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화 살수대첩 (12)
“방진을 펼치고 회군하라! 짐을 적게 하여 몸을 가볍게 하라!”
설세웅의 외침으로 회군이 시작되었다.
실상 몸을 가볍게 할만큼의 짐도 지니지 못한 상태였기에, 병장기만 지닌 채 행군을 하였고 허기도 채울 수 없었다.
평양성 내에선 수의 별동대가 물러나니, 북장원을 비롯한 대소 신료들이 기뻐 환호성을 질렀다.
이에, 을지문덕이 나서 말하였다.
“소인이 뒤따라가 요동에서 황제를 알현하고 강화를 맺겠나이다.”
그 누구도 을지문덕의 말에 이견을 달지 않으니, 을지문덕은 바로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을 나섰다.
기존 사만의 군사와 온달이 이끈 일만오천의 군사 그리고 비사성의 군사 이만이 합쳐지니 도합 칠만오천이었다.
* * *
“을지문덕이 군을 끌고 나왔다 합니다!”
척후가 급히 돌아와 아뢰니, 우문술이 놀라 바로 물었다.
“뭐라? 그 수가 얼마나 되느냐?”
“대략 칠만에서 팔만으로 추정되오며, 개마무사도 보입니다.”
“뭐… 뭐라 개마무사?”
이미 개마무사에게 호되게 당했던 우문화급이 놀라 아비를 바라보니, 우문술이 침통한 표정으로 급히 명하였다.
“더욱 방진을 강화하고, 쉼 없이 행군하라!”
그러나 방진은 행군 속도가 느려 이내 곧 온달이 이끈 개마무사가 바짝 쫓아왔다.
“어딜 급히 가시오? 함께 요동으로 가서 황제를 만납시다! 우리 막리지 합하께서 황제에게 하실 말씀이 있답니다!”
온달이 위엄있게 소리치니,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수의 삼십만 군사가 두려워하였다.
“오… 온달입니다. 저놈이 언제 이곳에?”
온달을 알아본 우문화급이 떨며 말하니, 우중문이 버럭 소리쳤다.
“어찌 장수가 적을 두려워한단 말인가? 실로 한심하도다!”
우문화급이 고개도 들지 못하니, 우중문이 비웃으며 급히 명하였다.
“기병을 준비하라! 내 친히 나가 온달을 물리치겠노라! 그대들은 그 사이에 보다 멀리 행군하도록 하시오.”
우중문이 온달을 물리치고 고구려 군의 추격을 막고자 오만 기병을 이끌고 나가니, 그 사이 우문술이 행군을 재촉하였다.
“서둘러라! 속히 살수를 건너야 한다! 고구려의 추격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정작 시간을 벌기 위해 출격한 우중문이 말을 내달리기도 전에 온달이 개마무사 오천 기를 이끌고 돌진해 왔다.
그리고 그 뒤로 경우가 궁기병 일만 기를 이끌고 넓게 진을 펼치며 기사를 펼치니, 우중문의 오만 기병은 개마무사들과 접전도 벌이기 전에 화살비 속을 헤매야 했다.
“적의 수는 보잘것없다! 화살을 두려워하지 마라!”
우중문의 독려에 수의 기병이 전의를 불태우려 했으나, 거센 파도처럼 밀고 들어오는 개마무사들의 압도적 돌격에 중앙이 돌파당하고 말았다.
기병 오만의 진이 흐트러지자, 온달이 다시 말을 돌려 배후를 공격했다.
그리고 이 순간에도 경우가 이끈 궁기병 일만 기는 거리를 유지하며 기사를 펼치니, 우중문의 오만 기병은 앞뒤로 협공당하는 형국이 되었다.
“불패장군 온달님이시다! 머리를 조아려라!”
목청 좋은 막바우가 선두에 서서 오만 기병 속으로 뛰어들고 온동도 오직 바람이 전하는 소리에 의지하며 적진 속을 누볐다.
이어서 온달이 누렁이를 몰아 또다시 중앙을 돌파하며 운철대검을 휘둘렀다.
일기당천 온달의 앞을 감히 막는 수의 기병은 없었으며, 그가 말을 몰아 달려들면 그저 도망치기 바빴다.
그리고 넓게 진을 펼친 개마무사들이 삭을 앞세워 돌진해 오니 마치 거대한 철벽과도 같았다.
이에 이미 전의를 상실한 수의 기병 오만 기는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기 바빴다.
간신히 목숨만 구해 방진 안으로 돌아온 우중문이 가쁜 숨을 몰아쉬니, 우문술이 바삐 명을 내렸다.
“적의 돌진에 대비해 더욱 방진을 단단히 하라! 결코 돌파당해선 안 된다!”
굶주려 제대로 힘을 낼 수는 없으나, 대군이 펼친 방진의 위용만큼은 대단하여, 온달도 더는 공격하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였다.
이때, 을지문덕이 군사들을 이끌고 와 명하였다.
“궁수들은 살을 날려 진을 흩트려 놓아라!”
궁수들이 일제히 화살을 날리니, 방진 속 설세웅이 급히 명하였다.
“방패로 막아라! 창병은 극을 박아 개마무사의 돌진을 막아라!”
또다시 공방이 이뤄지며, 방진이 잠시 멈추었다.
을지문덕은 수의 방진이 제법 단단하다 여겨, 다시 명하였다.
“궁기병은 측면에서 기사를 펼치고 궁수들은 거리를 두고 살을 날리며 추격한다. 기병 돌파는 삼가라!”
이에 궁기병들이 좌우로 갈라져 수의 방진을 따라가며 화살을 날리고, 궁수들이 배후를 노려 화살을 날렸다.
제아무리 방패를 들어 방비를 철저히 하여도 쓰러지는 군사들이 늘자, 우문술이 조급해 소리쳤다.
“서둘러 이동하라! 곧 살수다! 살수를 건너면 추격을 벗어날 수 있다! 거리를 벌려라!”
한편 우중문이 다시 군을 꾸려 궁기병들을 향해 돌진하니, 기다렸다는 듯 온달이 개마무사를 휘몰아 돌진해 왔다.
이에 우중문이 황급히 퇴각을 명하였다.
“맞서지 마라! 방진으로 퇴각하라!”
방진 속에선 우문술이 개마무사들을 노려 화살을 날리라 명하였다.
“철갑을 뚫어라! 살을 날려라! 적의 접근을 막아라!”
그러나 개마무사들의 철갑주는 화살을 튕겨내어 오히려 수나라 군의 사기를 꺾었다.
창병들의 극을 우려해 방진 속으로 돌진을 삼가고 온달이 개마무사를 뒤로 물리니, 그제야 한시름 놓은 우문술이 다시 명하였다.
“속도를 높여라! 살수까지 내달리며 계속 방진을 유지하라!”
수적으로 우세였으나, 굶주리고 사기가 저하된 채 퇴각 중이었기에 우문술을 비롯한 장수들은 군사들을 보전해 요동으로 돌아가 재정비하고자 했다.
‘군사들만 보전하면, 다시 군을 몰아 고구려 놈들을 벌할 수 있다.’
입을 열어 말하지 않아도 모든 장수의 마음은 일치하여 최대한 군사들의 희생을 줄여 회군하고자 했다.
“방진을 유지한 채 달려라! 결코 진이 흐트러져선 안 된다!”
이처럼 방진을 단단히 유지한 채 행군하니, 고구려 군도 거세게 공격하기가 수월하지 않았다.
“삼십만의 대군이 펼친 방진이라 그 위력이 상당하구나.”
을지문덕이 수의 방진을 칭찬하며 빙그레 웃을 무렵, 마침내 살수가 눈에 들어왔다.
살수는 이전 도하 때와 달리, 가슴팍까지 물이 올라 있었다.
전날 내린 비의 탓만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수량이었다.
“어찌 된 일인가?”
우중문이 놀라 부르짖으니, 설세웅이 급히 명하였다.
“머뭇거리지 말고 도하하라! 적이 바짝 쫓아왔다!”
물살은 거셌고, 굶주려 기운을 내지 못하는 군사들은 방진을 제대로 유지할 수 없었다.
사실, 수의 삼십만 별동대가 평양성 공략을 위해 도하할 무렵, 수심이 얕았던 것은.
상장군 주용이 소가죽 등으로 상류에 방죽을 만들어 내려가는 물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난밤 내린 비로 방죽이 넘치고, 무너지니 강폭은 더 넓어지고 수심은 깊어졌으며, 물살은 매우 거세고 빨랐다.
이는 고구려 군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으로 수나라 군이 살수를 건널 때 방죽을 무너뜨려 수공을 펼치려 했던 작전과는 사뭇 달랐다.
“막리지, 송구하게 되었습니다. 비로 인해 방죽이 넘치더니, 무너져 버렸나이다.”
상장군 주용이 급히 말을 몰아와 을지문덕에게 사죄를 고하였다.
“오히려 잘 되었습니다. 적이 살수를 건널 때 방죽을 무너뜨려 수공을 펼쳤다면, 적의 후미만 수공에 당했을 것이고, 우리도 물살 때문에 뒤쫓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천운입니다.”
을지문덕이 미소지으며 상장군 주용의 어깨를 두드려 위로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을지문덕의 입에서 총공격 명령이 내려졌다.
“적은 도하하느라 방진을 갖추지 못하였다!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적의 뒤를 잡아라!”
이에, 온달이 막바우, 온동과 함께 개마무사 오천 기를 이끌고 넘실거리는 살수로 돌진하였다.
그리고 상장군 주용과 경우도 각기 말갈기병과 궁기병을 이끌고 뒤따랐고, 을지문덕도 진을 갖춰 도하를 시행하며 화살을 날렸다.
이에, 수나라 군사들은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하를 강행했으나, 지치고 굶주린 몸은 물살을 헤치고 나아가지 못하였다.
가슴팍까지 차오른 강물에 허우적거리며 힘겹게 도주하는 수나라 군사들을 바짝 쫓으며 온달이 소리쳤다.
“적은 제대로 걷지도 못한다. 모두 짓밟아라!”
온달이 시커먼 운철대검을 들고 쫓아오니 그 기세가 너무도 사나웠다.
수나라 군사들은 겁에 질려 살고자, 무기와 갑주도 벗어던진 채 도주하기 바빴다.
그러나 거센 물살을 헤치며 들이닥친 개마무사들은 매정하게 수나라 군사들의 등을 삭으로 꿰뚫으며 쾌속 질주하였다.
“짓밟아라! 하하하!”
거침없이 찌르고, 베고, 밟으며 막바우가 호탕하게 웃으니, 그 곁을 온동이 스쳐 지나며 검을 휘둘렀다.
“파산귀검!”
일순 강물이 갈라지고 검기가 쭉 뻗으며 수나라 군사들을 베었다.
이 광경에 오금이 저린 수나라 군사들은 발을 헛디뎌 강물에 허우적거리기도 하였다.
“물에 빠진 놈들은 두고, 강을 건넌 놈들을 쫓는다! 따르라!”
온달이 수나라 군의 선두를 쫓아 급히 누렁이를 몰아 내달리니, 개마무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뒤따랐다.
이에, 신세웅이 몸을 돌려 감히 온달에게 달려들었다.
“네놈이 온달이냐? 어디 나와 백합만 겨뤄 보자꾸나!”
그러나 신세웅은 온달에게 접근하기도 전에, 바람이 전하는 소리를 들은 온동의 공격을 받아야 했다.
“네놈 따위를 상대할 분이 아니시다!”
신세웅의 외침이 들린 방향으로 몸을 돌린 온동이 곧바로 파산귀검 초식을 펼쳤다.
신세웅은 강물이 갈라지며 자신을 향해 솟구치는 기이한 광경에 입을 쩍 벌려 놀라다가 그대로 몸이 갈라져 피를 뿌렸다.
온동의 검기는 신세웅을 둘로 나누고도 쭉 이어져 수나라 군사들의 팔다리를 잘랐다.
살수의 물살이 핏빛으로 물들어갔다.
이때, 살수의 거센 강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수나라 군사들을 노려보며 을지문덕이 명하였다.
“살을 날린 후, 돌진하여 모두 목을 베라!”
이에 궁수들이 살수로 살을 날렸고, 보군들이 돌진할 준비를 갖췄다.
* * *
방진이 무너지니, 그 결과는 참혹하였다.
간신히 살수를 건넌 우문술과 우중문은 멈추지 않고 달렸다.
그러나 고구려 군은 결코 이들을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온달의 개마무사를 선두로 상장군 주용의 말갈기병과 경우의 궁기병들이 쉴새 없이 베고 또 베며 칼이 부러지고 창이 꺾일 때까지 수나라 군사들을 공격하였다.
여기에 더해, 을지문덕이 이끈 궁수들과 보군들이 뒤처진 수나라 군사들의 명줄을 끊었다.
“적은 삼십만 대군이다. 생포하지 마라!”
포로로 잡을 경우, 고구려 군보다 그 수가 많아 감당키 어렵다고 판단한 을지문덕이 가혹한 명을 내리니, 보군들이 뒤처져 기진맥진한 수나라 군사들의 목을 베었다.
이처럼, 수나라 군은 하루 낮밤을 내달려 압록수에 당도할 때까지 고구려 군의 거센 공격을 받아야 했다.
사지를 헤매며, 삼백 리를 하루에 돌파한 수나라 군사들은 압록수를 건너서야 간신히 고구려 군의 추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고, 고작… 살아남은 군사가… 고작…….”
우문술이 주위를 둘러보며 한탄하니, 설세웅이 급히 군을 재정비하였다.
“살아남은 군사는 모두 이천칠백입니다. 고구려 군의 공격이 다시 예상되니, 급히 요동으로 퇴각해야 합니다.”
설셍웅의 이 말에 우문술과 우중문은 아무 말 없이 그저 몸을 일으켜 휘청휘청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평양성 앞까지 승전을 거듭하던 삼십만의 대군이 단 하루만에 몰살당하였으니, 할 말을 잃음은 당연하였다.
한편, 을지문덕은 압록수에서 추격을 멈추고는 각 성에 전령을 보내어 단단히 방비를 명하며 군사를 아끼었다.
“전쟁은 계속될 터이니, 우리 사람을 남겨야 하지요.”
상장군 주용에게 말을 건네는 을지문덕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였다.
승전 소식은 이내 곧 평양성에 전해졌고, 강화를 주장하던 북장원과 사선종유를 비롯한 대소 신료들은 금세 태도를 바꾸어 만세를 외쳤다.
이에 태왕이 빙그레 웃으며 말하였다.
“그리도 좋소? 경들이 이토록 승리를 좋아하니, 나도 기쁘구려. 허나,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으니, 이 마음 잃지 말고 하나 되어 싸우도록 합시다.”
이에, 북장원과 사선종유는 부끄러워 감히 답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