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오해와 진실 (2)
[온달, 나의 벗이며 아우여.
이 서신이 그대에게 전해졌을 땐, 나는 한 줌 재가 되어 홍산에 뿌려졌을 것이네.
나의 죽음은 적봉진 내에서도 비밀로 하라 우랑에게 말하였네.
그러나, 사람이란 보고 듣지 않아도 눈치로 예상을 할 수 있기에, 적봉진의 군사는 결코 평양성으로 부르지 말게나.
태왕 폐하께 적봉진으로 향하겠다고 말하기 전, 천문을 살피니 폐하와 나의 별이 빛을 잃고 있었다네.
아마도 올해를 넘기기 전, 국상이 있을 것이네.
그때는 개소문이도 평양성에 들어서게 되겠지.
나는 그 아이가 요동성에서 강이식 대장군을 도와 남기를 간절히 바랐었네.
허나, 세상에 내가 없으니, 내 뜻을 고집할 수도 없겠구먼.
개소문이는 성정이 강직하고 의가 깊어 자네와 무척이나 닮은 아이였네.
허나, 내가 파악한 바와 그 아이에게서 느껴지는 기로 장차 역성이 의심되었네.
하여, 그 아이를 평양성 내에 두지 않기 위해 애썼으나, 돌이켜 생각해 보니, 부질없는 일이었네.
온달, 충직하고 의로운 벗이여, 아우여.
부디, 나의 죽음을 개소문이가 알지 못하도록 하시게.
내 비록 생전 재주는 보잘것없으나, 나의 죽음은 외적뿐만 아니라 내적도 일어서게 할 수 있으니, 개소문이와 오부 귀족은 결코 알아선 아니 되네.
만일 나의 죽음이 알려지게 될 경우, 역성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
그땐 자네가 부디 난을 제압하고 우리 고구려를 지켜주시게.
온달 자네에게 짐을 남기어 송구한 마음일세.
온달 그대는 부디 평양성 내에 남지 말고, 거리를 두고 머물며 살피고 경계하시게.
내가 적봉진에 남고, 그대가 안시성에 있다 여기면 내적들은 결코 함부로 준동하지 못할 것일세.
내 죽어서도 그대를 믿고, 의지함을 상기하시게.]
을지문덕의 서신을 다 읽은 평강이 멍하니 온달을 바라보았다.
이에, 온달이 평강의 머리를 손으로 감싸며 말하였다.
“공주도 안시성을 말하고, 을지문덕 공께서도 안시성을 추천하셨으니, 내 어찌 마다하겠소.”
“장군… 혹시, 이 서신 때문에 개소문에게 선친의 원한을 갚으러 오라 말씀하신 것이온지요?”
자신의 물음에 온달이 답하지 못하니, 평강이 온달의 속내를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라도 빨리 안시성으로 가시지요. 역성은 아직 벌어지지 않았으니, 미리 벌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안시성에서 대비하시지요.”
결국 또 한 번의 안시성행이 결정되었다.
* * *
“파천신검 비급은 돌려주셨나이까?”
공손향의 물음에 개소문이 짧게 고개를 끄덕여 답하였다.
“허면, 온달이 뭐라 말하던가요? 고생했다. 고맙다 하던가요?”
“파천신검 비급을 불에 태우고, 내겐 더 이상 파천신검 초식을 사용하지 말라 하시더군.”
이에 공손향이 눈살을 찌푸렸다.
“공자, 하오면 선친의 죽음에 대하여도 물어보셨나이까?”
“맞다 하시더군. 자신의 잘못이니, 책망하고 싶으면 찾아오라 하시더군.”
“어찌하여 오옥이란 의관을 데려갔는지, 연유를 물어보셨나이까?”
“물어볼 겨를도 없었네. 온달 장군께서 모든 잘못을 인정하고 자신을 책망하라 하셨는데, 무엇을 더 물어보겠는가?”
“하오면, 공자께선 어찌하실 생각이옵니까?”
“온달 장군을 책망한들 선친께서 살아 돌아오시는 것도 아니고, 선친의 원한을 갚고자 온달 장군을 해칠 수도 없네. 또한 나 따위에게 선선히 당할 분도 아니시고. 필경 온달 장군도 사정이 있으셨겠지. 이 일은 덮겠네.”
개소문이가 너무도 당연하게 답하니, 그제야 공손향이 안심해 미소 지었다.
“공자께서 이처럼 생각이 깊으시니, 고구려의 복이옵니다. 온달과 공자 모두 고구려의 영웅이니, 서로 다툼이 없도록 하심이 옳사옵니다. 참으로 현명하신 판단이십니다.”
공손향이 이처럼 개소문을 칭찬하였으나, 개소문의 표정은 어둡기만 하였다.
“공자, 안색이 어둡습니다. 마음이 불편하시온지요?”
“오늘 나를 대하던 온달 장군과 온동이 너무도 냉정하여 마음이 조금 불편했소. 온달 장군께선 정이 깊은 분이셨고, 온동은 나를 친형처럼 따랐건만, 어찌… 나를 냉대하는지… 마음이 무겁고 불편하오.”
“죄를 지은 사람은 본래, 자신이 피해준 사람을 편히 대하지 못하는 법이지요. 세상 이치랍니다.”
“나는 온달 장군의 성정을 알고 있기에 그분께 결코 죄를 묻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애석하고 안타까울 따름이오.”
개소문은 선친의 죽음이 온달과 관련 있다고 하여도, 온달의 성정상, 의도하지 않았을 것이라 여겨 더는 옳고 그름을 따져 진의를 밝힐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개소문의 생각과 달리, 아무 관련 없는 이들의 오해가 개소문을 괴롭히기 시작하였다.
온달이 국상도 끝나기 전에 안시성으로 떠나니, 오부 귀족을 비롯한 대소 신료들은 궐에서 온달과 개소문의 만남을 두고 억측을 하였다.
“성정이 사나운 개소문이 두려워 그 순한 온달이 몸을 피한 게야.”
“개소문은 이리와 같은 놈이라, 제아무리 범과 같은 온달도 피할 수밖에 없구먼.”
“저런 야수와 같은 개소문이 막리지에 오르면 필경 그간의 수모를 되갚으려고 할 터이니, 반드시 막아야 할 것이야.”
모든 억측의 중심에 북장원이 있었고, 그 곁을 명림신과 대건상이 지켰으니, 개소문이 막리지에 오르는 길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또한 태제이자 태자인 건무도 온달이 개소문 때문에 도망치듯 안시성으로 몸을 피했다 여겨 개소문을 미워하기 시작하였다.
“온달의 심성으로는 결코 일부러 연태조를 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소문이 선친의 죽음을 온달의 탓으로 돌리니, 모질지 못한 온달이 몸을 피한 게야. 개소문… 어리디어린 놈이 무척이나 사납구나. 이를 어찌할꼬.”
* * *
국상을 마치자, 고건무의 태왕 즉위식이 진행되었으나, 이보다 먼저 비보가 건무에게 전해졌다.
고구려의 또 다른 별, 동금호의 죽음이었다.
장인이자, 충성스런 신하로 태왕이 될 자신이 믿고 의지할 인물이 세상을 떠나니, 건무는 슬프고 매우 두려웠다.
전장에선 용맹스러운 장수였으나, 궐에선 늘 수심 가득한 건무였으니, 태왕에 오른들 기쁘지 않았다.
즉위식은 간소하게 진행되었으며, 태왕에 오른 건무는 자신이 믿고 의지할 이를 곁에 두고자 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이 대장군 강이식이었고, 종리소형 동정찬이었다.
그러나 강이식은 요동을 지켜야 했고, 동정찬은 지위가 낮았다.
하여, 건무는 강이식을 막리지에, 동금호를 대신하여 동정찬을 조의두대형에 앉히고자 했다.
그러나, 오부 귀족들과 대소 신료들의 반발이 거셌다.
“폐하, 대장군은 요동을 지켜야 하옵니다.”
북장원이 나서 말하니, 사선종유도 거들었다.
“폐하, 종리소형의 동정찬을 조의두대형으로 올릴 수는 없사옵니다. 승찬도 단계가 있는 법이오며, 외척을 이리 급하게 중용하시오면 필히 화를 불러오게 되옵나이다.”
은연중 협박까지 하니, 건무의 얼굴에 노기가 번졌다.
이에, 대장군 강이식이 허허 웃으며 북장원에게 말하였다.
“소장이 요동을 지킴은 옳은 말씀이시오. 허나, 소장이 일신상 문제로 평양성에 잠시 머무르게 되었으니, 종리위두대형께선 해량해 주시기 바라오.”
이제 막 태왕에 오른 건무를 두고 요동으로 떠날 수 없어 강이식이 이처럼 말하니, 북장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건무는 천군만마를 얻은 듯 기뻐 얼굴이 밝아졌다.
“대장군이 일신상의 문제가 있었구려. 부디 잘 해결하길 바라오. 내 명하건데, 막리지가 정해질 때까지는 평양성에 남도록 하시오.”
“명을 받들겠나이다. 소장, 옳은 이가 막리지로 정해지면 그때, 요동성으로 향하도록 하겠나이다.”
일부러 강이식이 힘주어 답하니, 오부 귀족들과 대소 신료들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이때 사선종유가 한발 앞으로 나와 냉소를 담아 강이식에게 물었다.
“옳은 이라면, 염두에 둔 이가 있소?”
“태대사자는 잊으시었소? 선대 태왕께서, 연태조의 장자에게 막리지를 승계토록 하라 명하셨으니, 개소문이가 가장 옳은 인물이라 생각하오만 태대사자께선 어찌 생각하시오?”
“아니, 이보시오! 대장군은 대고구려의 막리지가 고작 스물이 된 애송이에게 어울린다 생각하시는 게요?”
사선종유가 언성을 높여 물으니, 강이식이 껄껄 웃었다.
“선대 태왕의 명을 거역하시겠다는 말이시오? 참으로 담대하시구려. 하하하.”
역심을 품지 않고서야, 선대 태왕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선종유가 얼굴을 붉히고 물러나자, 강이식이 태왕 건무에게 아뢰웠다.
“이미 선대 태왕께옵서 명하신 인물이 평양성 내에 있사오니, 폐하께선 심려치 마시옵소서.”
그러나 건무는 강이식을 믿고 의지하여도 개소문을 막리지에 앉히고 싶지 않았다.
잠시 침묵을 지킨 건무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대장군의 말은 옳으나, 개소문은 아직 어리니 대고구려의 재상인 막리지를 감당하기 어려울 듯하구려.”
이에, 북장원과 사선종유의 얼굴에 웃음이 활짝 피었다.
북장원이 웃는 얼굴로 나와 태왕에게 말하였다.
“폐하, 개소문이는 아직 어리고 경험이 일천하니 장차 경험을 쌓은 뒤 중용토록 하시옵소서.”
이에, 기다렸다는 듯 명림신이 앞으로 나와 아뢰었다.
“지난 수와의 전쟁으로 요동 일대 성들의 보수가 필요한 실정이옵나이다. 요동성을 중심으로 동과 서로 천 리에 이르는 이들 성들을 천리장성이라 명하시어, 보수 공사 책임을 개소문에게 맡기심이 어떠시온지요?”
요동성을 중심으로 동과 서의 산성들은 모두 이십여 개나 되었고, 이들 성들을 보수하자면 족히 십여 년의 세월이 요구되었다.
명림신의 이 제안은 개소문을 요동 일대 성들 보수 공사에 묶어두겠다는 의미였다.
“천리장성? 아니, 이보시오 종리대형. 만리장성은 만 리에 이르는 성벽을 일컫는 말이나, 요동의 우리 성들은 이런 장성들이 아니오.”
“…….”
“각기 개별적인 성들이고, 보수 공사는 각 성에서 맡아서 하면 일, 이 년 안에 마무리되는 일이오. 그걸 한 사람의 책임자를 두어 진행하면 숱한 세월이 걸림을 아시오?”
“…….”
“그대는 어찌 천리장성이란 그럴싸한 명칭을 붙여, 개소문이를 요동에 처박아 두려 하시오?”
강이식이 노해 따지듯 묻자, 명림신이 두려워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태왕 건무는 무척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종리대형의 말도 일리가 있소.”
“폐… 폐하.”
강이식이 당황하여 불렀으나, 건무는 고개를 저었다.
“천리장성 보수 공사는 우리 고구려의 북방을 지키는 매우 중대한 일이오. 고작 스물의 개소문이에겐 과한 직책이나, 경험을 쌓고 장차 막리지에 올리기 위해 배려하여 명하니, 내일 개소문이를 대전에 들라 하시오.”
태왕의 명은 지엄하였고, 강이식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 날, 개소문이 입궐하여 대전에 들어서니, 먼저 와 태왕을 알현하는 이가 있었다.
해동증자(海東曾子)라 불리는 백제 왕의 사신으로 온 좌평 성충이었다.
“고구려가 서국(중국)과 전쟁한 지 수백 년, 마침내 영양태왕께옵서 세 차례나 백만의 수나라군을 물리쳐 국위가 크게 떨쳐졌나이다. 이에 고구려의 군사들과 백성들은 서국과 맞붙어 싸움에 망설임이 없고, 그 기염이 하늘을 찌른다 들었나이다.”
성충의 낭랑한 목소리가 개소문의 심장을 뛰게 하였다.
‘서국이라 낮춰 말하다니, 실로 당찬 사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