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살수대첩 (7)
유사룡이 급히 진중으로 달려가 을지문덕이 항복하러 왔다고 전하니, 모든 장수가 놀라 일제히 벌떡 일어났다.
“우, 우리가 이긴 거요? 이… 꿈은 아닌 게지요? 정녕 을지문덕이 맞소?”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어 우문술이 물으니, 유사룡이 바로 답하였다.
“봉황의 눈매를 하고, 눈썹이 마치 용이 날듯하였습니다. 얼굴은 붉고 혈색이 좋으며 수염은 매우 위엄있었나이다.”
“봉황의 눈? 그게 무슨 소리요?”
우문술이 의아해 물으니, 유사룡이 머뭇거리지 않고 답하였다.
“보시오면 바로 아실 것입니다. 을지문덕이 맞사옵고, 항복하고자 왔다고 하옵니다.”
이에, 우문술이 기뻐 크게 웃었다.
“이긴 게야! 이겼어! 하하하.”
그러나, 우중문은 황제의 서신을 떠올리며 표정을 굳혀 명하였다.
“군막 주위에 군사들을 배치하고, 전군 창과 도검을 들고 도열하도록 하라. 또한 부월수들은 을지문덕이 군막으로 향하는 길에 쭉 늘어서 언제든 머리를 쪼갤 준비를 하라!”
이에, 유사룡이 놀라 물었다.
“머리를 쪼개다니요? 항복하러 온 고구려의 재상 머리를 어찌하여 쪼갠단 말이십니까?”
우문술도 항복을 받아 이길 전쟁을 우중문이 공연히 망친다 여겨 거들었다.
“그렇소. 사신을 해하는 법은 없소이다. 더구나 을지문덕은 고구려의 재상인데, 격에 맞게 대우는 못할망정 어찌 머리를 날릴 생각을 한단 말이오?”
여기에 더해 설세웅도 고개를 저으며 우중문을 꾸짖었다.
“우장군, 심하였소.”
“누가 당장 쪼갠다고 하였소? 준비만 하라는 게요.”
모두가 난색을 표하니, 우중문도 슬그머니 뜻을 굽혔다.
이에, 우문술이 우중문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유사룡에게 명하였다.
“가서 고구려의 재상 을지문덕을 모시도록 하시오.”
유사룡이 급히 막사 밖으로 나가 아직 강가에 있는 을지문덕에게 달려갔다.
“을지 공, 우리 군사들이 귀공을 맞아 도열 중이오니 놀리지는 마시오. 격식을 갖춰 예로 맞는 것이지 귀공을 위협하고자 함은 아니라오.”
유사룡이 이렇듯 배려하니, 을지문덕이 공손히 허리 굽혀 예를 표하였다.
“불쑥 찾아온 객을 이토록 과분히 반기니, 감읍할 따름이외다.”
* * *
유사룡의 말처럼 창검을 든 군사들이 도열하였고, 커다란 도끼를 든 부월수들이 군막까지 쭉 늘어서 있었다.
“군의 기강이 바로 섰구려. 좋은 군대이외다.”
을지문덕이 칭찬을 하며, 도열한 군사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하였다.
“허허, 저 멀리 있는 군사들까지 저렇게 반듯하게 서 있군요. 허허, 지기도 있고. 정말 대군입니다.”
을지문덕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도열한 군사들을 칭찬하니, 유사룡의 입이 귀에 걸렸다.
“백십삼만 대군에서 추린 정예입니다.”
“정말 하나같이 기골이 장대하여 정예라 불릴 만합니다. 근력들이 상당하겠습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백 일치 식량을 지고 행군을 할 수 있는 강골들입니다. 이 세상 어느 군대도 할 수 없는 일이지요. 감히 맞서는 적은 오직 패배뿐입니다.”
유사룡이 일부러 군사들을 칭찬하며 을지문덕이 감히 맞서지 못하고, 항복하도록 유도하였다.
“정말 대단합니다. 백 일치 식량을 지고 행군할 수 있는 군대는 전무후무하지요.”
“그뿐입니까? 갑옷과 무기는 물론이요. 화구와 침구, 막사 자재와 조리 기구까지 짐에 포함되어 있으니, 소도 못 할 일을 해내고 있는 게지요. 이 모두가 황제 폐하의 최정예군이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유사룡이 끝도 없이 자랑하는 사이, 군막 앞에 다다랐다.
“고구려의 재상, 막리지 을지문덕 공께서 들어가십니다!”
유사룡이 크게 소리쳐 알리고는 을지문덕에게 길을 내어주었다.
* * *
“어서 오시오! 을지문덕 공 진심으로 환영하고 반갑소이다!”
우문술이 달려나와 을지문덕을 영접하니, 이 광경이 못마땅한 우중문과 설세웅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우문술은 요동에 들어와 변변한 승전이 없었기에, 을지문덕에게서 항복을 받아내어 공을 세우고자 달아올라 있었다.
우문술이 을지문덕의 손을 잡아끌어 상석에 앉혔다.
이에, 모든 장수가 을지문덕을 천천히 살폈다.
‘과연 봉황의 눈에 용이 승천하는 눈썹이로다. 삼십만 대군 속에 홀로 들어온 그 기개도 드높으니… 을지문덕의 명성은 허명이 아니로구나.’
설세웅이 이렇듯 을지문덕을 살피며 감탄하니, 다른 장수들 또한 을지문덕의 풍채와 기개에 내심 탄복하여 속히 을지문덕에게서 항복을 받아 내기를 원하였다.
이에 우문술이 기쁜 마음을 감추지 않고 바로 물었다.
“귀공께서 오시기를… 항복을 하고자 오셨다고 들었소만, 사실이시오?”
대뜸 진의 파악부터 하니, 을지문덕이 껄껄 웃었다.
“소인은 강화를 맺고자 막리지에 오른 사람이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우문술의 물음에, 을지문덕이 막리지에 오르게 된 연유를 천천히 설명하였다.
이에, 듣는 장수들이 무릎을 치고, 손뼉을 치며 을지문덕의 이야기를 듣고 좋아하였다.
“정녕, 천하의 을지문덕이라 칭송이 자자하더니, 과연 그대는 앞을 내다보는 혜안을 지녔구려. 귀공 같은 이가 고구려에 있으니, 어찌 강화가 맺어지지 않을 수 있겠소.”
우중문이 매우 기뻐 연신 을지문덕을 칭찬하고는 살며시 물었다.
“허면, 이 길로 바로 황제 폐하께 가시어 항복을 알리는 국서를 전하실 것이오? 길을 열어드리오리까?”
우문술의 물음에 을지문덕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요.”
“어찌 아니라 하시오? 황제 폐하께 강화를 청하기 위해 막리지가 되었다 하지 않았소? 그대가 여기 온 것도 강화를 맺고자 온 것이고… 헌데 어찌?”
“소인은 강화를 맺고자 막리지에 올랐고, 오부 귀족의 뜻도 그러합니다. 허나, 아직 평양성 내에는 항전을 원하는 장수들이 있고, 태왕 폐하께선 그들 장수들의 마음을 돌려야 하시지요. 하여!”
“하여?”
“소인이 이곳에 와 수의 삼십만 정예를 직접 목도하였으니, 평양성에 돌아가 사실대로 아뢰고, 태왕 폐하께 항복을 아뢰는 국서를 받아 황제 폐하께 올리려 합니다.”
“아, 그러시구려.”
우문술이 왠지 미심쩍어 을지문덕을 바라보았다.
이에, 을지문덕은 태연히 군막 내 모든 장수들과 하나하나 눈을 마주하며 말하였다.
“백 일치 식량을 지고, 행군하는 천하의 둘도 없는 최정예 군을 직접 보고도 어찌 항복하지 않으리오. 내가 사실대로 아뢰면 폐하께서 필경 국서를 내리실 터이니, 다시 돌아와 함께 황제 폐하께 갑시다.”
너무도 당당히 말하니, 우문술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천하의 둘도 없는 강군이지. 아무렴.”
설세웅도 나서 말하였다.
“을지 공, 부디 고구려 왕에게 사실대로 잘 말해 국서를 받아 오시오. 양국의 군대가 더는 피를 흘리지 않고 화친을 맺으면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소.”
이에, 우중문을 제외한 모든 장수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을지문덕을 칭찬하고 항복을 권하며 속히 돌아오라 당부하였다.
‘도대체, 이자들이… 을지문덕을 살려 보내선 안 되는데… 헌데, 정녕 항복하고자 왔다면, 이보다 좋은 일은 없다.’
우중문은 황제의 명을 떠올려 심사가 불편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전쟁을 마무리할 수 있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무척 혼란스러웠다.
한참을 수나라 장수들과 대화를 나눈 을지문덕이 몸을 일으키니, 우문술이 기다렸다는 듯 따라 일어섰다.
“을지 공, 가시려오? 부디, 국서를 받아 오시오. 기다리고 있겠소이다.”
손까지 잡으며 우문술이 말하니, 을지문덕이 빙그레 웃었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나갈 때도 상서우승 유사룡이 을지문덕의 길 안내를 맡았다.
을지문덕이 막사를 떠나니, 우중문이 마침내 마음을 굳히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까지 뽑아 든 우중문의 기세에 우문술과 설세웅이 놀라 물었다.
“우장군, 왜 그러시오?”
“그 칼은 무엇을 의미하는 게요? 당장 멈추시오!”
우문술이 우중문의 손을 잡고, 설세웅이 호통을 치며 앞을 막으니 우중문이 기가 막혀 소리쳤다.
“당장 비키시오! 을지문덕을 이대로 돌려보낼 수는 없소!”
“아니, 황제 폐하께 항복을 아뢰는 국서를 받아와야 할 을지문덕을 붙잡아 두겠다는 게요? 그대는 고구려의 항복을 원치 않는 게요?”
우문술의 물음에 우중문이 답을 하지 못하니, 설세웅도 소리 높여 우중문을 꾸짖었다.
“고구려의 항복을 받아 승리로 전쟁을 마무리할 이때! 어찌 우장군은 거사를 그르치려 하는 게요! 혼자 공명심에 사로잡혀 공을 쫓고자 하는 게요?”
이에, 우중문도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쳐 맞섰다.
“황제 폐하께서 긴밀히 서신을 보내시어 명하시길! 고구려의 왕이나 문덕이 오면 반드시 잡아두라 하시었소! 혹여 여의치 않다면 목을 베라 하시었는데, 어찌 그대들이 황명을 거역한단 말이오?”
이에 우문술이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화, 황… 황명을 거역한다니… 우리는 전해 듣지 못하였으니, 몰라서 그런 것 아니오. 오, 오해시오.”
“비키시오!”
아직도 앞을 막고 있는 설세웅을 밀어 길은 연 우중문이 을지문덕을 쫓아 내달렸다.
그러나 강가에 당도하였을 때는 이미 을지문덕이 탄 나룻배가 강 중간에 도달하고 있었다.
“을지 공! 돌아오시오!”
우중문이 소리쳐 부르니, 나룻배 위 을지문덕이 껄껄 웃었다.
“하하하, 어찌 부르시오?”
“못다 한 이야기가 있으니, 배를 돌리시오!”
“아니오. 못한 이야기는 국서를 받아와서 합시다. 길이 바쁘니, 서둘러야겠소이다. 하하하.”
“급한 길도 돌아가야 하는 법이라오! 아주 잠시면 되니, 배를 돌리시오!”
“나의 길이 꽃구경 가는 길도 아닌데, 굳이 돌아갈 필요가 있겠소이까? 수일 내로 평양성에 다녀올 터이니, 압록수에서 기다리고 계시구려.”
어느새 나룻배가 멀어져 강 건너에 다다르니, 우중문이 분통을 터트리며 소리쳐 명하였다.
“기병 오만을 추슬러라! 정예로 추슬러야 하느니라! 당장 압록수를 건너 을지문덕의 목을 베어오겠다!”
이에 부장들이 급히 진영을 돌며 기병 오만을 추슬러 왔으나, 정예 기병은 아니었다.
군막을 세울 자재를 나르던 늙은 말들이 대부분이었고, 별동대 삼십만은 대부분 보군으로 구성되었기에 기마도 능숙하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부장들이 오만 기의 기병 수를 채우니, 우중문이 바로 명하였다.
“나를 따르라! 압록수를 건너 을지문덕의 목을 베자!”
이때, 우문술과 설세웅이 달려와 우중문을 만류하였다.
“어찌 이 야심한 밤에 기병을 이끌고 도하를 한단 말이오. 날이 밝거든 하시구려.”
“우장군, 대군이 갈라지면, 약해지는 법이오. 함께 도하합시다.”
그러나 우중문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차갑게 답하였다.
“나는 황제 폐하의 명을 따라야 하오! 그대들은 내일 날이 밝거든, 도하를 하시구려. 나는 그때 이미 을지문덕의 목을 취해 있을 것이오!”
우중문이 자신 있게 소리치고 선두에 서서 도하를 시작하니, 우문술과 설세웅도 더는 만류하지 않았다.
“황명을 팔아 홀로 공을 취하려는군. 오냐, 나는 내일 날이 밝으면 도하를 할 것이다. 어디 실컷 공을 세워 보거라.”
우문술이 이렇듯 이를 갈며 중얼거리는 사이 우중문이 이끈 기병 오만 기는 칠흑같이 어두운 압록수를 건너기 시작하였다.
늙고 야윈 말들이 시커먼 압록수를 도하하다가 발을 헛디뎌 쓰러지고, 겁먹은 말들이 길게 울며 군사들을 떨구었으나, 우중문은 강경하였다.
“뒤처지는 자의 목을 베어라! 시간이 없다! 머뭇거리지 마라!”
기병도 아닌 보군 출신들이 대부분이었기에, 기마술이 서툴러 속도를 높이지 못하니, 곳곳에서 장수들이 목을 베며 독려하기 바빴다.
싸우기도 전, 압록수에는 이미 수나라 별동대의 피가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우중문이 기필코 도하를 강행하여 강을 건넜을 시엔, 이미 고구려 군은 진을 물린 뒤였다.
마음이 급한 우중문이 다시 서둘러 명하였다.
“추격을 시작한다! 놈들이 험준한 산맥 속으로 숨어들기 전에 뒤를 잡아야 한다! 서둘러라!”
우중문은 황제 양광에게 압록수를 건너면 험준한 산맥이 펼쳐진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무척이나 마음이 급하였다.
힘겹게 압록수를 건넌 오만의 기병은 잠시 쉴 여유도 없이 어두운 수림을 향해 내달려야 했다.