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살수대첩 (9)
주필산 앞으로 흑비걸의 오천 기병을 요격하기 위해 나선 우문지급이 급히 명하였다.
“진을 펼치고, 궁수들은 살을 날려 접근을 막아라! 창병들은 극을 세우고 적의 돌진을 막아라!”
그러나, 흑비걸은 우중문의 반격에 부상을 입었으면서도,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가소로운 적이로다! 저따위 것들은 무시하고 그대로 돌진하여 적의 본대 후미를 노린다! 돌파하라!”
날아드는 화살에도 흑비걸이 이끈 고구려의 철기병 개마무사 오천 기는 맹렬히 돌진하였고, 그 모습이 주피살 일대를 검게 물들였다.
두 개의 뿔을 단 투구와 검은색 일색의 철갑주 그리고 칠흑같은 피풍의를 휘날리며 내달려오는 개마무사들의 돌진은 그야말로 성난 소떼를 연상시켰다.
말까지 철갑을 두른 덕에 날아든 화살을 튕겨내는 모습은 보는 이에게 공포를 안겨 주었고, 철컹철컹 울리는 쇳소리가 점차 가까워지자 마치 천둥이 치는 듯하였다.
촤르르, 철컹! 촤르르, 철겅!
무시무시한 속도로 돌진해 오는 개마무사의 위용에 궁수들이 기가 질려 흩어지고, 극을 세운 창병들의 손이 덜덜 떨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개마무사들의 삭(기병창)이 창병들의 머리와 가슴을 꿰뚫고는 무너지는 몸뚱이를 그대로 밟고 지났다.
“으아악!”
곳곳에서 수나라 군사들의 비명이 울리고, 우문지급도 겁에 질려 제대로 명령을 내리지 못하였다.
“정… 정녕, 저들이 우장군에게 패했었단 말인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수나라 진을 돌파한 개마무사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우문화급이 진을 펼친 안시성으로 향하였다.
* * *
“적은 고작 삼만에 불과하다! 짓밟아라!”
막바우가 선두에 서서 장창을 앞세워 내달리니, 개마무사 오천기가 우문화급의 진을 향해 일제히 내달렸다.
하늘에선 화살비가 내렸으나, 개마무사들의 철갑은 이를 모두 튕겨내었고, 경우의 궁기병들은 개마무사들을 방패 삼아 좌우로 퍼지며 연신 화살을 날렸다.
쐐애애액!
온달이 또 한번 효시를 날리며 막바우를 쫓아 내달리니, 온동도 효시가 내는 매의 울음을 쫓아 말을 몰았다.
“살을 날리고 극으로 막아라!”
우문화급이 목청 높여 명하였으나, 온달이 날린 효시와 개마무사들이 내뿜는 강렬한 쇳소리에 묻혀만 갔다.
“쓸어버려라!”
어느새 선두에 선 온달이 운철대검을 휘둘러 앞을 막은 극을 날리니, 뒤이어 막바우와 온동이 뛰어들며 창과 칼을 휘둘렀다.
그리고 맹렬한 기세로 돌진해 온 개마무사들이 극조차 무사한 채 창병과 부월수들을 짓밟으며 밀고 들어갔다.
“적장을 찾아라! 목을 베어 성에 내걸겠노라!”
온달이 크게 소리치며 쉴새 없이 운철대검을 휘두르니, 시커먼 검에서 내뿜는 검기에 휘말린 수나라 군사들이 나뒹굴었다.
난전 속에서 온동은 혹여 고구려 군을 벨까 염려하여, 더욱 적진 깊이 홀로 뛰어들었다.
주위에서 들리는 소리가 온통 수나라 군사들의 고함이자, 안심한 온동이 마음껏 재주를 펼쳤다.
“파산귀검!”
온달이 할 수 있는 것은 온동도 펼쳐 낼 수 있었다.
운철대검의 위용은 없었으나, 눈보다 정확한 온동의 청각은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마저 구분하여 정확히 적을 베고, 검기를 날렸다.
이때, 우문화급의 진영 후미가 소란스러워지자, 온동이 급히 검을 거두며 말머리를 돌렸다.
“장군! 흑비걸 장군께서 오셨습니다!”
혹여, 흑비걸이 이끈 고구려 군을 상하게 할까 염려한 온동이 급히 온달의 곁으로 말을 몰아갔다.
이때, 수의 창병과 부월수들이 온동의 앞과 옆을 막으며 달려들었다.
온동은 오직 청각에 의지해 바람이 전하는 소리로 창과 도끼를 구분해 자신의 몸을 지키고, 반격을 가하였다.
그리고 온동의 안위가 염려된 경우가 어느새 말을 몰아오며 살을 날려 주위를 정리하였다.
온달도 급히 누렁이를 몰아 달려오며 운철대검을 휘둘러 감히 온동의 주위를 둘러싼 수나라 군사들을 모두 요절내었다.
온달이 휘두르는 거대한 운철대검이 바람을 일으키고, 사람과 말을 함께 날리는 광경에 수나라 군사들은 기가 질려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어느새 후미까지 밀고 들어온 흑비걸의 개마무사들이 삭과 말발굽으로 짓밟기 시작하니, 우문화급이 황망히 퇴각 명령을 내렸다.
“퇴각하라! 퇴각하라!”
목이 터져라 퇴각 명령을 내리면서도, 우문화급은 흑비걸의 개마무사들이 어찌 이곳까지 올 수 있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내 아우는 어찌 되었단 말인가? 도대체 저 철기병들은 왜 이리도 험악하고 무시무시하단 말인가?”
고구려의 철기병 개마무사를 처음 접한 우문화급은 감히 맞설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무작정 내달려 도망치기 바빴다.
전투는 너무도 쉽게 끝났고, 우문화급은 주필산 앞에서 동생 우문지급을 겨우 만나 군을 정비할 수 있었다.
“이대로 황제께 가면 참형을 당합니다. 속히 아버님께 가야 합니다.”
우문지급의 말이 옳다 여긴 우문화급은 아비 우문술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곧장 압록수로 향하였다.
* * *
“부상을 입으셨다고 들었소만, 괜찮으시오?”
대모달 흑비걸을 만난 온달이 근심을 담아 살피며 물었다.
“화살 몇 대 맞았을 뿐이지요. 막리지께서 야습을 강행하고는 바로 패해 도주하라 하시어, 적을 속이기 위해 화살 몇 대 일부러 맞았습니다.”
너무도 담담히 답하는 모습에 온달이 실로 감탄하였다.
“정녕, 호걸이시오. 대단하십니다.”
흑비걸을 연신 칭찬하는 온달에게 군을 재정비한 경우와 막바우가 다가와 말하였다.
“상한 군사는 안시성으로 보냈으니, 이대로 곧장 비사성으로 가면 되시옵니다.”
“경우 말대로 후딱 갑시다, 장군.”
이에, 흑비걸도 오랜만에 만난 경우와 막바우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오골성으로 귀환을 서둘렀다.
“오골성을 지켜야 하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부디, 평양성을 지켜주십시오.”
떠나는 흑비걸이 거듭 당부를 하니, 막바우가 어서 가라 손짓하며 답하였다.
“상처 치료나 하라고요. 패하는 척을 하랬더니, 화살까지 맞고… 대충이 없구먼, 대충이 없어. 어서 가라고요!”
* * *
온달은 안시성에 들리지도 않고, 곧장 개마무사 오천 기와 궁기병 일만 기를 이끌고 비사성으로 향했다.
쉬지 않고 내달린 덕에 날이 저물기 전에 당도할 수 있었다.
비사성 성주 고광과 그의 군사 예곤이 벌써 소식을 듣고 마중 나와 있었다.
“처음 뵙습니다. 온달이라 하옵니다.”
온달이 말에서 내려 예를 올리니, 비사성 성주 고광이 웃으며 말하였다.
“뭐 그리 격식을 차리시오. 내가 평강의 오라비뻘이나, 격 없이 그저 편히 지냅시다. 어쨌든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평양성으로 향하는 것이 중하니, 서두릅시다. 안내는 예곤이 할 것이오. 나는 비사성을 지켜야 하니, 자리를 비울 수 없소이다. 부디, 평양성을 지켜주시오.”
이에, 온달과 막바우, 경우는 예곤의 안내를 받으며 군사들을 이끌고 포구로 향하였다.
포구엔 이미 삼백여 척의 군선이 준비되어 있었고, 수군 이만 명도 도열해 있었다.
온달이 이끌고 온 개마무사 오천 기와 궁기병 일만 기를 더하면 모두 삼만 팔천의 병력이었다.
“우리의 존재를 적들이 몰라야 합니다. 막리지께옵선, 이 전쟁을 승리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존재하지 않아야 가능하다 하셨지요.”
예곤이 대장선으로 안내하며 말하니, 온달이 고개를 끄덕여 답하였다.
이에, 참견 잘하기로 일등인 막바우가 또 나섰다.
“우린 원래 존재하지 않는 듯 움직이는데 이골났으니, 걱정 마시오. 혹시, 홍산 아시오? 적봉진 모르오?”
은근히 전공을 자랑하고 싶어 근질근질한 막바우였다.
* * *
마침내 내호아의 십이만 수군이 바다를 건넜다.
“황제 폐하께서 비사성을 함락하신 모양이구려. 하하하.”
고구려 수군의 저항이 없으니, 마냥 기쁜 내호아였다.
“총관, 상륙하여 육로로 진격하시겠습니까?”
부총관 주법상의 물음에 내호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육백 척은 이곳에 남기고, 사백 척만 끌고 패수(대동강)로 올라가 곧장 평양성을 칠 것이오.”
내호아가 망설임 없이 답하니, 주법상이 바로 실행에 옮겼다.
이에, 대장선을 선두로 사백여 척의 군선이 대동강을 따라 평양성으로 향하기 시작하였다.
“고작 오백이 지키고 있다니, 고구려 왕은 참으로 가여운 왕이 아닐 수 없구려. 하하하.”
이미 승리를 거머쥔 듯 내호아는 자신감이 넘쳐 있었다.
이때, 강기슭에서 함성이 들리고 불화살이 날아들었다.
“와아아!”
“적의 공격입니다!”
주법상이 놀라 말하니, 내호아가 날아드는 화살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함성은 여리고 작으며, 화살은 고작 백여 개에 불과하오. 역시, 고구려 군은 오백이 전부구려.”
주법상도 정신을 가다듬어 날아드는 화살을 살피니, 과연 그 수가 적었다.
“부총관 배를 강기슭에 대시오. 내 직접 저것들을 물리치고 그대로 평양성으로 직공하겠소이다.”
주법상이 손을 들어 부장을 불러 깃발로 신호를 보내게 하였다.
이에 사백여 척의 군선들이 일제히 강기슭에 멈추었다.
기다렸다는 듯 내호아가 군사들을 이끌고 대장선에서 내리니, 사백여 척에서 군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모두 오만의 군사로 보군 일색이었으나, 기세가 올라 무척 용맹스러웠다.
강기슭에 숨어 화살을 날리던 고구려 군은 수나라 군의 수에 놀라 도주하였고, 내호아는 이를 비웃으며 급히 뒤쫓았다.
한참을 쫓아 산 아래 큰 절에 다다르니,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함성이 울리고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들었다.
“매복이옵니다!”
주법상이 당황해 소리쳤으나, 이번에도 내호아는 여전히 태연했다.
“화살 수가 적소이다. 매복이라고 해도 적의 수는 오백이 되지 않소.”
내호아의 말처럼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들었으나, 그 수가 적어 큰 타격을 주지 못하였다.
“당황하지 말고, 적을 격퇴하라! 방패로 화살을 막아라!”
주법상의 외침에 수나라 군사 오만이 일제히 방패를 들고 화살을 막으며 사방으로 갈라져 반격하였다.
이에, 매복 중이던 고구려 군은 수나라 군의 맹렬한 기세에 질려 비명을 지르며 도주하기 바빴다.
“하하하! 참으로 버러지 같은 놈들이로다! 하하하, 이대로 저것들을 몰아쳐 평양성까지 돌진한다!”
오만의 수나라 군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평양성을 향해 내달리니, 앞서 도주하던 고구려 군이 더욱 겁에 질려 무기마저 버리며 도망쳤다.
“참으로 한심하고 불쌍하도다! 하하하.”
내호아가 앞장서 달리며 군사들을 독려하니, 이윽고 평양성이 시야에 들어왔다.
“멈추지 마라! 이 전쟁을 우리가 끝낼 수 있다! 고구려 왕을 사로잡아라!”
내호아가 연신 독려하며 내달리니, 평양성 성문 앞 목책에 숨어 있던 고구려 군이 몸을 일으켜 화살을 날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날아든 화살의 수가 적어, 오히려 내호아의 기만 드높여 줄 뿐이었다.
“매복은 열심히 하였으나, 그 수가 적으니, 안쓰럽구나! 하하하. 단숨에 성문을 돌파한다!”
거대한 해일처럼 수나라 군이 들이닥치니, 목책도 무너지고 매복하던 고구려 군도 몸을 돌려 도주하였다.
“성문이 열려있다! 뒤쫓아 들어가라!”
패주하는 고구려 군을 따라 성문마저 돌파하며 평양성 내로 진입하니, 이미 함락된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밀고 들어가라! 이대로 휘몰아쳐 평양성을 함락하고, 고구려 왕을 잡아라!”
앞장서 성안으로 들어온 내호아가 기세를 몰아 궁으로 돌격을 명하였다.
거듭된 승리에 수나라 군사들은 모두 자신감에 넘쳐 있었고, 성문을 지키는 고구려 군은 모두 도망쳐 저항도 없었다.
“내달려라! 궁을 찾아라!”
내호아가 사방으로 뻗은 길을 살피며 명하니, 수나라 군사 오만 명이 궁을 찾아 사방으로 흩어져 내달렸다.
“바다만 건너면 승리라 여겼으나, 이처럼 쉬울 것이라 생각지는 못하였다. 역시, 오백의 군사로는 무리였던 게야. 하하하.”
내호아도 주법상과 함께 군사들을 이끌고 좁은 성내를 내달리며 연신 껄껄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