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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검귀-247화 (247/328)

247화 오해와 진실 (3)

개소문이 성충을 눈여겨 살펴보니 키가 훤칠하고 얼굴에서 빛이 나 매우 비범해 보였다.

나이는 고작 스물 중반으로 보였으나, 좌평의 신분으로 백제 왕의 사신이 되어 고구려에 왔으니, 범상치 않은 재주를 지녔음이 분명했다.

대전에 들어선 개소문이 조용이 구석에 자리해 서자, 태왕이 잠시 개소문에게 시선을 두더니, 성충에게 물었다.

“그대가 지혜로는 그 누구보다 윗선이라는 부여성충(扶餘成忠)인가?”

부여 씨는 백제의 왕성으로 성충은 백제의 왕족이었다.

* * *

성충은 어려서부터 지혜롭기로 유명하였는데, 신라가 그의 고향을 침략한 일이 있었다.

어린 성충이 직접 사람들을 이끌고 산에 올라 적을 맞아 싸우며 버티자, 그의 기묘한 계책으로 신라가 번번이 패하였다.

이때, 신라의 총사령관은 각간 김서현이었다.

김서현도 지모로는 누구보다 뛰어나다 자신하는 인물이었기에, 지혜로 성충을 누르고자 했다.

김서현은 화려한 궤를 마련하여 성충에게 보냈다.

“이것이 무엇이오?”

어린 성충이 물으니, 김서현의 사자가 답하였다.

“각간 김서현 공께서 보내신 것이옵니다.”

“누가 보냈는지 묻는 게 아니라 무엇이냐 물었소이다.”

“각간 김서현 공께서 이르시길, ‘그대가 비록 어리다 하나 나라를 위한 충절은 그 누구보다 뛰어나며, 지모 또한 출중하니 어찌 그대를 흠모하지 않으리오. 내 그대에게 약간의 음식을 올리니, 사양치 말고 받기 바라오.’라 하시었나이다.”

“음식?”

“그렇사옵니다. 비록 적으로 만났으나, 각간 김서현 공께서는 그대와 사람들을 위로하고자 하십니다.”

이에 성충이 고개를 끄덕이며 매우 기뻐하였다.

“천하의 위명이 자자한 각간 김서현 공께서 내게 선물을 보내시니 어찌 마다하겠소. 잘 받았다 전하시오.”

사자가 허리 숙여 예를 표한 후 떠나니, 사람들이 기뻐 궤를 열려고 하였다.

“열면 아니 되오.”

“열지 않으면 궤 속에서 음식을 어찌 꺼내옵니까?”

사람들이 의아해 물으니, 성충이 즉시 명을 내렸다.

“장작을 쌓아 불을 피우고, 저 궤를 불 속에 던지시오!”

이에 사람들이 놀라 어리둥절하였으나, 성충의 명을 따라 불을 피우고 궤를 불 속에 던졌다.

궤가 불에 타자, 그 속에서 벌과 뱀 등이 튀어 나왔으나 모두 불에 타 죽고 말았다.

각간 김서현은 산 위에 불이 피어오르는 광경에 눈살을 찌푸렸다.

다음 날 다시 사자를 보내 성충에게 궤를 선물하였다.

“또 오셨소?”

“각간 김서현 공께서 이르시길,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 듯하여 다시 보내니 부디 약소하다 사양치 마시라’ 하시었습니다.”

“약소하다니요. 아주 잘 구워 먹었습니다. 이 궤 역시 잘 받을 터이니, 각간 김서현 공께 고맙다 전하시구려.”

사자가 예를 올리고 떠나니, 성충이 빙그레 웃었다.

이에 사람들이 몰려와 욕설을 내뱉으며 불을 피워 궤를 불 속에 던지려 했다.

“아니 되오!”

“궤 속에서 벌과 뱀이 나올 것입니다. 태워야 합니다.”

“아니오. 그냥 여기서 열도록 하시오.”

이에 사람들이 당황하였으나, 성충의 명에 따라 조심스럽게 궤를 열었다.

그러자, 궤 속에서 화약과 염초가 가득 나왔다.

각간 김서현은 산 위에서 불길이 솟지 않으니, 눈썹을 꿈틀거리며 화를 삭여야 했다.

다음 날 각간 김서현이 다시 사자를 보내어 성충에게 궤를 선물하였다.

“자주 오시는구려.”

“송구하옵니다.”

“송구까지야… 그래 이번에도 김서현 공의 선물이오?”

“그렇습니다.”

“잘 받았다 전하시구려.”

사자가 두려워 서둘러 떠나니, 사람들이 모여들며 궤를 열고자 했다.

이에 성충이 소리쳐 명하였다.

“열지 마시오!”

“화약과 염초가 들어 있을 것입니다. 불 속에 던져선 아니 되옵니다.”

“하하하, 불 속에도 던지지 마시고. 톱으로 궤를 썰도록 하시오.”

사람들이 의아해 했으나, 명에 따라 커다란 톱으로 궤를 썰기 시작하였다.

단단한 궤가 썰리자, 그 속에서 사람의 비명이 울리고 피가 흘러나왔다.

사람들이 놀랍고도 두려워 성충을 바라보니, 성충이 웃으며 손짓해 명하였다.

“계속 하시오.”

성충의 명에 따라 궤를 마저 썰어 가르니, 몸이 잘린 장수가 칼을 쥔 채 죽어 있었다.

화약과 염초라 생각하여 열었다면, 궤 속에서 대기하던 장수가 튀어나와 성충의 목을 바로 베었을 것이다.

다음 날, 각간 김서현은 자신의 지모가 성충보다 못함을 알고 군을 물렸다.

이 일로 성충의 지혜는 백제와 신라는 물론, 고구려까지 전해졌다.

* * *

태왕의 물음에 성충이 머리를 숙여 답하였다.

“그 누구보다 뛰어나지는 않으나, 각간 김서현보다는 윗선이라 자부하나이다.”

이에, 태왕이 껄껄 웃었다.

“대단한 자부심이로다. 그래, 우리 고구려에는 어인 일로 왔는가?”

“우리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하여 당에 맞서고, 신라를 벌하고자 왔나이다.”

성충의 거침없는 답변에 태왕 건무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무, 무엇이라?”

“고구려의 기상은 이제 갓 나라를 세운 당을 누르오며, 우리 백제 역시 근초고왕 이래로 최대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나이다. 하여, 두 나라가 화합하여 서로 힘을 모아 신라를 벌하고, 당에 맞서고자 하옵기를 청하나이다.”

성충의 당당한 태도에 대소 신료들이 웅성거렸고, 태왕 건무의 안색은 점점 하얗게 질려만 갔다.

이에, 대장군 강이식이 껄껄 웃으며 말하였다.

“기상이 가상하오. 함께 당에 맞서고, 신라를 벌한다면 신라는 어찌 나눌 생각이시오?”

“신라의 북동 방면은 고구려가 남서 방면은 우리 백제가 취함이 옳다 여깁니다.”

타당하다 여긴 강이식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태왕 건무를 바라보았다.

“전쟁을 원하는가?”

건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숱한 전장에서 그 용맹을 떨친 기상은 온데간데없고 나약한 모습을 보이니, 성충은 그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 정중히 고개를 숙여 답하였다.

“전쟁은 피할 수 없나이다. 하여, 우리가 연합해 먼저 공세를 취하여야 하나이다.”

“어찌… 어찌 전쟁을 피할 수 없다 여기는가?”

건무가 두려워 말까지 더듬으며 물으니, 강이식은 부끄러워 눈을 감았고 성충은 고개를 숙여 답하였다.

“예로부터 중원의 국가 중국은 혼란을 정돈하여 새로 나라를 세우면, 반드시 삼한의 북방을 침범하였나이다. 또한 신라는 중원의 국가와 거리가 멀다 하여 서로 돕고자 했으니, 반드시 당과 연합할 것이옵니다. 하여.”

“하여?”

“이 두 세력에 맞서 싸우지 않고서는 우리 백제와 고구려의 장래는 밝지 않다 할 것입니다. 이에, 당이 혼란을 정돈하여 힘을 키우기 전, 신라를 벌하고 향후 닥쳐올 당과의 전쟁에 대비하여야 하나이다.”

이에 태왕 건무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대의 백제는 무왕의 장자인 부여의자가 왕이 되었다지?”

태왕 건무가 자신이 섬기는 왕을 하대하여 부름에도 성충은 결코 노기를 띄우지 않고 담담히 답하였다.

“그렇사옵니다.”

“의자란 이름은 의롭고 자애롭다는 뜻일 터인데, 어찌 전쟁을 즐긴단 말인가? 해동증자라 불린 만큼 효와 의가 뛰어난 인물이 이토록 투지가 강할 줄은 몰랐구나. 더구나 의자의 모후께선 신라의 선화 공주 아니더냐? 일가 싸움에 우리 고구려를 끌어들이고자 하는 것이더냐?”

태왕 건무의 말 속에 조롱기마저 담겨 있으니, 강이식이 불편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성충은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담담히 말하였다.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누지 않는다고 하옵니다. 일가라 하오나 왕래가 없으니, 남보다 못한 사이오며, 신라를 벌해 남서 방면을 다스린다고 하여도 신라 왕족의 피가 흐르니, 정당하지 못하다 탓할 수 없습니다.”

“…….”

“신라와 당이 서로 호응해 힘을 키우기 전에 우리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하지 못한다면 향후 통탄을 금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성충의 당당한 태도에 건무가 다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강이식이 답답함을 참지 못하여 앞으로 나서 말하려 하니, 그제야 건무가 눈을 뜨고 손을 들어 강이식을 제지하였다.

“대장군은 잠시 기다리라.”

강이식이 다시 자리로 돌아가자, 건무가 성충에게 시선을 옮겨 말하였다.

“우리 대고구려와 너희 백제의 연합은 일견 타당하다. 너는 돌아가 너의 왕 의자에게 전하거라. 연합은 성사되었고, 우리 고구려는 북방을 단단히 방비할 터이니, 너희는 신라를 벌하여 세를 넓히라.”

생각보다 쉽게 고구려와 백제의 연합이 성사되었다.

성충이 기뻐하며 허리 숙여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이에, 북장원이 노기를 드러내며 태왕 건무에게 소리쳐 물었다.

“폐하! 우리 고구려는 백제를 도와 신라를 벌할 여력이 없사옵니다. 또한 당과 대립하여 좋은 일보다 나쁜 일만 가득할 터인데 어찌하여 연합을 허락하시었나이까?”

“허락하지 않으면, 백제를 적으로 돌릴 생각이시오?”

건무가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며 이렇듯 물으니, 북장원이 답하지 못하였다.

이에 언제나처럼 사선종유도 언성을 높이며 태왕 건무에게 항의하였다.

“폐하! 당은 대국입니다. 우리 고구려가 대국인 수의 뜻을 따르지 않아, 네 차례나 전쟁을 치르고 만백성들이 아직까지 고초를 겪고 있나이다. 하온데, 어찌하여 아직 대립할 기미조차 없는 당을 적으로 돌리시려 하나이까?”

“나는 당을 적으로 돌리지 않을 것이오.”

“하오면?”

“신라도 적으로 삼지 않고, 백제와도 불화를 일으키고 싶지 않소.”

“…….”

“나는 선대 태왕이신 영양태왕과 선친이신 평원태왕께옵서 친히 군을 이끌고 강적을 물리치셨듯 적과 맞서 싸워 이길 자신이 없소. 숱한 전쟁으로 우리 고구려는 피폐하고, 백성들은 괴로워하며, 나 또한 지쳤소.”

“폐… 폐하…….”

사선종유가 오히려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으나, 태왕 건무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나는 평화를 원하오. 화친을 원하오. 여러 전쟁에서 우리 고구려가 승리를 거두고 중원의 국가가 새로 바뀐들 변함없이 전쟁이 계속된다면, 언제까지 승리가 이어질지 자신할 수도 없소. 나는 이 전쟁의 시대를 종식하고 싶소.”

“폐하…….”

“그대들 오부 귀족들과 대소 신료들은 항상 강화를 원하였고, 화친을 요구하였소. 나는 그대들과 뜻이 같으니, 의심치 말고 나를 믿고 따라 주기 바라오. 백제와 연합으로 백제가 신라를 벌한다고 하여도, 우리 고구려는 화친을 고수할 것이오.”

오부 귀족들과 대소 신료들은 모두 안도하여 기쁜 기색을 내비쳤고, 무장들은 참담하여 고개를 떨궜다.

“폐하!”

태왕 건무의 나약한 태도에 강이식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대장군, 나는 그대를 선대 태왕이신 형님처럼 믿고 의지하오. 대장군, 나는 전쟁이 두렵고 평화를 갈구하오.”

수의 침공을 막아낸 선대 태왕은 끝내 심신이 지쳐 세상을 떠났고, 전장에선 용맹한 건무였으나, 궐에선 수심 가득하고 나약했으니, 강이식은 비통해 눈을 질끈 감았다.

“대장군, 부디 내게 힘을 주시고 믿어 주시오. 내 진정으로 평화를 이끌어 내겠소. 우리 고구려 만백성들이 기뻐 마음 편히 밭을 일굴 수 있도록 태평성대를 만들어 내겠소.”

애원하듯 말하는 태왕을 바라보며 강이식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폐하, 소장은 폐하를 지키고, 이 고구려를 지킬 터이니, 믿어 의심치 마시옵소서. 하오나, 폐하. 평화는 힘에서 나오나이다. 우리 고구려가 평화를 요구하면, 당은 얕잡아 보고 평화에 대한 보답을 요구할 것입니다.”

“평화를 얻는다면, 보답은 당연한 일이오.”

태왕이 이처럼 답하니, 강이식은 눈을 감고 입을 닫았다.

이에, 태왕이 한숨을 내쉬고는 시선을 개소문에게로 돌렸다.

“개소문은 앞으로 나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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