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떨어지는 별들 (1)
황제 양광은 결코 어리석은 인물이 아니었다.
우문술과 우중문이 고작 이천칠백의 군사만 이끌고 돌아오니, 요동성을 바라보며 껄껄 웃었다.
“올해는 전쟁을 멈춰야겠구나. 하하하.”
그리고는 군사들에게 좋은 술과 비단을 높이 쌓아두라 명하였다.
이에, 술과 비단이 작은 구릉처럼 쌓였다.
“요동성을 지켜낸 강이식과 고구려 군사들은 능히 상을 받아 마땅하다.”
황제 양광은 이렇듯 말하고 철군을 명하였다.
또한 우중문과 우문술 등의 패전 장수들은 모두 서민으로 강등되었다.
그러나 우문술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이 말하길, 우중문이 을지문덕을 추격한 것이 패전 원인이라 주장하며 제 살길을 찾았다.
황제 양광은 고구려 재정벌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여러 장수들의 주장을 따랐다.
“우중문만 서민으로 강등하고, 다른 장수들은 벌하지 않겠노라. 더는 논하지 말라.”
이에, 우중문은 쇠사슬에 묶여 낙양까지 끌려가야 했다.
을지문덕도 군을 이끌고 요동성에 들어와 있었기에, 성벽 위에서 우중문이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패전 책임을 우중문 한 사람에게만 묻는 것은, 해가 바뀌면 다시 전쟁을 일으킬 생각이기 때문인 듯하구려.”
을지문덕이 이렇듯 말하며 철군하는 수나라 군을 바라보니, 곁에 선 강이식이 입맛을 다시며 말하였다.
“허허, 미련이 무척이나 많은 황제로군. 저들이 요하를 건널 때 뒤를 공격하는 것은 어떻겠소?”
이에 을지문덕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 군도 무척 지쳤을 것이오. 또한 황제는 필경 우리가 배후를 공격하리라 예상하고 있을 터이니, 이대로 가게 둡시다. 우리도 다음 전쟁을 준비해야겠소.”
성벽을 내려온 을지문덕은 강이식에게 연개소문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껄껄 웃었다.
“하하하, 그 아이가 있어, 참으로 다행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그 아이를 불러주시구려.”
잠시 뒤, 처소에서 개소문을 은밀히 만난 을지문덕이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공자 애썼소. 참으로 공이 크오.”
“과찬이시옵니다.”
개소문이 겸손히 답하니, 을지문덕이 빙그레 웃었다.
“평양성에선 이번 전쟁에서 공이 큰 자들에게 상을 내릴 것이오. 허나, 공자는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소이다.”
“허면, 저는 어디에 있어야 하나이까?”
개소문이 담담히 물으니, 을지문덕이 바로 답하였다.
“공자는 태왕 폐하를 대신하여 왕박에게 상을 내리러 태산에 가야 하오.”
“태산이라 하셨습니까? 왕박이 어떤 공이 있사옵니까?”
개소문이 의아해 다시 물으니 을지문덕은 기다렸다는 듯 답하였다.
“우리 고구려의 여러 성들이 왕박의 막향요동랑사가 덕을 보았구려. 공자가 그와 친분이 있으니, 직접 만나 상을 전달하고, 내 서신도 전하면 좋겠소이다. 왕박에게 상을 내리는 일은 매우 은밀해야 하니, 이 요동성에서 공자의 공을 지워야겠소이다.”
“내세울 공이 없기에, 상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하여 지울 것도 없으니, 바로 떠나겠나이다.”
개소문이 조금도 미련 없이 답하니, 을지문덕이 매우 만족해 껄껄 웃었다.
“공자, 부디 잘 부탁하오.”
다음 날, 을지문덕의 부탁으로 개소문은 팽무일 등과 함께 사람들의 눈을 피해 요동성을 떠났다.
왕박은 황제 양광이 백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정벌에 나서자, 탈영병들과 농민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한때 큰 세력을 쌓기도 하였다.
그러나 수의 장수 장수타가 토벌대를 이끌고 공격하니, 연전연패하여 태산에서 산채를 세우고 버티는 중이었다.
개소문은 왕박이 매우 위급함을 을지문덕에게 들었기에, 쉬지 않고 말을 달려 태산으로 향했다.
“그곳에 가면 매우 위험할 것 같은데… 꼭 가야 하오? 왕박이 패해 죽으면 이따위 상이 뭔 소용이오? 사부, 가지 맙시다.”
팽무일이 불평을 토로했으나, 개소문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답하였다.
“막리지께서 아무 이유 없이 왕박에게 상을 내리진 않았을 것이다. 쉬지 말고 말이나 달려라.”
“아니, 그래도 이건 좀…….”
이에, 팽무일이 인상을 구기며 다시 입을 열려고 하니, 야수가 그의 말을 잘랐다.
“와. 왕박은. 우리의… 은인이다. 서, 서둘. 러… 가자.”
“이런 제길! 죽기 살기로 요동성을 지켰건만, 상 대신 사지로 가라니… 너무하는구먼! 제길! 그래, 가자고! 가!”
* * *
황제 양광이 군을 물려 요하를 넘으니, 평양성 내에선 논공행상이 이뤄졌다.
가장 공적이 큰 이는 당연 막리지 을지문덕이었다.
수의 별동대 삼십만을 일거에 섬멸한 공은 그 누구도 이견을 댈 수 없었다.
그 다음으로 공이 큰 이는 요동성을 지킨 대장군 강이식이었다.
백만 대군의 공격에도 성을 지켜냈으니, 이 역시도 이견은 없었다.
“다음으로 공이 큰 인물은 단 오백의 군사로 평양성을 지켜낸 태자 전하와 상장군 대건상이옵나이다.”
북장원이 태왕에게 아뢰니, 동금호가 노해 소리쳤다.
“평양성은 태자 전하와 대건상뿐만 아니라, 온달, 예곤 등의 장수들 공 또한 크오! 어찌하여 이들의 공은 언급이 없단 말이오?”
“조의두대형, 그대의 말도 옳으나, 온달은 안시성의 군사가… 예곤은 비사성의 군사가 있었소이다.”
“…….”
“허나, 태자 전하와 대건상은 고작 오백 밖에 남지 않은 군사로 평양성을 지키고 있었으니, 이 어찌 다른 이들과 비하겠소? 그대는 태자 전하가 공을 인정받는 게 마땅치 않은 게요?”
북장원이 자신을 따르는 대건상에게 상을 주기 위해 태자 건무를 거론하니 동금호는 그 속내를 알고도 눈살을 찌푸리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교활한 자로다. 태자 전하의 공을 언급하여 내 입을 막는구나.’
결국 북장원의 뜻대로 논공행상이 이뤄져, 온달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은 뒤로 밀려나야 했다.
한편, 을지문덕의 부탁으로 비밀리 태산으로 향한 개소문 일행의 공적은 그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다.
* * *
비록 작은 상이었지만, 온동까지 태왕이 비단을 하사하니, 온달의 집은 축제와 다름없었다.
“그래도 다들 상을 받긴 받았구먼! 하하하.”
막바우가 온동을 얼싸안고 제 일처럼 기뻐하니, 독고영과 팽운도 막바우와 함께 온동을 끌어안고 매우 기뻐하였다.
이 광경을 지켜보며 온달이 허허 웃었다.
“우리 일가가 이제 다 모였나 봅니다. 허허허.”
자신들을 일가라 칭하는 온달의 말에 경우가 내심 기뻐 속으로 웃으니, 평강이 살포시 미소지었다.
“그렇군요. 우리 장군님 말씀대로 드디어 우리 일가가 모두 모였사옵니다.”
전쟁이 끝나 모두가 기뻐하던 그 순간.
개소문은 태산에 당도해 왕박을 만나고 있었다.
“고구려의 태왕 폐하께서 그대에게 내리는 상이오.”
개소문의 말에 쇼락이 커다란 궤짝을 왕박 앞에 내려놓았다.
왕박이 살며시 궤짝을 열어보니, 모두 금으로 채워져 있었다.
“이… 이걸 내게? 고구려 왕이 어찌 내게 이것을 내린단 말이오?”
이에 개소문이 품에서 을지문덕의 서신을 꺼내 건네었다.
“고구려의 막리지께서 그대의 공을 치하하며 보내신 서신이오.”
왕박이 받아 펼쳐 읽었다.
[그대의 노래가 이 전쟁을 종결짓는 데 공이 무척 크오.
이는 나도 알고, 태왕 폐하도 아시며, 황제 또한 알 것이오.
부디, 상으로 내린 금이 장수타를 물리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오.
황제는 봄에 다시 군을 몰아 우리 고구려 정벌에 나설 것이니, 그때가 바로 그대의 군사들이 군량미를 얻을 기회일 것이오.
그대가 반드시 세를 키우지 못하면, 정벌에서 돌아온 황제가 그대의 목을 노릴 터이니, 부디 대업을 이루길 바라고 바라겠소.]
을지문덕의 서신을 읽은 왕박이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해 멍하니 개소문만 바라보았다.
“막리지께서 뭐라 하시었소?”
개소문의 물음에 그제야 왕박이 입을 열었다.
“공자는 탁현 강가에서 탈영해 오갈 곳 없던 내게 금을 주었지요.”
“그렇게 되었구려.”
“이젠 고구려 왕이 금을 내리고, 고구려 재상이 서신을 보내니… 내가 살고자 한다면, 길은 하나뿐이겠소이다. 하하하.”
왕박의 웃음 속엔 이미 결기가 담겨 있었다.
“그럼 결정하신 것으로 여기고 돌아가겠소이다.”
개소문이 몸을 일으켜 고구려로 돌아가려 하자, 때마침 군사가 들어와 아뢰었다.
“장수타가 군을 이끌고 산을 오르옵니다!”
“뭐라? 그 수가 몇이나 되더냐?”
“삼만은 족히 넘어 보입니다.”
왕박의 군사는 이미 장수타에게 패해 일만으로 그 수가 줄어 있었기에, 이 공격을 막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태산을 떠나 황하를 넘겠노라! 퇴긱할 준비하라!”
왕박이 이처럼 명을 내리니, 개소문의 뒤에 서 있던 공손향이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적의 세가 강하여 퇴각함은 당연한 일이오나, 이대로 퇴각하시면 필경 장수타가 추격하여 피해가 클 것입니다.”
“허면, 그대는 대책이 있으시오?”
“우리 공자께서 장수타의 목을 벨 터이니, 장군께서는 이 태산에 진을 단단히 하고 세를 키우도록 하소서. 황제는 고구려 정벌에 온 힘을 쏟느라 장군에겐 당장 시선도 주지 않을 것입니다.”
공손향의 말대로 오직 장수타만이 왕박을 토벌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뿐이었다.
“정녕, 공자가 장수타의 목을 벨 수 있으시오?”
왕박의 물음에 개소문이 답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 바로 말에 올랐다.
이에 팽무일도 구시렁거리며 말에 오르니, 개소문이 야수와 당진평, 쇼락에게 말하였다.
“그대들은 남아 공손향을 지키시게.”
야수와 당진평, 쇼락이 명을 받으니, 개소문은 팽무일과 함께 말을 몰아 내달렸다.
군사들을 이끌고 산을 오르던 장수타는 두 필의 말이 내달려와 자신의 앞을 막고 서니, 기가 막혀 물었다.
“무엇 하는 놈들이기에 감히 앞을 막는 게냐? 왕박의 수하냐?”
이에 개소문은 답도 하지 않고, 등에 멘 다섯 자루의 검을 빠르게 날렸다.
바람을 가르며 다섯 자루의 검이 일시에 날아드니, 장수타가 놀라 급히 말을 돌렸으나 이미 그의 목을 비롯한 사지에 검이 박혀 말에서 떨어졌다.
뒤따르던 군사들이 놀라 비명을 지르니, 개소문이 기세 좋게 허리춤에서 두 자루 검을 뽑아 들고는 외쳤다.
“내가 바로 갓쉰동이다! 누가 더 목을 바칠 것이냐?”
백만 대군 속에서 관풍행전을 불태운 갓쉰동의 무용은 너무도 유명했으니, 군사들은 놀라 도망치기 바빴다.
“갓, 갓쉰동이다!”
“도망쳐라!”
잠시 뒤, 개소문이 삼만 대군 속에서 장수타의 목을 가져오니, 왕박이 기뻐 개소문의 두 손을 잡고 사정하였다.
“공자, 잠시 나와 함께 있어 주시오. 아주 잠시면 되오. 내가 세를 키울 때까지만 곁에 있어 주시오.”
왕박의 부탁에 개소문이 머뭇거리니, 공손향이 빙그레 웃으며 말하였다.
“왕박 장군께서 세를 키우지 못하면, 막리지께서 무척 섭섭해하실 것입니다. 잠시 남도록 하시지요.”
개소문도 공손향의 말이 옳다 여겨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당진평이 각지에 심어둔 수하들을 풀어 왕박과 힘을 합칠 이들을 찾으니, 해가 바뀌어 손선아(孫宣雅)와 학효덕(郝孝德)이 군사들을 이끌고와 왕박에게 힘을 보태었다.
개소문은 왕박의 군세가 십만 가까이 이르자, 안심하여 고구려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때, 수의 황제 양광도 다시 고구려 정벌을 천하에 알렸다.
“고구려와 같이 하찮은 것들이 상국의 명을 따르지 않고 있다. 우리 수의 국력은 바다를 뽑아내고 산을 옮길 수 있거늘, 하물며 이런 따위의 적이야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내 친히 고구려 정벌에 다시 나설 터이니, 그대들은 서둘러 준비를 마치도록 하라.”
이에, 좌광록 대부 곽영이 죽음을 각오하고 말하였다.
“고구려가 오랑캐로서 예절을 지키지 못한 것은 신하가 벌할 일입니다. 천근 무게의 장궁으로 생쥐를 잡지 않는 법이니, 황제 폐하께서 직접 나서 작은 도적을 대적하실 이유가 없사옵니다.”
“그대는 틀렸소. 고구려는 생쥐가 아니오. 고구려는 범이오. 대국이라 하여 소국을 업신 여겨 패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 또 주의하기 바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