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오해와 진실 (5)
개소문이 공손향과 돌아와 모두에게 서부 누살에 입명되었음을 알렸다.
“뭐? 재상이 아니고 누살? 그게 뭔데?”
팽무일이 대뜸 언성을 높여 물으니 연정토가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형님 말씀 중이시오. 그만 조용히 하시오.”
“뭐? 이 새파랗게 어린 놈이. 네놈 집안은 형이나 동생이나 어찌 하나 같이 시건방지냐?”
“뭐라 하셨소? 이자가 정녕!”
연정토가 불같이 화를 내며 몸을 일으키니, 팽무일도 짤막한 몸을 일으켜 주먹을 치켜들었다.
이에 개소문이 엄히 꾸짖으며 두 사람을 제지하였다.
“그만 하라! 아직 더 할 이야기가 있느니라.”
연정토와 팽무일이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으니, 개소문이 다시 말을 이었다.
“곧 군사 오천이 배정될 것이며, 나는 그 군사들을 이끌고 요동 이십여 성을 보수 공사해야 하느니라.”
“뭐? 아니 사부. 고작 오천 군사로 어찌 요동 이십여 성을 보수 공사한단 말이오? 정신 나간 소리! 고구려의 막리지가 된다 하여 팔자 필 생각에 따라와 죽을 고생하며 수나라 군사들을 막아내었건만, 고작 성벽 보수 책임자가 된 거요?”
“…….”
“내 이럴 거면, 중원으로 돌아가 비적 무리 괴수가 되는 게 차라리 낫겠소이다.”
팽무일이 다시 언성을 높이니, 연정토가 매섭게 노려보았다.
“뭐? 왜? 이 애송이는 툭하면 노려보고 지랄이야?”
팽무일도 눈을 부릅뜨고 맞서니 다시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이에 당진평이 한숨을 내쉬며 말하였다.
“다른 방도는 없습니까? 서부 누살을 거절하면 아니 되옵니까?”
“그럴 수는 없소.”
“십 년도 더 걸릴 일입니다. 공자 재고하십시오. 제가 수하들을 풀어 방도를 마련하겠습니다.”
“어떤 방도를 마련하겠다는 게요?”
개소문이 물으니, 당진평이 바로 답하지 못하였다.
이에 공손향이 빙그레 웃으며 말하였다.
“당 장주께서 염두에 두신 방법이 있는 듯하오나, 아직은 아니 되옵니다. 공자께선, 아니 우리 서부 누살께선 길어야 삼 년, 짧으면 일 년 내로 다시 평양성에 돌아오실 수 있을 터이니, 모두 불안해하지 마소서.”
“그 말이 정녕 가능하겠소?”
당진평이 놀라 물으니, 공손향을 대신하여 개소문이 답하였다.
“나는 자신하네. 그러니, 나를 믿고 따라주시게.”
“공자께서 이토록 자신하시니, 어찌 따르지 않겠습니까.”
당진평이 바로 답하니, 팽무일도 한숨을 내쉬며 말하였다.
“삼 년이라면 못 참을 일도 아니지.”
“그대들은 어찌 하겠소?”
개소문이 말 없는 야수와 쇼락을 바라보며 물었다.
“나. 나는… 언, 제나… 함께다.”
야수가 망설임 없이 답하자, 쇼락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하였다.
이에, 개소문이 연정토와 연수영에게 말하였다.
“너희에게 미안하나, 사재를 사용해야 할 듯하구나.”
“걱정하지 마소서.”
연수영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답하니, 연정토도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형님 것입니다.”
이에, 개소문이 단 사부와 모용설, 모용상에게 당부하였다.
“그대들은 내가 돌아올 때까지 동생들을 지켜주시오.”
“따르겠소이다.”
단 사부가 담담히 답하니, 개소문도 안심할 수 있었다.
모두가 마음을 모아 개소문을 돕고자 하니, 든든한 마음에 공손향이 환하게 웃으며 말하였다.
“요동과 요서에는 아직 저의 세가 미치는 곳이 있습니다. 따르는 이들도 상당하고, 대대로 물려받은 재산도 상당하니, 천리장성 공사에 도움이 되리라 여깁니다. 모두 안심하시고 삼 년 뒤 뵙기를 바라나이다.”
* * *
다음 날, 상장군 대건상의 수하 모달 여범이 개소문을 찾아왔다.
“소장이 누살을 모시게 되었나이다.”
“선친과 함께 전장에 계셨다 들었소이다. 잘 부탁하오.”
개소문이 이처럼 반겼으나, 여범은 표정을 굳혀 건조하게 답하였다.
“누살께 배정된 오천의 군사가 대기 중이옵니다. 요동행을 서둘러 주십시오.”
마치 하대하듯 서두르라 말하는 여범의 태도에 성미 급한 팽무일이 눈을 크게 뜨고 노려보았으나, 개소문은 개의치 않고 말하였다.
“이미 준비는 마치었으니, 내일 출발하도록 합시다.”
이에 여범이 짧게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넨 후 몸을 돌려 떠났다.
“시건방진 놈이로세. 사부, 저놈을 꼭 데리고 가야 하오?”
팽무일의 물음에, 개소문을 대신하여 야수가 답하였다.
“안… 데리고. 가면? 다. 른. 수 있나?”
“뭐래? 이 버벅이가? 넌 좀 과묵히 있으라고!”
팽무일이 버럭 소리 지르니, 개소문이 손을 저어 두 사람의 다툼을 제지하였다.
“그만들 하시게. 저자는 자신이 우리를 데려간다고 여기는 듯한데, 어찌 안 데려갈 수 있겠나. 우리는 출발 준비나 하세.”
* * *
개소문이 요동행을 준비하는 그 시점, 성충은 사비에 도착하여 백제의 왕 의자와 독대하고 있었다.
마흔이 넘어서야 선왕 무왕에 이어 즉위한 의자는 태자 시절부터 전장에선 용맹하고, 궐에선 효를 다하며, 아랫사람들에겐 항상 자애로웠다.
신중하면서도 담대하여 실수가 적고, 조언과 충언을 마다하지 않으니, 그를 믿고 따르는 신하들 또한 많았다.
하여, 삼한 중 백제의 국정이 가장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의자는 태자 시절, 무왕의 정비인 사택왕후와 그녀를 따르는 사택 씨 일족의 견제로 숱한 고비와 고초를 겪으며 사지를 헤매기도 했다.
허나 의자는 과거사를 덮는 듯, 무왕이 승하한 후에도 의모인 사택왕후를 극진히 섬기며 효를 다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사택왕후마저 세상을 떠나자 성충, 흥수, 의직, 계백, 흑치상지 등과 함께 친위 정변을 일으켜 정적인 사택 씨 일족을 물리쳐 왕권을 강화하였다.
의자는 이처럼 참을성도 깊고 때를 기다릴 줄도 아는 군주였다.
“새로운 태왕은 어떠하던가? 듣기로는 선대 태왕에 비하여, 무척이나 소심하고 나약하다던데 그러하던가?”
의자의 물음에 성충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옵니다.”
“아니라?”
“그렇사옵니다.”
“그럼 어떤 인물이던가?”
“선대 태왕인 평원태왕과 영양태왕은 모두 친히 군을 이끌고 외적을 물리칠 만큼 담대한 인물들이었으며, 귀족들과 신하들은 이들을 감히 능멸하지 못하였나이다. 허나.”
“허나?”
“새로 태왕이 된 고건무는 전장에선 용맹한 영웅이나, 궐에선 귀족들과 신하들에게 주눅 든 모습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태왕이 나약하고 소심한 인물이란 소문이 사실 아니던가?”
“아니옵니다.”
“뭐라? 어찌 그런가?”
의자가 의아해 물으니, 성충이 빙그레 웃었다.
“건무는 화살 맞은 범이옵니다.”
“범?”
“평원태왕은 오부 귀족과 신하들을 무릎 꿇릴 위엄을 지닌 용이었고, 영양태왕은 이들을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며 가지고 놀듯 다룰 수 있는 봉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건무는 화살 맞은 범이었습니다. 무릇 범이란, 쫓기며 화살을 맞으면, 반드시 빙 돌아 역습을 가하는 법이지요.”
“허면?”
“그렇사옵니다. 건무는 전하와 무척이나 닮은 자이옵니다. 그는 때를 기다리며 자신을 따르지 않고 능멸한 오부 귀족들과 대소 신료들에게 반격을 가할 것입니다. 지금 보이는 고건무의 모습은 모두가 진실되지 않은 모습이옵나이다.”
“그렇다면 고구려에서 친위 정변이 일어나겠구먼. 내가 했듯이 말이야.”
“반드시 그러할 것입니다. 허나, 아쉬운 것은… 건무에겐 강이식 같은 맹장이 곁을 지키나, 지혜로운 책사가 없기에 친위 정변의 성공 여부는 장담할 수 없나이다.”
“을지문덕이 있지 않은가?”
“전하, 을지문덕은 세상에 없나이다.”
성충이 단호히 답하니, 의자가 놀라 바로 물었다.
“듣자하니, 을지문덕은 외적을 방비하기 위해 적봉진으로 향했다고 하던데, 설마 그가 죽은 겐가?”
“을지문덕은 충성스러운 자입니다. 그런 자가, 오부 귀족들에게 능멸 당할 태왕을 두고 평양성을 비울 리 없사옵니다. 그는 죽었나이다.”
“음… 그럴 듯하군. 허면, 고건무가 친위 정변을 일으켜 오부 귀족들을 제거하고자 해도 쉽지 않겠구먼. 오히려 고건무가 당하겠어.”
“시기만 맞춘다면, 성공할 것이오나… 고건무가 그 시기를 놓친다면 사지가 잘려 대동강에 뿌려질 것입니다.”
“시기라?”
“그렇습니다. 안시성의 온달과 요동의 성들을 보수하는 연개소문이 평양성에 돌아온다면 고건무의 친위 정변은 성공할 수 있나이다.”
“검신 온달과 관풍행전을 불태운 연개소문이라… 그래, 연개소문은 어떤 인물이던가?”
“기골이 장대하고 눈빛에 흔들림이 없는 사내이옵니다.”
“자신을 요동으로 내친 태왕을 연개소문이 도와 친위 정변을 일으킬 듯한가?”
“태왕이 연개소문을 요동으로 내친 것은 그를 막리지에 올리고자함입니다. 태왕은 선대 태왕이 신뢰한 연태조의 장자를 결코 내칠 인물이 아닙니다. 연개소문도 이런 태왕의 마음을 파악하여 반드시 따를 것입니다.”
“그렇다면, 연개소문이 오부 귀족을 모두 제압할 만큼의 재주를 지녔다고 여기는가?”
“연개소문은 어려서 천하를 떠돌며 사지를 헤매고, 숱한 고초를 겪은 인물입니다. 이런 인물은 심지가 곧고 굳어 흔들리지 않으며, 거사를 단행함에 망설임도 없는 법입니다. 연개소문이 칼을 빼어들면 그의 정적들은 모두 생을 마감하게 되리라 판단하옵나이다.”
“나의 의직과 계백이 태왕에겐 연개소문인 게로군. 하여, 그를 요동으로 보내 오부 귀족의 견제를 받지 않도록 한 게야. 역시 성충 자네의 말대로 고구려의 새로운 태왕은 나와 무척이나 닮았구먼.”
의자가 고개를 끄덕이니, 성충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허면, 그대가 생각하기에 정권이 안정된 고구려가 당을 막아낼 수 있다 여겨지는가?”
“현재 고구려는 천하의 명장 검귀 강이식이 대장군이오며, 검신 온달이 안시성에 있고, 젊은 연개소문이 힘을 키우고 있나이다. 이들을 지닌 태왕 고건무는 당의 황제 이연과 맞서 능히 이길 것입니다. 허나, 이연은 장수로서 훌륭한 인물이나, 전쟁을 꺼려하는 성품이라 전쟁은 없을 것입니다.”
“허나, 차남 이세민이 정변을 일으켜 황위를 찬탈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당에서 정변이 일어나, 차남 이세민이 황위를 잇게 된다면 과를 덮기 위해 반드시 전쟁을 일으킬 것입니다. 허나, 강이식, 온달, 연개소문이 맞서고 전장의 영웅 고건무가 평양성을 지킨다면 당의 대패가 될 것이옵나이다.”
“성충, 자네 말대로라면 당이 고구려를 제압하지 못할 터이니, 육로로는 우리 백제에게 위협이 되지 못하겠구먼.”
“그렇사옵니다. 당이 우리 백제를 위협한다면 반드시 수군을 이끌고 기벌포에 상륙할 것입니다. 육로를 확보하지 못한 당은 필경 신라에게 우리 백제를 공격하도록 시킬 것이옵니다.”
“기벌포라…….”
“맞습니다. 기벌포에 당군을 묶어두고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 군을 물리친다면 당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이옵니다.”
“내 기억하고 또 기억하겠네. 어찌 되었든 고구려의 새로운 태왕이 어리석은 인물이 아니라 참으로 다행일세.”
의자가 내심 안심해 말하니, 성충이 안색을 굳히며 답하였다.
“그러하옵니다만, 전하. 고구려 태왕에겐 지혜로운 책사가 없어 친위 정변이 실패할 수도 있나이다. 그땐 오부 귀족들이 고구려를 당에게 내다 바칠 터이니, 우리 백제의 안위도 존망지추에 처할 수밖에 없음을 상기하고 또 상기하소서.”
이에, 의자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더니, 빙그레 웃으며 말하였다.
“고구려 태왕이 친위 정변을 준비하면 성충 자네가 고구려에 가서 책사 노릇을 좀 해주게나.”
전혀 뜻밖에 명이었으나, 성충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머리 숙여 명을 받았다.
“항상 주시하여 때가 되면 고구려 태왕을 돕겠나이다.”
이에 의자가 만족해 껄껄 웃었다.
“친위 정변에 그대보다 능한 이는 없을 터이니, 이는 고구려 태왕의 복일 걸세.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