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오해와 진실 (4)
태왕의 부름에 개소문이 당당한 걸음으로 앞으로 나오니, 오부 귀족들이 경계하며 웅성거렸다.
“어려서부터 잔악한 놈이 저리도 성장했으니, 장차 화근이 될 게야.”
“오죽하면 온달이 내뺐겠는가?”
“소문에 의하면 저놈이 수의 황제 양광을 섬겼다지?”
“양광의 환관이었다는 소문도 있고, 근위장이었다는 소문도 있더만 사실인가?”
이들의 웅성거림을 개소문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오해와 질시에 익숙한 개소문은 결코 불쾌한 기색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이런 개소문의 담대한 태도에 오히려 오부 귀족들이 더욱 두려워하였다.
“저놈의 태도가 보통이 아니로군.”
“어린놈이 여간내기가 아니야. 이대로 두면 장차 우리 목을 원할 게야.”
이에, 듣다 못한 강이식이 호랑이 눈으로 오부 귀족들을 노려보니, 그제야 웅성거림이 멈췄다.
“네가 막리지 연태조의 장자 개소문이더냐?”
태왕 건무가 자신의 앞에 선 개소문에게 물었다.
“연개소문이옵니다.”
개소문이 절을 올려 예를 표한 후 답하니, 태왕 건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대 태왕께서 명하시길, 막리지 연태조의 장자가 성인이 되면 막리지의 직위를 승계토록 하라셨느니라. 허나, 너는 아직 어리고 경험이 일천하니, 이에, 내가 네게 서부 누살의 직책을 내려 천리장성 보수 공사 중책을 맡기겠노라. 너는 성심을 다해 맡은 바 임무를 완수토록 하라.”
“명을 받사옵니다.”
개소문이 다시 예를 올려 명을 받으니, 태왕 건무가 냉랭한 표정으로 손짓하며 명하였다.
“물러나 요동으로 떠날 채비를 하거라.”
개소문이 절을 올리고 대전 밖으로 물러나니, 강이식도 뒤따라 나와 개소문의 어깨를 다독였다.
“폐하께선 선대 태왕의 명을 어길 분이 아니시네. 경험을 쌓고 중책을 완수하면 반드시 막리지에 오를 수 있을 것이네.”
강이식은 개소문과 함께 요동성을 지키며 사람됨을 알고 있기에, 개소문이 막리지에 오르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저와 약조하신 것도 아니고, 제 선친과 약조하신 것도 아니옵니다. 더구나 선대 태왕의 약속이시니, 태왕 폐하께옵서 지키시지 않아도 탓할 이유가 없나이다.”
개소문이 이처럼 막리지에 오르지 않아도 탓하지 않겠다고 말하니, 강이식이 허허 웃었다.
“자네가 탓하고 탓하지 않는다고 하여 마무리될 일이 아니네. 오부 귀족과 대소 신료들은 물론, 고구려의 만백성들은 장차 자네가 막리지에 오를 거라 여기고 있네. 자네가 막리지에 오르지 못한다면 선대 태왕의 명을 어기는 것이니, 이는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 아니라네.”
강이식의 말처럼 개소문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개소문이 죽지 않는 한, 선대 태왕의 명은 반드시 지켜져야 했으니 어찌 보면, 개소문에겐 불행일지도 몰랐다.
“궁에는 허언이란 없는 법이네. 지키지 못할 명분이 없는 한, 반드시 지켜져야 할 명이니, 운명이라 생각하시게.”
“제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군요. 소인이 궐과 격식에 무지하여 함부로 말하였습니다. 용서하소서.”
“아닐세. 먼 길 떠나야 하니, 어서 집으로 가서 채비하시게. 세월이 걸릴 일이나, 반드시 완수하고 돌아와 막리지에 올라 태왕 폐하를 도우시게나.”
강이식이 거듭 격려하며 태왕 건무를 도우라 말하니, 개소문이 담담히 고개 숙여 말을 대신하였다.
강이식과 헤어져 궐 밖으로 나오니, 성충이 홀로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찌 된 일인가? 설마 백제의 사신이 홀로 우리 고구려까지 왔단 말인가?’
개소문의 시선을 의식한 듯 성충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눈빛이 맑고 광채가 흘러 매우 총명스러워 보였다.
“그대가 연태조의 장자 연개소문이시오?”
성충이 불쑥 물으니, 개소문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 답하였다.
“나는 부여성충이라 하오.”
“대전에서 뵙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개소문이 공손히 답하니, 성충이 다가와 불쑥 손을 잡았다.
“백만대군 속에서 관풍행전을 불태웠다고 들었소이다. 그래, 그 공으로 어떤 관직을 얻으셨소이까?”
총명한 성충이라면 고구려 사정을 빤히 알고 있을 터인데도 이처럼 물으니, 개소문은 그저 허허 웃을 따름이었다.
이에, 성충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어찌 답 대신 웃으시는 게요?”
“대단한 공도 아닌데, 너무 치켜세우시니 몸 둘 바를 몰라 웃었습니다. 하하하.”
개소문이 겸손히 답하니, 성충이 빙그레 웃었다.
“용맹하시고, 담대하시며, 겸손까지 하시니, 실로 고구려의 재상감이십니다. 하하하.”
막리지에 오르지 못한 자신을 놀리는 듯하진 않아 개소문도 따라 웃었다.
“하하하. 재상감이라니, 말씀만으로도 과하옵니다. 하하하.”
이에, 성충이 웃음을 멈추고는 소리 낮춰 말하였다.
“서부 누살에 올라 천리장성 보수 공사 중책을 맡으셨다 들었습니다.”
“하여, 떠날 채비를 하기 위하여 집으로 가던 길이었지요.”
개소문이 은근 바쁘니 그만 가야겠다는 뜻을 보였다.
“바쁘시군요. 그렇다면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괜찮으시온지요?”
“말씀하십시오.”
“요동에 가서 스무 개가 넘는 산성들의 성벽을 보수하자면, 한 해에 한 곳씩 하여도 이십 년이 걸릴 것입니다.”
“…….”
개소문이 내심 불쾌하여 입을 꾹 다물었으나, 성충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부디, 공을 나누고 중책과 직책도 나누십시오. 요동의 성주, 장수들과 화합하고, 요동의 백성들을 품어 따르게 하소서. 하여.”
“하여?”
“배정된 군사들로만 천리장성 보수 공사를 하시지 않고, 함께 도모하여 보수토록 하십시오. 하면, 길어도 삼 년, 짧으면 일 년 내로 마무리될 것입니다.”
“…….”
“성벽 보수 공사가 속히 완료되기를 바라는 이는 그 누구보다, 요동 일대의 성주들과 장수들 그리고 백성들이오니, 그들의 협조를 얻는 것은 쉬울 것입니다.”
“내게 어찌 그런 조언을 하시는 게요? 그대의 의도가 무엇이오?”
개소문이 의심하며 물으니, 성충이 빙그레 웃으며 답하였다.
“백제는 담장이요. 고구려는 지붕입니다. 고구려의 북방이 안정되어야, 백제 역시 남서 방면을 도모할 수 있으니, 두 나라가 힘을 합쳐 삼한의 평화를 이루도록 하고자 함이지요.”
듣고 보니 실로 옳은 말이었다.
“내가 성충 공의 뜻을 의심하고 오해했습니다. 공연한 경계였으니, 용서하십시오.”
개소문이 정중히 사과하니, 성충이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외인의 조언은 경계함이 옳습니다. 당연한 의심이오니, 개의치 마십시오. 저 또한 백제를 위하여 공에게 조언한 것이니, 한편으로는 이득을 얻고자 함이었지요. 하하하.”
성충이 참으로 솔직한 사람이라 여긴 개소문은 내심 호감이 생겼다.
“헌데, 성충 공께선 어찌 혼자 고구려에 오셨습니까? 일행은 없으신지요?”
“혼자 와야 할 일이기에, 혼자 왔습니다. 이런 일은 군사들을 이끌고 와 태왕께 아뢸 일이 아니지요. 하하하.”
“그렇다고 해도 수행원조차 없다니, 가시는 길이 험하고 멀 터인데, 제가 따로 수행원을 붙여드리겠습니다.”
개소문이 호의를 담아 말하였으나, 성충은 웃는 얼굴로 정중히 사양하였다.
“공의 호의 마음 깊이 담고 돌아가겠나이다. 혼자가 편하니, 심려치 마십시오.”
개소문에게 정중히 인사를 건넨 성충이 몸을 돌려 발을 옮겼다.
“허허, 그 먼 길을 혼자 간다니… 가는 길에 비적 떼라도 만나면 어찌하려고.”
개소문이 근심을 담아 말하니, 그의 등 뒤에서 고운 목소리가 화답하였다.
“공자께옵선 심려치 않아도 되시옵니다.”
이에, 개소문이 놀라 돌아보니, 공손향이 환한 미소를 담아 바라보고 있었다.
“어찌 나오신 게요?”
“입궐하신 공자를 기다리다 지쳐 나왔지요. 헌데, 저자는 부여성충이옵지요?”
“그렇소.”
“그렇다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되십니다.”
“어찌 그렇소?”
“이 고구려 땅에서 태왕을 알현하고자 찾아온 부여 씨를 그 누가 해치겠나이까? 더구나, 비적 떼라면 그가 이름만 대어도 벌벌 떨며 피할 것이오며, 백제 땅에선 모두가 그를 왕보다 존경하니, 괜한 근심이옵니다.”
개소문이 들어보니, 옳은 말이었다.
“허허, 그렇군. 헌데, 그대는 어찌 그리도 우리 고구려와 백제에 대해 잘 아는 게요?”
“우문도웅을 도울 때, 정탐하고, 염탐하여 정보를 취합하는 일을 하였지요. 삼한 그 누구 못지않게 정보를 지니고 있사오니, 저를 중히 여기셔야 하옵니다. 호호호.”
공손향이 은근 자랑하며 웃으니, 그 모습이 무척이나 매혹적이었다.
그러나 공손향의 아름다운 자태에도 개소문은 그저 담담할 따름이었다.
“일가처럼 여기며 항상 중히 생각하니, 염려하지 마시오. 더구나 나보다 십여 살 위이니, 어찌 내가 함부로 대하겠소.”
“호호호, 여인의 나이는 그저 수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나이를 잊고 산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공자도 저의 나이는 잊으소서.”
“그게 잊으란다고 잊어지는 게요?”
“그럼 마음대로 하시옵고, 입궐하여 알현하신 일은 어찌 되셨는지요?”
“서부 누살에 임명되었소이다.”
“역시, 막리지가 아니군요.”
공손향이 고개를 끄덕이니, 개소문이 은근 자존심이 상하여 말하였다.
“천리장성을 보수하는 중책을 맡은 서부 누살이오. 막리지 못지않은 책무이며, 나랏일에 지위 고하가 어디 있소.”
“아니옵니다. 지위 고하는 있습니다. 아무튼 천리장성이라니, 참으로 신선하군요. 그래, 요동의 산들에 성벽이라도 쌓겠단 말인가요?”
“그건 아니고… 기존 요동의 이십여 성을 보수하는 일이오.”
“그럼 개별 성들 보수인데 어찌 천리장성이라 한 건가요?”
“그건 나도 모르겠소.”
“본래, 성벽 보수 공사는 개별 성의 군사와 백성들이 맡아 진행하면 길어도 삼 년, 짧으면 일 년에 끝날 일인데, 어찌하여 책임자를 임명하고 따로 군사를 내어주어 담당케 하는지요?”
“…….”
“이것은 아마도 십여 년간 공자를 요동에 묶어 두고자 함이 분명합니다.”
“…….”
“수락하셨습니까?”
“그럼, 태왕의 명을 대전에서 거역하란 말이오?”
“수락하셨군요.”
“그렇소.”
이에, 공손향이 한숨을 내쉬며 말하였다.
“집으로 돌아가 다 함께 논의해야 할 듯합니다. 이대로 십여 년간 요동에서 성벽 보수만 해선 아니 되옵니다.”
“태왕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소. 걱정하지 마시오. 길어도 삼 년 내로 보수 공사를 완료하고 평양성으로 돌아올 터이니… 내 장담하오.”
평소 실없이 장담하지 않는 개소문이었기에, 공손향이 놀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에 개소문이 싱긋 웃으며 말하였다.
“조금 전 만난 부여 씨가 내게 조언을 하더이다. 하여, 내 그 뜻을 따라 삼 년 내로 보수 공사를 완료하고 평양성에 돌아올 계획이오.”
“어떤 계획이옵니까?”
공손향의 물음에 개소문은 성충의 조언을 들려주었다.
가만히 듣던 공손향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동 일대의 성주들과 장수들 그리고 백성들의 마음을 얻어 모두 함께 보수 공사를 한다면 삼 년이 아니라 일 년 내로 끝날 일입니다. 헌데, 어찌 그 마음을 얻으시려 하나이까?”
“그건 진정을 담아 말하면 가능할 것이오.”
“진정을 담는다고 가능하겠나이까?”
“실은 성충이 말하길, 성벽 보수 공사를 원하는 이는 그 누구보다 요동 일대의 성주들과 장수들 그리고 백성들이라 하였소. 그러니, 그들의 호응을 얻기 쉬울 것이오.”
이에, 공손향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군요. 무너진 성벽을 바라보며 불안해하느니, 하루라도 빨리 보수하고 싶겠군요. 과연 공을 나누면 호응을 얻을 수 있겠습니다. 헌데…….”
“헌데? 무엇이오?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소?”
“명칭이 걸립니다.”
“명칭이라면?”
“천리장성이란 명칭이 마음에 걸립니다.”
“괘념치 마시오. 그저 명칭일 뿐이오.”
개소문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였으나, 총명한 공손향은 여전히 불안하였다.
‘세상에 괜한 명칭은 없는 법이다. 필경, 이 명칭 속에 꿍꿍이가 있을 게야.’
“뭘 그리 생각하시오?”
개소문이 골똘히 생각하는 공손향에게 물었다.
“아니옵니다. 어찌 되었든 지금은 공자를 도와 하루속히 보수 공사를 마치고 평양성으로 돌아오는 것이 중하지, 제 생각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공손향의 대답에 개소문이 껄껄 웃으며 말하였다.
“하하하. 뭐 그럽시다. 일단 돌아가 요동으로 향할 채비부터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