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살수대첩 (10)
중과부적이었다.
고구려 군의 매복과 급습, 기습은 계속되었으나, 내호아의 수나라 군사 오만 명은 압도적인 군세로 평양성 안까지 밀고 들어왔다.
“대승이로다! 고구려 군은 고작 오백에 불과하다! 싹 쓸어버리고, 고구려 왕과 태자를 잡아라!”
승리를 손에 쥔 듯한 기쁨에 내호아의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내가! 내가… 내가! 고구려의 심장!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가장 앞장서 내달리는 내호아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고, 뒤따르는 모든 군사들은 승리에 도취되어 약탈을 시작하였다.
오백의 군사가 지키던 평양성은 이들을 막을 힘이 없어 보였다.
“약탈하지 마라! 고구려 왕을 잡아라! 고구려의 태자를 잡아라! 왕과 태자의 목에 황금 일만 냥을 걸겠다! 약탈을 멈추고 궁으로 향하라!”
부총관 주법상이 군기를 세우기 위해 크게 소리치자, 모두가 기뻐 폭풍처럼 함성이 일었다.
“궁에는 어여쁜 궁녀가 있고, 왕후는 꽃보다 곱다! 약탈은 궁에서 해도 족하다! 궁녀를 취하고, 왕후를 잡아서 내 앞에 무릎 꿇려라! 내 후하게 상을 내리겠노라!”
내호아가 궁을 수탈하라 명하니, 약탈하던 군사들이 승냥이 떼처럼 좁은 거리를 달리며 궁을 찾아 헤맸다.
내호아도 총관 신분을 잊어버린 채 군사들과 함께 미친 듯이 내달렸다.
그때, 백마를 탄 사내가 내호아의 앞을 막고 서더니, 당황한 내호아에게 담담히 물었다.
“나의 목이 어찌하여 불충하게도 태왕 폐하와 같은 값이더냐?”
“뭐, 뭐?”
사내의 기세에 질린 내호아가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며 물으니, 사내가 빙그레 웃었다.
“나의 목에 걸린 황금 값을 내리는 것은 어떠냐? 너 때문에 내가 불충스러워 고개를 들 수 없지 않느냐?”
백마를 탄 사내는 고구려 태왕의 이복동생 태자 고건무였다.
“너… 너?”
내호아가 놀라 건무를 올려다보다가 급히 소리쳤다.
“고건무다! 고구려의 태자다! 잡아라!”
이에 군사들이 기뻐 건무의 목을 취하기 위해 내달려 왔다.
그러나 건무는 조금도 두려운 기색 없이 말 위에서 자세를 바로잡더니, 월도를 휘두르며 오히려 수나라 군사들을 향해 돌진했다.
“죽을 길로 들어선 너희를 내가 반겨주겠노라!”
건무의 외침과 함께 좁은 골목 곳곳은 물론, 지붕 위에서 함성이 일며 숨어 있던 고구려 군사들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폭풍처럼 화살을 쏟아부었다.
“으아악!”
화살비에 하늘이 가리고, 전신에 화살이 박힌 수나라 군사들이 고통에 겨워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이미 수나라 군사 깊숙이 돌진한 건무의 뒤를 쫓아 고구려의 자랑 개마무사 일천 기가 돌진을 시작하였다.
“내가 바로! 일장산성의 백정 막바우 장군이시다! 평양성을 침입한 죄, 죽음으로 갚아라!”
막바우의 성난 포효가 이어지고, 어느새 건무와 함께 수나라 군사들을 짓밟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흩어져 궁으로 향하던 수나라 군사들은 진을 펼쳐 반격을 가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이 순간에도 길을 달리하여 궁으로 향하던 수나라 군사들의 앞을 막는 이가 있었으니, 불패장군 검신 온달이었다.
“이 길은 막혔다.”
온달의 짧은 이 한마디와 함께 온동이 말을 몰아 앞으로 나오며 소리쳤다.
“불패장군 검신 온달이시다! 도망치면 살 수 있으니, 택하라!”
이미 온달의 위명은 천하의 널리 퍼졌기에 온달과 마주한 수나라 군사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발도 떼지 못하였다.
“시커멓고 거대한… 검… 비루하고 누런 말… 온달이다!”
비명을 지르듯 외친 선두의 군사가 몸을 돌려 도망치니, 공포는 역병처럼 퍼져 좁은 골목 내의 수나라 군사들은 일시에 몸을 돌려 도망치기 바빴다.
“머리는 두고 가라!”
이에 온동이 벼락 치듯 호통치며 앞장서 말을 달려나갔다.
앞을 보지 못하기에, 고구려 군사들을 상하게 할 수 있어 일부러 수나라 군사 속으로 뛰어든 것이다.
“파산귀검!”
온동의 외침이 일고, 수나라 군사들의 팔과 다리가 허공에 떠올랐다.
그리고, 온동을 염려한 온달이 누렁이를 몰아 내달려오며 운철대검을 휘두르니, 땅이 파이고 흙과 돌이 날려 수나라 군사들을 덮쳤다.
평양성 내의 모든 거리는 고구려 군의 함성과 수나라 군사들의 비명으로 가득했으며, 일방적인 살육에 수나라 군사들은 살길을 찾아 도주하기 바빴다.
“속았다! 오백이 아니었다.”
절망에 찬 내호아의 외침은 군사들의 사기를 더욱 꺾었다.
“넓은 곳으로 이동해 진을 펼쳐라!”
부총관 주법상이 반격하기 위해 진을 펼치고자 했으나, 거리는 너무도 좁았고, 골목마다 고구려 군이 매복하여 화살을 날리고 개마무사들의 돌진이 이어졌다.
결국 주법상도 퇴각을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배로 돌아간다! 성을 벗어나라!”
성문을 찾아 수나라 군사들이 죽을힘을 다해 내달렸다.
“성문이다! 밖으로 나가 진을 펼친다!”
부총관 주법상이 군을 수습하기 위해 소리치며 성 밖으로 뛰어나왔다.
이때, 마침 기다리고 있던 경우가 활을 들어올리며 소리쳐 명하였다.
“몰이 사냥을 시작한다!”
경우의 명에 궁기병 일만 기가 함성을 지르며 들판에서 화살을 날리니, 주법상은 피를 토할 듯 소리쳐 명하였다.
“달리고 또 달려라! 배로 돌아가야 살 수 있다!”
이에, 수나라 군사들은 쏟아지는 화살비 속에서 목숨을 건지고자 멀리 떨어진 군선을 향해 내달려야 했다.
이에 경우의 궁기병들은 마치 사냥을 즐기듯 거리를 두고 수나라 군사들을 쫓으며 몰이 사냥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어느새 성문으로 쏟아져 나온 개마무사들이 화살비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수나라 군사들을 짓밟기 시작했다.
개마무사의 선두는 일기당천 건무와 온달, 온동, 막바우가 섰으니 도주하던 수나라 군사들은 허망하게 몸과 머리를 따로 놓았다.
“이대로 배에 돌아간들, 배를 움직일 수 없다. 패수가 아닌 바다까지 달려라!”
주법상이 급히 명을 내려 명하니, 머리가 산발이 된 내호아가 뒤 쫓아와 물었다.
“부총관! 어찌 배로 안 가고, 저 먼 곳까지 퇴각하자 말하시오?”
이에, 주법상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답하며 달렸다.
“이 군사들로 패수에 정박한 배에 오르면 군선 채 불에 타 죽을 것입니다. 바다까지 달려 합류해야 합니다. 살고자 한다면, 달리십시오!”
주법상의 판단은 정확했다.
이미 패수에서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으니, 정박한 군선들이 불에 타고 있음이 분명했다.
“바다… 바다까지 어찌 달려간단 말인가?”
내호아가 황망해 중얼거리면서도 두 다리를 쉬지 않고 움직였다.
해가 저물고 밤이 깊어서야 해안가에 정박한 육백여 척의 군선이 시야에 들어왔다.
군선에 오르자마자 내호아는 실성한 듯 드러누웠고, 주법상이 바삐 군을 재정비하였다.
다행스럽게도 고구려 군은 근처까지 추격해오지 않아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아직 칠만의 군사가 있습니다. 총관 정신을 가다듬으소서.”
주법상의 말에 내호아가 겨우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내 곧 내호아의 두 눈은 공포로 일그러졌다.
“삼족오다! 삼족오 기다!”
저 멀리, 어둠보다 더 검은 삼족오 기를 휘날리며 고구려 군선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예곤이 이끈 고구려의 수군기지 비사성의 군선들이었다.
“도, 도망쳐라!”
“삼족오다! 삼족오다! 도망쳐라! 돛을 올려라!”
사기가 땅에 처박힌, 수나라 군사들은 명이 떨어지기 전에 돛을 올리고 노를 저어 한시라도 빨리 사지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리고, 이들이 정신을 가다듬었을 땐 이미 바다를 건너고 있었다.
“다시는 고구려로 향할 수 없소.”
이렇듯 내호아가 군선을 돌리길 원치 않으니, 주법상도 다른 도리가 없었다.
* * *
평양성의 승전은 을지문덕에게 전해졌으나, 수의 별동대에겐 전해지지 못했다.
우중문은 을지문덕의 사만 군사의 뒤를 쫓으며 계속해 승리를 거뒀고, 우문술은 바삐 우중문의 뒤를 쫓아야 했다.
밤이 되어 합류한 우문술에게 우중문이 역정을 내었다.
“좌장군! 어찌하여 군사들의 짐이 줄었소?”
행군할수록 군사들의 짐이 줄어드니, 보급이 우려됨은 당연하였다.
이에, 우문술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하였다.
“우장군, 그대는 말을 타고 달려 모르는 듯하나, 이 험한 산을 군사들이 어찌 짐을 지고 말을 쫓을 수 있단 말이오? 그렇다고 그대만 홀로 깊숙이 들어가 적에게 역공당하면 안 되기에, 피를 토하며 달라오느라 짐이 줄은 게요.”
“그 말은 좋소만, 짐을 내다 버리고 쫓아오면 뭐로 배를 채워 전쟁을 치른단 말이오? 좌장군은 먹지 않고 전쟁을 치를 수 있으시오?”
우중문이 다시 군량미를 지적하며 군 기강을 바로 잡지 못한 우문술을 책망하였다.
“아니, 우장군. 내가 짐을 버리라 명한 것도 아니고, 그대를 쫓아 오느라 지친 군사들이 나 모르게 짐을 버린 것을 어찌 내 탓으로 말하시오? 나도 군 기강을 바로잡고 싶었으나, 우장군이 먼저 독단적으로 움직여 이렇듯 된 것을 어찌 나를 책망한단 말이오?”
좌우장군이 서로 탓만하며 언성을 높이니, 보다 못한 설세웅이 나서 말하였다.
“수군총관 내호아가 군선으로 보급을 싣고 왔을 터이니, 평양성까지만 행군하면 군량미 걱정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고정하십시오.”
참으로 솔깃한 말이었다.
어차피 평양성으로 향할 길이었고, 군량미는 내호아에게 보충받으면 되니, 무거운 짐을 지고 어렵게 산을 타고 넘을 필요가 없어졌다.
“하하하! 맞소! 내호아가 군선 가득 군량미를 가지고 올 터인데, 힘들게 백일 치 식량을 지고 산속을 행군할 필요가 없소이다. 하하하.”
우문술이 기뻐 이렇듯 웃을 때, 군막 안으로 처참한 몰골의 우문화급과 우문지급이 들어왔다.
“아니? 어찌된 것이냐?”
우문술이 놀라 물으니, 우문화급과 우문지급은 아비 앞에 무릎 꿇고 하염없이 울었다.
안시성을 함락시킨 후, 비사성으로 진군헤야 할 우문화급이 초라한 몰골로 압록수를 건너 찾아왔으니, 우중문은 듣지 않고도 대략적인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허허… 낭패로다.”
한숨을 내쉬며 우중문이 군막 밖으로 나가니, 설세웅이 뒤따라 나와 말하였다.
“우장군, 비사성의 고구려 수군이 움직이면 낭패 아닙니까?”
이에 우중문이 고개를 저었다.
“해전은 육전보다 숫자에 민감하오. 배의 크기와 수가 승리를 좌우하기에, 애초에 고구려 수군은 내호아 총관을 막지 못할 것이오.”
천여 척의 수나라 군선을 고작 이백여 척의 고구려 군선이 막지 못할 것이라 우중문이 단언하니, 설세웅도 안심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요. 드넓은 바다에서 기습, 매복은 불가할 터이니, 고구려는 감히 우리 군선의 수를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허나, 세상 일은 모르는 법이니, 속히 평양성까지 진군하여 내호아 총관과 합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군량미가 부족하면 사기는 바닥을 치게 될 것입니다.”
우중문이 이렇듯 강행군을 주장하니, 설세웅도 이견을 달지 않고 동의하였다.
그리고, 서로 반목하였던 우문술도 못난 두 아들 때문에 우중문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다음날 날이 밝기 무섭게 을지문덕이 기습을 가하고는 도주하였다.
이에 우중문이 불같이 화내며 기병을 이끌고 을지문덕의 뒤를 쫓으니, 우문술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은 군사들을 독려하며 우중문의 뒤를 따라야 했다.
지금까지 우중문은 을지문덕의 사만 군사를 상대로 일곱 번이나 승리를 거뒀고, 을지문덕은 끝도 없이 패하며 남으로 도주하기 바빴다.
매번 사로잡을 듯한 순간에 을지문덕이 몸을 빼 도주하기를 반복하니, 우중문은 약이 오를 대로 올라 있었다.
굳이 오르지 않아도 될 산을 을지문덕의 뒤를 쫓아 오르기를 수차례 하니, 설세웅은 은근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좌장군, 우장군이 계속 을지문덕의 뒤를 쫓으며 추격하느라, 우리의 보군이 지치고 있습니다. 을지문덕의 뒤를 쫓지 말고 평양성으로 직공하는 게 좋을 듯하온데, 좌장군이 우장군에게 말씀 좀 해보십시오.”
이에, 우문술이 한숨을 내쉬며 말하였다.
“내 아들이 못나고, 우장군은 연승을 거두고 있으니… 내 어찌 우장군을 말릴 수 있단 말이오? 설 장군이 한번 말해보시구려.”
그러나 좌장군 우문술의 말도 듣지 않는 우중문이 설세웅의 말을 귀담아들을 리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