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살수대첩 (8)
압록수를 건너느라 수나라 기병의 몸은 물에 젖었고 횃불도 밝히지 못했다.
짐이나 나르던 말은 야심한 밤에 사람을 태우니, 무척 힘겨워하였고 풀과 돌부리에 발이 걸려 쓰러지기 일쑤였다.
멀리서 이 광경을 바라보던 주용이 어처구니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참으로 애쓴다. 막리지, 저들의 말은 늙고 비루하니, 일거에 요절을 내도 좋지 않겠습니까?”
이에 을지문덕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저들을 격퇴하면 이후는 몸을 사려 신중히 행군할 것입니다.”
“하오나, 수의 수군이 곧 평양성 앞에 당도할 터인데, 여유를 부릴 겨를이 있사옵니까?”
주용의 말대로, 삼십만 별동대가 요동에서 움직임과 동시에 내호아도 바다를 건너기 시작하였으니 평양성은 남은 오백의 군사로 이를 막아야 할 형편이었다.
“상장군, 평양성은 지켜질 것입니다.”
을지문덕이 담담히 말하며 우중문의 오만 기병을 주시하였다.
어느새 거리가 꽤 좁혀져 있었다.
“막리지, 적들도 평양성의 군세를 알 것입니다. 수의 수군은 결코 망설이지 않고 패수(대동강)를 통해 평양성으로 진입할 것입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시간이야 만들면 있는 게지요. 상장군 너무 염려치 마십시오. 안시성의 온달이 비사성의 수군을 이끌고 내려갈 것입니다.”
“막리지, 안시성은 우문화급이 공격 중인데, 어찌 군사를 빼낼 수 있단 말입니까?”
이에, 을지문덕이 빙그레 웃었다.
“안시성은 오골성의 대모달 흑비걸이 도울 것입니다.”
“평양성은 비사성이 돕고, 비사성은 안시성의 군사가 증원하고, 안시성은 오골성의 흑비걸이 돕는다는 말씀이시옵니까?”
상장군 주용이 놀라 물으니, 을지문덕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수적으로 열세이니, 손발을 짝짝 맞추어 서로가 도우며 응전해야겠지요. 상장군, 조금 더 물러나 저들을 수림으로 끌어들이도록 합시다.”
을지문덕이 우중문의 기병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말머리를 돌리니, 상장군 주용이 높이 소리쳤다.
“놈들의 말이 우리 고구려의 산림에서 버틸 수 있는지 확인해 보자! 퇴각하라!”
이에, 화전이 주용의 명을 받아 빠르게 퇴각을 진행하였다.
* * *
우문술과 설세웅은 장수들과 상의해 즉시 군막을 걷고 도하를 강행하였다.
날은 어둡고, 강물은 깊었으니, 이들도 앞서 건넌 우중문과 마찬가지로 불을 밝히지 못한 채 도하를 했다.
물살은 거세고, 짐은 크고 무거우니 강물에 휩쓸려 넘어지는 군사들이 적지 않았다.
“장군, 이 야심한 밤에 횃불도 밝히지 않은 채 도하는 무리입니다. 군을 돌려야 합니다.”
설세웅이 이렇듯 말하였으나, 우문술은 고개를 저었다.
“황명이라지 않소. 우리가 바로 뒤따르지 않은 걸 우중문이 황제 폐하께 아뢴다면, 우리의 목은 몸에 붙어 있지 못할 것이외다.”
우문술이 이렇듯 말하니, 설세웅도 더는 이견을 달지 못하고 군사들을 독려하였다.
“발을 조심하고, 먼저 건넌 군사들은 불을 밝혀라!”
그러나 먼저 건넌 군사들은 제대로 불을 지피지 못하였다.
이들의 짐 속 화구 역시 젖은 탓에 말려야 불을 지필 수 있었다.
도하를 하던 군사 중 꾀가 많은 이는 일부러 강물에 빠지며 짐을 줄였고, 장수들은 이를 알고도 모른 척하니, 압록수를 건너며 줄어든 짐이 절반가량이었다.
간신히 도하를 한 후, 날이 밝도록 행군을 강행하니, 산기슭에서 우중문의 기병과 만날 수 있었다.
“을지문덕은 잡았소?”
우문술이 우중문에게 달려가 바로 물었다.
“한 차례 접전이 있었고, 승리를 거뒀으나 을지문덕은 놓쳤소.”
“승리? 승리를 거뒀소?”
우중문이 또 한 번 승리를 거뒀단 말에 우문술이 놀라 바로 물었다.
“그렇소. 날이 밝아올 무렵 놈들이 기습을 해왔으나, 격퇴하고 이곳까지 쫓아 왔지요. 을지문덕은 패하여 지금 저 산으로 도주했소이다.”
우중문의 승전이 마냥 부러운 우문술이 산을 바라보았다.
산세가 험하고 높아 기병은 물론 보군 또한 오르기 불가해 보였다.
“산세가 너무도 험하니, 을지문덕은 두고, 평양성으로 갑시다.”
우문술의 제안에 우중문이 미간을 좁히며 엄히 말하였다.
“고작 산세가 험하다 하여, 황명을 어길 생각이시오? 을지문덕은 반드시 사로잡아야 하며, 여의치 않을 시 목을 베야 하오!”
황명을 언급하니, 우문술은 제대로 반박조차 할 수 없었다.
“황명이니… 잡기는 잡아야겠지요. 허허…….”
억지로 웃음 지은 우문술이 바로 명을 내렸다.
“불도 지피지 말고 대충 허기를 채운 후, 바로 산에 오른다. 준비들 하라!”
좌우장군 우문술과 우중문이 이처럼 닦달하니, 군사들은 생쌀로 겨우 허기를 채워야 했다.
* * *
군선 천여 척과 십이만의 수군이 바다를 건너기 시작하였고, 선두 대장선에선 총관 내호아와 부총관 주법상이 논의하였다.
“총관, 평양성 내의 군사 사만을 을지문덕이 이끌고 나갔다 합니다.”
전서구를 통해 전달받은 전황을 주법상이 말하니, 내호아가 크게 기뻐하였다.
“허면, 평양성 내엔 몇이나 있다 합니까?”
“오백이 전부라 합니다.”
“오백! 오백이라 하셨소? 오백?”
“그렇습니다.”
“하하하. 오백이라… 하하하. 쉬워도 너무 쉬운 것 아니오? 하하하.”
내호아가 너무도 기뻐하니, 주법상이 살며시 그를 진정시켰다.
“총관, 아직 기뻐하실 때가 아니옵니다.”
“뭔 일이 있소?”
“있사옵니다.”
“그것이 무엇이오?”
내호아의 물음에 주법상이 잠시 주위를 살피더니, 나지막이 말하였다.
“별동대도 이 사실을 알 것입니다. 하여.”
“하여?”
“그들이 먼저 평양성에 당도해 고구려 왕을 사로잡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지. 그리되면 아니 되지. 기껏 바다를 건너와 공을 뺏겨선 아니 되지.”
“그렇습니다, 총관. 서둘러야 합니다. 바다를 건넌 후, 곧바로 패수로 진입하여 일거에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고구려 왕만 사로잡는다면 이 전쟁의 최고 수훈은 총관께서 되실 것이옵니다. 필경 황제 폐하께선 총관을 오국공에 봉하시겠지요.”
주법상의 말이 너무도 달콤하여 내호아의 얼굴에 웃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월국공? 아니지… 월국공은 양소였지. 오국공? 오국공에 책봉된다고? 하하하. 내가 오국공에 오르면 결코 부총관을 잊지 않겠소. 하하하.”
고작 오백여 군사만 남은 평양성은 좋은 먹잇감이었고, 이를 노리는 수나라 군은 육로와 바다로 진격하며 서로 공을 다투고 있었다.
* * *
우문화급이 또다시 군을 이끌고 와 안시성 앞에 진을 펼치니, 온달과 양만춘이 외성에 나가 살폈다.
이때, 평강이 온동과 함께 성벽 위로 올라와 서신을 온달에게 건네었다.
“막리지 을지문덕 공께서 전서구를 보내왔습니다.”
온달은 안시성 성주 양만춘보다 자신이 먼저 서신을 읽는 게 미안해 머뭇거리며 말하였다.
“성주가 계신데… 내가 먼저 읽어도 되겠소?”
이에 양만춘이 허허 웃으며 답하였다.
“막리지께서 장군께 전할 명이 있나 봅니다. 괘념치 마시고 읽으십시오.”
“그래도 되겠소?”
온달과 양만춘이 이렇듯 대화하니, 성미 급한 막바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무나 좀 빨리 읽으라고요! 답답해 뒈질 것 같네. 하여튼 이 두 분만 보면 아주 그냥 속이 뒤집어진다니깐. 쌈질이나 잘하지, 영 별로야.”
공연히 막바우에게 지청구를 들은 온달이 입맛을 다시며 서신을 펼쳐 읽었다.
“허허…….”
서신을 읽은 온달이 성 앞에 진을 펼친 수나라 군을 바라보며 허허 웃으니, 막바우가 더욱 답답해 소리쳤다.
“왜! 왜 웃으시냐고! 도대체 뭐냐고!”
이에, 온달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였다.
“군사를 비사성으로 돌려야겠네.”
“뭐? 뭐요? 왜? 왜냐고요? 뜬금없이 뭔 소리요?”
“그게 말일세. 비사성의 수군과 합류해 바삐 평양성으로 가야 하네.”
“가서? 가서 뭐 하시게? 저것들은 두고?”
막바우가 진을 펼친 수나라 군을 가리키며 물으니, 온달이 다시 머리를 긁적이며 답하였다.
“저것들은 일단 요절을 내긴 해야겠는데… 평양성에 가서 바다를 건너온 수군을 격퇴하란 막리지의 명이 있으니… 이를 어쩐다…….”
자신이 군사를 이끌고 떠나면, 안시성의 안위가 염려되고, 위기에 처한 평양성 또한 염려되니 온달에겐 실로 큰 난제였다.
이때, 평강이 빙그레 웃으며 한장의 서신을 온달에게 건네었다.
“오골성의 흑비걸 장군께서도 전서구를 보내셨나이다.”
“그렇소?”
온달이 급히 서신을 펼치더니, 이내 기뻐 크게 웃었다.
“왜 웃어요?”
막바우가 다시 또 참견하니, 보다 못한 경우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좀 닥치고 들어보자. 제발 좀 닥치자고.”
막바우 잡는 데는 경우가 최고였다.
얌전해진 막바우에게 온달이 웃으며 말하였다.
“흑비걸 장군께서 주필산 앞으로 군을 끌고 오신다고 하오.”
이에 경우가 기뻐 말을 이었다.
“잘 되었습니다. 앞뒤로 적을 급습하여 물리친 후, 비사성으로 가면 되겠습니다.”
온달도 고개를 끄덕여 답하니, 막바우가 바로 소리쳐 군사들에게 명하였다.
“출전 준비하라! 감히 앞에 진을 펼친 놈들을 혼내주고 평양성을 구하러 간다!”
* * *
흑비걸이 이끈 오천 기병이 주필산에 당도했단 소식은 우문화급에게도 전해졌다.
“뭐라? 주필산이라면 바로 인근 아니더냐? 오골성의 군사는 이미 우중문 장군께 패했을 터인데, 어찌 다시 나온단 말이냐?”
이에, 우문지급이 지도를 보며 말하였다.
“오골성은 이 안시성과 인접한 성입니다. 우리가 대군을 이끌고 안시성을 공략한 후, 비사성마저 취할 것을 우려해 오골성에서 응원 나온 듯하나, 그 수가 많지 않으니, 대수롭지 않습니다.”
이미 우중문에게 패한 군대라 여겨 만만히 본 것이었다.
“그렇군. 우리는 오만이고, 저들은 고작 오천이니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겠구나. 허나, 앞뒤로 적을 맞아 싸우면 피곤해지니, 네가 이만의 군사를 이끌고 나가 물리치거라.”
우문지급이 바로 명을 받아 군사 이만을 이끌고 주필산으로 나아갔다.
우문화급이 남은 삼만의 군사로 일거에 안시성을 공략하기 위해 진 앞으로 나가니, 때마침 안시성의 북서 외성 성문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성문이 열린다? 시건방진 놈들이로다. 정녕 앞뒤로 우리를 공격할 수 있다 믿은 것인가?”
우문화급이 비웃으며 소리쳐 명하였다.
“궁수들은 살을 날릴 준비를 하고, 기군은 적을 맞아 돌격할 준비하라! 또한 창군과 부월수는 적의 돌진에 대비하라!”
이에, 성문을 나온 고구려 군을 맞이할 진이 새로 갖춰졌다.
* * *
온달이 누렁이를 타고 선두에서 성문을 나서니, 그 곁에 앞을 보지 못하는 온동이 말에 올라 따르고 있었다.
“동아, 지금이라도 안시성에 돌아가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온달이 근심을 담아 물었으나, 온동은 단호히 답하였다.
“장군을 돕고 싶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아 필요없다고 내치지 마시옵고, 기회를 주시옵소서.”
온동이 일부러 눈을 언급하며 간청하니, 마음 약한 온달로선 별도리가 없었다.
“허허, 눈은 왜 언급하느냐? 눈 때문이 아니거늘… 아무튼 조심해야 한다.”
경우가 활을 들어 올리며 장담하였다.
“장군 심려치 마시옵소서. 소장의 활이 동이를 지키겠나이다.”
온달도 더는 말하지 않고, 그저 운철대검을 높이 치켜들어 올렸다.
이에, 막바우가 기다렸다는 듯 크게 소리쳐 명하였다.
“개마무사는 나를 따르라!”
막바우가 창을 앞세워 내달리니, 개마무사 오천 기가 일제히 질주를 시작하였다.
두두두두.
땅을 뒤흔드는 말발굽 소리에 귀가 멍멍해진 온동이 머리를 흔들며 바람이 전하는 소리를 구분하기 시작하였다.
“동아, 효시란다. 소리를 따르거라.”
온달이 부드럽게 말하고는 철궁에 효시를 먹여 날렸다.
쐐애애액!
매의 울음이 길게 울리지, 누렁이가 내달리기 시작하였고, 온동도 효시가 이끄는 소리를 따라 말을 몰아 질주하였다.
그 뒤를 경우가 궁기병들을 이끌고 따르더니, 활을 들어 올리며 명하였다.
“살을 날리고, 옆으로 돌아라!”
경우의 명에 따라 궁기병들이 일제히 화살을 날리고 옆으로 말을 몰아 내달리니, 수나라 군의 진영에서도 돌진해 오는 개마무사들을 노리고 화살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