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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검귀-244화 (244/328)

244화 떨어지는 별들 (3)

수의 황제 양광의 죽음은 모든 고구려인들을 안심케 하였다.

모두가 더는 전쟁이 없으리라 여기며 기뻐하였으나, 병석의 을지문덕은 다가올 또 다른 전쟁을 우려하고 있었다.

북주와 돌궐 연합군의 침공에서부터, 수의 네 차레 침공으로 이어진 오랜 전쟁으로 심신이 지친 을지문덕은 평화가 찾아왔음에도 병을 얻어 외부 출입을 자제하고 있었다.

이에 태왕이 염려하여 을지문덕의 집을 찾으니, 온달도 함께했다.

강이식은 아직도 북방이 어지러워 요동을 지키고 있었으며, 개소문도 강이식을 도와 요동성에 머물고 있던 중이었다.

“보잘것없는 소신을 폐하께서 찾으시니, 실로 감격할 따름이옵나이다.”

을지문덕이 몸을 일으켜 절을 올리니, 태왕이 을지문덕의 몸을 부축해 다시 눕히고는 자상히 말하였다.

“그동안 너무 고생이 많으셨소. 광인 양광도 사라졌으니, 천하의 근심은 오직 그대의 환우구려.”

“폐하, 천문을 보니, 소신과 같은 하찮은 인물은 빛을 잃고 새로운 강자들이 득세하리라 보입니다. 중원에 새로 들어선 당은 우리 고구려에게 양광보다 더욱 강하고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 있사오니, 부디 살피고 또 살피시오며 경계하소서.”

“당은 이제 창업한 나라로 어찌 우리 고구려와 겨룰 수 있겠소만, 그대가 우려하니, 내 경계하리다.”

태왕의 답변에 을지문덕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사옵니다. 이제 건국한 당은 우리 고구려에게 위협은 되지 않습니다. 당의 이연은 진중하고 전쟁을 즐기지 않는 인물이기에 우리 고구려와 화목하게 지내길 원할 것입니다. 허나.”

“허나?”

“그의 차남 이세민은 다를 것입니다.”

“다르다?”

“젊은 이세민은 백이십여 개의 난을 평정하며 아비 이연이 황위를 양위 받는 데 그 공이 큰 인물입니다. 폐하, 보소서. 백이십여 개의 난을 평정한 젊은 피 이세민이 현재의 지위에 만족할 리 없나이다.”

“허면, 장자 승계를 거부하고 난이라도 일으킬 것이라 말하는 게요?”

태왕의 물음에 을지문덕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세민은 반드시 형을 누르고 황위에 오를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과를 덮기 위해 우리 고구려를 침공할 터이니, 경계 또 경계하셔야 하옵니다.”

“이세민이 황위를 찬탈하지 않는다면?”

“우리… 고구려의 평화가 지속될 것이오니… 당과… 화친을 유지하소서.”

항상 당당하고 여유롭기만 했던 을지문덕이 식은땀을 흘리며 겨우 말을 이으니, 태왕은 그 모습이 너무도 안쓰러워 을지문덕의 손을 부드럽게 쥐며 말하였다.

“나는 항상 그대의 말을 믿고 따랐으니, 그대는 근심치 마시오. 그대는 그저 어서 일어나 나를 보필할 생각이나 하시구려.”

“송구하오나, 폐하… 소신의 명은 해를 넘기지 못하옵나이다. 부디 불충을 용서하시옵소서.”

“어찌 그런 말을 하시오. 대장군이 그대의 나약한 소리를 들었다면 불호령을 했을 것이오.”

태왕이 웃는 얼굴로 말하니 을지문덕도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대장군이 들으면 화를 낼 소리이오나, 폐하… 당과는 필히 화친을 맺으셔야 하옵나이다. 허나, 이세민이 황위에 오른다면 침공이 예상되오니, 전쟁에 대비하시옵소서.”

을지문덕이 다시 당부하니, 태왕이 허허 웃었다.

“허허, 이미 다짐한 말을 또 다짐하라 말하시오? 그대는 염려치 마시구려. 내 언제 그대의 말을 따르지 않은 일이 있소? 염려치 마시구려. 내 이렇게 다짐하리다.”

태왕의 말에 을지문덕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한 가지 다짐을 더 청하였다.

“폐하, 청하옵건데… 소신을 적봉진에 보내주시옵소서.”

“어찌 이 몸으로… 아니 될 소리요.”

“폐하, 소신은 고구려 땅에서 죽어선 아니 되옵나이다. 적봉진을 지키라 명하시옵고, 소신은 그곳에서 죽겠나이다. 소신의 죽음은 오직 온달에게만 알릴 것이오며, 결코 묘도 세우지 않고, 장례도 치르지 않을 것이옵나이다.”

“어찌 대고구려의 막리지가 묘도 없고, 장례도 치르지 않는단 말이오? 아니 되오.”

태왕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으나, 을지문덕도 강경하였다.

“소신이 적봉진에 살아 있다 여기면 당은 결코 쉽사리 침공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만일 당이 비밀리 적봉진을 찾아낸다면, 이는 곧 침공을 의미하니, 대비하시옵소서.”

죽어서도 고구려를 지키겠노라 을지문덕이 말하니, 태왕도 더는 반대할 수 없었다.

* * *

다음 날, 을지문덕이 관복을 입고 대전에 들어서니, 대소 신료들이 놀라 웅성거렸다.

“저자가 쾌차한 겐가?”

“허허, 역시 을지문덕이로다. 오늘 내일한다더니, 그새 몸을 추스렸나 보군.”

이에 태왕은 마침 기다렸다는 듯 엄히 명하였다.

“막리지는 들으라!”

“하명하시옵소서.”

“그간의 전쟁으로 백성들이 괴로워하느니라. 하여, 새로 황위에 오른 당의 이연과 화친을 맺을 것이다. 허나, 전장을 장악한 그대를 당이 두려워하여 화친을 꺼려할 여지가 있으니, 막리지는 홍산 적봉진으로 떠나 조정의 일에 관여치 않도록 하라.”

공이 큰 을지문덕을 이름만 들어본 적봉진으로 내치니, 대소 신료들이 놀라 숨소리조차 줄였다.

그러나 을지문덕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업드려 절을 올리며 명을 받았다.

“부디, 당과 화친을 맺으시어 만백성의 괴로움을 해소하시옵소서.”

예를 올린 을지문덕이 몸을 돌려 대전을 나서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태왕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폐하, 소신은 죽어서도 살아 있다 여기게 할 것이옵나이다. 시신으로도 고구려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오며, 고구려의 적들은 소신이 죽은 땅을 취하지 않고선 결코, 고구려를 넘보지 못할 것이옵니다.’

궁을 나선 을지문덕이 마음 깊이 다짐하며 말에 오르니, 우랑이 곁을 지키며 함께 적봉진으로 향하였다.

을지문덕이 적봉진으로 향하며 막리지는 자연스럽게 공석이 되었다.

* * *

해를 넘기지 못하고, 온달에게 비보가 전해졌다.

온달은 그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은 채, 밤이 깊어 태왕을 알현하였다.

단공만이 태왕의 곁을 지킬 뿐 주위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온달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막리지께서 명을 달리하셨나이다.”

이에 태왕이 짧은 기침을 하고는 온달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 장례는 치렀는가?”

“아니옵니다. 적봉진 내에서도 막리지의 죽음을 아는 이가 적도록 우랑이 조치를 취하였고, 막리지는 깊은 밤 재가 되어 홍산에 뿌려졌다 하옵니다.”

태왕이 눈을 감고 말을 삼켰다.

아마도 비통함을 삼키는 듯하였다.

잠시 뒤, 눈을 뜬 태왕이 온달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나는 얼마나 남아 보이는가?”

“폐하…….”

온달이 감히 답하지 못하니, 태왕이 허허 웃었다.

“허허, 뭐가 그리 어렵다고 정색을 하는가? 막리지 을지문덕이 명을 달리하였으나, 조문도 장례도 치를 수 없으니, 안타깝구나.”

“…….”

“또한 을지문덕이 적봉진으로 향하며 그간 막리지가 공석이었으니, 새로 막리지를 세워야겠구나. 내가 경솔하여 연태조의 장자가 성인이 되면 막리지를 계승케 하겠다고 말하였으니, 이를 지켜야 할 터인데…….”

태왕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무겁게 말하였다.

“나는 이를 번복하고 대장군 강이식이나 너를 막리지에 올리고 싶으나, 허언 또한 하고 싶지는 않다. 허니, 온달 자네가 연태조의 장자를 도움이 어떠한가?”

“궁에는 허언이 없다 하며, 태왕은 오류가 없는 법이오니, 연태조의 장자에게 막리지를 승계토록 하시옵소서.”

온달이 개소문을 막리지로 추천하니, 태왕이 만족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온달, 너의 말이 옳구나. 내일 요동성에 사람을 보내 강이식과 연개소문을 불러들여 내가 직접 뜻을 알려야겠도다.”

말을 마친 태왕이 짧은 기침을 하며 손짓으로 그만 물러나라 명하니, 온달이 공손히 예를 올리고 물러났다.

다음 날, 요동성으로 사람을 보내겠다던 태왕은 일어나지 못하였다.

을지문덕과 마찬가지로 수의 침공을 네 번이나 막아낸 태왕은 심신이 지쳐 이미 깊은 병을 앓고 있었다.

항상 당당하고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대소 신료들에게 자신의 병세를 알리지 않았으나, 온달이 추천한 명의 오옥조차 손 쓸 수 없는 상태였다.

여기에 더해, 을지문덕의 죽음은 태왕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으니, 아침이 되어도 태왕은 일어나지 못하였다.

항상 곁을 지키던 단공이 태왕의 승하를 알리니, 그제야 궁이 소란스러워졌다.

태제이자 태자인 건무가 상주를 맡아 국상을 치르니, 요동을 지키던 대장군 강이식과 개소문도 평양성으로 향하였다.

내일 요동에 사람을 보내어 강이식과 연개소문을 불러들이겠다던 태왕의 뜻대로 된 셈이었다.

상복으로 갈아입고 입궁한 강이식은 곧바로 온달을 찾아 물었다.

“태왕 폐하께서 어찌… 온달 아우는 폐하의 환우를 아셨는가?”

“송구하오나, 알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아둔하고 눈치마저 부족하여 알 수 없었습니다. 제 못남을 탓하여 주십시오.”

전날 밤까지도 태왕의 병세를 눈치 채지 못한 자신의 아둔함을 온달이 책망하며 눈물을 흘리니 강이식은 그저 허망해 온달의 등을 두드리며 위로할 뿐이었다.

“어찌 그대의 탓인가… 외적과 내적을 우려하여 강건한 모습만 보이시고자 하셨음인데… 누구의 잘못도 아닐세.”

* * *

강이식과는 달리, 입궁할 수 없는 개소문은 팽무일 일행을 이끌고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열 살 되어 떠났던 집을 스물이 되어 돌아오니, 십 년만이었다.

남동생 연정토와 여동생 연수영은 성인이 되어 돌아온 개소문의 모습에 놀랍고도 반가워 눈물을 흘렸다.

“형님… 어찌 이제 오셨습니까? 아버님께선 온달이 의관을 데려가…….”

연정토가 울며 말을 잇지 못하니, 개소문이 답답하여 호통을 쳤다.

“말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할 것이지. 어찌 사내대장부가 울먹여서 하던 말도 끝맺지 못한단 말인가?”

이에 연수영이 연정토를 대신하여 답하였다.

“상장군 대건상의 말에 따르면 온달 때문에 아버님께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온달 그자가 아버님을 치유하던 의관을 끌고 갔다고 합니다.”

“뭐라? 온달 장군께서? 어찌…….”

북장원을 따르던 대건상이 꾸민 흉계인 줄도 모른 채 연정토와 연수영이 울며 그간의 일들을 말하니, 개소문은 그저 참담하여 땅만 바라볼 뿐이었다.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던 개소문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오해다. 오해가 있을 것이다.”

“형님, 그렇지 않습니다.”

“그만하라!”

개소문이 단호히 말하니, 연정토도 더는 말하지 못하였다.

이에 개소문이 연정토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간의 고생을 위로하고는 어색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는 공손향과 모용설, 모용상 남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공손향을 바라보는 모용설, 모용상 남매의 눈에서 살기마저 흘렀다.

이와 달리, 공손향은 애써 여유로운 듯한 태도를 취하였으나, 언제든 손을 써 검을 뽑아 들 듯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사부, 싸움 나겠어. 딱 살인 날 분위기야.”

팽무일이 손짓으로 개소문을 부르니, 모용상이 입꼬리를 실룩이며 팽무일을 노려보았다.

“왜 노려보냐? 죽고 싶니?”

팽무일이 공손향을 도울 듯 한발 앞으로 나서며 모용상을 비웃으니, 멀리 떨어져 있던 단 사부와 가림도 한 발 나서며 점점 싸움이 크게 번질 듯했다.

이에, 야수가 고개를 저으며 말하였다.

“싸. 싸우면… 안 돼. 우, 우린… 서로. 적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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