 형제들의 목을 베고 황위에 오른 이세민은 자신의 과를 덮기 위한 전쟁이 필요하였다.
하여, 동돌궐 정벌이 진행되었고, 고구려에도 이 사실이 전해졌다.
* * *
천하의 영웅이자, 냉혹한 황제 이세민의 등장은 요동 일대의 백성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였다.
“수와의 오랜 전쟁으로 무너지고 부서진 성벽은 언제 보수하는 거야?”
“도대체 태왕은 무슨 생각으로 책임자를 두고 진행하라시는 건지… 이러다가 당과 전쟁이라도 벌어지면 우리는 어찌 되는 건가?”
선대 태왕과 달리 건무는 요동 일대 백성들에게 신망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가장 큰 원인은 서부 누살을 따로 임명하여 천리장성이란 이름 하에 보수 공사를 진행하게 한 탓이 컸다.
숱하게 성벽 보수 공사에 참여했던 요동 일대의 백성들은 각기 개별 성들의 백성들과 군사들이 합심하면 쉽게 끝낼 일을 한 사람에게 진행토록 한 태왕의 처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민심에 들끓으니, 요동 일대의 장수들과 성주들 역시 불만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개소문이 오천의 군사를 이끌고 요동성에 당도하니, 요동성 성주 고승과 새로 서부총관에 임명된 상장군 주용이 마중 나왔다.
“허허, 참으로 묘한 조합이로다.”
상장군 주용이 공손향을 알아보고는 이처럼 말하니, 요동성 성주 고승이 미소 지으며 말하였다.
“우리 요동성을 지켜준 인물들이오. 서부 누살을 성심으로 따르니 의심치 않으셔도 되시오.”
이에 개소문이 고마워 예를 표하였다.
“성주의 환대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대연회는 마련되어 있지 않으나, 서부 누살과 일행들을 위해 잠시 자리를 마련했으니, 함께 합시다.”
고승이 이처럼 말하며 앞장섰고, 주용은 개소문을 대신하여 여범에게 명하였다.
“먼길 오느라 고생하였을 터이니, 자네와 군사들은 잠시 쉬게나.”
이에 여범이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며 개소문을 바라보았다.
“총관의 말대로 잠시 쉬도록 하시오.”
고승과 주용이 따로 할 말이 있을 것이라 여겨 개소문이 이처럼 말하니, 여범은 불만을 품고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개소문 일행만을 데리고 연회장에 들어선 고승이 상석에 앉고, 그 좌측에 주용이 앉았다.
개소문이 우측에 앉으니, 공손향, 팽무일, 당진평, 야수, 쇼락 순으로 자리에 앉았다.
“여범을 따로 떼어 놓으신 연유가 있사온지요?”
개소문이 바로 물으니, 상장군 주용이 껄껄 웃었다.
“그의 상관 대건상은 북장원을 따르는 인물이네. 북장원은 우리와 뜻이 다른 자로, 그자가 대건상에게 어떤 말을 전할 지 알 수 없어 떼어 놓은 것일세.”
“…….”
“나는 그대의 선친과 함께 전장을 누빈 동지로 나는 그대를 믿고 싶네. 허니, 그대도 나를 믿고 의지해 주시게나. 여범은 항상 주의하시게.”
“허나, 그는 저를 따르는 자입니다. 수하 하나 충성을 바치게 못 한다면 어찌 맡은 바 책무를 완수할 수 있겠나이까?”
개소문이 이처럼 말하니, 고승이 손을 내저었다.
“그 맡은 바 책무란 것이 말일세. 태왕 폐하와 자네를 요동의 백성들이 미워하게 만든다는 걸 아시나?”
이에 개소문도 이해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소장도 잘 알고 있사옵니다. 하여, 길어도 삼 년 짧으면 일 년 내로 완수할 생각입니다.”
“삼 년?”
“삼 년이라 하였는가?”
고승과 주용이 이처럼 놀라 물었으나, 개소문은 전혀 개의치 않고 담담하였다.
“그렇습니다.”
“자네와 군사 오천으로 가능하겠는가?”
고승이 다시 물으니, 개소문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였다.
“내일부터 요동 이십여 성을 돌며 제 뜻을 알릴 것입니다.”
“자네의 뜻이 무엇인가?”
“천리장성 보수 공사의 공은 모두의 것으로 나누고, 과는 저 혼자 책임질 것입니다. 성벽 보수 공사의 책임은 제가 질 터이니, 각 성에서 백성들과 군사들도 보수 공사에 참여토록 협조를 구할 생각입니다.”
이에 고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네만, 백성들을 노역에 참여시키려면 비용을 지불해야 할 것일세. 폐하의 지원 없이는 비용을 마련하기 어려울 게야.”
상장군 주용도 고승의 말을 도와 말하였다.
“오랜 전쟁으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졌네. 덕분에 요동 일대 성들 중 보수 공사 비용을 지원할 만한 성들도 없다네. 중앙에서 지원이 없다면, 백성들을 노역에 동원하기는 불가하네. 차라리 돌아가 태왕 폐하께 지원을 요청함이 어떠하겠나?”
이에 개소문이 고개를 저어 잘라 말하였다.
“아니옵니다.”
“아니라?”
상장군 주용과 고승이 놀라 동시에 물으니, 개소문을 대신하여 공손향이 답하였다.
“서부 누살께서는 사재를 털어 천리장성 보수 공사 비용으로 사용코자 하시옵니다.”
“뭐라?”
상장군 주용이 놀라 고승을 바라보니, 고승이 한숨을 내쉬며 말하였다.
“사재를? 그 마음은 가상하나, 그렇다고 한들 어찌 이십여 성의 보수 공사 비용을 충당할 수 있단 말인가? 어려운 일이야.”
주용과 고승이 난색을 보였으나, 공손향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하였다.
“두 분께옵선, 제가 누군지 아시옵지요?”
공손향의 물음에 상장군 주용이 허허 웃으며 답을 피하였고, 고승이 점잖게 말하였다.
“그대는 우리 고구려의 적이었지. 상장군과는 꽤 많은 전장에서 만났을 듯한데…….”
“그렇사옵니다. 두 분께서 아시듯이 저는 이 요동과 요서 일대에 세력을 지니고 있지요. 서부 누살께 충심을 다하고 있는 지금에도 요동과 요서에서 저를 따르는 이들을 모으면 족히 일만은 될 것입니다. 또한.”
“또한?”
“대를 이어 부를 축적하여, 재물이 적지 않다 말씀드릴 수 있나이다. 하여, 저의 재물을 모두 천리장성 보수 공사에 투여하고, 저를 따르는 이들도 노역에 투입할 것이옵니다.”
“…….”
“노역에 참여하는 요동의 백성들과 군사들에게도 서부 누살의 이름으로 마땅한 비용을 지불하여 생계를 책임질 것입니다. 하여, 이를 요동 이십여 성에 널리 알리고 싶나이다.”
공손향이 말을 마치자, 상장군 주용과 요동성 성주 고승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다가 동시에 껄껄 웃었다.
“하하하, 그대는 어디서 이런 복을 얻었는가?”
상장군 주용이 개소문의 잔에 술을 가득 따라주며 물으니, 요동성 성주 고승도 공손향의 잔에 술을 따라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서부 누살의 이름으로 비용을 지불하겠다니, 참으로 주군을 생각하는 충심이 가상하오. 내 반드시 요동 일대 성들에 이를 상세히 알려 많은 이들이 노역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겠소.”
다음 날, 요동성에 방이 붙고, 요동 이십여 성으로 고승이 사람을 보내어 개소문의 뜻을 알렸다.
또한 공손향이 요동과 요서 일대에서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모아 요동성으로 데려오니 그 수가 장담했듯 일만에 달하였다.
부서지고 무너졌던 성벽을 바라보며 두려워하던 요동성 백성들은 노역비를 받고 노역에 참여하여 성벽을 보수할 수 있게 되니, 모두가 기뻐하였다.
요동성을 시작으로 보수 공사가 진행되자, 개소문은 일행들을 이끌고 일대 성들을 방문할 준비를 하였다.
이때, 신성 성주 고정의와 건안성 성주 고돌발이 직접 요동성을 방문하였다.
고정의는 고구려의 왕종인 계루부의 수장을 맡고 있으며 태왕의 사냥터이자, 난공불락의 요새인 신성을 지키는 인물이었다.
예순이 넘은 고정의와 달리 이제 갓 스물이 된 건안성의 젊은 성주 고돌발은 어깨가 넓고 가슴이 두터운 사내로 패기 넘치는 눈매가 인상적이었다.
“아니 어찌 두 분이 직접 오셨소?”
요동성 성주 고승이 직접 나와 이들을 맞이하니, 고정의가 본론부터 말하였다.
“서부 누살을 보러 왔소이다. 노역비를 지급한다고 들었소만 사실이오?”
“이런 일을 거짓으로 알릴 수는 없지요. 사실입니다.”
고승이 웃으며 답하니, 고돌발이 바로 물었다.
“일 년, 이 년, 삼 년 모두 지급 가능하오? 우리 건안성은 수와의 전쟁으로 백성들의 삶은 피폐하고, 성벽은 허물어졌소이다. 농사를 짓든 도적질을 하든, 일해야 먹고살 백성들이오.”
“…….”
“그들을 강제로 끌고 가 노역을 시키면, 노역에 나선 사람뿐만 아니라 그가 책임지는 가족 전체가 굶어 죽게 된단 말이오. 절대 거짓을 말하여선 아니 되오.”
고돌발이 이처럼 따지듯 말하니, 고승은 그저 말문이 막혀 손가락으로 멀리 떨어진 개소문을 가리켰다.
“저자요? 저자가 서부 누살 연개소문이오?”
고돌발이 재촉해 물으니, 고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서부 누살이 노역비를 책임질 것이니, 직접 가서 묻든지 따지든지 하시구려.”
이에, 성미 급한 고돌발이 날듯이 달려가 성벽을 올려다보며 지시 내리는 개소문의 멱살을 덥썩 움켜쥐었다.
“당신이 서부 누살 연개소문이오?”
처음 본 사내가 난데없이 멱살을 잡고 물으니, 개소문이 의아해 물었다.
“내가 그대에게 죄를 지었소?”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허투루 답할 시엔 내가 그대에게 죄를 짓게 될 것이오.”
“그럼, 허투루 답하지 않을 터이니, 어서 묻기나 하시구려.”
애써 멱살 잡힌 손을 풀 생각도 하지 않고 개소문이 이처럼 말하니, 고돌발이 무안해 멱살을 놓고는 바로 물었다.
“노역비를 중앙에서 지원해 준다고 하더이까?”
“아니오.”
“태왕 폐하께서 지원하지 않는단 말이오?”
“그렇소이다. 지원은 오천 군사가 전부요.”
“헌데, 무엇으로 노역비를 지급한단 말이오? 혹시 그대의 사재로 지불할 생각이시오? 연씨 일가가 대대로 모아둔 재물이 요동 이십여 성의 노역비를 충당하고도 충분하오?”
“아니오. 부족하오.”
“그렇다면 무엇으로 백성들의 배를 채우게 할 것이오? 굶고는 일을 할 수 없소. 차라리 태왕을 설득하여 지원을 약조 받아 오시는 것은 어떠하오?”
고돌발이 애원하듯 물으니, 개소문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장대한 기골과 달리 부리부리한 눈매가 무척이나 선한 사내였다.
“그대는 이 요동성을 세운 이가 누군지 아시오?”
뜬금없이 개소문이 요동성을 처음 세운 이를 물으니, 고돌발이 당황하여 말하였다.
“요동성? 한조의 백마장군 공손찬? 아니지… 그보다 먼저 세운 이가 있었나?”
이에 개소문이 허허 웃으며 답하였다.
“맞소, 공손 씨 일족이 세웠소이다. 내 곁에 있는 이 여인이 바로 그 공손 씨 일족의 대를 잇는 공녀, 공손향이라 하오.”
개소문이 공손향을 가리키니, 고돌발이 깜짝 놀라 바라보았다.
“노역비는 서부 누살의 이름으로 지급될 것을 책임지겠나이다.”
공손향이 공손히 말하니, 고돌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길면 삼 년이오. 삼 년간 요동 일대 이십여 성의 보수 공사 노역비를 책임질 수 있단 말이오?”
이에 공손향이 빙그레 웃었다.
“요서에 나라를 세우고 싶으나, 거란이 터를 잡았고. 요동에 나라를 세우고 싶으나, 이미 고구려가 자리를 굳건히 지킨 지 오래라… 우리 공손 씨 일족의 부는 계속 늘어만 가고 줄지 않았나이다.”
“…….”
“만약 우문도웅이 요동을 차지했다면, 제가 그의 궁전을 세워주었을 것입니다.”
이에, 고돌발이 말문이 막혀 곁에 다가온 고정의를 바라보니, 고정의가 그를 대신하여 개소문에게 말하였다.
“서부 누살이 귀인을 얻었구려. 공녀와 더는 적으로 만나지 않게 되어 참으로 다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